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 길어요 워닝 2만 3천자예요ㅠㅠ 아, 그리고 비지엠은 가능하면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듣는 것만으로도 좋은 꿈꾸는 것 같았어서요 저는ㅎㅎ

(BGM : LaLa Land OST - Chinatown)


***


토요일 새벽. 한주의 피곤을 몰아서 풀어내느라 다들 꿈나라에서 허덕이고 있을 시간. 군청색 깊은 잠을 자던 우리 집 현관문을 조심스레 깨우는 손길이 있다. 설레는 마음에 바짝 곤두서 있던 나는 똑똑, 그 작은 소리에도 바로 몸을 일으킨다. 불어 닥칠 찬바람도 전혀 무섭지 않아서 나는 벌컥 문을 열었다. 왔어요? 그런 당연하고 익숙한 인사를 건네려다가 나도 모르게 꼴깍 집어삼키고 말았다. 왜냐하면, 일찍이 일어나는 게 힘들지 않았냐며 내 앞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넘기는 오늘의 강다니엘이…


“…형."

"응?"

"오늘 왜 이렇게 멋있어요?”


너무, 멋있었기 때문이다.


“맞나. 내 오늘 멋있나.”


한 번 더 듣고 싶은 말이었는지 다시 묻는 말에도 흔쾌히 대답해줄 의향이 절로 샘솟았다. 그 정도였다. 그 정도로 멋졌다.


“네, 완전요. 엄청 차려입고.”


처음 보는 모습. 검은 색상의 가벼운 슈트를 걸친 강다니엘은 마치 다른 사람 같다. 내 사람 맞나? 이리저리 살피는 눈짓에 그는 쑥스러워하며 평소처럼 뒷머리를 헤집으려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급히 손을 내렸다. 인제 보니 머리까지 손질했다. 평소와 다르게 훤히 드러난 이마.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나는 우선 차디찬 새벽바람을 맞고 왔을 강다니엘을 현관 안으로 잡아끌었다. 닫히는 문과 동시에 잘생긴 이마 위에 땅콩을 때렸다. 어쭈, 하더니 내 이마를 들추는 강다니엘. 그래 봤자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어차피 나를 아프게 할 리가 없었다. 내게 슬슬 다가오는 그. 쪽, 입술로 내 이마를 때린다. 봐봐, 이러잖아.

얼굴 가까이서 떠나지 않고 머무는 강다니엘. 예쁨 받아 마땅한 사람이 코앞이다. 그렇다면 예뻐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 역시 무자비하게 그의 입술을 쪽, 내리찍었다. 그가 휘둘렀던 무기와 똑같은 것으로.


“근데 진짜 뭔 일이에요?”

"그게, 저번에 너무 후줄근하게 입고 갔더니… 내 보자마자 뭐라 하는 줄 아나."

"뭐라 했는데요?"

"혼자 사는 거 많이 힘드냐고."

"……."

"내 지금 혼자 서울 올라온 지가 몇 년인데, 거 참…."


차림새의 문제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얼 알겠냐만. 아마 어머니께서는 혼자 사는 강다니엘이 항상 걱정이 되셨을 것 같다. 게다가 항상 무엇이든 투정 한 번 없이 열심히 하는 그니까, 맘껏 무장해제 되는 가족 앞에서는 조금 지쳐보였을지도. 사실 가족들이 어떻게 느꼈을지는 모른다. 그냥, 내가 느끼는 강다니엘이 그랬다. 묵묵히 견디는 게 습관인 사람. 상경한 후의 긴 시간들이 그를 이렇게 단단하게 한 걸까, 아니면 단단한 사람이라서 지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걸까. 그러나 아무리 두꺼운 철갑옷을 두른 사람이어도 그 안에는 살성이 여린 부분이 존재한다. 나는 그런 강다니엘에게 매달리듯, 그를 껴안고는 묻는다.


“편한 옷은 챙겼어요?”

“우리 지금, 우리 집 가는 건데.”

“네?”

“거기도 다 있다, 내 옷.”


아, 맞다. 이제야 내가, 우리가 어딜 가는 건지 실감한다. 나 정말, 강다니엘이 나고 자라온 곳으로 가는 거구나. 나를 지지하고 있는 가슴팍 안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거기 가도 되는 걸까 하는 물음은 이미 저물었지만 가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그 자리를 채우고 올라온다. 찬바람이 묻은 와이셔츠 위에 얼굴을 비볐다. 내 뒤통수로 내려앉는 온유한 손길. 창밖에서부터 스며온 푸른 새벽의 어스름은 어제의 것과 다른 것이 되고.다녀왔을 때의 나는 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그와 내 사이는 전과 어떻게 달라질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해가 밝아오고 나서야 아침을 알게 되듯이 우리 또한 그 곳에 도착해야 알게 될 터였다.



버스터미널. 상쾌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출발 시간에 임박해서 버스 위에 올랐다. 입 안에는 사탕을 하나씩 문 채였다. 앉자마자 내게 훅 다가오더니 안전벨트를 채워주는 강다니엘. 저도 할 수 있는데… 하니 원래 연애는 자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서로가 해주는 거란다. 그 말에 나도 그의 안전벨트를 매주자 그가 내 이마에 소리 없이 뽀뽀했다.

버스가 몸을 떨며 시동을 걸더니 이내 쭉 뻗은 아스팔트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4시간이나 가야 했기에 일찍 일어난 피곤함을 달래기로 했다.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음악을 듣는데, 강다니엘이 미소를 지은 채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보는 거지?


“뭐 해요?”

“아, 꽃말 좀 찾아보느라.”

“그건 왜요?”

“어머니한테 꽃 드리려고.”


나는 그 말에 눈이 조금 커졌다. 어머니께 꽃 선물을 하는 사람이라니. 참, 드물게도 낭만적인 사람이라는 생각. 그리고 이런 사람이 내 애인이라는 건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이다. 반면에 나는 어떤지. 일주일에 몇 번 할까 말까한 연락. 좀처럼 찾아가지 않는 아들이다. 노란 국화를 닮은 우리 엄마. 어디선가 또 시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을 아버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려는 생각을 급히 자른다. 그 길의 끝엔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 있을 거란 걸 이미 수차례 걸어본 나는 잘 알고 있어서.

강다니엘은 핸드폰 화면을 보던 시선을 틀어 말이 없는 나를 바라본다. 낮게 가라앉는 나를 눈치 챌까, 급히 그에게 물었다.


“왜요? 오늘 무슨 날이에요?”


가만히 나를 보는 눈빛. 읽어내려는 기색은 없는데, 괜히 긴장된다. 내려놓았던 손을 들어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걸 바라보는 나는 다른 의미로 숨이 막힌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큰 손이 내 옆머리를 천천히 귀 뒤로 넘긴다. 그러면서 그가 말했다.


“그런 건 아니고, 사죄의 의미.”

“…뭐 잘못했어요, 어머니한테?”

“방학 때 오라오라 했는데 내가 안 갔거든.”

“와, 나쁜 아들…. 어머니 섭섭했겠어요.”

“…그러게, 내도 이래 안 간 적 처음인데.”


진짜 나쁜 아들은 난데, 괜히 장난스럽게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오가는 말장난이 시작될 줄 알았는데 강다니엘은 여전히 진지하다. 내 귓바퀴를 툭툭 튕기는 손가락. 그리고 열리는 입술.


“이러면 안 되는데 어디 갈 생각이 안 들더라, 너 보고 있으니까.”

“…….”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게 이런 말인갑다.”


옆얼굴에 머물던 강다니엘의 손이 드러난 귓바퀴를 살살 어루만졌다. 그의 눈이 더 가늘어지면서 눈빛이 아까보다 짙어졌다. 아……, 표정, 몸짓, 말. 그 모든 게 모아지면 오직 하나의 의미였다. 내가 좋아서, 잠시라도 멀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 저도 그래요. 나 역시도 마찬가지라, 어깨가 닿도록 강다니엘에게 더 바투 다가가 앉았다. 옆구리를 짓누르는 의자 손잡이에도 아랑곳 않고.


“형 원래 꽃말 알아보고 선물해요?”

“어, 뜻까지 좋으면 받는 사람 기분 더 좋잖아. 주는 나부터도 그렇고.”


그 말에 나는 내 창가에서 한참을 머물다 이제 책갈피가 되어버린 튤립을 생각했다. 나한테 선물할 때에도 그랬을까? 물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강다니엘을 바라보는데,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마처럼 하품을 한다.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난 것도 그렇고, 출발시간이나 일정 같은 걸 살피느라 신경 쓸 곳이 많았을 텐데, 피곤할 법도 하지. 게다가 혹처럼 딸린 나까지 있는데. 물론, 강다니엘은 달랑거리는 혹까지 예쁘다고 쓰다듬어주는 다정한 사람이지만.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졸려요?”

“…조금?”

“그럼 좀 자요.”

“내 자면 니 안 심심하겠나.”


이 와중에도 내 걱정이다.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다. 인간은 광활한 도서관에 홀로 툭 던져진 존재 같다고. 그 안을 거닐다가 고단하고 심심해지면 간혹 눈에 띄는 책들을 읽어나가는 것이다. 갈증에 물이 스미듯 온몸이 열려 반기는 문체가 있는가 하면, 도저히 한 글자도 더 이어나가기 어려운 책들도 있다. 그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상성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강다니엘은 신기한 서적이다. 켜켜이 쌓인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들춰봐도 그 안은 온통 사랑에 관한 문장들이다. 이제 내 생활엔 항상 그의 글월들이 함께이다. 이 행복이 온전히 운일까, 아니면 이렇게 되기까지 내 공헌이 조금이라도 담겨있을까.


“혼자 할 거 있나.”


…역시, 이 과분한 사람이 처음부터 고스란히 내 몫이었을 리 없다. 내가 나를 작게 여김이 아니다. 그냥 이 사람이 너무 큰 옹달샘이다. 이 모든 건 어쩌다 주어진 행운이라고. 그러니 이 하루하루를 더욱 감사히 여겨야 한다고.


“그게 뭐가 중요해요. 형 졸린 거 참는데 제가 재밌겠어요?”

“그래도….”

“자는 얼굴 구경할게요. 그것만 해도 재밌으니까.”

“재밌다는 게 웃겨서 그렇다는 거가, 아니면 보기만 해도 좋다는 거가.”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대답 안 하지, 응? 하며 후덥지근한 차내 공기에 달아오른 내 볼을 꼬집었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없었다. 문을 열게 하려면 문고리를 건드려야지, 어딜 건드리는 거야. 입술을 쭉 내밀자 그제야 내 뜻을 파악한 강다니엘이 남몰래 내 입술에 작게 쪽,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둘 다예요.”하고 대답하자 그가 푸르게 몰려오는 파도처럼 웃었다.


“그럼 내 웃긴 얼굴로 잘게. 니 재밌으라고.”

“제 핑계 대려고 그러죠? 못생기게 잘 것 같으니까.”

“우리 지훈이, 눈치가 빨라졌네….”


또, 또. 졸려서 말이 느려지고 꼬리가 흐물흐물 늘어나는데도 끝까지 장난을 친다. 이런 식이면 눈도 못 붙이고 부산에 도착할 것만 같다. 나는 손바닥을 들어 억지로 강다니엘의 눈을 감겼다. 손바닥 아래에서 속눈썹이 간질간질, 눈을 깜빡이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에 더 힘주어 눈두덩이를 덮었다. 알았어, 잘게, 잘게. 끝끝내 두 눈이 얌전히 감겼다. 조심스럽게 손을 거두자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게 보인다. 장난치고 싶겠지. 그러나 그를 재우겠다고 결심한 나는 단지, 강다니엘을 바라보기만 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결이 그에게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강다니엘의 눈앞에 손바닥을 휘휘 저어봤다.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걸 보니 금세 잠이 들었나보다. 코는 안 고네, 밖이고 불편해서 그런가. 손잡이 옆에 있는 버튼을 천천히 눌렀다. 직각으로 세워진 강다니엘의 등받이가 서서히 뒤로 젖혀졌다. 적당히 내려갔다 싶을 때 버튼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다시금 그 얼굴을 바라본다. 무방비하게 풀어진 미간. 순하게 감긴 눈. 아까는 웃긴 거, 보고 싶은 거, 둘 다라고 했지만, 사실 자는 그의 모습 역시 잘생겼기만 하다. 내 눈에 강다니엘이 못생겨 보이는 날이 오기나 할까. 성에 찰 때까지 들여다보다가 아쉽게 시선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내 의식의 발바닥을 간질간질 괴롭히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핸드폰 검색창을 켰다.


튤..립...


[튤립의 꽃말]


돋보기 버튼을 누르자, 곧장 화면 위로 떠오르는 검색 결과.


[사랑의 고백, 영원한 애정.]


“…….”


나는 자고 있는 강다니엘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튤립 이전에도 내게 몰래 마음을 전해왔을까. 나 모르게 고백을 했으니, 나도 형이 모르게 고백해도 되겠지.


“저도 형 좋아했어요.”

“…….”

“형한테 고백하기 훨씬 전부터.”


그리고 이 마음, 이 애정, 영원할 것만 같아요. 정말일지는 모르지만 본래 영원이란 게 그런 거 아닐까요. 지금 이 순간의 내가, 끝이 없을 거라고 믿는 마음.


창밖의 커다란 나무들은 우리를 빠르게 지나가고, 너른 풍경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변치 않겠다고 다짐하는 작은 사람이 있었다.



***


“지훈아.”


들리는 목소리가 희미하다…. 몸에는 힘이 없어 온 근육이 물렁거리고.


“훈아.”

“으응…….”

“도착했다. 일어나야제.”

“…벌써요……?”


언제 잠들어버린 걸까.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가고 이제 한두 명만이 버스 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의식이 잠겨있었다는 것에 한 번, 내 머리가 기대어있던 곳이 강다니엘의 어깨라는 것에 한 번 놀라고 만다. 내가 고개를 가누기 시작하자 바깥쪽에 앉아있던 그가 내 짐과 그의 짐을 한 손에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어 버스 복도로 나왔다.


“손.”


내미는 손을 멍하니 잡았다. 비좁은 복도를 앞서 걷는 강다니엘. 앞뒤로 걷자니 그의 반려견이 된 것만 같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아침 어스름이 무르익어서 오후의 햇살이 되어있었다. 기지개를 켜는 강다니엘을 따라 나도 하늘 저 높이 팔을 주욱 늘렸다. 네 시간이라는 긴 시간동안 접혀있던 근육들이 쾌청한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서도 감긴 눈은 아직도 무겁기만 하다. 천하장사도 못 이긴다는 게 눈꺼풀이라던데. 그런 나를 보며 강다니엘이 말했다.


“마이 졸리나. 카페 같은 데 들렀다 갈까?”

“아뇨, 푹 자서 노곤노곤한 거예요. 괜찮아요.”

“진짜?”

“네, 진짜.”


 의사가 진단하듯 살피는 눈빛이다. 청진기 대신 얼굴위로 이리저리 와 닿는 손끝.


“맞네.”


한 번 꾹 힘을 주어 내 볼을 누르더니, 엄지로 내 눈가를 쓸면서 살살 어르는 강다니엘.


“니 뜨겁다, 지금.”

“…그래요?”


응. 답하며 또 노을같이 웃어버리고. 다른 의미로 뜨겁게 만들어버리고서는 그것도 몰라주는 이 무책임한 사람.



버스 터미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강다니엘은 몇 번과 몇 번을 타면 금방 시내에 도착할 수 있다며 내게 설명해주었다. 나와는 초면인 이곳, 그런 나와는 달리 이곳이 익숙한 강다니엘. 새삼, 우리가 다른 시간을 살아 왔구나 깨닫게 되었다. 버스는 꽤 많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우리 앞에 커다란 몸집으로 다가와 섰다.

듬성듬성 돌부리를 머금고 있는 비포장도로 때문에 버스 몸체가 자꾸만 들썩거렸다. 그럴 때마다 강다니엘은 오, 하는 소리와 함께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걸 보는 내 입꼬리도 그게 꼭 무슨 법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따라 올라가고. 포장되지 않은 날것의 마음. 반짝거리는 리본끈 없이도 즐거운 우리.


.

.

.


따릉- 꽃집의 종이 울렸다. 한발 들어서자마자 사장님께서 다가오시며 우리에게 물으셨다.


“안녕하세요! 뭐 찾으세요?”

“혹시 여기 카네이션 있나요?”

“아… 지금 다 떨어졌는데.”


아… 그래요? 하며 눈썹을 눕히는 모습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금세 다시 표정을 돌리더니 그가 또 사장님께 물었다.


“혹시 선물하기 좋은 꽃 있나요? 꽃말은 좀 담백했으면 좋겠어요.”

“누구한테 선물하실 건데요?”

“저희 어머니요.”

“아, 그럼 요즘 수국 많이들 사가세요.”

“그건 꽃말이 뭐죠?”

“히히, 소녀의 꿈이요!”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말인지, 꽃집 주인 분은 치열이 다 드러나도록 크게 미소 지었다. 소녀의 꿈. 왠지 멋진 말이다. 소녀가 품고 있는 건 무엇일까. 그 무엇도 될 수 있으니, 내게는 웅장하고 환히 빛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말.


“어떤 것 같노.”

“뜻이 예쁜 것 같아요.”

“맞제.”


강다니엘은 망설임 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그럼 이걸로 할게요.


“우리 엄마도 소녀일 때가 있었으니까.”


따릉- 유리문을 밀고 나오며 강다니엘은 뒤에서 내 어깨를 감쌌다. 그 상태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조금 녹이 슨 정류장. 그는 한손으로 턱을 받치고 고민하듯 노선표를 한참 보더니, 내게 말했다.


“잠깐 바다 좀 보다 갈래?”


.

.

.


발밑에서 모래가 바르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기운 있게 용솟음치는 파도와, 소금기를 머금고 헤엄치듯 온 해변을 누비는 바닷바람. 푸른 물살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니 성난 개처럼 으르렁대는 파도소리.


“꼭 눈 맞는 강아지 같네.”


바다를 조금 앞둔 나를 보며 강다니엘은 그런 감상을 읊었다. 나는 흔들리는 상상의 꼬리가 보일 정도로 신이 나 있나 보다.


진짜 바다다. 올해로 두 번째다. 잊을 수 없는 그 여름의 밤바다, 그리고 지금. 잡고 있는 손으로 나는 그 두 번 모두 강다니엘과 함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손바닥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한 차례 손을 꿈틀거리자, 그가 모양을 바꿔 깍지를 껴왔다. 마디마디마다 닿아오는 굵고 단단한 감촉. 손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사람은 처음이다. 그러니 이렇게 초면인 바다를 앞에 두고도 평온하기만 할 수 있는 거겠지.

움직이는 것들을 마음껏 누리고 나니 이제야 고요히 숨 쉬던 것들이 눈에 띈다. 모래 사이에 콕콕 박힌 수많은 조개껍질들. 동그란 것이 난생 처음 보는 모양이기에 나는 강다니엘에게 물었다.


“형, 저건 뭐예요?”

“저건 성게.”

“성게 그 삐죽삐죽 그거 아니에요? 근데 저렇게 동그래요?”

“어, 근데 저건 뼈라서.”


강다니엘이 몸을 숙여 내게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성게라고 하는 걸 주웠다. 나를 이끌고 파도 앞까지 가더니 재빨리 물에 모레를 헹구고 뒤로 물러났다. 곧장 따라붙는 파도가 느림보들의 발끝에 닿을 듯 말듯 하더니, 다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술래잡기에서 이긴 우리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 강다니엘이 내게 손에 쥐었던 것을 건넸다. 연보랏빛으로 빛나는 성게. 한 손에 든 채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바람에 물기가 다 가시고 난 뒤 나는 그걸 주머니에 넣었다.


그나저나 성게를 안다니. 역시 바다 가까이 자라서 아는 게 많은 걸까?


그 뒤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이건 뭐예요? 저건 뭐예요? 하는 질문에 강다니엘은 뜸을 들이면서도 대답해줬다. 우와- 대단하다는 듯 바라보자 갑자기 머리를 긁적이더니 입을 벙긋거린다. 그리고 망설임 끝에 하는 말.


“훈아, 사실 그거 내도 모른다.”

“네?”

“성게까지는 아는 거였는데, 그 다음부턴 솔직히 잘 모르는데 대답한 기다. 니 신기해하는 게 귀여워가.”


난데없는 고해성사. 쭈뼛대며 하는 그 양심고백이 더 귀엽다는 걸, 대체 왜 스스로는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조개 이름이 맞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가리비든 키조개든 마음대로 갖다 붙이라지.


“형이 그렇다고 하면 다 그런 거죠.”


파도소리가 낭랑하다. 한참을 걸어도 모자라다. 발끝이 밀려오는 감정에 다 젖도록 우리는 그렇게 계속, 계속 끝도 없는 바닷가를 걸었다.



***


버스는 우리 둘을 태우고 30분이 넘는 길을 붕붕 달렸다. 어느 한적한 정류장에 내려 언덕길을 꽤 오래 걸어 올라가다가 어느 한 집에서 강다니엘이 멈췄다.


“여기가 우리 집.”


‘우리 집.’ 그 단어에 나는 후하후하, 심호흡을 했다. 그런 내 머리를 강다니엘이 조용히 쓰다듬었다. 그렇게 안 떨어도 된다. 알아요, 아는 데 이렇게 떨리는 걸.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준비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진 않다. 큰 결심으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강다니엘이 벨을 눌렀다. 웽- 하고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것도 잠시, 벌컥 열리는 문에 더더욱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문틈 사이로 빠르게 나오는 한 사람.


“왔나-”


보자마자 격한 포옹을 하더니, 등 뒤에 손을 올리는 강다니엘의 어머니. 아, 따뜻한 광경이다 생각하는데 갑자기 퍽퍽 울리는 소리.


“방학 땐, 오라카니까, 오지도, 않고-”

“앗, 아. 어무이- 내 뒤에 동생 델꼬 왔는데-”

“니가 여서 내 아들이제, 누구 엉아가, 엉?”


인정사정없이 강다니엘은 등짝을 두들겨 맞고 있었다. 나는 놀라 준비했던 모든 인사말을 꿀꺽 삼켜버리고. 하지만 그게 익숙한지 강다니엘은 맞으면서도 하하-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품에서 쏙 빠져나와 들고 있던 꽃다발을 어머님께 건네는 그.


“내 오늘 선물도 준비했는데, 이쯤 하면 안 되나.”

“이걸로 넘어간다 이거제.”

“거 알면 잘 좀 봐도.”

“허, 참…….”


어머니는 어이없다는 듯 말을 하시면서도 만면에 미소를 띄우셨다. 꽃을 한 번 내려다보시더니 코를 묻고 향기를 맡으신다. 소녀의 꿈. 지금 그녀가 꾸는 꿈은 무얼까. 따뜻한 풍경. 나는 이 자체도 어쩐지 몽롱한 꿈같기만 하다.


“와 이래 얼굴 보기 힘든데.”

“미안타, 겨울엔 자주 오께.”

“곧 죽어도 서울에 있겠다 이거제. 거 뭔 꿀단지라도 숨겨놨나, 니.”


그 순간 뒤를 돌아 나를 흘끗 넘겨보는 강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쫄깃하게 죄었다. 설마, 그 꿀단지가 나는 아니겠지.


“그라고, 와 이래 차려입고 왔노.”

“그것도 좀 오랜만에 잘 보일라고.”

“나 참… 내한테 잘 보여서 뭐 할 건데.”

“내가 뭘 할 건 아니고, 손님한테 좀 잘해 달라 이거제.”

“손님? 아이고, 내 정신. 어디 있는데 지금.”

“내 뒤에.”


앗, 내 소개를 한다. 꿀꺽, 침이 넘어갔다. 나는 강다니엘이 어깨 너머로 빼꼼,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자 환하게 밝아지는 낯선 얼굴과 내게 다가오는 발걸음. 내 앞으로 다가오신 강다니엘 어머니께서 내 손을 맞잡으셨다.


…아, 따뜻하다.


“등치 산만한 아들놈 뒤에 있어서 내가 못 봤네요. 이름이 뭐예요?”

“아, 저, 박지훈입니다…!”

“먼길 고생했죠? 아이고, 잘 왔어요. 서울 친구들 델꼬 함 놀러 오라고 했는데 한 번도 안 오길래 뭔 따라도 당하나 걱정했드만.”

“엄마, 짐 하는 말 진심이가.”

“그래, 근데 이렇게 예쁜 동생을…”


부담스럽진 않은데, 어쩐지 부끄럽다. 내가 뭘 했다고 예쁜 동생이라고 하시는 거지. 쑥스러워서 숙여지려는 고개를 가까스로 붙잡고 있는데 옆에서 강다니엘은 흐뭇하게 웃고 있다.


“예쁘나.”

“그래.”

“하는 행동은 더 이쁘데이.”

“하이고… 니나 좀 그래봐라.”


어머니께서 내 손을 놓으셨다. 그리고 그 손으로 강다니엘의 등짝을 투박하고 다정하게 쓰다듬으시며 말씀하셨다.


“들어와요, 다들.”



***


우리는 2층에 있는 강다니엘의 방에 짐이라고 하기에도 조촐한 소지품들을 내려놓았다.


“아… 뭐부터 해야지. 손님 데려 온 게 이번이 첨이라.”


뒷머리를 긁으며 고민하던 강다니엘은 집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나를 이끌었다. 전원주택인 강다니엘의 집의 구조는 어렸을 적 내가 꿈꾸던 집과 비슷했다. 빨간 지붕 2층 집에, 작지만 아기자기한 마당이 있고, 2층 옥상에 있는 너른 테라스에는 여름철 누워 자기 좋을 법한 나무 평상이 있었다.


“여름엔 여기 누워서 삶은 옥수수 먹으면서 별보고 그랬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름에 누워 별을 헤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말하는 강다니엘. 그렇게 유년시절에 대해 들으며 집을 한번 훑은 후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부엌에 계신 어머님께 자연스럽게 다가가더니 그가 물었다.


“엄마.”

“어?”

“이제 저녁 하나.”

“그래, 아직 밥 안 먹고 왔제?”

“어, 내 이제 뭐하면 되노.”

“지금 손님 왔는데 뭘 한다꼬. 가만있는 게 도와주는 거니까, 올라가서 놀기나 해라.”


그 말에 아… 하고 탄식하더니 강다니엘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앨범 볼래?”


.

.

.


으하하, 자꾸 웃음이 났다. 비웃지 마라, 하는 강다니엘의 말에도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웃는 게 아니라 귀여워서 웃는 건데요?”


그래, 어렸을 적 강다니엘은 너무 귀여웠다. 통통한 볼살과 두꺼운 안경까지. 아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존재했지? 96년도에 부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니 눈엔 이게 귀엽나.”


강다니엘은 그런 나를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아니, 왜 그러지. 본인이라서 그런가.

초등학교 시절 모습이 담긴 앨범에는 수많은 사진이 담겨있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귀엽다는 점이었다. 물론 전적으로 내 시점이긴 했지만. 피에로 아저씨가 만들어준 풍선 푸들을 들고 해맑게 웃는 사진, 푸드덕 날아가는 비둘기에 식겁해서 눈을 앙 감은 사진, 그리고 네발 자전거를 타며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


“내는 못 보겠다, 이거.”

“아, 왜요- 귀여운데.”

“차라리 더 어렸을 때 사진 볼래? 그게 나을 것 같다.”

“그것도 보고 이것도 볼래요.”


징징거리는 나를 제지하며 강다니엘이 보고 있던 앨범을 덮었다. 아쉬움에 댓 발 나온 내 입술에 달래듯 쪽, 한 번 입을 맞추더니 내 앞에서 빼앗아가버렸다. 힝… 어울리지도 않게 귀여운 소리가 나왔다. 그런 내 앞에 놓아지는 하얀 앨범. 강다니엘 역시 아까 엎드렸던 자리에 배를 깔고 엎드리더니 천천히 첫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

“…….”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첫 장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어린 강다니엘이 브이를 하며 새하얗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탁-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누구보다 빠르게 강다니엘이 앨범을 덮었기 때문이다. 아, 이 정적을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도 없는 강다니엘의 방에서 조력자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우리 둘 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나는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어느 비오는 날의 목소리.


‘주말에 같이 있을래?’


…아.


‘…더 오래. 밤에도 같이.’


왜 지금 그게 생각이 나서…!


나는 홧홧해진 정신으로 슬그머니 강다니엘을 바라봤다. 그도 내게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 무슨 생각 중이에요…? 물어보기 두려울 정도로 나를 보는 그는 짙은 빛이다. 아아… 이대로 가까워지려는 순간.


“밥 다 됐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본능적으로 화드득 떨어졌다. 뒤를 바라보니 앞치마를 두르신 어머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둘 다 정리하고 내려와요~”


그러고는 문을 닫으시고 내려가시는 그녀. 다른 의미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미동도 없는 강다니엘을 대신하여 내가 먼저 출발선을 끊었다. 몸을 일으키면서 그에게 말했다.


“…내려갈까요?”

“……그래.”


.

.

.


저녁식사시간이었다. 셋이서 막 상을 차리고 나니 문이 열리고 사람이 왔다. 학교 사무일이 늦게 끝나서 조금 늦었다며 헐레벌떡 들어오시는 강다니엘의 누님. 나도 모르게 몸이 스스로 벌떡 일어났다. 그런 내게 다가오는 그녀. 아, 저는…


“지훈 씨?”

“…네?”


내 이름을 알고 계셨던 걸까. 밝게 웃는 얼굴이 내 이름을 말하니 실감이 난다. 아, 이 사람은 나를 알고 있는 사람.


“반가워요.”


저녁바람에 차가운 손이 내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볼륨을 낮추고 거의 속삭이듯 그녀가 내게 말해왔다.


“궁금했어요. 그래서 다니엘한테 물어보려다가, 아무래도 사람은 직접 겪는 게 맞으니까요.”


처음 나누는 대화에서 그녀를 알 수 있겠다 하면 오만이겠지만, ‘깊은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아, 아무래도 나는 지금 나눈 첫 목소리를 잊지 못할 것 같다. 사람은 직접 겪는 게 맞다는 말.


다 같이 인사를 나누고 나서 강다니엘은 밥솥에서 따끈한 밥을 퍼서 누님의 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식사가 시작됐다. 내가 국어교육과라고 하니, 강다니엘의 누님은 놀라시더니 본인이 중학교 문학 선생님이라며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내가 최근 고민했던 문제. 아이들이 즐기도록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에 굉장히 공감을 하셨다. 그건 아직 본인도 더 나은 방향과 방법을 찾는 중이라고. 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에 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같은 고민에 공감을 해주신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위안이었기 때문이다.

그 주제로 이어지던 이야기가 잠시 맥을 끊었다. 나는 한 숟가락 가득 밥을 퍼먹었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먹었다. 그러자 문득 느껴지는 어떤 뜨거운 무언가. 의식적으로 외면해오던 게 확연히 다가온다.


“맛있어요?”


바로, 내 행동을 하나하나 주시하시는 강다니엘의 어머니.


“네, 진짜 맛있어요-!”


진짜였다. 어느 정도냐면,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를 이 상황에서도 맛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내 대답에 그녀는 흐뭇하게 웃으시며 이것도 먹어보라 하셨다.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고 참깨가 귀엽게 올라간 연근조림이다. 나는 곧바로 젓가락으로 그걸 들어올려 입 안에 넣었다. 아삭아삭 씹히다가 부드럽게 녹아들어 목 뒤로 넘어간다. 아… 그러고보니 집밥 오랜만인데 진짜 맛있다.


그 후로도 강다니엘의 어머니는 내가 밥 먹는 모습을 종종 지켜보셨다. 나는 더 이상 그 눈빛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강다니엘은 아니었나보다. 나와 어머니 사이를 종횡무진하던 그의 시선이 끝내 어머님께 정착했다. 그리고 하는 말.


“엄마,”

“어?”

“시방 아 체하라 그러나.”


방금, 좀 위험한 발음을 들은 것 같은데. 그에 아랑곳 않고 받아치시는 어머님.


“뭔 소리고.”

“지훈이는 와 그래 쳐다보는데. 그래가 아가 밥이 넘어가겠나.”

“아니, 신기해서 그라제.”


내가 신기하다고…? 나 지금 뭔가 웃긴 모양샌가. 부산에서는 나 같은 사람이 신기한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나 밥풀 하나 흘리지도 않았는데. 긴장감에 온갖 생각들이 스쳐간다. 차마 그 이유를 묻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서 강다니엘이 어머님께 물었다.


“뭐가 신기한데.”

“서울 아들은 원래 이렇게 곱나.”


…내가, 곱다고? 그저 밥을 먹고 있을 뿐인데?


“하하… 감사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자, 아까처럼 정말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시는 어머님. 그 눈빛이 아주 초롱초롱하고 맑았다. 으아… 예쁨 받고 싶은 사람에게 예쁨을 받는 중인데, 나는 왜 이렇게 당당하지 못하고 자꾸 부끄러워지는지. 어머님과 눈을 맞추다 젓가락을 입에 물었다. 그러자 들려오는 강다니엘의 목소리.


“그럴 리 있나. 야가 고운 거제.”

“맞제, 역시 그렇제?”

“어, 거기도 지훈이만 한 아 없다.”


강다니엘과 함깨하면서, 사람을 앞에 두고 천연덕스럽게 칭찬하는 게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는지 내리 고민했었는데, 아무래도 집안 내력인가보다.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든다. 그런 내 시야 안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있다. 내 밥공기 위로 불쑥 들어와, 불고기를 놓고 떠나가는 젓가락.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주인을 바라봤다.


“많이 먹어요.”


강다니엘의 누님이 나를 보며 웃으셨다. 그 미소가 향긋하다. 내게 건네는 말 역시도.


도란도란 이야기가 이어졌다.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함께하는 저녁인데도 그들은 자꾸만 내게 말을 걸었다. 신경을 써주시고 있다는 게 배려 받는 사람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숨쉬듯 위로인 사람. 강다니엘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아니,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형이 어떻게 그런 사람일 수 있는지 지금 어느 정도 깨닫는다. 그건 이런 가족들과 한집에서, 하나의 공통인 시간을 보내고, 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눈길들이 지금에까지 쌓여와서 그런 게 아닐까.

그리고 이 순간, 내가 그런 사람들 안에 있다. 조금의 가림막도 없이 하나로 섞이고 있다. 영영 머물고 싶다. 흐르는 시간을 잡고 싶다. 말도 안 되는 바람까지 가지게 될 정도로 나는 이 시간이 너무, 너무….



***


저녁을 다 먹고 테라스에 먼저 올라가 기다리라는 강다니엘의 말에 나는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확실히 서울보다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별이 많이 보이는구나. 신기하다. 별자리라고는 하나도 모르는데 괜히 찾아보려고 이리저리 훑어보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별빛에 흠뻑 젖어갈 때 쯤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훈 씨.”


아, 안녕하세요! 당황했던 것도 잠시,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가 손사레를 치며 내게 말한다.


“그렇게 긴장 안 해도 돼요.”


그 말에도 긴장이 미처 다 가시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내가 강다니엘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그것도 가족분인데.


“잠깐 이야기해도 돼요?”


짧은 대화에도 내 의향을 물어보는 사람. 그런 사람과 나누는 말들이 달갑지 않을 리가 없다. 아무리 긴장이 되더라도. 좋다고 대답하니 그녀가 내가 웃어보였다.


“밥은 입맛에 잘 맞았어요? 아, 이러니까 무슨 내가 밥 차린 사람 같네-”

“네, 진짜 맛있었어요. 저 자취해서 집밥 오랜만이었거든요.”

“그래요? 다행이다.”

“네. 진짜요.”

“…….”

“…….”


잠깐 침묵이 흘렀다. 뭐라도 말해야 할 텐데, 내가 속을 태우기 시작할 때 솔직하게 그녀가 말해왔다.


“하하… 나도 동생이 사귄다고 데려온 사람 보는 건 처음이라 뭐라 해야 할지를 모르겠네. 이 나이 먹고도 모르는 게 많아요-”

“괜찮아요, 저도 그래요… 처음이니까요.”


내 대답에 한결 가벼운 미소를 짓는 그녀. 서로의 마음이 탁 트였다. 나 역시 이 공기가 조금 편안하게 느껴진다.


“사실… 지훈 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모르고, 그냥 애인 있다는 것만 알았어요. 이름은 어제 전화하면서 들었고.”


머릿속을 스치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내 이름을 외치던 그녀의 모습. 아, 그래서 아까 내 이름을….


“근데요,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네, 맘껏."

"음, 애인 있는 거 알았다고 하셨잖아요.”

“네, 네.”

“그건 어쩌다….”

“아, 다니엘한테 못 들었나?”

“네, 그냥 물어봐서 대답해줬다고 들었어요.”

“그렇구나.”


눈빛이 조금 진지해졌다. 무슨 사연이 있기라도 한 걸까. 나는 그저 가볍게 물은 건데. 단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저번이 우리 아버지 기일이었거든요. 여름에 다니엘 부산 내려왔을 때.”


아…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그래서 누님의 표정이 조금 무거워졌고. 지금에 와서 아차 해봤자 질문을 주워 담을 수는 없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할 뿐이었다.


“아, 네… 기억나요.”

“그 날도 아버지 만나려고 납골당에 갔어요. 뭐, 늘 그랬듯이 그냥 각자 묵념하고 하고 싶었던 말 하고 그러는데, 제가 할 말 줄줄이 늘어놓고 눈을 딱- 떴는데. 다니엘, 걔가 아직도 눈을 감고 있는 거예요.”

“…….”

“그러고서도 한참을 그러고 있더라고요. 끝도 없을 것처럼. 원래 그렇게 말이 많은 애가 아닌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싶었을까 해서 물어봤죠. 아빠한테 뭔 얘기 했냐고.”

“네.”

“그랬더니 뭐라 대답했는지 알아요?”

“…뭐라고 했는데요?”


그 때를 회상하는 건지 누님은 하늘을 보고 계셨다. 구름을 훑는 듯, 별자리를 찾는 듯, 잠시간 밤하늘을 훑던 눈이 곧 나를 향했다.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애인 자랑.”


그리고, 정통으로 부딪치는 단어들과, 그 무게감.


“아버지한테, 자기 애인 자랑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

“그렇게 길게요. 지훈 씨 얘기를.”


학창시절 가장 하기 싫었던 걸 말해보라면 나는 일말의 고민도 않고 대답할 수 있다. 바로 자기소개다. 싫었던 이유는 단순히 그게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라니,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그래서 항상 내 자기소개는 싱겁게 끝나고는 했다.

그런데, 그저 단순한 정보를 나열하는 것조차 힘이 들 정돈데, 내 자랑을 그렇게 길게 했다고…. 강다니엘은 내게서 어떤 장점을 보아왔기에 그렇게 오래도록 내 칭찬을 할 수 있었을까.


벅찬 감정에 휘말려 있을 때, 강다니엘의 누님이 내게 말을 덧붙이셨다.


“그냥 나는 다니엘이 행복하면 돼요. 그 애 누나니까요.”


…저도 그래요.

내가 하기엔 죄스러운 말이다. 나는 어쩌면 그에게 짐이 될 수 있는 존재다. 물론 당사자인 강다니엘이 나를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그에게 간지러운 솜털로 존재할 수도 있으나. 이 세상과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한, 그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마음만으로 건네는 말. 저도, 형이 행복하면 돼요.

나는 그저 누님의 눈동자만 들여다봤다. 내 이런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건 너무 과한 소망, 과한 부탁이 아닐까. 머리 위의 별들이 몇 번 깜빡였다. 다시 또 은은하게 빛나는 목소리가 내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지훈 씨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아…….


“어제까지는 그냥, 다니엘만 좋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늘 만나서 얼굴도 보고 눈도 마주치니까 그러네요, 내 마음이.”

“…….”

“응. 그랬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

“지금 내가 뭘 안다고 그러나 싶을 수도 있는데, 사람이 뭐 아는 게 단가요.”


머리로 ‘아는’ 건 정말 별 거 아니다. 나 역시 항상 느껴왔던 바였다. 하지만 그게 모습을 바꾸어 나를 향한 사려 깊은 말로 다가오니 맞아요, 하고 쉽게 대답을 꺼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강다니엘의 누나가 담담하게 내 어깨를 감쌌다. 나 지금 정말 이상한 표정일 텐데. 이런 온화함조차 강다니엘을 닮아, 자꾸 그를 떠올리게 해서 나는 더 말 대신 감정만 차올랐다.


“제가… 말 주변이 없어서 뭐라 해야할 지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나도 말 못해요. 아이고, 서울말 써보려고 하는데 안 되네요 잘.”


민망한지 눈썹을 굽히며 웃는 그녀. 사투리든 외국어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건 다 껍질일 뿐인데.


“…감사합니다.”


자신의 혈육이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고 했을 때, 그걸 묵묵히 받아들일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네가 좋으면 됐다. 그렇게 머리로 생각하기는 쉬워도 정말 심장으로 그 말을 울려내기는 어려운 일일 텐데.

감사하다는 말, 그것 밖에 할 수 없는 나.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조금의 흠집도 없이 전하는 건 왜 불가능할까. 이렇게나 간절한데.

마음이 절절히 울고 있을 때, 아래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는 건,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강다니엘이었다. 그 손에 체크무늬 담요가 들려있었다. 우리 앞에 가까이 다가오더니 닿아있는 누님과 나를 번갈아보기 시작했다.


“뭔 얘기하는데.”

“와, 우리 둘이 사이좋게 얘기하니까 질투하나, 니.”

“아니, 얘기하는 건 상관없는데 그 손은 좀.”

“와… 니 지금 진짜로 내한테 질투하나.”

“와, 좀 하믄 안 되나.”

“참나… 꼴사납다, 꼴사나워.”


강다니엘의 누님은 어깨를 한번 툭 치시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셨다. 투닥거리는 남매의 장난. 그걸 세상은 평범하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이건 평범하지 않은 장면이다. 이런 따뜻함은 어느 집에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화목한 가족들은 당연히 여길 게 아니라 서로에게 더 감사해할 필요가 있다. 하긴, 이미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니 이런 포근한 공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겠지만.


강다니엘이 내 손을 잡고 평상으로 이끌었다. 자신이 먼저 슬리퍼를 벗고 올라가더니 옆자리를 툭툭 쳤다.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자 어깨 위로 담요가 덮어졌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담요 안에 몸을 부대끼고 가까이 앉은 우리 둘.


“누나랑 얘기 잘 했나.”

“네, 진짜… 좋은 분이시던데.”

“우리 누나, 나랑 되게 비슷한 사람이야.”


지금 자기도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말인가? 그런 성급한 생각을 가르고 강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좋은 사람한테만 좋은 사람.”

“…….”

“다 네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래.”


좋은 사람이란 뭘까. 알 수 없다. 같은 사람이라도 겪는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겨주는 강다니엘에게 고마워해야할까, 아니면 조금은 그렇게 여겨질 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 다만 확실한 것은-


“저도 마찬가지예요. 좋은 사람한테만 착하게 대해요.”

“…….”

“제가 이런 것도 형이 좋은 사람이라서.”


강다니엘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가 본 중 가장 간직하고 싶은 풍경이다. 내 대답에 말을 잃은 그. 그 안에서 웅성거리는 작은 목소리까지 궁금한 나는 그에게 묻는다.


“무슨 생각해요?”

“…어떻게 이런 애가 나한테 왔지, 이런 생각.”

“…….”


정말 신기했다. 이제 우린, 스치는 생각조차도 닮아있구나.


“그나저나 안 피곤했나, 우리 가족들이 극성이라.”

“아뇨, 좋았어요. 이렇게 따뜻하고 떠들썩한 거 오랜만이라.”

“정말?”

“네, 진짜로. 밥도 너무 맛있었어요.”

“…다행이네.”


진심으로 안심한 듯 제 가슴팍을 쓸어내리는 그. 그런 걱정을 했구나. 정말 말도 안 되는 염려였는데, 그거. 나는 강다니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고개를 틀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그리고 사실 되게 신기했어요.”

“뭐가?”

“음, 뭐라고 해야 하지… 뭔가, 형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 번에 보는 느낌.”


아무 대답이 없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 지 궁금해서 다시 몸을 일으켰다. 강다니엘은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런 얼굴인 걸까, 생각하는데 내게 몸을 기울여 한 뼘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강다니엘과 내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묘한 표정의 얼굴.


“거울 봐도 있을 텐데.”

“네?”

“여기 있잖아, 내 미래.”


그렇게 말하며 강다니엘은 내 볼을 검지로 콕- 찔렀다. 내 미래, 라고. 나를 그렇게 불렀다. 앞으로 함께 걸을 길이 나뿐만 아니라 그의 머릿속에도 펼쳐져 있었다. 그 벅찬 울림에 그저 눈을 맞추기만 하자, 그는 찔렀던 손을 펼쳐 내 볼을 따뜻하게 감쌌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며 서서히 다가오는 얼굴. 이젠 그 감각이 익숙할 법한데도 아직도 종종 처음인 것처럼 느껴진다. 익숙해진 건 오직 닥쳐올 일의 순서였다. 몇 번을 겪어도 아쉬워서 머릿털이 쭈뼛 설 정도로 생경할 이 감각. 자연스럽게 두 눈이 감겼다. 그러자 사근거리는 숨결이 먼저, 그 다음엔 둥근 콧방울끼리, 그리고 마침내 입술이 닿았다.

찬바람에 식었던 입술에 닿아오는 부드러운 감촉. 평소보다 더 뜨겁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아아, 사람의 몸 중에서 가장 묘한 감각을 줄 수 있는 건 아마도 혀 아닐까. 내 아랫입술을 살살 몇 번 빨다가 이내 안으로 파고드는 그가 나는 아직도 소름 돋도록 낯설다. 소름 돋기는 좋은 감각도 마찬가지라서 나는 그에게 내 자신을 틈 없이 얽었다. 그러자 내 어깨에 와 닿아 자신에게로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손길이 있다. 아래층에 가족들이 있는데도 아랑곳 않는 강다니엘. 이래도 될까 하는 생각이 탁 트인 하늘로 흩어져간다.

눈을 떴을 때 내게 보였던 건, 단정한 눈매와 맑은 구슬 안에 담긴 나의 지금. 그리고 서서히 멀어져가며 보였던 건, 강다니엘. 시야를 가득 채우는 내 미래. 두 뼘의 거리에서 얼굴을 감싼 손 그대로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위로는 쏟아질 듯한 별가루들이 보인다. 내가 이렇게 분위기를 타는 사람이었나. 나 역시도 문득 저렇게 내 안의 뭔가를 쏟아내고 싶다.


“형,”

“응.”

“…제 얘기해도 돼요?”


모르겠다. 이 사람만큼은 주인도 쓰라려하는 과거마저도 따뜻하게 감싸주지 않을까, 뭐 그런 막중한 기대를 강다니엘에게 짊어지게 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무슨 기분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냥, 밤하늘에 별이 이렇게 많은데, 내 어두움 한 웅큼 흩뿌린다고 해서 이 찬란한 밤이 흐려질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내 옆의 빛나는 이 사람도.


“말하고 싶으면 언제든 들어준다 했다이가.”


내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는 나도 몰랐다. 그저 나도 이 순간에 내 자신을 맡길 뿐이었다.


“항상 외로웠던 것 같아요.”


말하고서도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내 옆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잠잠했기 때문에, 나도 차분히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집이 화목하지가 않았거든요, 돌이켜보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요. 근데, 저는 그걸 초등학교 4학년? 그 때쯤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요?”

“어떻게 알았는데?”

“그 때 처음으로 친구네 집에 놀러갔어요. 그 전까지는 못 놀러갔거든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할머니께서 허락을 안 해주셔서. 그런데 그 날은 너무너무 가고 싶어서 몰래 방과후 학교를 빠지고 친구네 집에 가서 놀았어요.”

“그랬구나.”

“네, 그런데 저는 그날 되게 충격이었어요.”

“왜?”

“…친구네 부모님께서 저희 앞에서 뽀뽀를 하시는 거예요. 저는 부모님이 그렇게 사이가 좋을 수 있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어요. 저는, 그 전까지 제가 봤던 부부는, 교과서랑 우리 집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날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서로를 더 넓게 담지 못해 아쉬워하면서도 마주보기만 하면 어쩔 수 없이 둥글게 휘어지던 눈들. 나는 그런 게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무지한 어린 아이였다.

내 안엔 더 쓰라린 것들이 많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강다니엘을 믿지 못해서도 아니고, 그냥, 좋은 것만 되새기기도 아까운 시간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야기는 마무리해야겠지.


“그래서, 오늘 형 가족을 보는데 너무 부러웠던 것 같아요. 우리 가족이 원망스럽진 않아요. 저도 그 중 하난데요. 이렇게 되기까지는 제 몫도 있었죠, 분명.”

“내가 들은 말, 똑같이 돌려주고 싶네.”

“…무슨 말이요?”

“너는 나한테는 내 잘못 아니라 해놓고.”

“…….”

“네 잘못 아니야.”


아…….


“사람 사이는 누군가의 잘못 없이도 틀어지기도 하는 것 같더라.”

“…….”

“나는 너희 가족에 대해서 뭐라 말하기 조심스러울 정도로 아는 게 없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

“넌 잘못 없어.”


나는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눈가에 매운 기운이 물씬 몰려들었다. 아 진짜…. 목덜미를 훤히 드러내고 고개를 차마 내리지 못하는 내게 강다니엘의 손이 다가왔다. 뒤로 젖힌 몸을 받치고 있는 내 손위로 겹쳐지는 강다니엘의 커다란 손. 그가 내 위를 완전히 덮고 천천히 달래기 시작했다. 엄지로 문지르다가 손바닥 전체로 넓게 쓰다듬다가. 나는 겨우겨우 울음을 머금고는 고개를 내려 강다니엘을 바라본다. 그러자 그가 내게 뜬금없는 말을 했다.


“나중에 같이 살면, 부산 살래?”

“네?”

“니가 좀 그러면, 우리 가족들 괜찮으면 서울 올라오라고 얘기 해볼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런 의문으로 대답 없이 가만 바라보니 말을 잇는 강다니엘.


“우리 엄마랑 누나랑 가끔 같이 모여서 요리도 해 먹고. 밤새 얘기도 나누고. 오늘처럼.”

“…….”

“아, 근데 너무 가까이 살면 좀. 내는 신혼 방해받을 생각은 없어서.”

“…뭐예요, 그게…….”


아아… 또 한 번 울음이 나오려 한다. 하지만 나는 꾸역꾸역 참아냈다. 눈물로 흐리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광경인, 내 사람이다. 짐짓 가볍고 명랑한 기분을 연기하면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형.”

“응?”

“저는 마당 있는 집이 좋아요.”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적혀있다. 그게 뭔 말이고. 이제 사투리로 보이는 구나, 싶어서 웃음이 난다. 나는 더 확실한 대답을 그에게 주기로 했다.


“우리 같이 살 집이요.”

“…아.”


그제야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장난스럽게 탄식하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는다.


“클났다, 내 돈 마이 벌어야겠네.”

“형만 벌어요? 당연히 같이 벌어야죠.”

“…맞네. 그래, 같이.”


저 멀리 이스라엘에 있다는 사해보다 짠 교사 봉급에, 마당 있는 집이라니… 그런 엄청난 걸 약속했으니, 꼼짝없이 우린 그걸 이룰 때까지 함께 있어야겠다.


“마당엔 강아지 키웠으면 좋겠어요.”

“그럼 고양이도 두 마리.”

“왜 고양이만 두 마리예요.”

“와, 안되나.”

“네, 전 강아지가 더 좋단 말이에요.”


어리광 같은 내 말에 강다니엘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강아지를 쓰다듬듯 이리저리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


“그래, 그럼 공평하게 강아지도 두 마리.”


우리는 그 밖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뜬구름 같은 소리이면서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은 이야기. 지붕과 가구 색부터, 함께하는 일상은 어땠으면 좋겠는지. 거실에 책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나와 거기에 만화책도 가득 채워도 되냐는 그. 음식에 자신이 없는 둘 중 누가 요리를 맡으면 좋을지. 그런 자질구레하고 소중한 이야기들.

그렇게 밤하늘 가득 빛나는 미래를 하나하나 헤면서도, 사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는 걸. 지금도 누군가는 예고치 못한 행복과 이별과 슬픔으로 가슴을 죄고 있다. 또 어떤 이는 세상을 향한 첫 울음을 터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작별의 긴 숨을 내뱉고 있다. 아직 여물지 못한 여린 우리지만,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어리지는 않았다. 우리 모두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결코 전부를 알지 못한다는 그 사실뿐이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될지 모르는 수많은 약속을 서로의 마음에 새겨 넣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지금 현재 마주하고 있는 미소들이 너무나도 소중해서였다.


꽃 같은 그대

나무 같은 나를 믿고 길을 나서자


그대는 꽃이라서

10년이면 10번 변하겠지만

난 나무 같아서 그 10년

내 속에 둥근 나이테로만 남기고 말겠다


타는 가슴이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길 가는 동안 내가 지치지 않게

그대의 꽃향기 잃지 않으면 고맙겠다


동행 / 이수동


“저랑 밤바다 매일 봐줄 거예요?”

“어, 밤하늘도.”


앞으로 가슴이 타는 일도 있을 거고, 거센 바람에 향기를 잃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맞잡은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당장 내딛을 수 있는 이 한 걸음을 걸으면 되는 것이다. 그냥 지금처럼.


영겁의 약속은 결국 현재에만 존재한다는 걸.

알지만,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 순간 영원히 좋아해요.


사랑해요, 형.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은하, 나의 강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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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이가 이야기 할 때 다니엘은 항상 이렇게 봐줄 것 같아요

다들 잘 지내셨나요? 뭔가 또 오랜만인 기분이네요ㅎㅎ 시간하고 상관없이 너무 보고 싶고 그리웠어요ㅠㅠ

항상 달던 답글도 잘 못 달아서 죄송합니다ㅠㅠ 달아드리는 게 아니라 제가 좋아서 다는 거였는데 혐생이 제 바짓가랑이를 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네요ㅠㅠ 게다가 다 정성스러운 댓글들이어서 막 의식의 흐름대로 대충 답해드리고 싶지 않아서 미루다보니까 놓치기도 하고ㅠㅠ 근데 제가 꼭 다 달 거예요! 저 너무 여러분 사랑하거든요ㅠㅠㅠㅠㅠ 제 단비예요 정마류ㅠㅠㅠ

이 사이에 즐거운 일도 많았는데 얼른 올렸으면 댓글로 더 이야기 나눴을지도 모르겠는데 너무 바빴어서 아쉽네요ㅠㅠ 다시 돌아오는 동안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한테 또 즐거운 일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밤도 좋은 꿈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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