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말하기도 쑥스럽지만 저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사랑은 인류의 보편적인 감정이자 근본적인 욕망이고 그렇기에 이런 시궁창 속에서라도 불특정 다수가 모인다면 어디선가는 싹 트는 거겠죠.

 개인적으로 사랑의 싹이 제 가슴속에서 피어난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삶을 짓누르는 고난 속에서 지켜낸 사랑은 얼마나 고귀하고 성스러울까요. 마치 긴 어둠 끝에 마지막까지 예수 곁에서 고통을 나눈 성모 마리아의 그것과도 비견될 듯합니다.

 당신이 입사했을 당시 첫 대면 때부터 언제나 제 신경은 당신에게 있었습니다. 어떤 환상체를 관리하는지,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는지, 하루의 시작과 끝을 남 모르게 함께했습니다. 못 보던 에고 기프트를 가지고 있을 때면 제 일인양 기뻐했고 상위 등급의 에고를 장착하는 날에는 마음속은 이미 여름의 불꽃축제의 중심에 있는 듯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의 퇴사 소식을 들었을 때의 저의 행동을, 당신은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흑사병에 걸린 양 메말라 비틀어진 이성으로 저질러 버린 일을 마땅히 용서받을 거라 생각합니다. 퇴사의 의미를 모르는 당신은 그저 지금까지 친분을 쌓아온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없었고, 물론 저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단지 구석에서 가루로 갈린 이빨로 가득한 입안을 헹구고 있었을 뿐입니다.

 예측 가능한 위험으로 한 발 내디딜 용기가 당신에게는 부족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상부는 당신을 퇴사시키기로 결정했던 거겠죠. 서로를 지켜주고 환상체와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한 직원은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용기가 낮은 당신은 'T-09-85'에도 어울리지 않고 마지막으로 회사에 도움이 될 길이 별로 없습니다. 그나마 'O-01-15'정도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해낼 수 있었겠죠. 저는 당신을 그렇게 보낼 수 없었습니다.

 작업지시서를 바꾸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위에 써진 글자를 지우고 새로 'O-06-20'을 적어 넣어두는 걸로 모든 일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걸로 언제든지, 그리고 영원히 당신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부에서는 지정되지 않은 직원의 격리실 출입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그들에게는 똑같은 결말이었겠죠. 하지만 저에게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새로이 가르치며, 당신 안에 저를 채워나가는 일이 그리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당신을 사람으로 보지 않지만, 저는 여전히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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