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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마부도 없는 검은 마차가 사막을 가로질렀다. 축제 기간이지만 수도인 하이랜드와는 규모가 다른 소도시 블랙펄에서 비교적 한사롭게 경비를 서고 있던 란돌은 검은 마차에 새겨진 문장을 알아보고 입을 쩍 벌렸다.


이곳에서 10년이 넘게 이곳에서 근무해 왔지만, 지금 같은 상황을 맞이할 줄이야.


"계속 그리 서 있을건가."


경멸을 숨기지 않은 회색눈이 그에게 향하자 란돌은 정신을 차리렸다. 급히 부엉이를 불러 영주에게 기별을 넣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영주가 그곳에 도착할때까지 손님을 모시는데 모자람이 없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귀족을, 그것도 황실 마차를 타고올 만한 고위 귀족을 맞이해야할 처지가 된 야간 경비대장 란돌은 긴장한 표정으로 검은 마차에 다가갔다.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아니." 


마차에 탄 귀족은 지루한 듯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귀찮게 굴지말고 떨어져있으라는 뜻이다. 영주에게 받은 명령과 즉결 처분권을 가진 고위 귀족의 명령중 무엇을 우선시해야할지는 명확했다. 란돌과 즉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함께 당직을 맡은 하급 경비 라울은 살짝 열린 마차 커튼 사이로 보이는 창백한 백금발을 힐끔힐끔 보고있었다. 란돌은 헛기침을 했다. 라울이 바라보자 란돌은 입모양으로 말했다.


'목숨 아까운줄 알면, 가만히.'


하급 경비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 그 이후 그는 마차쪽으로는 시선 한점도 주지 않고 정면만 똑바로 바라봤다. 마차에서 들리는 종이 넘기는 소리를 제외하고 숨막히도록 조용한 거리에 말 발굽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영주와 그의 기사단이 도착했다.


"수조가 필요한데."


마차로 다가간 영주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창백한 금발 귀족은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크기는 그 정도로."


"...예?" 


서류에 있는 그림을 본 영주가 아연히 되물었다. 이 나라에 욕조를 사용하여 목욕을 하는것은 사치를 부리는 건 귀족 뿐이었다. 욕조를 짜맞추는것도 1주일은 필요한데, 유리로 된 커다란 수조를 구해오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였다. 


"늦어도 내일 새벽까지. 비용은 상관말고 세공에 특별히 신경쓰게."


심지어 유리로만 된 수조도 아니라, 특별 세공을 해야 한다. 그러나 영주는 거절하지 못했다. 서류에 있는 천문학적인 금액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남자의 약지에 있는 말포이 가문을 상징하는 반지를 알아 보았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실망시키지 않는게 좋을거야."


남자는 회색눈을 가늘게 좁히며 품평하듯 영주와 그가 데려온 일행들의 행색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마치 이 자신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는듯이. 하지만 시간이 없었기에 남자는 초라한 마을의 영주에게 압력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귀하신 분께 선물할 것이니."


차마 숨기지 못하고, 급히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영주는 뛰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말핼다.


"따,따로 묵을곳을 잡아두지 않으셨다면 저희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말포이 가주가 높임말을 사용하는 사람, 그중에서도 '귀하신 분'이라고 칭할만한 사람은 단 한 사람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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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커튼이 바깥을 차단하자 루시우스는 미간을 짚었다. 


일주일 전, 사막의 지배자는 "다녀올 곳이 있다"며 수행원 한명 없이 그대로 사라졌고, 그간 잡혀있던 일정은 모두 루시우스가 도맡아야 했다. 루시우스는 주군의 집무실에 앉아 올라오는 서류를 대신 처리하고, 정기 회의를 미루고, 주군의 행방을 따져 물으러 온 벨라트릭스와 캐로우를 쫓아냈다. 


급한일을 처리하고, 주군이 자리를 비우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죄수의 행방을 찾을 때쯤 나시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언제쯤 집에 돌아오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날짜를 확인한 루시우스는 머리가 아팠다. 이틀안에 드레이코의 생일선물을 사 놓아야 했다. 그때였다. 루시우스는 펜을 놓치고 급히 오른손으로 왼팔을 붙잡았다. 왼쪽 팔이 타들어가는 통증이 느껴졌다. 팔에 새겨진 검은색 뱀이 쉭쉭거렸다. 뱀 문양이 글자 형태로 바뀌었다. 


오후 2시, <깊의 밤의 속삭임>


그로부터 한 시간 뒤, 블랙펄에서 전령이 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실까."


그의 주군은 언제나 강하고 여유로우며 비밀스러운 존재였다. 그런 주군의 흥미를 두는 것이 생겼다. 그것이 무엇일지 누구일지 루시우스는 한시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사람이라면. 불안감이 싹텄다. 주군이 말포이 가문이 아닌 다른 사람을 곁에 두고자 하신다면.

'아군으로 만들거나, 싹이 트기 전에 제거하거나. '

그 역시 자신의 눈으로 보아야만 판단 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은 커튼을 바라보는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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