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왜 또 비었어?”

“그게 말입니다...”


꿀벌들은 늘 부지런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면서 꿀을 모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꿀이 모이지 않았다. 좀 모였다 싶으면 제일 먼저 알고 털어 먹는 곰 때문이었다.


   어디 곰뿐이랴, 그다음엔 오소리가, 거기에 산 밑 동네에서 올라오는 사람들까지 몰리니 꿀이 모이기는커녕, 줄어드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여왕벌은 일벌들의 보고를 듣고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앞에 나온 보고는 약과였다. 가장 늦게 알아차리고 올라 온 인간들이 여왕벌이 되기 위해 준비 중인 애벌레들이 먹어야 할 로열젤리까지 싹싹 긁어간다는 보고를 들은 여왕벌은 목덜미를 잡고 쓰러질 뻔했다. 


   “하오나, 어찌하면 좋겠는지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어떻게 좀 해보라’고 소리치는 여왕벌 앞에서 신하 벌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전전긍긍했다. 바로 그때였다. 여왕벌의 머릿속에 기막힌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충직한 신하들을 데리고 제우스가 사는 올림포스산으로 한달음에 날아갔다.



   “상관없습니다! 복수, 복수를 원합니다. 소중한 우리의 꿀을 이렇게 빼앗기느니, 그 편이 나아요!”


    한껏 격양되어 ‘누구도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게 강한 독침을 달라’는 여왕벌에게 제우스는 ’복수를 위해 불타는 그 마음은 너와 다른 꿀벌들을 멸망시킬 거라며 경고했다. 하지만 최고신의 엄중한 경고도 복수의 칼날을 가는 여왕벌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여왕벌은 멸망해도 좋으니 꿀을 빼앗아 간 모두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다. 제우스는 더욱 세차게 변하는 날갯짓을 보고서야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꿀벌들에게 독침을 주기로 했다.


   이제는 복수를 할 수 있다며 동물들과 사람에게 달려든 꿀벌들은 독침을 놓아 혼쭐을 내긴 했지만, 독침을 사용한 꿀벌은 어김없이 죽게 되었다. 제우스의 말 그대로였다.


이솝 우화 중 ‘꿀벌의 독침’ -


   “그래서, 뭐 어쩌게?”

   “복수해야지, 복수!”

   “하이고...”


   분노가 끓어오를 때가 있다. 하는 짓이 꼭 깍쟁이 같아서 한대 쥐어 박아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속 보이는 거짓말을 한다거나, 교활하게 이간질을 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속에서는 저절로 ‘내가 저걸 가만 두나 보자’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분노를 가라앉혀라’ ‘원한을 품지 마라’ ‘복수하려고 하지 마라’ 등의 말을 숱하게 들었다. 그럴 때마다 반문했다. 왜? 대체 왜? 왜 그래야 하는 건데? 저 사람이 잘못한 일에 대해서 분을 품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인 거야? 하고 생각했다.


   꿀벌의 독침 이야기는 왜 그렇게 다들 ‘분을 내려놓으라’고 권하는지 잘 말해주는 우화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분을 내고 복수를 원하는 심리는 사람이라면 품는 당연한 감정이다. 하지만, 꿀벌처럼 복수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면 곤란하다.


   마음에 한을 품고 기어이 갚겠다고 생각하다 보면 언젠가 목표에 다다를 수 있을지 모른다. 복수에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문제가 해결될까? 복수는 또 다른 복수가 되어 내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독침으로 벌꿀을 지키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자기 목숨을 잃게 된 꿀벌처럼 복수는 당장 시원한 일일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나도 남도 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원한이 삶을 망친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한들, 여전히 우리는 분노가 나를 장악하는 순간을 되풀이할 수도 있다. 복수하려는 마음이 삶을 뒤덮어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거든 독일의 철학자 Friedrich Nietzsche의 문장을 기억하길 바란다.


   ‘지상에서 원한에 사무친 열정보다 사람을 더 빨리 소모시키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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