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썰은 원작 소설의 설정을 기반으로 합니다.




망무 신수물로 신수 남망기의 감정을 담당하는 보좌 위무선 같은 이야기가 보고싶다. 위무선이 곁에 있을 땐 그나마 어느 정도 감정을 표현하고 인정에 휘둘리기도 하던 남망기가 어느 날 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칠 상황이 되자 자신 앞에서 자결하는 위무선을 보고 모든 감정을 잃어버리는.. 그런... 


이 무감함이 단순히 감정을 담당하던 위무선이 죽었기에 인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허면 모든 감정이 소거되었을 나는 어찌 네 죽음 앞에 비참한 절망을 느끼는지. 


그렇게 남망기가 한없이 정과 백으로 침잠할 무렵, 13년만에 환생한 위무선이 머리나 긁적이며 후회하고 있는, 양쪽의 무게가 달라도 너무 다른 그런 이야기 좋아해.. 


위 : 아, 역시 눈앞에서 자결은 좀 심했나. 효과적이긴 한데 그래도 좀 심했지? 다음에 만나면 사과해야겠네! 


대충 막지 않으면 분노로 천재지변이 일어 사방이 초토화 될 지경의 일이었다고 하자. 이유는 물론 위무선이었으나 남망기의 분노에 급브레이크를 걸고 사라진 것도 위무선이니 남망기가 홀로 남은 십삼 년간 차마 원망할 수 없는 이를 대신해 누구를 원망했을지는 빤하지. 


위무선은 '다시 만나면 사과해야지' 결심은 했는데 구중궁궐보다 더한 심처에 기거하시는 신수님이랑 길바닥 무지렁이 인생으로 태어난 자신이 재회할 길은 한참 요원하더라. 이쪽도 인외였던 시절이 길어 훌륭하게 제정신이 아닌 탓에 한 번 더 죽으면 좀 더 좋게 환생하려나? 따위나 생각하고 있음. 


에이, 그래도 천지신명에게 부여받은 이 삶에도 의미는 있겠지. 남잠은 아주아주 오래 사니까 적당히 살다 다음 생에서 만나도 괜찮을 거야! 

...하고 위무선이 쌈박하게 납득한 사이(재차 말하지만 이쪽도 인간의 범주에선 벗어난 존재였다) 남망기 쪽 상황은 악화일로였겠지. 


어느 날, 평소처럼 무정으로 자고 일어난 남망기는 제 가슴속이 기이하게 날뛰는 것을 깨닫는데 이유를 모르니 해법도 알 수 없을 테다. 영원불멸 주제에 죽을 때가 다 되었나, 실없는 생각하다 그게 옛날 옛적, 위무선 생전의 고동과 같다는 걸 알아채는 건 한참이나 후가 되겠지. 



돌아왔구나. 너, 다시, 돌아왔구나. 

내 곁이 아닌 곳으로. 



그렇게 위무선의 환생과 동시에 남망기에겐 다시 잃었던 감정이 싹 트기 시작하는데, 시장에서 아양 떨어 만두 하나 얻어먹고 해사하게 웃는 위무선과는 달리 이쪽은 눈앞에서 자각 못했던 사랑의 자결을 목도한 비참한 작별이 마지막이어서. 


되찾는 감정이라고 해봤자 분노, 절망, 좌절, 우울, 뭐 그런... 차라리 없는 게 더 도움이 되는... 신수님 기거하시는 궁에 언젠가부터 먹구름이 잔뜩 꼈는데 시시때때로 낙뢰가 내리치고 폭우가 쏟아지니 궁궐 사람들도 참으로 고단하다더라- 하는 소문이 술렁이며 떠돌아도 위무선은 '엥? 큰일이네? 남잠이 왜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지? 그래도 지난번처럼 폭주하진 않겠지?' 하고 그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생에 열중임. 일단 먹고 살고 자라야 다시 만나러 가던가 할 거 아니겠어. 이쪽도 남망기와는 다른 의미로 치열한 사투 중이었다... 이 생에서도 배고파서 객사해버리면 뭣도 안 되니. 


그렇게 어영부영 한가로운 마음으로 살다, 남망기의 절망과 우울이 지나쳐 보름 넘도록 폭우가 내리고 천지가 재앙에 잠기기 시작하면 그제야 위무선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지는데, 다름 아니라 세상이 각박해지니 인심도 얼어붙어 한 끼 얻어먹고 살기도 힘겨워졌음이라...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 일단 살고 나서 남망기를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미처 그러기도 전에 꼼짝 없이 죽게 생긴거지. 사흘을 내리 굶고 온몸에 힘이 없어 허름한 방구석에 널브러져 있다 아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나마 뛰고 걸을 힘이 있을 때 궁으로 찾아갈 걸 그랬네, 후회하는 위무선... 


그래도 죽기 전엔 너를 만나야겠으니 그 몸으로도 천신만고 끝에 신수궁 앞에 도달했는데, 시립한 수문장이 길바닥 무지렁이에게 문을 열어줄 턱이 있겠어. 내가 그 옛날에 신수님 옆에서 살던 그 사람이오 하소연해도 씨알도 안 먹히지. 가뜩이나 배고프고 오래 앓아 육신이 부실한데 정문 앞에서 옥신각신하는 동안 밀쳐지고 구르고 맞고 숫제 넝마짝이 따로없었음. 


결국 정문으로 들어가길 포기한 위무선은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담 주변을 돌다 까마득한 옛적에 제가 결계에 개구멍을 내어두었던 자릴 찾아 슬금슬금 올라가보는데, 간신히 끝자락에 팔은 걸쳤는데 도저히 비루먹은 몸을 그 위까지 끌어올리질 못할 거라. 비에 젖은 손가락은 불어터지고 허한 배는 먹은 것도 없이 울렁이는데 악착같이 매달려 있다 남망기를 부를 수단이라곤 무엇도 없어서 결국 소리 높여 남잠, 남잠!! 하고 제게만 허락된 그 이름을 부르는 게 전부였을 테다. 


그 나름의 절박을 담은 공포에, 말라빠진 몸에서 나오는 것치곤 목소리는 제법 컸고 기껏 남몰래 담을 기어오른 보람도 없이 당장에 신수를 지키는 충직한 권속들이 뛰어왔어. 이제 위무선은 명백한 침입자이니 무기를 손에 드는 걸 망설이지 않지. 


화살 한 대가 어깨에 푹 박혀 매달린 담장에서 떨어진 위무선은 허둥지둥 진창이 된 흙바닥을 뛰어 도망쳤어. 아이고, 오늘은 날이 아닌가보다. 마음이 성급해 일을 그르쳤구나. 하지만, 굶어 죽을 날짜를 받아놓고 사는 마당에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너를 불러볼 수 있었을까. 



실은, 성급함이 아니라 어리석은 두려움이 일을 망친 게 틀림없다. 



네 앞에서 그런 식으로 죽어버렸으니 네가 화를 내면 어쩌나. 나로 인해 모든 감정을 알고 또 잃어버린 네가 더이상 나를 보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그 차갑게 굳은 안광을 고스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 차일피일 일을 미루다 적기를 놓쳤으니 누굴 원망하랴. 사랑받고자 했던 내 알량한 욕심이 죄로다. 


상념은 발목을 붙들고 회한은 뒷덜미를 낚아채서, 발이 휘청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허공을 갈라 날아온 창 한자루가 위무선의 등을 꿰뚫었어. 나동그라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는데 저 멀리 드높은 창공에서 내리친 시퍼런 벼락이 창을 던진 이의 몸을 새카맣게 태워버리는 것도 그야말로 일순이더라. 


공기가 무겁게 울었어. 이미 사위는 눈도 뜨기 힘겨울 정도의 폭우인데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았는지. 폐부를 가득 채우는 밀도 높은 절망이 말도 안 되게 익숙해서 피거품을 뱉으며 떨던 위무선은 간신히 바닥에 처박힌 고개를 들었어. 보이는 것은, 빗물따위가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순백의 옷자락. 


어디선가 꽈릉, 하고 하늘의 귀퉁이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어. 차갑게 식은 손이 다가와 흙탕물에 더럽혀진 몸을 안아들고 몸을 관통한 창을 뽑아 던지는 동안 위무선은 가물가물한 눈으로도 암담한 격분과 참담한 설움으로 얼룩진 희고 고운 낯을 보곤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뻗어 매달렸어. 


저만을 피해간 분노라, 오로지 저만이 느낄 수 있었지. 



다 죽을 것이다. 

나를 막아섰던 이들도, 쫓았던 이들도, 말을 들어주지 않고 밀쳐냈던 이들도, 하다못해 밥 한 술을 청하는 부탁을 거절했던 이들마저도. 


한때 인간이 아니되 누구보다 인간적이었던 존재는 그 전부를 알고서 겁에 질렸어.



- ..남잠... 



벌벌 떨리는 목소리가, 덧없이 지나간 과거의 한 끝을 붙들었어. 말하고 싶었는데. 말했어야만 했는데. 상황이 기다려주지 않아 입술 한 번 떼어보지 못하고 무작정 검을 뽑아 제 심장을 찔러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 때에도 하지 못했던 말을, 지금에서야. 



- 죽이지 마... 



거기에서 멈췄더라면 이는 단지 충직을 이유로 죽어갈 이들에 대한 연민과 자비였으나, 여린 인간의 몸으론 근원에 대한 공포를 감당키 어려워 끝내 뒷말까지 입 밖으로 새었다. 나..., 



- 죽기 싫어.. 


나, 다시 죽기 싫어. 

그러니까 죽이지 마. 그러지 마.. 



사랑을 아는 네가 사랑 때문에 폭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내가 죽어야만 했던 그 날에도 나는, 실은, 


죽기 싫었다고. 

그러니 이번에는 부디 그 분노를 삼켜달라고.  




죽인 것은 내 손이었으나 검을 뽑도록 만든 것은 신수의 몸으로 인간의 감정을 이겨내지 못한 너였으니 나는 결국 네 탓에 죽었다. 


이 말이 네게도 내게도 무한한 상처가 될 것을 알아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 상처를 지워내지 못하고 너를 만나게 된다면 생을 가진 존재로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게 만든 네게 원망의 화살이 향할까 두려워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 내가 상처 입는 것만큼 네가 아파할 게 무서워서. 싫어서. 


결국에는 다 사랑 때문이지. 

결국에는 다 알량한 감정놀음 때문이 아니냐. 


네가 감정을 모르는 신이었더라면 이런 비극은 탄생부터 없었을 것을. 


그러나 나는 기어이 너를 사랑했고, 너는 기필코 나를 사랑할 작정이기에 나는 또다시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 


그러니 부디 잊으라. 


천지를 잠기게 만든 너의 슬픔도, 진창 속에 스민 나의 피도, 개인의 안위가 중요해 타인을 보살피지 않았던 평범한 만민들도. 전부. 


사랑에 눈이 멀어 그 모두를 심판한다면 나는 어김없이 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으니. 


이번에야말로 간절히 네게 생을 구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목숨을. 




가슴 속엔 수천의 언어가 갇헜는데 희게 질려 파들파들 떠는 몸으로 뱉을 수 있었던 건 죽기 싫다는 애원뿐이어서 과연 그 마음이 제대로 전해졌을지는 모를 노릇이었으나, 위무선은 실혈로 인해 기절하기 직전 얼굴을 때리던 빗줄기가 어렴풋이 멈춘 것을 느꼈다. 


비가 멎었으니, 미약하게 경련하는 두 손에 붙들려 안온하고 너른 품 안으로 끌어안기는 와중 뜨거운 물방울 몇 개가 뺨 위로 떨어졌던 것은 어쩌면 착각이었을지도 몰랐다. 





- 2020년 4월 4일에 풀었던 썰

잔불의 기사 / 마도조사 (프로필 사진 - 배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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