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보컬 트레이닝은 혹독했다.

 

보컬 트레이너의 험한 소리는 조금 익숙해졌지만 목을 하도 써서 이제는 목이 아팠다.

 

오전 보컬 트레이닝을 끝낸 여름은 혼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막 숟가락을 들었을 때, 맞은편에 누군가가 말도 안 하고 앉았다.

 

에바였다.

 

“뉴스 봤어. 역시 그랬지?”

“뭐가요?”

 

여름이 뚱하게 묻자 에바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헤디. 내가 말했잖아.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인간이라고.”

 

여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국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러자 에바는 말했다.

 

“벌써 너한테 싫증이 난 거 아닐까? 그러니까 그렇게 대놓고 전 남친도 만나는 거지. 안 그러니?”

 

여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도 않고 묵묵히 식사를 했다.

 

에바는 여름의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괸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어떻게 너 같은 애를 두고 바람을 필 수가 있을까. 헤디도 참. 그래도 헤디 치고는 오래 갔-”

“언니.”

 

여름은 에바의 말을 끊었다. 에바는 여전히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

 

“그 이야기는 그만 해요. 흔히 있을 수 있는 오해니까.”

“오해?”

“네. 저도 비슷한 오해로 헤디 언니 감정 상하게 한 적 있어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 해요.”

“너무 순진하게 굴면 호구 되는 거 알아?”

 

에바는 여전히 입에서 미소를 거두지 않으며 그렇게 말했다.

 

여름은 얼른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식사를 하던 여름은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물었다.

 

“에바 언니. 이 회사 사람들 잘 알죠?”

“응. 어떤 사람들?”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요.”

“음. 말단 직원들은 다 모르겠지만. 넥타이 매고 매일 출근하는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다 알지. 왜?”

“얼마 전에 누가 저를 불러내서 다용도룸에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회사에서 높은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한데. 누군지를 잘 모르겠어요.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어떤 사람이었는데?”

 

여름은 얼마 전에 만난 그 여자의 인상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여성으로서 평소 자기관리를 철저히 한 것 같은 인상. 무표정한 얼굴. 차갑지만 권위적인 말투. 그림에 대한 관심. 이상한 질문들 등등.

 

그 이야기를 듣자 에바의 표정은 단박에 굳어졌다.

 

“그 여자 키는 나하고 비슷했지? 피부 창백하고 마네킹처럼 표정 변화 없고?”

“네. 맞아요. 옷도 세미 정장 같은 걸 입었는데 옷 입는 감각이 있던데요. 아예 따로 맞춘 옷 같던데.”

 

멍하니 난감한 표정을 짓던 에바는 다시 물었다.

 

“그 여자가 뭐 물어봤어?”

“에바 언니에 대한 감정에 대해서요.”

“그래서 어떻게 대답했는데?”

 

여름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에바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대답하기 싫어요. 언니가 먼저 그 여자가 누군지 말해주세요.”

 

초조하게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에바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김은영일 거야. 아이스 프린세스.”

“그게 누군데요?”

 

여름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었다.

 

“최고이사. 우리 회사 넘버 투. 현재 실세.”

 

그러자 여름의 두 눈은 커졌다.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여름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뭐, 뭐라고요?”

 

여름의 당황한 목소리가 워낙 컸기 때문에 식당 내의 시선이 여름에게로 집중되었다.

 

여름은 부끄러워져서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김은영 이사가 너를 왜 만났을까? 말단 연습생을 김은영이 직접 만날 일이 없을 건데.”

 

에바는 그렇게 말하면서 저쪽을 바라보았다.

 

여름은 에바에게 물었다.

 

“김은영이 어떤 사람일까요?”

“능력은 좋지. 머리도 좋고. 그런데 공허한 사람이야.”

“네?”

“나는 김은영이랑 대화하면 기분이 나빠져. 너무 피도 눈물도 없는 느낌이랄까. 가끔 그런 결정도 김은영이 하기도 했고. 지금 회장님이 일선에서 물러나면 김은영이 그 자리를 이어 받을 가능성이 높아. 회장님 신뢰도 한몸에 받고 있으니까.”

 

여름은 막막한 표정으로 저편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했더라? 무슨 실수를 하지 않았을까?

 

그러자 에바는 다시 여름을 힐끔 바라보고서는 물었다.

 

“그래서...... 너 김은영 질문에 뭐라고 답했어?”

“교과서적인 답을 했지요. 일반적인 우정이라고.”

“잘 했어.”

 

에바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난 김은영이 회장 되면 이 회사에서 최대한 빨리 나갈 거야.”

“네? 왜요?”

“나하고 맞는 타입은 절대 아니야. 차라리 그 사이 안 좋은 헤디랑 같이 일하는 게 더 편할걸.”

“그 정도에요?”

“김은영은 얼굴만 포커페이스가 아니야. 마음도 포커페이스라니까. 헤디는 솔직하기라도 하지. 김은영 같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타입이 더 불편해. 너도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야.”

 

에바는 잠시 뒤에 단언하듯 말했다.

 

“김은영 이사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

 

 

***

 

헤디는 여름과의 사이가 냉랭해진 것 같아 기분이 불편했다.

 

헤디는 그런 분위기에 예민했다. 자신의 노래나 무대가 항상 완벽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자신이 아끼는 이와도 항상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어떻게든 예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여름이 트레이닝을 받고 있는 화이트로드에 찾아갈까, 했지만 그만뒀다. 여름이 그런 행동을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헤디는 화이트로드에 조금 불편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전에 화이트로드에서 신인 여가수를 데뷔시키면서 ‘제 2의 헤디’, ‘헤디 만큼 인기를 끌 수 있는 아티스트’ 운운하며 자신을 이용한 언플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디는 일단 여름과 최대한 많은 대화를 하는 게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문제는 시간이 답이라지만, 연인 사이의 갈등은 결코 시간이 답이 아니었다. 문제를 그냥 방치하며 시간에 맡기는 건 오히려 서로의 상처를 아물지 못하게끔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연애 경험이 많았던 헤디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점심시간 즈음, 헤디는 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왜? 언니.”

 

여름은 평소처럼 전화를 받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미묘한 앙금이 목소리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헤디는 그걸 느꼈다.

 

“어? 아, 아니. 그냥. 점심 뭐 먹나 싶어서.”

“구내 식당에서 혼자 점심 먹고 있어. 맨날 여기서 먹거든. 식당 아주머니 솜씨가 아주 괜찮아. 값도 싸고.”

“보컬 트레이닝은 어때?”

“힘들어. 맨날 때려치우고 싶다고 생각해.”

“너 가수 되고 싶어 했잖아. 그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야. 너무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 하지 마.”

“그래. 나는 언니하고 다르니까.”

 

평소 같으면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헤디가 한 소리 했겠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언니. 언니는 데뷔하기 전에 회사에서 높으신 분이 만나러 온 적 있어?”

 

여름이 물었다.

 

헤디는 머리 위로 물음표가 둥둥 떴다. 이 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헤디는 침착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데뷔하기 직전에 그때 기획사 사장님이 보러 온 적은 있어. 그때 나는 유망주였지만 말이야. 아무래도 워낙 어린 나이이기도 했고 체크를 확실히 해야 된다고 데뷔 무대 마지막 리허설 때는 사장님이 왔었거든.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어봐?”

“음. 그렇구나. 이 회사도 정치질이 중요한가 봐. 가수 연습생, 아이돌 연습생 사이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느껴져.”

 

여름은 헤디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헤디는 말했다.

 

“큰 회사일수록 정치질 싸움이 심해. 다 겪어 봤지요. 나도. 특히 눈에 띄는 애들은 공격 받거나 미움 받기도 쉬워.”

“이상한 소문도 나고?”

“그렇지. 너도 이상한 소문났어?”

“에바 언니 때문에. 그 언니가 재계약 조건으로 나 걸고 넘어진 거 모르는 사람 거의 없어.”

“음. 그렇구나.”

“차라리 내가 잘나서 이상한 소문이 났으면 이해라도 해. 잘난 건 하나도 없는데 그런 이유로 이상한 소문이 도니까 짜증나.”

“여름아. 조금만 힘을 내. 원래 가수하려고 하면 지금이 한창 힘든 시기야.”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여름은 대답했다.

 

“응. 고마워. 가을 언니.”

 

그제서야 여름의 기분이 조금 풀어진 느낌이었다. 헤디는 보이지 않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통화를 끝낸 헤디는 문득 여름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화이트로드라는 회사가 궁금했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헤디가 아는 수준은 업계 소문 수준이었다.

 

언젠가 그 회사에 한번 가볼 수 있을까?

 

***

 

여름은 보컬 트레이닝을 마치고 본사 건물에서 나섰다.

 

여전히 그날도 파김치가 됐다. 하루종일 험한 소리를 듣다보니 혼이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역시 이런 회사는 나하고 안 맞아.

 

뭐가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거야. 이러다가 우울증 걸려서 먼저 죽을 거 같은데.

 

여름은 그리 생각하며 회사 주차장을 지나 정문 방향으로 향했다.

 

그때 여름의 옆에서 천천히 굴러가던 까만색 포르쉐 스포츠카가 멈췄다.

 

“여름 씨. 집에 가는 거예요?”

 

스포츠카 창문이 내려가면서 누군가가 물었다. 힐끗 옆을 바라본 여름은 깜짝 놀라서 멈춰 섰다.

 

“이, 이, 이사님. 네, 네. 지, 집에 가고 있어요.”

 

여름은 바짝 얼어서 은영에게 대답했다. 은영은 무표정하게 여름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옆에 타요. 제가 태워줄게요.”

 

여름은 주위를 살피다가 거절할 용기도 나지 않아 얼른 은영의 옆에 탔다.

 

“어디에 사세요? 여름 씨?

 

여름이 타자마자 은영이 얼음결 같이 차갑게 물었다. 여름은 잔뜩 긴장해서 대답했다.

 

헤디의 아파트 주소가 여름의 입으로 나왔다.

 

“잘 됐네. 거기 우리 동넨데. 여름 씨 내려주고 십 분 정도만 운전해서 가면 돼요.”

 

은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차에 속도를 붙였다.

 

“그런데 거기 돈 좀 있는 사람들만 사는 동넨데요. 여름 씨 집안 재력이 괜찮나 봐요?”

“아, 아, 아니에요. 이사님, 아, 아니. 최고이사님. 잠, 잠깐 아는 사람 집에 신세 지고 있는 거라......”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여름은 잔뜩 긴장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최고이사님이라고 안 불러도 돼요. 그냥 이사님이면 괜찮아요. 여름 씨한테 물어볼 게 이것저것 많거든요.”

 

은영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선글라스를 꼈다.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여름은 그제야 에바 언니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꼭 로봇과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표정이나 말투도 지극히 사무적이어서 어떤 지점에서 솔직한 면을 보여야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여름 씨.”

“네.”

 

은영은 정면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헤디하고는 지금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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