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지나

*지나코 성격이 페그오에 가까움






화면 너머의 그 사람 (3)


*


진짜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지나코는 먼 눈을 한 채 제 옆에 앉아있는 존재를 한껏 외면하는 중이었다.


"지나, …무시카. 배가 고프다고 책을 먹어선 안된다."


"…절 어디까지 먹보로 보는 검까. 그 정도로 식탐을 부리진 않슴다."


지나코는 저도 모르게 익숙히 답해버리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버렸다. 아아, 정말 그 붉은 랜서 가 맞구나~~~~ 지나코는 한탄이 나오는 걸 금할 수가 없었다. 결국 기세에 밀려 통성명까지 마쳐버렸다. 다행히 행사장내에선 이름말고 닉네임으로 불러달라는 말엔 마음에 들진 않아보였지만 납득해줘 곤란한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남자란 건 말해줘서 알고 있었지만 설마, 설마 이런 터무니 없이 눈에 띄는 사람일 줄이야. 히키코모리에 엘리트니트인 지나코 씨는 기가 금방 죽어버린다고! 아직 정식 개장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아프다!! 게다가!


"그런 티셔츠를 입고도 잘 어울리다니… 반칙 아님까아…"


현재 붉은랜서의 본인인 카르나라고 자칭한 사람은 캐릭터가 크게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전에 입고 있던 옷은 일을 하기엔 여러모로 이 자리에 부적합했기에 오사카베히메와 지나코가 황급히 구해온 티셔츠였다. 구했다곤 해도 이른 아침부터 열린 옷가게는 없던 터라 행사 부스 내에서밖에 구할 수 없었다. 최대한 얌전한 옷을 고르긴 했지만 외모가 주는 압력이 엄청나 티셔츠에 시선이 잘가지도 않는다. 아니, 그 티셔츠가 캐릭터 티셔츠란 걸 눈치채도 하나의 컨셉 촬영인가? 혹시 몰래 카메라? 라고 현실을 부정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카르나는 제가 입은 셔츠를 슥 보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쑥스러움을 타는 소년 같이 보인 건 기분탓일까? 지나코는 고개를 갸웃했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 느낌을 받은 걸까? 지나코는 의아했으나 깊게 생각치는 않았다.


"하하. 막 밖에서 입고 돌아다녀도 화보 컨셉인가? 생각할지도 모른다구요?"


지나코는 이 순간 평생 죽어있던 사교력을 끌어냈다. 어찌됐든 장장 몇시간동안 함께할 사이. 계속 어색해선 심적으로 정말 죽어버릴지도.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말을 꺼내곤 살짝 카르나의 기색을 살폈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건 아무래도 서툴다 보니 눈치를 보게 된다.


"아아. 네가 그 정도까지 말해준다니 기쁘군."


카르나는 그의 말에 정말로 기쁜듯이 웃었다. 우왁, 눈부셔! 쿨한 이미지의 남자가 웃는 것만으로 태양계 남자가 되다니, 이 무슨 반칙인가. 지나코는 저도 모르게 눈부신 햇빛을 가리듯 손으로 차양막을 쳤다.


"왜 그러지? 눈이 아픈 건가? 혹시, 이런 조명이 눈부실정도로 실내를 어둡게하고 지내는 건가? 그렇다면, 이 조명들은 버거울지도 모르겠군. 설마 방종의 대가가 이렇게 찾아들다니, 우선 안과를 가보는 게 좋겠군. 아니, 종합검진인가."


카르나가 심각히 중얼거렸다. 당장이라도 일어서 병원으로 향하려는 그의 낌새에 지나코는 황급히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정도로 어둡지 않슴다! 그리고 저 아직 건강함다! 매년 검사하고 있으니 걱정마십쇼!"


싫어도 파르바티 고모님의 강압에 못이겨 어거지로 병원에 끌려가는 형색이었다. 저와 같이 죽상을 한채 끌려나오는 사촌오빠와는 매년 공감대를 형성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랜서씨, 게임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저한테 너무 극성이지 않슴까? 과보호임다. 과보호. 극성인 아버지임까…"


"아니, 아버지보단 남동생 쪽이 연령적으로 적합하다."


"으윽…!"


허를 찌르는 팩트폭력에 지나코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저 사람, 아무렇지 않게 디스하다니! 무슨 천연임까, 대체!


"…두사람, 정말 친하구나."


"! 그렇게 보인가!"


"히엑…"


문득, 옆에서 공기와도 같이 조용히 있던 오카사베히메가 툭, 하니 중얼거렸다. 꽤나 작은 소리여서 지나코는 듣지 못했으나, 카르나는 달랐던 모양인지 오카사베히메의 말에 달려들듯 반응했다. 오카사베히메는 갑자기 관심이 제게로 향하자 질린 기색으로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카르나는 개의치 않고 눈을 빛내었다.


"나와 지, …무시카가 그렇게 친해보이는가?"


"엥. 히메짱, 대체 우리의 어디가 친해 보인다는 검까!"


"…무시카는 나와 친하지 않다 생각하는 걸까."


"아, 아니… 게임에서면 몰라도 저희 얼굴 보는 건 처음이잖슴까…"


"! 게임에선 친했다는 거군. 그렇다면, 게임 밖에서의 만남을 늘리면 될 일이다."


"아니, 대체 왜 그렇게 되는 검까?!"


아니, 그런 부분. 오사카베히메는 자연스레 시선이 제게서 비껴나 다시 서로만의 공간이 되어버린 두 사람을 흐린 눈으로 바라봤다.


한참을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만담과도 같은 그 대화를 청자처럼 듣고 있다가 입구 쪽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개장 시간이다."


그 말에 두 사람의 대화가 뚝, 끊어졌다. 카르나 여전히 차가운 인상 그대로의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지나코는 여간 긴장되고 불안한 기색인 얼굴로 입구쪽을 보고 있었다. 그런 지나코에게 오사카베히메는 부스 선배로서 조언 하나라도 주고자 입을 열었다.


"걱정마. 뭇짱. 몇시간만 정신 잃고 나면 끝나있을 거야!"


"그건 무슨 위로임까…?!"


"우으… 하지만 히메짱도 사람 많은 건 버거운걸…"


"…히메짱도 히키코모리였죠."


둘은 침묵했다. 지나코는 슬쩍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 없는 남자를 바라봤다. 방금까지 편하게 대화를 주고 받은 기분이었지만, 가만히 있는 그를 바라보니 조각된 석상을 바라보는 기품이 느껴졌다. 취향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지만 역시 미인이었다. 나이가 10살 정도 더 어렸다며 스트라이크 존이었을지도. 물론 예스 쇼타 노 터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일 해본 적 있을까? 일이라곤 전혀 안 해봤을 것만치 깔끔한 인상이었다. 어딘가의 부잣집 도련님이라던가…


"저…"


그때 낯선 목소리에 황급히 정신을 돌이켰다. 부스 앞에 사람이 점점 줄을 서는게 보였다. 아, 드디어 시작이구나. 하지만, 목소리를 듣자 머리가 새하얘졌다. 뭐, 뭐부터 해야되지? 당황스런 마음에 오사카베히메를 보니 이미 오사카베 히메는 손님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 어쩌지…?!


"예약하셨습니까?"


그 때, 차분한 카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네, 네…!"


손님인 여성은 눈 앞의 미남에 긴장한 모양인지 떨린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럼 확인 닉네임과 번호를…"


카르나는 손님이 말해준 네임과 번호를 정해진 예약판으로 확인하고 체크하며 예약했던 물건을 건네주었다.


"예약한 물건, 여깄습니다."


"가, 감사합니다아아…"


손님은 황송하단 어조로 두 손으로 책을 소중히 붙잡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 손님.


"저, 저… 예약을…"


"닉네임과 번호를 알려주세요."


한명 한명 차분히 차례대로 손님이 지나갔다.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던 지나코는 뒤늦게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곤 카르나를 도왔다.


*


카르나를 도왔다곤 해도 지나코가 한 일은 책이 부족해지지 않게끔 책을 다시 채워 놓거나 현금 정리하는 것 등등의 잡무였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중간엔 오카사베히메도 멘탈이 나갈 징조까지 보여 결국 손님 대응은 카르나가 전부 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안돼 책은 매진이라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수, 수고하셨슴다아…"


"수고했어어…."


"수고했다."


지나코는 오사카베히메는 매진이 된 걸 확인하곤 진이 빠져 책상 위에 엎어졌다. 완전히 지친 기색이 만연한 그들과는 달리 카르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은 채였다. 오히려 너무 멀쩡해 보여 두렵기까지 할 정도였다.


"랜서씨, 완전 대단함다……"


지나코가 감탄을 담으며 중얼거리자 물을 마시던 카르나가 갸웃했다.


"딱히 나는 한 일이 없었다만."


"겸손안해도 됨다… 진짜 랜서씨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지…"


오사카베히메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랜서씨 아니었음 분명 사고 하나, 아니, 손가락으로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이 쳤을 거야…"


오사카베히메가 중얼거린 말에 으으, 하며 몸서리를 쳤다. 안그래도 히키코모리인 자신인데 이 일로 창피해서 집안에 더 틀어박혔을지도… 무사히 잘 끝나 정말로 다행이었다. 하지만, 카르나는 여전히 납득이 가질 않았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한 건 자리에 앉아 손님을 맞이한 것 뿐이다."


아니, 그 부분이 가장 힘든 검다…? 이 사람, 겸손이 좀 지나친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진정으로 바빴던 건 뒤에서 일을 받쳐준 너와 히메가 아닌가."


호인이다. 이 사람, 엄청 쓸데없이 호의가 넘쳐나는 호인이다! 지나코와 오사카베히메는 뜨악한 심정으로 눈 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어째선지 후광이 나는 것 같은 환상마저 보이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집안에만 있는 나태한 삶을 영위하다가 겨우 그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어 이곳까지 와 희소가치있는 운동을 한 셈이겠지? …이제 그 몸을 지탱하는 것도 슬슬 한계가 아닌가?"


…저 놈의 말! 말! 말! 지나코는 감동하려다가도 그 놈의 말 때문에 욱한 심정으로 대꾸하려 했다. 그러나, 저를 바라보는 두 눈과 딱, 마주쳐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도 그럴게 그 안엔 염려가 가득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알았다.'


불현듯 깨달았다. 아까부터 이 남자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던 이유를. 이 사람, 표정은 죽었나 싶을 정도로 일하지 않으면서 그 눈은 열심히 심정을 대꾸하고 있었다. 그 안에 가득 담긴 심려와 마주하자니, 화가 단박에 식어짐을 느꼈다. 지나코는 한숨을 내쉬며 뚱하니 그를 향해 말했다.


"카르나씨, 피곤할까 걱정이 된다면, 걱정이 된다고 솔직히 말하십쇼. 정말, 생각이 많아서 그런 건지 몰라도 남 생각하다가 말을 생략해버리면 오해를 부른다구요? 그냥 하고 싶은 말 빼먹지 말고 전부 하는 게 좋슴다."


아, 그럼 저 잠시 화장실 좀. 지나코는 그 말을 전하곤 자리를 비웠다.


"……"


오사카베히메는 그 빈자리를 확인하곤 슬쩍,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배웅하는 남자의 얼굴을 얼결에 봐버리고 말았다. 남자는 두 눈이 크게 벌어져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사카베히메가 놀란 건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충격을 받아 혼란스러운 한편, 마치 무언가에 고양된 것만치 두 볼에 홍조를 띈 한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나, 나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오사카베히메는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마치 봐선 안될 걸 봐버린 기분이었다. 저것을 마주해야할 건 제가 아니었다.


"어라? 히메짱도 화장실?"


지나코는 자신을 뒤쫓아온 오사카베히메에 의아한듯 물어봤다.


"아! 뭇짱. 이제 슬슬 가봐도 괜찮아! 정리는 이제 내가 할게!"


"응? 하지만…"


"진짜 괜찮아! 정리는 금방인걸! 히메 혼자 할 수 있어! 랜서씨랑 같이 돌아가도 돼!"


강하게 밀어닥치는 그의 말에 지나코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대답에 안심한 둣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뭐 하나 대접할게.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 랜서씨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줘."


"음? 히메짱은 부스로 안가?"


"아, 아~ 난 잠시 볼일이 있어서! 어차피 중요한 건 다챙겼으니까! 괜찮아, 괜찮아!"


아마도. 그는 뒷말은 조용히 삼켰다. 자신도 함께 돌아갈 순 있었으나, 그 얼굴을 봐서인지 돌아가기가 여간 껄끄러운게 아니었다. 그는 지나코의 등을 꾹꾹 밀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볼일을 보고 그를 저 자리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


"랜서씨, 저 왔슴다."


"히메는?"


"볼 일이 있다고 함다. 아, 정리는 자기가 하겠다고… 했지만, 먼저 해버렸군요."


이미 깔끔해진 책상에 지나코는 먼눈을 하며 속으로 감탄했다. 정말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구나… 보면 볼수록 처음에 가졌던 편견이 점점 저 멀리 사라져가는 기분이었다.


"…해선 안됐었나?"


무언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그런 그를 안심시키기위해 지나코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닐 검다. 그럼 가죠."


"어딜?"


"어딜긴요. 집이죠. 아, 히메짱이 저희 보고 먼저 가라고 했슴다."


"그런가."


카르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짐을 챙겼다. 그리곤 그대로 나가려는 카르나를 지나코는 당황하며 붙잡았다.


"저, 저기! 랜서씨! 혹시, 그, 그 상태 그대로 가려는 검까?"


"무엇이 문제지?"


지나코의 물음에 카르나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아니, 아니! 엄청 문제 많은데요?!


"그, 그 옷은 밖에서 입기엔 좀…!"


"하지만, 네가 잘 어울린다 했다."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엔 언뜻 자랑스러움이 묻어나는 듯 보였다. 아니 왜 우쭐해진 거야? 이 사람!


"아니, 평판이라고 해야될까, 그, 여러모로 문제가… 아, 아무튼 차라리 입을 거면 차라리 집에서…! 집에서 입으십쇼!"


"음…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제발 부탁드림다아아"


이대로가다간 백발미남 오타쿠 티셔츠라는 태그나 실시간 인기 검색어가 sns에 갱신될지도 모른다. 이미 떴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백발미남이 오타쿠 티셔츠를 입고 길거리에서도 출몰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이 건실해 보이는 사람의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뭐라 생각할지… 직접 만날 일은 없겠지만 생각만으로도 오한이 떨려왔다.


"으음… 알겠다."


굉장히 불만족스러워 보였지만 어떻게든 대답을 받아낸 지나코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얼른 갈아입고 오십쇼."


"…알겠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이 왠지 기운이 빠져 보였지만 지나코는 모른 척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사람, 잘챙겨주는 아버지같아 보여도 저런 고집스런 모습은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똑같구나.


지나코는 그를 기다릴 겸 sns나 둘러볼까 싶어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리고 손에 거슬리는 감촉에 뭐지 싶어 주머니를 확인했다.


"아."


나온 것은 종이 조각들이었다. 그것도 번호가 적혀있는 종이들. 현금을 정리하다가 섞여들어온 것들이었다. 그냥 종인줄 알고 나중에 한번에 처리하자 싶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건데… 설마 내용물이 이거였을 줄이야.


"이거, 누가 봐도 헌팅… 맞지?"


"누가 말이지."


"으헛…?!"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지나코는 고개를 돌려 그 주인공을 확인하자 그 곳엔 처음 봤을 때처럼 모델같은 카르나가 서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 얼굴이 굳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아니, 확실히 티가 날정도로 기분이 나빠보였다.


"왜, 왜 그럼까…"


왜 저리 화가난 거지? 표정 하나 바뀐 것만으로도 그가 주는 압력이 무서웠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그를 화나게 한걸까? 지나코가 두려움에 움츠러들자 카르나가 움찔, 하며 표정을 살짝 풀어냈다.


"…미안하다. 겁먹일 의도는 없었다. …그 손에 든 건, 무엇이지?"


카르나는 지나코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어느정도 부드럽게 풀렸으나, 쪽지를 바라보는 찰나의 순간엔 그것을 불태울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너무나도 순식간이라 지나코가 눈치챌 일은 없었다. 그저 자기한테 화난 게 아니란 걸 알고 안심한 지나코는 들고 있던 쪽지를 카르나에게 건네줬다.


"아, 이거…자요."


"…왜 나에게."


"그거 랜서씨검다. 랜서씨 인기많네요~"


생각해보면 카르나가 물건을 건네줄 때마다 수줍어하며 받아간 인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현금을 건네주며 자연스레 번호까지 교환해준 이들도 한둘이 아니란 뜻. 저 종이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너의 것이 아니었던 건가."


그런데 카르나는 건네받은 종이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근데, 말하는 내용이 이상했다. …왜 저런 착각을?


"아니, 이런 오타쿠 행사에서 헌팅하는 사람이 어디있단 검까. 랜서씨 정도되는 비쥬얼이 돼줘야 장소불문하고 헌팅이 되는 거라구요?"


"그런가. 나는 필시, 내가 없는 사이에 그 바다표범이나 물개와 같은 네게 매력을 느껴 다가온 이가 있을 거라 여겼는데, …착각이었나보군."


그렇게 말하는 카르나의 얼굴은 확실히 아까완 달리 후련할정도로 풀려있었다. 하지만, 그걸 듣고 있던 지나코는 아니었다.


"…바다표범이나 물개가 뭠까, 대체!! 아!! 그래요!! 전 이제 30줄을 바라보는 글러먹은 히키코모리에 엘리트니트라 이검다! 정말!! 이런 저한테 호감을 다가오는 남자따윈 없단 거 충분히 알고 있단 검다!!"


흥-!!! 지나코는 콧방귀를 크게 뀌며 쿵쾅거리는 발걸음으로 출구로 향했다. 잔뜩 열이 오른듯한 그의 뒤를 카르나가 황급히 쫓아왔다.


"잠깐, 무시카."


카르나는 그를 좇아 옆에 서며 그를 계속 불렀으나, 지나코는 입을 꾹 다문 채였다. 그렇게 입구를 빠져나와 그대로 역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무시카."


"……"


"무시카. 내 말을 들어 줘."


"……"


"…지나코."


멈칫, 그의 발걸음이 돌연 멈췄다. 지나코는 갑자기 불려진 이름에 눈살을 찌푸리며 옆에 선 이를 홱, 노려봤다.


"드디어 봐줬구나. 지나코."


그의 시선이 향하자 안심한 듯 카르나는 작게 웃고 있었다. 지나코는 그 진심으로 안도한듯한 얼굴에 솟았던 화가 스르륵 녹아버릴 뻔 했다. 위, 위험! 저런 치트 얼굴에 하마터면 금방 화가 풀리는 쉬운 여자가 될 뻔 했슴다! 정신차리자! 지나코=카리기리!


"뭡니까, 전 이만 가봐야됨다."


퉁명스레 나가는 말투에도 카르나는 그것만으로도 족했던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간청했다.


"잠시면 된다. 내게 시간을 주지 않겠나."


…잠시라면 뭐. 잠깐 입을 다물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지, 카르나의 만면엔 화색이 맴돌았다. 그 얼굴에 지나코는 잠시 멍한 얼굴을 지었다가 그가 하는 말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아아. 잠깐이면 된다."


카르나는 그대로 지나코를 이끌어 근처의 벤치로 향했다. 그는 지나코를 먼저 앉히고 자신은 의자의 끝자락에 떨어져 앉았다. 카르나 나름대로의 배려가 느껴지는 거리였으나, 지나코는 왠지 그 틈이 신경이 쓰였다. 괜스레 민망스런 기분에 그는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할 말이 무엇임까."


"…지나코. 너는 내게 두 번이나 말이 부족하단 걸 지적해주었겠지."


"예? 예… 그렇슴다만."


카르나는 잠시 머뭇대다가 입을 열었다. 시선은 지나코를 보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코는 그 말에 갸웃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간 스스로가 한 마디 더 많은 사람인 줄 알았고, 또 그렇게 들어왔기에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네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인생을 통튼 격언을 받은 셈이었다."


…아니, 그 때 그건 홧김에…… 지나코는 삐질 흘러나오려는 땀을 몰래 닦으며 차마 입으로 내뱉지 못할 말을 삼켰다.


"하지만, 한 마디 부족하다 해도 왜 부족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주위로부터의 평판이 조금 나아졌지만 그것 뿐. 근본적인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나는 제대로 바뀌질 못했던 거겠지. 그런데,"


카르나는 정면에서 지나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를 힐끔힐끔 바라보던 지나코는 그와 시선이 맞춰지자 움찔, 하고 작게 몸이 튀었다. 하지만, 카르나는 그런 지나코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너는 나조차도 보지 못했던 나를 꿰뚫어주었다. 나는 그에 진심으로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지나코=카리기리."


그는 말을 마치고 볼에 붉은 홍조를 띄며, 마치 고양된 듯 부드럽게 웃었다.


"…어엇……"


지나코는 그런 그의 얼굴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말이 되지 못한 탄성만이 흘러나왔다. 왠지 얼굴에도 조금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아까의 나는 말이 부족했던 것 같다. 너의 격언을 살려 제대로 보충하도록 하지."


엇. 아직 안 끝났어? 지나코는 아직도 끝나지 않는 그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여기에서 더한 말을 꺼낸다고? 지금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 그 이상으로 더 들었다간 얼굴이 폭발하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나코는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서둘러 손사레를 쳤다.


"아, 아~ 이제 충분할지도 모르겠슴다. 아니, 지나코씨는 이제 충분함다!"


"아니. 그렇지 않다. 아직 네가 화났던 일에 대한 해명을 하질 못했다. 그러니 넌 들어야만 한다."


"네? 제가 뭘…"


앗. 그러고 보니. 방금 건물 안에서 물개니 바다표범이니 하는 말을 들었었지. 잊고 있었다. 아니, 아니. 면전에서 저런 엄청난 소릴 들어벌이고 저런 얼굴 봐버리면 잠깐 잊을 수도 있는 거 아님까! …어, 어쨌든 그렇담 듣긴 들어야지. 왠지 불길하지만.


지나코가 침묵하자, 말을 이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카르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네?"


네? 뭐라구요? 지나코는 방금 자신이 들은 내용에 대해 귀를 후볐다. 아무래도 귀가 안 좋았던 모양이다. 그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조심스레 되물었다.


"죄송함다. 다시 한 번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너를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다른 남자가 헌팅을 해도 이상치 않다 여겼었는데, 내 착각이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카르나는 단언했다. 그리고 지나코는 그 말을 듣고 뜨억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매, 매력적? 매력적이라고 했슴까, 이 사람? 처음 보자마자 저한테 욕을 일삼던 사람이…? 어? 잠시만, 그 표현이 설마 칭찬? 진짜로?


"그, 그럼… 바다표범이나 물개는…"


"아아. 참으로 귀엽다고 생각한다."


칭찬이었구나!!! 게다가 눈을 반짝이면서 말하는 게 진심이야!!! 지나코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처음 보자마자 뚱뚱하다고 하지 않았음까! 아앗…! 혹시 통통하거나 뚱뚱한 사람이 취향…?"


"음. 그건 잘 모르겠군. 미추엔 약해서 말이지. 무엇보다 그 체형에 대해서라면 맞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만. 무엇보다 건강이 걱정되니 운동을 할 것을 권장한다."


아앗. 그건 또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지나코는 괜스레 지뢰를 밟은 탓에 쑥스러움에 온 몸이 불타던 기분이 쏙 들어갔다. 그는 입을 쭉 내밀며 툴툴 중얼거렸다.


"그럼, 뭠까. 막 예상과 같았다느니 뭐니 하면서 욕한 거 아님까."


"그건 아니다."


하지만, 지나코의 말에 단호한 부정이 날아들었다. 지나코가 토끼눈을 뜨며 그를 바라보자 그는 진지한 얼굴로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너의 생활 리듬과 식단으로 그 정도는 금방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니 예상과 다르지 않은 체형에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카르나는 잠시 지나코의 눈길을 쓱 피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며시 다시 시선을 향했다.


"네가 여성이라는 점은, 참으로 기분 좋은 예외였다."


"…그, 그게 무슨…"


지나코는 저도 모르게 반문을 꺼냈다. 꺼내고 나서야 아차 싶었으나 카르나의 입을 막을 길은 없었다.


"음. 나도 내 기분을 지금으로선 정확히 표현하기가 힘들군. 그러니, 지나코.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


"예, 예?"


"앞으로도 나와 만나주지 않겠나?"


카르나는 불쑥 지나코에게 다가왔다. 지나코는 그의 발언에 정신을 못 차린 것도 모자라 그가 들이대니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온 몸에는 불이 나는 것만치 뜨거운 김이 나고 있었다.


"래, 랜서씨? 저, 그, 예?"


"카르나라고 불러주면 된다."


"예? 카르나?"


"아아. 네 입에서 나는 내 이름은 특히도 다름 울림인 것 같구나. 이것은 실로 좋은 울림이야. 지나코."


"우으으…"


너무나도 저돌적인 언사에 지나코의 의식이 저만치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이, 이런건 모태솔로인 저한테 너무나도 큰 이벤트! 아니, 모브 오브 모브인 제게 이런 미남이 들이댄다뇨?! 무슨 장난임까, 이거?! 아, 혹시 몰래 카메라? 몰래 카메라인가?!


"…지나코?"


아무 말도 못하고 어버버하고 있자 조심스레 이름이 불려졌다. 지나코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보았다. 그는 눈꼬리를 추욱 늘어트리곤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개같다고 지나코는 생각했다.


"안 될까…?"


의기소침해져 눈꼬리를 축 내리는 모습은 이제껏 의식하지 못했던 그의 나이를 상기시켰다. 그러고보니, 이 사람 대학생이랬지. 멍하니 그의 정보를 떠올리던 지나코는 눈쌀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조금 비키며 중얼거렸다.


"뭐, 뭐어… 지나코 씨는 어차피 집에만 있으니깐, 마, 맘대로 하시든 말든가요오…"


"…! 아아! 그 넓은 아량에 감사를 표한다."


카르나는 지나코의 말에 대번에 환해졌다. 아이처럼 기뻐하는 그 모습에 지나코는 입가가 풀어지려는 걸 황급히 막았다.


절대 난생 처음 고백 비스무리한 걸 받아 마음이 흔들린 게 아니다. 절대로! 그저 이 축 쳐진 얼굴에서 지나코씨가 약한 쇼타의 흔적이 지나간 걸 어쩝니까! 그러면 진다는 결론밖에 없지 않나요! 지나코씬 쇼타에 완전 약하니깐! 취향인 걸! 물론, 그래도 카르나씨는 취향 밖의 사람이라 지나코씨가 흔들릴려면 한참 걸리겠지만요~흥!


지나코는 현실을 한껏 부정하며 얼굴을 환히 밝힌 채 저를 바라보는 카르나의 시선을 피해 얼굴을 붉힐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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