볼빨간사춘기-좋다고 말해


지훈은 한참동안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곧 죽을 것처럼. 다니엘은 그 등짝을 툭툭 두들겨 주며 생각했다. 사레든지 딸꾹질이든지, 한번 시작하면 멈추지 못 하는 타입인 것 같다. 물론 못 멈추는 게 또 하나 있긴 하지. 예를 들면... 선생님을 향한 내 마음? 해맑은 고딩은 언제 기침을 했었냐는 양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밥 많이 먹고 신난 토끼 같았다.

"딸꾹질 멈췄죠!"
"엉. 이제 가자."

딸꾹질 하나 멈춘 게 그리 좋을까. 다니엘은 픽 웃으며 지훈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집결지로 발걸음을 옮기려... 고 했다. 하지만 저 복도 끝 쪽에서 서성이는 인영들은 지훈을 기절초풍하게 할만 한 것이었다. 하이에나 같이 놀래킬 사람을 찾아다니는 학생들. 아마 그들은 여기서 납량 특집의 쇼부를 볼 모양이었다. 그리고 들키면 희생자가 되겠지. 결국 다니엘은 지훈의 입을 틀어막고 식수대 뒤쪽 공간에 몸을 숨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훈은 사각지대로 질질질 끌려 들어가며 손을 휘저었다.

"읍!"
"쉿, 쉿. 저기 애들 있다."

공중을 가로지르던 손이 정확히 벽에 안착한다. 그리고 지훈은 매우 얌전해진 상태로 벽에 기대 쪼그려 앉았다. 물론 학생들이 진짜 귀신은 아니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다니엘은 그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며 어이 없다는 듯 웃었다. 추위를 느끼는 것처럼 부르르 진동하는 박지훈은 생각보다 훨씬 더 귀신을 무서워 하는 것 같았다. 다니엘은 지훈의 가운깃을 여며준 후 몇 번 등을 토닥였다. 그러자 쬐깐한 손이 쭉 뻗어와서 다니엘의 소매를 붙잡았다. 다니엘이 자연스레 그 손을 맞잡는다.

"많이 무섭나."
"...당근빠따죠."
"그럼 잠깐 숨어 있을래?"
"네... 끅!"

또 딸꾹질 시작이네. 다니엘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숨을 곳의 위치를 확인했다. 두 사람이 위치한 1층에는 과학실이 있었다. 과학실에 깨질만한 것들이 많아서 담력 시험 코스에 포함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아마 학생들은 지하 쪽을 둘러보러 내려간 것 같고, 돌아와도 과학실을 찾아오진 않을 거다. 다니엘은 지체할 것 없이 지훈의 손을 쭉 끌어당겨 일으켰다. 그리고 어두운 과학실로 향했다.


좋아해줘

보건실: 토끼 사육 허용


철컥, 문이 잠긴다. 그 소리에 지레 겁먹은 지훈이 펄쩍 뛰며 또 딸꾹질을 했다. 다니엘은 꼭 제 주인처럼 고집스러운 딸꾹질이 웃겼다. 하지만 당사자는 고통스러워 보여서 좀 신경 쓰였다. 이곳에는 물이 없다. 물을 마시려면 식수대에서 떠와야 하는데, 이미 학생들이 지하에서 올라왔는지 밖으로 인기척이 들렸다. 결국 지훈은 제 입을 꽉 막고 딸꾹질을 삼켰다. 조용한 침묵만이 과학실을 가득 채운다. 다니엘은 괜히 진열된 표본들을 둘러보며 시간을 죽였다.

"꺄아아아악!!!!!!!"
"아악!!!!!!"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 가지 못 했다. 아까 그 학생들은 결국 새로 내려온 애들을 놀래키는 것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놀란 지훈의 입에서 손이 떨어지자, 다니엘이 얼른 그 위로 제 손을 덮었다. 손바닥에 웅웅대는 진동이 느껴진다. 마주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그 모습을 본 다니엘은 잠시 숨을 삼켰다가 다시 내뱉었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곧 밖에서 헉헉대는 소리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야, 진짜...! 나 완전 놀랬다."
"아까 걔 이진우 맞지? 내일 만나면 조질 거야."

익숙한 목소리. 지훈과 다니엘은 동시에 문 쪽을 돌아봤다. 창문 앞에 아룽아룽 비치는 것은 지연과 효림이었다. 어쩌다 보니 선발대가 후발대보다 더 느려졌다. 이유야 뭐... '박지훈' 한 단어로 설명된다. 곧 웃음 소리가 잦아들고, 효림이 지연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너 아까 지훈 오빠가 다니엘쌤이랑 간다 해서 삐진 것 같더라?"
"아, 뭐래..."
"너 그 오빠한테 관심 있어?"

두 사람은 다시 서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훈이 불안한 듯 눈을 끔뻑였다. 지연아, 말 잘해!! 지연아... 관심 없다고 해...!!! 하지만 지연은 그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약간 생길 것 같아."
"오올- 야, 잘 해봐."
"모르겠다아! 아직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뭐."

개방적인 열일곱들은 과학실 앞에 폭탄을 던져놓고 쿨하게 떠났다. 그 순간부터 지훈은 보노보노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선생님 앞에서, 뭔가, 묘한, 좆됨을 느낀다... 딸꾹! 다니엘의 손바닥 아래로 다시 한번 진동이 느껴진다. 다니엘은 말 없이 손을 떼냈다. 맞닿은 가슴팍이 오르락 내리락, 연신 밭은 숨소리가 났다. 지훈은 괜히 눈치를 보다가 손을 모아서 꼬물거렸다. 토끼. 앞발 문대는 토끼. 그 모습이 터트리고 싶을만큼 귀여웠다. 딴 데 내놓고 싶지가 않았다. 결국 다니엘은 줄곧 피해왔던 제 감정을 인정해야 했다. 지훈의 반듯한 어깨나, 목울대나, 젠틀한 태도 따위를 신경 쓰게 되는 건... 지훈이 다른 이와 훌쩍 떠나 버릴까 두려워서였다. 우습게도. 다니엘은 매우 충동적으로 말을 뱉었다.

"가시나들이랑 어울리지 마라."
"...쌤 혹시 질투하시는 거에요?"
"어."
"헐 대박!!!!!!! 대박 사건!!!!!!!!!!!"
"쉿."

그냥 한번 던져 본 건데 덥석 물었어! 오호 예! 지훈은 흥분한 듯 방방 뛰며 또 여기저기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아까 말했다시피 과학실에는 깨질만한 물건들이 많다. 예를 들면 지훈의 손 끝에 닿은 비이커라던지, 비이커라던지, 비이커... 툭- 비이커가 책상 아래로 공중부양 하자마자 다니엘이 재빨리 손을 뻗었다. 더 이상의 기물 파손은 NAVER...! 지훈은 내적 비명을 지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비이커는 깨지지 않았다. 정말 초인적인 스피드를 냈기 때문에. 비이커를 제 자리에 돌려놓은 다니엘이 지훈의 몸 위로 제 몸을 털썩 기댔다. 힘들다. 그러자 지훈이 까치발을 들며 붙박이장에 몸을 바싹 기댔다. 가깝다.

"쌤, 쌤. 너무 가깝... 끅!"

지훈의 딸꾹질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앞에 선 상대방이 계속 놀라게 했으니까. 하지만 다니엘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지훈을 쳐다봤다. 그리고 미묘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혀 내밀어."
"네?"
"혀 잡고 있으면 딸꾹질 멈춘다."
"이ㅋ... 이케요?"

지훈이 어색하게 혀를 내밀었다. 누굴 놀리는 듯 어설픈 모습이었지만 다니엘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얀 손 끝이 빨간 혀를 덥석 붙잡는다. 지훈은 제 혀를 잡은 채로 데록데록 눈알만 굴렸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내려다 보던 다니엘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좀... 그런 광경이었다. 뒷목이 슬슬 뜨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묘하게 의식되는 건 지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내려다 보는 시선이 뭔가 미지근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기류 때문에 과학실에 또 침묵이 흐른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무거운 침묵이. 그러자 다니엘이 천천히, 느릿하게 속삭였다.

"도와주까."
"으에...?"

뭘 도와줘요? 영문을 모르는 지훈은 그저 눈만 끔뻑였다. 심지어 다니엘이 제 혓바닥을 붙잡을 때까지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다. 내 혀를.. 잡았네...? 근데 왜 잡지??? 롸????????? 한 박자 늦게 놀란 지훈이 겁 먹은 토끼처럼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멍청한 표정으로 다니엘을 올려다봤다. 도통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과 혀 위아래로 느껴지는 생경한 이물감. 뜨거운 손가락 끝이 자꾸 뒷목을 쥐었다 놓는 게 어색했다. 아니, 사실 모든 게 어색했다. 익숙치 못한 다니엘의 눈빛까지도. 그 눈을 마주하면 왠지 긴장이 되서... 지훈은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성생니..."
"와."
"긍데 왜 질투하새어...?"

지훈은 생각했다. 그게 아까부터 내내 궁금했다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그걸 이제서야 묻는 게 참 지훈답다고. 그리고... 나를 자꾸 곤란하게 만드는 것도 전부 너답다고. 똑, 똑, 똑- 나무판을 두드리던 손이 다시 지훈의 뒷목을 스치고 떨어진다. 흠칫 떨리는 몸. 다니엘은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지훈의 말을 씹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진실되게 말할지, 거짓되게 말할지를 고민 중이었다. 그리고 선택은 이번에도 전자였다. 왜냐면... 지훈은 다니엘에게 늘 솔직했으니까. 혀를 붙잡고 있던 손이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

"니는 얼라니까... 내보단 걔들이랑 어울린다 아이가."

뜨거운 손가락 끝이 말랑한 입술 위를 꾹 눌렀다. 열일곱 여자애들의 천진한 웃음 소리, 그 이야기 속에서 지훈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그걸 떠올리면 다니엘은 괜히 입 안이 써졌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사실 늘 그랬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하지만 지훈은 다니엘의 대답이 영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주한 얼굴은 어이 없어 보이기도, 슬퍼 보이기도 했다. 지훈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자 다니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뭔가 말 실수를 한 것 같다. 끅, 울음 같은 딸꾹질 소리가 났다.

"...제가 좋아하는 거 알면서 왜 그런 말을 해요?"
"지훈아."
"저 딴 사람한테 갈 일 없어요..."

축 가라앉은 목소리는 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니엘은 상체 위로 쏟아지는 작은 몸을 꽉 감싸안았다. 그 짧은 문장 하나가 그리도 슬펐을까? 이렇게 우울한 모습을 본 적이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다. 몇 번이고 밀어냈는데 그때마다 늘 웃었다. 이내 울음 소리와 함께 가슴팍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천천히 지훈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뻗어온 손이 덥석 멱살을 붙들었다. 그리고 확 잡아당겼다. 기우뚱, 코가 가까이 맞닿자 지훈이 속삭였다.

"딸꾹질 멈추게 해주세요."

뭐? 하고 묻기도 전에 먼저 입술이 맞부딪혔다. 정말 요령 없이 박치기만 한 거라 조금 아팠다. 코도 아프고, 입술도 아프고, 왠지 머리가 띵했다. 이어진 부분에서 맥박이 쿵쿵 뛰었다. 혀가 들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지훈은 아주 조용했다. 다니엘은 그것마저도 참 지훈답다고 생각했다. 이내 입술이 떨어지며 시선이 마주쳤다. 지훈의 눈은 토끼처럼 붉었고, 전에 없이 아주 단호해 보였다. 꼬맹이가 어른을 힘들게 하네... 다니엘이 마지막으로 짓씹듯 속삭였다.

"니 아직 얼라다. 알제?"
"...좋아해줘요."

'좋아해요'도 아니고 '좋아해줘요'였다. 그게 사람을 미치게 했다. 다니엘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이미 여러 번 지훈에게 고백을 들었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지금 꼭 대답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 다시 실수를 한다면... 지훈이 어른의 표정을 지으며 훌쩍 떠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니엘은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짊어져야 할 것은 생각보다 아주 많았다. 나이 차, 성별, 사제 관계, 비난... 지훈에게 더 나은 선택지는 많으니 거절할 수 있었다. 행복하게 잘 살라며 놔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욕심을 내고 싶었다. 옆에 두고 싶으니까. 다니엘이 천천히 지훈의 볼을 쓸어내렸다.

"다 컸다고 생각해도 되나."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에 더 가까웠다. '대답은 늦게 해도 돼요! 저 20살 되고 나서 해도 되고! ' 하던 목소리가 떠올라서 양심이 콕콕 찔렸다. 지훈은 한참 울다가 어이 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 소리 사이로 딸꾹대는 소리가 섞인다. 딸꾹질을 멈추게 해달라더니 더 심하게 딸꾹질을 하고 있다. 안쓰러웠다. 하지만 지훈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맞닿은 가슴팍에서 자신과 비슷한 박동이 느껴지는 게 더 신경 쓰였다. 꼬물대는 손이 슬쩍 그 사이로 들어왔다. 쿵, 쿵, 쿵, 그리고 어느새 바로 코 앞에 다니엘의 얼굴이 있었다. 놀란 지훈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좋아해."

다니엘은 웃고 있었다. 지훈이 그곳에서 마주한 건 나쁜 어른이었다. 하지만... 사실 전혀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르르 눈꺼풀이 감긴다. 처음으로 키스 각이 적중한 순간, 당연하게도 두 사람의 입술은 맞닿았다. 이내 고개가 틀어지고 입이 벌어졌다. 뜨끈한 혀는 마치 제 것처럼 지훈의 혀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딸꾹질이 뚝 멈췄다. 쿵, 쿵, 쿵, 쿵, 쿵... 터질 듯한 심장 박동. 모든 게 다 그놈의 나쁜 생각 때문이었다.


과학실에서 나온 후에는 이미 시간이 꽤 많이 흘러있었다. 물론 그럴만도 했다. 그 안에서 개교 이래 가장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으니까. 지훈은 (((((우리 사귄다)))))라고 교내에 외치고 싶은 것을 꾹꾹 참으며 괜히 귓바퀴만 붉혔다. 너무 떨려서 나댈 겨를도 없었다. 복도는 길었고, 둘 다 조용했고, 자꾸 손 끝이 스쳤다. 다니엘은 말 없이 지훈의 손을 붙잡았다. 지훈은... 펑 터져버릴 것 같았다. 리얼로.
우진은 집결지인 회의실 앞에서 내내 두 사람을 기다렸다. 하지만 모든 인원이 도착한지 5분, 10분, 30분이 지나도록 둘은 나타나지 않았다. 엄청 불길했었고, 불길했고, 불길하다. 그 불길한 생각의 최종 결론은 '결국 박지훈이 진짜 다니엘쌤 덮쳤구나...' 신고는 아무래도 112로 해야겠지? 우진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박우진!"

저 먼 어둠 속, 누군가 발랄한 목소리로 우진을 불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무서운 새끼. 우진은 조용히 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밀어넣으며 억지로 웃었다. 고개를 든 곳에는 당연히도 다니엘과 지훈이 있었다. 정답게 손을 잡은. 손을... 잡은.....?????? 잠깐. 왜 손을 잡고 있지? 우진은 대놓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어울리지도 않게 귀를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뭔가 불길한 예감. 우진이 눈썹을 찡긋했다.

"...와 이리 늦게 왔노?"
"사랑하는 우진아. 할 말이 있다."

지훈은 그렇게 말하곤 괜히 다니엘을 한번 돌아봤다. 끄덕, 위아래로 움직여지는 고개. (그동안 도와줬으니까)얘한텐 말해도 된다. 뭐 그런 뜻이었다. 하지만 우진은 시그널을 주고 받는 두 사람의 모습이 영 어색했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불안했다. 대체 저 미묘한 분위기는 뭐지...? 우진이 슬쩍 회의실 문고리를 잡았다. 차라리 대화를 차단해 버리기 위함이었다.

"으응, 맞나. 근데 지금 다들 안에서 기다리니ㄲ..."
"횽아가 치킨 20마리 사줄게."
"...뭐?"

우진이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좋아서가 아니었다. 너무 놀라워서, 그리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였다. 썸 관계의 두 사람이 한참동안 사라졌다. 근데 돌아와서 치킨 20마리를 사주겠다고 한다. 그 정도로 경사스러운 일은 대체 무얼까? 우진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훈은 태연한 표정으로 다니엘의 어깨에 기댔다. 그러자 다니엘이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어줬다. 존나 다정하게. 자기 집 토끼 다루듯이. 씨발. 이 노양심 커퀴 벌레들... 우진은 진심으로 문고리를 부러뜨리고 싶었으나 박지훈이 아닌지라 그렇게 할 수 없었다. 18년 인생에서 인생에서 가장 황당한 밤이었다.


계속 찾아다녔는데 대체 어디 가있었어? 하는 영민의 타박에 지훈은 이렇게 답했다. 제가 너무 놀라서 중간에 졸도했습니다, 선생님. 하고. 다니엘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민은 그 말을 쉽게 믿었다. 우진은 인생에 강한 환멸을 느꼈다.

"야. 그 정도로 무서웠냐?"
"당근빠따죠. 다니엘쌤 없었으면 심정지 왔을 걸요."

지훈은 너스레를 떨며 다니엘의 팔을 슬쩍 붙잡았다. 마주치는 시선. 그 시선 사이로 아까 전과는 달리 꽁냥꽁냥한 스파크가 튄다. 연애 초반 연인들 사이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1조 조원들은 다들 눈치를 개 밥 말아먹었기 때문에, 그 기류를 눈치 챈 건 우진 뿐이었다. 우진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눈치 없는 효림은 지연을 팔꿈치로 툭 치더니 뭐라도 해보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눈치 없는 지연은 걱정 어린 투로 지훈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 낯빛이 너무 안 좋으세요... 괜찮아요?"

슬쩍 볼로 와서 닿으려는 손바닥. 그 손바닥은 하얗고 부드러워 보였다. 손목도 가늘었다. 애초부터 알고 끼어든 것도 아닌데... 괜히 상처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훈은 슬쩍 다니엘과 효림을 돌아봤다. 아닌 척 쫑긋쫑긋 이 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지훈이 완곡히 지연의 손을 내리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나 건드리면 안돼. 조심해."
"...네?"
"오빠 사실 총각 귀신 만나서 기절한 거야... 근데 걔가 지금 나한테 붙었거든."
"네????????"
"딴 사람이 만지면 해코지 할 수도 있어."  

질투가 심해서, 지훈은 그렇게 덧붙이며 다니엘을 돌아봤다. 다니엘이 픽 웃었다. 하지만 지연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분명 지훈이 장난을 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올려다 본 얼굴은 너무나도 진지했고, 얼굴 옆으로 주르륵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지훈은 어깨를 툭툭 털어대며 자꾸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연이 슬쩍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본능이었다.

"그 뭐야... 퇴마 같은 거, 한번 알아보시구....."
"혹시 아는 퇴마사 있니?"
"있을 리가 없죠... 네."

지연아 자니? 혹시 아는 퇴마사 있니? 지연은 전남친을 붙잡았다가 돈 빌려달라는 소리를 들었던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단박에 정이 떨어졌다. 지연이 스을쩍 옆에 서있던 효림을 붙잡았다. 저 오빠 이상해/인정. 짧은 복화술 후, 두 사람은 가장 믿을만한 영민에게로 후다닥 피신했다. 그러자 다니엘이 와락 지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 총각 귀신 설마 내 아이가?"
"하항! 들켰네요!! 귀신아 물러가라~ 훠이훠이~"

언제 식은땀을 흘리며 불안해 했냐는 양(연기였음), 지훈은 깨발랄한 태도로 어깨 터는 시늉을 했다. 말랑한 손바닥이 얇은 셔츠를 입은 팔 위를 몇 번 스쳤다. 그러자 다니엘이 지훈의 손목을 붙잡고 목에 고개를 박았다. 웅웅, 말을 꺼낼 때마다 맥박 위로 진동이 울렸다.

"총각 귀신 붙었는데 무섭지도 않나."
"넹. 대박 개이득인데요?"
"딱 붙어서 앞으로 니 안 놔줄 텐데... 진짜 후회 없나."
"쌤은 귀신이어도 안 무서워요."

좋아하니까. 지훈이 작게 큭큭대며 다니엘을 돌아봤다. 또 바로 앞에 다니엘의 얼굴이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은 어두운 복도 안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유독 붉었다. 순간 정말로 심정지가 올 것 같았다. 지훈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 한참 찾았다더니 그새 다들 텐트라도 치러 나간 모양이었다. 지훈이 진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뽀뽀해도 돼요?"

다니엘은 대답이 없었다. 지훈은 그 침묵을 동의로 알고 슬쩍 까치발을 들었다. 쪽- 볼 위로 맞닿는 입술. 목을 스치고 떨어지는 손. 토끼처럼 포르르 도망가는 뒷모습. 천천히 볼을 문지르던 다니엘은 문득 어이가 없어져서 끅끅 웃었다. 사귀자마자 키스했는데 그 후에 한다는 게 고작 볼 뽀뽀다. 그것마저도 너무 '애' 같고 너무 지훈다웠다. 하지만 '어른' 강다니엘의 얼굴은 터질듯이 붉어졌다. 꼬맹이가 으른의 고생길을 활짝 열어준, 아주 역사적인 여름 밤이었다.

 

-
두 사람이 드디어 사귑니다!!!!!!!!!!(고기댄스) 제가 너무 늦게 와서.. 이번 화는 평소보다 길게 써봤어요...☆기다려 주신 분들 너무너무 감사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랑합니다♥♥♥♥♥♥♥♥♥


PS. 좋다고 말해 꼭 들어주세요!!! '그 예쁜 가로등 아래서 넌 내가 좋다고 말했어' 이 가사 때문에 11화 브금으로 넣기 좀 그렇다....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8화에 가로등 아래서 좋다고 말한 적 있더라구요...(소름) 제목도 그렇구;; 지금 이 순간부터 주제곡입니다;;; 

인디고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