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부분을 보고 싶다는 요청이 있어서, 예전에 써둔 부분을 올립니다.




5. 연애


서국의 모든 물건들은 도심을 가로지르는 본류시장을 한 번쯤은 거치게 된다. 서국인으로 태어났다면 요람에 담긴 그 순간부터 이 땅을 떠나는 순간까지 시장을 거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하지만 시장이 물건보다도 더 빨리 끌어들이는 것은 이야기였다. 서국의 가장 변방에서 일어난 일들도 며칠 후면 금세 소문으로 부푼 채 좌판 사이를 뒤뚱거리며 돌아다니게 되었다.

최근 상인들의 입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 하나가 시장 안을 떠돌았다. 시작은 서국 변두리에 위치한 소읍, 눈썹달 마을이었다. 비옥한 삼각주 지대의 이름을 딴 눈썹달 마을은 강 하류를 끼고 발달했다. 질 좋은 흙에서는 단맛 나는 작물이 자랐고 사람들은 손수 만든 울타리 안에 가축을 키웠다. 오래 전 전쟁의 시대에는 바다를 마주보는 위치 때문에 시달렸지만 평화가 찾아온 지금은 이보다 더 고요하고 무던할 수 없는 마을이었다.

최초의 사건은 아주 작은 강아지에게서 일어났다. 한 소녀가 기르던 흰 강아지가 머리부터 발까지 얼어붙은 채 싸늘한 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강아지의 죽음을 같이 슬퍼해 주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괴한 사체의 형태를 보고 수군거렸다. 일각에서는 떠돌이들 중 빈약하게나마 개성을 쓸 수 있는 자들의 짓이라고 말했고, 한편에서는 소녀의 부모가 도심 서커스단에서 하듯이 개성 투혈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을 거라고 했다. 그중 인기를 얻은 이야기는 북국에서 첩자가 흘러들어왔을 거라는 의심이었다. 사체가 기묘하게 얼어붙은 모양이 의심에 불을 질렀다. 사시사철 더운 서국에서 자연적으로 얼어붙을 수 있는 모양이 아니었다. 북국을 마주보는 바다에서 기어들어온 누군가가 빙결 능력으로 마을에 해를 끼치고 있는 게 틀림없어.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더 나아간 몇몇은 북국에서 몰래 들어온 사람들이 바로 서국인들 사이에 숨어들어서 서국인 흉내를 내는 첩자라고 생각했다. 왜 굳이? 라는 질문에 누군가가 소리 높여 말했다.


“남국과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거지. 요즘 남국과의 관계가 심상찮으니까 그 틈을 타서 전쟁을 일으키고, 자기들이 서국을 꿀꺽하려는 거야!”


그 작은 마을에도 변경에서 전투가 있었던 소식은 이미 퍼져 있었기 때문에, 그 의견은 제법 지지를 얻었다. 사람들은 선술집이나 식당에 둘러앉아 북국 첩자 이야기를 소박한 안줏거리 삼아 떠들었다.

문제는 그런 죽음이 계속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소문도 사그라들기는커녕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소녀네 옆집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얼어 죽고, 닭과 쥐떼가 얼어 죽더니, 나중에는 돼지들까지 얼어 죽었다. 왕가에서 파견한 진상 조사반은 특별한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고 죽은 동물들의 사체를 뒤탈 없이 처리하는 방법만 알려 주고 떠났다.

그러나 눈썹달 마을의 가축들이 삼분의 일 정도 죽어나갔을 때쯤, 갑자기 서국의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푸른 포도꽃 문양이 찍힌 정복을 일사불란하게 차려입은 남자들이 죽은 동물들의 사체를 떠메고 분주히 운반하더니, 흰 강아지의 주인이었던 소녀의 부모를 윽박질렀고, 곧 주민들에게도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무슨 일인가요?”


걱정스러운 주민들의 물음에도 군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썹달 마을 주민들도 곧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수도에서도 가축들이 얼어죽고 있대요.”


왕궁의 전차 경주에 말을 공급하는 도심 최대의 마구간에서 제일 비싼 말 여섯 마리가 얼어 죽었다고 했다. 태어나서 전차 경주는커녕 경주용 말도 본 적 없는 눈썹달 마을 주민들은 그게 큰일인지 아닌지는 잘 몰랐다. 그냥 군인들이 떼거지로 몰려오니 뭔가 중대한 일이 있겠거니 생각했을 뿐이다.




* * *




토도로키는 사체로 가득한 거리를 걷는다. 기껏해야 발끝에 벌건 흙먼지나 좀 날리던 서국의 땅에서는 이제 허옇게 얼어 죽은 토끼나 돼지 따위가 발에 채이게 되었다. 뻣뻣하게 굳어 두 발 또는 네 발을 번쩍 들고 땅 위를 굴러다니는 짐승 시체들은 한때 활기로 북적거리던 도심의 사거리를 유령 도시처럼 만들었다. 얼어붙은 동물 사체는 그 자체로도 괴기했지만, 사체가 서서히 녹으면서 뒤늦게 부패가 진행되기 시작하면 얼음이 녹은 물과 섞여 그야말로 견딜 수 없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동물 사체를 아무렇게나 내다 버리면 엄벌에 처한다는 법이 즉각적으로 공포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집에 들어앉아 악취를 견디느니 차라리 법을 어기겠다고 발끈했다.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악취에 휩싸인 사람들은 쉽게 화를 냈다. 가축을 팔아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은 파산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분위기가 흉흉해지면서 사방에 왕가에서 보낸 군인들이 깔렸다. 검정 옷을 입은 군인들은 하나같이 왼쪽 어깨에 왕가의 상징인 푸른 포도꽃 문양을 달고 있었다. 무개성 군인들이라곤 하지만 어쨌든 왕궁에서 정식으로 훈련받은 군사들과 대거리하는 것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토도로키는 결국 바쿠고의 팔을 치료받았던 바로 그 천막 병원 옆의 가게에서 돈을 내고 검정색 가발을 샀다. 어울리지 않는 긴 머리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흰 머리칼은 토도로키에게 북국의 피가 섞였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였다.

북국 첩자설은 수도에서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연간 중대사라고 해 봤자 기껏해야 돼지 먹이로 귀리를 얼마나 섞어 줘야 육질이 맛있는가 정도가 전부인 눈썹달 마을과는 달리 수도에는 소문을 먹고 자라는 사업이 발디딜 틈 없이 깔려 있었다. 남쪽 국경에서 있었던 전투들이 사실은 남국 군인의 옷을 입은 북국 첩자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라는 설이 같이 돌았다. 북국은 변장에 특출난 용병 수출 사업으로도 이름이 높았으므로 제법 근거가 갖춰진 소문인 셈이었다. 본류 시장을 중심으로 상인들은 서북전쟁이 나면 꼭 필요하다는 물건들을 만들어 비싼 값에 팔았다. 게다가 최근 인기를 얻은 개성 무투의 참가자 중 역대 최고의 상금이 걸린 반랭이 손끝에서 뽑아내는 게 바로 얼음이었다. 전쟁과 첩자의 접근을 막아 준다는 자질구레한 부적을 팔기에 최적의 때였다.


“얼음을 쓴다는 건 북국 놈들 피가 섞였다는 증거지요.” 유리세공을 다루는 상인이 말했다. 서국 도심 특유의 느긋하고 간드러지는 발음이었다. “틀림없이 북국에서 온 놈일 거예요.”


“그 새끼 복면을 벗겨서 쌍판떼기를 확인해 봐야 돼. 북국에 정보를 팔아먹는 후레자식일지 모른다고.” 남쪽 방언도 들렸다.


“설마 첩자씩이나 되는 놈이 그렇게 대놓고 얼음을 쓰면서 전투에 참가하려고?”

“바로 그런 생각을 이용하는 거지! 첩자들이 제일 잘 하는 게 뭔데? 바로 뒤통수치는 거 아니야!”


여론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오랫동안 이어진 불안한 평화에 길든 서국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남국과의 전쟁을 다시 상상하지 않으려고 재주껏 온갖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북국과 북국인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이 거기에 불을 질렀다. 북국인들의 흰빛 나는 머리와 추운 나라 특유의 새하얀 피부와 근질이 좋은 덩치 따위의 외형적 특징으로 북국 핏줄을 색출해 내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다.

마지막 전투만을 남겨 놓은 토도로키는 변장을 수없이 바꾸면서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가발로도 모자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쓰는 망토로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린 채로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만을 찾아서 숨고, 하루에 한 번씩 반드시 묵는 곳을 바꾸었다. 혹시라도 밤중에 습격당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마음놓고 잠드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

마지막 전투를 치러서, 연맹전이 끝나고 무투대회 참가가 결정나면, 그 후에는 적어도 승부 조작사들에게 목숨을 위협당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색깔이 다른 눈 쪽을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파란 눈 위를 덮는 안대를 사서 썼다. 토도로키는 검은 장발을 늘어뜨린 창백한 외눈박이처럼 변장한 채로 도심의 가장 어두운 곳들만을 찾아 숨어다녔다. 어느 골목에서든 북국 첩자에 대한 이야기가 들렸다. 그 북국 출신 무투사인 반랭이 첩자일 거라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렸다. 토도로키는 숨을 죽이고 연맹전의 마지막 날을 기다린다. 단 한 번의 전투면 계획이 일단되는데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날 밤 이후 바쿠고와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만나지 않은 것이다. 바쿠고는 계속해서 에이지로 공이 관리하는 객사에 연락처를 남기고 있었지만 토도로키는 단 한 번도 마주 연락하지 않았다. 그는 바쿠고가 자신을 속였을 것이라고는 여전히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기가 싫었다.


‘객관적으로 판단할 능력을 상실했어.’


토도로키는 냉정하게 결론내렸다. 역시 만나지 않는 게 낫다. 확신이 없으니까. 그는 혹여나 타카미 케이고가 바쿠고의 세력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어딘지 외국인 같은 그 느낌은 북국에서 온 용병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야, 바쿠고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토도로키의 머리 한구석은 바쿠고를 줄기차게 옹호한다. 나를 속였을 리 없어. 바쿠고는 나 때문에 목숨까지 위험했었잖아. 그애가 나를 능욕하고, 갖고 놀았을 리 없어……. 그러나 바쿠고 공자에게는 의심갈 만한 구석이 너무나 많았다. 북국에 연결된 세력이 있고, 없던 연회를 뚝딱 만들어 낼 만큼 고위 귀족에, 토도로키의 정체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고, 조직적으로 소문을 낼 만한 힘도 지니고 있다.

그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수차례 기를 쓰고 노력했다. 바쿠고는 모를 테지만 그는 이미 바쿠고가 무방비할 때 몇 번이나 목숨을 노린 전적이 있었다. 애초에 이익을 위해 연합한 관계니까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토도로키는 타카미 케이고와 바쿠고가 서로 아는 사이처럼 친근하게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스스로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손이 떨렸다.



마지막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잠그고, 짐을 내렸다. 그러고서야 가발을 벗었다. 더운 공기 때문에 머리칼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아예 싹둑 자르거나 싹 밀어 버릴까, 잠깐 충동적인 생각도 들었다. 머리가 짧아지면 북국 피가 섞였다는 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꽤 오래 망설인 끝에 결국 그만두고 가위를 내려놓았다. 오른쪽의 흰색 머리칼은 어쩐지 개성의 발원지처럼 생각되어서, 우습지만 없애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어머니와는 토도로키가 아직 어리던 시절에 헤어졌다. 흰 머리칼이 아니면 어머니는 이제 그를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찝찝하게 땀이 말라붙은 몸을 씻고 여느 때처럼 단도를 쥔 채 누웠다. 인파에 최대한 몸을 숨기고 다니느라 잠자는 시간도 불규칙해졌다. 최대한 눈을 뜨고 있었으면 했지만, 계단을 기어올라올 때부터 수면 부족 때문에 자꾸만 다리를 헛디뎠고 눈앞도 어지러웠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머리가 베개에 처박히자마자 끔찍히도 달콤한 잠이 콸콸 쏟아졌다.

빠르게 수면의 세계로 끌려가는 도중에 그는 희미한 두통을 느꼈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한 사람이 마침내 잠에 빠질 때 느끼는 고통이었다. 그는 그 고통마저도 기꺼울 정도로 수면에 목마른 상태였고, 꿈속에 연한 노란빛의 머리털이 불쑥 나타났을 때 금세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딱히 바쿠고가 이상한 행색을 하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지쳐 있던 토도로키의 신체가 자신이 잠들어 꿈을 꾸고 있다는 황홀한 사실을 자꾸만 곱씹어 보다가 나타나게 된 일종의 부작용 같았다.


토도로키의 꿈이 만들어낸 바쿠고는 맨몸이었다. 그냥 맨몸이 아니라 이상할 정도로 야릇한 꼴을 하고 있었다. 아랫도리의 큼직한 윤곽이 슬쩍 드러나는 통 넓은 검정색 바지만 걸쳤을 뿐 상체에는 실오라기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하얀 피부에 근육이 견고하게 짜인 몸은 너무하다 싶게 반짝거리는 광채를 뿜었다. 토도로키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다.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린다.


‘쇼토.’


나직한 목소리가 부르더니, 곧 침대 위에 누운 토도로키에게로 천천히 다가온다. 토도로키는 민망하도록 소극적인 태도로 도망쳐야 해, 라고 생각했지만, 곧 바쿠고의 손이 양 손목을 감싸안았을 때 그 촉감이 너무나 기분좋은 데에 놀란다. 그는 바쿠고가 어떻게 잠자리 상대를 어루만지는지 알고 있고, 그 사실에 흥분한다. 옴짝달싹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는 토도로키의 몸 위로 바쿠고의 손이 부드럽게 달려 나간다. 온몸을 칭칭 감은 더러운 헝겊이며 속옷을 한 장, 한 장 벗겨내서 깨끗한 알몸으로 만든다. 토도로키는 그 과정이 하나도 불쾌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바쿠고의 손에 의해 느릿하게 알몸이 되는 상황이 너무나 행복했다.


‘왜 연락 안 했어. 보고 싶었는데.’


네 연락, 기다렸다고. 벗은 어깨 위에 바쿠고가 까끌거리는 머리털을 부볐다. 토도로키는 미안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없이 눈을 감는 쪽을 택했다.


‘밤마다 네 생각밖에 안 했어.’


좋아, 이건 확실히 그 바쿠고 공자는 아니다. 토도로키의 어느 한 부분이 그렇게 주장했다. 그러나 그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토도로키는 그 설탕발림 같은 말이 마음에 들었다. 바쿠고가 다정하게 살을 붙이고 치대 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따뜻해. 그는 문득 바쿠고의 땀에서 달콤한 향기가 풍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는 내 생각 같은 거 안 하지.’


바쿠고가 원망과 애정을 동시에 담뿍 담은 표정으로 서글프게 눈을 휘었다. 토도로키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그 하얗고 멀끔한 얼굴을 바라본다.

네 생각, 했어.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


‘연락도 안 하고.’

‘…….’

‘나한테 화났어?’


자신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어쩐지 흡족한 기분을 안긴다. 바쿠고는 두터운 양 손으로 뺨을 붙잡고, 간지러운 키스를 몇 번 퍼붓는다.


‘기분 좋게 해 줄게. 그러면 화 풀 거야?’


나는 이런 말들이, 듣고 싶었던 걸까? 토도로키는 뺨에서부터 목을 따라 천천히 타고 내려가는 손끝의 감촉을 느끼면서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가 자신의 기분이며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고, 아첨을 떨고, 어린애처럼 달래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걸까? 그래서 꿈 속의 바쿠고는 이렇게나 달콤하고 다정한 것일까?

아니면 그냥,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바쿠고가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뒷머리를 쓸면서 입술을 빨아 당기는 촉감과 앞니를 톡톡 두드리는 두툼한 혀끝.


‘연락해 줘. 보고 싶어.’


불룩해진 앞섶이 맞닿자 토도로키는 저도 모르게 헐떡거린다. 그는 이제 크게 부풀어오른 바쿠고의 것을 쥐고 대담하게 만지작댔다. 손바닥 안에서 걷잡을 수 없이 부피를 늘려 가는 기둥 표면을 집요하게 문지르자 바쿠고의 얼굴이 흥분으로 일그러진다. 일견 금욕적이던 얼굴은 이제 토도로키를 향한 욕망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토도로키는 뱃속 아주 깊숙한 곳에서 간지러운 만족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제 바쿠고를 더 깊이 받아들이고 싶었다.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헉!”


토도로키는 악몽이라도 꾼 듯 비명을 지르면서 깨어났다. 쿵쿵 뛰어 대는 심장의 맥박이 너무 강해서 무서울 정도였다. 그는 무심코 앞섶을 내려다보았다. 반쯤 부풀어오른 그곳이 정체 모를 액체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토도로키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덜컥 감쌌다. 온몸이 이대로 활활 타올라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를 것 같았다. 부끄러웠다. 너무 부끄러워서 죽어 없어지고 싶었다. 목에 흙탕물이라도 들이붓는 기분이었다.

그는 바쿠고 공자와 잤다.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그건 부끄럽지 않았다. 공자에게는 작부놀음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고 토도로키는 그 대가로 필요한 것을 얻었다. 하지만 이건, 이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끊어질 듯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자 그는 얼굴을 감싸쥔 채 울음을 터뜨렸다. 코끝에 비릿한 냄새가 감돌았다. 다리 한가운데는 아직까지도 짝짓기하는 개구리처럼 기괴하게 부풀어올라서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한번 생각하자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는 안 돼. 죽어도 안 돼…….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려 단도를 찾는다. 쥐고 잠들었던 단도가 뒤척이는 사이 떨어졌는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무방비하게 행동했는지 깨닫자 또 한번 뒷목이 아찔했다. 오른손으로 단단히 칼자루를 쥔 토도로키는 이를 악물고, 그대로 왼쪽 팔에 내리긋는다. 통증이 왈칵 쏟아졌다. 그 통증이 오히려 반가웠다. 열기로 몽롱하던 정신을 일깨운다. 코끝에 피냄새가 대롱대롱 매달린다. 눈앞이 어지러운 와중에 토도로키는 멀리서 울리는 듯한, 그럼에도 뚜렷한 목소리를 듣는다.


‘주어진 것에 순응해라.’

‘마음의 준비를 해라.’


마룻바닥에 피가 스며들었다. 엉망진창으로 난도질당한 왼팔을 마구잡이로 묶어 지혈한다. 토도로키가 아는 한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뿐이었다. 거기서만은 그렇게 증오하는 사람과 별로 다르지가 못했다.




* * *




아침의 태양이 밝았을 때 토도로키는 이미 전투에 임할 복장을 전부 갖추고 있었다. 평소보다도 팽팽하게 복면을 당겨 쓰고, 망토로 최대한 온몸을 감쌌다. 매듭 부분의 한가운데를 정확히 칼로 자르지 않는 한 토도로키의 망토를 벗겨내는 건 불가능하다.

마지막 전투였다. 오늘까지만 견디면 적어도 승부 조작사들은 떨어져나갈 거라는 생각에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몇 푼 안 되는 우승 상금을 노리는 거라면 빼앗겨도 괜찮다. 전투 자체를 걱정하는 것도 아니다. 적당히 상대하다가 적당히 끝내면 된다. 오히려 토도로키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부분이다.

최근 빙결 능력자에 대한 여론은 최악이었다. 얼음을 쓰는 괴물들이 쏘다니는데 왕궁은 뭘 하는 거냐는 분노도 산발적으로 일었다. 남국 국경에서는 전투가 벌어졌고 북국에서는 첩자 용병이 몰래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졌으니 사람들이 쿡 찌르면 폭발할 것처럼 뜨끈뜨끈한 분노로 부풀어올라 있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그렇다고 얼음을 아예 사용하지 않고 무투에 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는 스스로를 진정시킨다. 호신용 단도를 망토 안에 숨긴다. 기도를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하는지를 몰랐다. 대신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어쩐지 머릿속에 스쳐간 사람이 있었다.




무투장은 시뻘건 흙먼지와 아직 가시지 않은 태양열과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가 혼탁하게 섞여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대회의 마지막 장을 맞이해서 사람들의 흥분을 돋우려는지 풀 태우는 냄새가 평소보다도 강하게 코를 찌르며 맴돌았다.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강렬한 냄새였다. 토도로키는 몇 번이고 복면을 단단하게 묶어 고정하면서 무투사 대기실을 서성거린다. 자신의 차례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십수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왠지 다른 참가자들이 쳐다봐 오는 시선도 평소와는 달라진 것만 같다. 땀이 차오르는 왼손을 애써 쥐었다 폈다 하며 반복적으로 움직인다. 기분 탓일 거야. 아니래도 어쩔 수 없다.

우승 후보인 토도로키가 출전하는 전투는 맨 마지막이다. 앞의 전투가 하나씩 끝나면서, 총 점수가 합산된다. 이미 1위는 사실상 토도로키로 결정지어져 있다. 워낙 지금껏 쌓아 온 점수가 압도적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오히려 문제는 실격이다. 끝까지 참가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어이.”


뒤에서 어깨를 퍽 맞는다. 몸이 덜컹 흔들릴 정도로 공격적인 힘이었다. 가까스로 돌아보자 얼굴에 큰 칼자국이 있는 남자가 남부 사투리가 섞인 억양으로 내뱉듯 말했다.


“반랭, 나갈 준비해. 곧 네 차례니까.”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복면을 한 번 더 당겨 묶는다. 토도로키를 기분나쁠 정도로 훑어보던 남자가 갑자기 물었다.


“북국 사창가 출신이란 게 진짜냐?”

“……뭐?”

“네놈, 북국에서 몸을 팔다가 쫓겨나서 서국으로 흘러들어왔다며. 진짜냐고.”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뒤따른다.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 잠자코 있었더니 남자가 성큼 다가와서 어깨를 도로 툭 친다.


“무시하지 마라, 새꺄. 연회에서의 얼굴은 가짜였지? 쌍판에 뭔가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어. 북국 놈들 피가 섞인 주제에 그렇게 생겨먹었을 리가 없지.”

“…….”

“마지막인데 진짜 얼굴이나 까 봐라. 북국에선 어떤 얼굴이 잘 팔리는지 좀 보자고.”


대기실로 돌아온 다른 참가자들이 합세해서 비웃기 시작하자 킬킬거리는 소리가 좀더 커진다. 토도로키는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딱히 그 말에 수치심을 느꼈다기보다는, 바깥의 분위기가 나쁜 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고 정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 어떻게 봐도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시비를 거는 말이 뒤따랐지만 토도로키는 대응하지 않고 최대한 몸을 낮추었다. 더 상할 자존심 같은 건 남아 있지 않다. 복면을 벗지 않을 수만 있다면 몸뚱이는 아깝지 않았다. 바쿠고 공자와 잤던 것도 그래서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그뿐이다.

그는 천천히 무투장으로 나간다. 붉은 흙먼지가 휘날리고 알싸한 향풀 냄새가 어지럽게 풍기는 곳으로.




“반랭이다.”

“진짜 반랭이야.”

“역시 얼굴은 가렸군.”

“저걸 치우면 분명 북국 창놈의 얼굴이 나올걸…….”


토도로키가 무투장에 올라 두 발로 붉은 흙을 딛고 선 순간, 무투장은 수군거리는 소리로 가득 찬다.

그는 빈자리 하나 없이 꽉꽉 들어찬 객석을 길게 훑어본다. 쉴새없이 소음이 들려오지만 평소처럼 열광적으로 커다란 함성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의구심에 차서 쑥덕거리는 소리에 더 가까웠다. 저 수많은 사람들 중 아무도 토도로키를 응원할 생각으로 온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복면 아래 숨겨진 얼굴이 첩자의 것인지 창부의 것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절반, 토도로키에게 돈을 건 사람들과 토도로키 때문에 돈을 잃어 앙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나머지 절반이다. 무투장 가장자리마다 피어오르는 불 때문에 복면 속에서는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토도로키는 굳이 체온을 조절하지 않는다. 왼쪽에서부터 오른쪽까지 관객석을 돌아보며 건조하게 눈길을 던지던 토도로키가 문득 고장난 듯 멈춘다.

맨 앞자리 특별석에 바쿠고가 앉아 있었다. 자신이 아는 바쿠고가 아니라, 바쿠고 가의 공자였다.

찾아올 때마다 입던 거친 평민복 대신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붉고 번쩍이는 옷이 단단한 몸 위로 풍성하게 걸쳐져 있었다. 목에는 서국 왕실에서 전통적으로 최고의 무투가들을 치하하는 데 사용했던 새파란 보석을 엮어 만든 목걸이가 늘어지고, 어깨와 목은 우단 망토로 덮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고위 귀족의 차림이었다. 서슬퍼렇게 흰 피부와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화려한 의복과 어울려 압도적인 인상을 새겼다. 뒤에 장막처럼 늘어선 호위병들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것을 누구나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옆에는 키리시마 가의 장남이 동행했다. 엄청난 수의 인원에 둘러싸인 공자는 일견 오만할 정도로 턱을 치켜든 채, 고고하게 무투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되어 시커먼 복면에 둘둘 감긴 토도로키를.

문득 꿈속에 나타났던 맨몸의 바쿠고를 떠올린다. 연락을 받지 않아서 화가 났지만 여전히 다정하던 그 애. 토도로키는 꼭 지금이 바쿠고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도 되는 것처럼 검은 천 사이로 집요하게 그를 노려본다. 꼿꼿하게 앉은 바쿠고에게는 미세한 표정 변화조차도 없다.

토도로키는 정말로, 그의 머리라도 쪼개 보고 싶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저 눈에서 빛나고 있는 것은 적대감인가? 경기가 끝나자마자 공작가의 호위병들에게 끌려 바쿠고 공작궁의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인가?

어쩐지, 그럴 리가 없지만, 바쿠고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토도로키는 부러 눈에 띌 정도로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치웠다. 눈앞의 철문을 바라본다. 상대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철문이 열리기 전에 관객석에서 누군가가 침을 뱉으면서 고함을 질렀다.


“첩자 새끼!”


그 말이 기름통에 불을 질렀다. 웅성거림은 점차 커져 간다. 복면을 쓴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야. 얼굴을 확인해 봐야 돼. 분명 북국에서 온 불법 체류자야. 아니야, 간첩이야. 아니야, 창부야. 복면을 벗겨야 돼!


“얼굴을 드러내!”

“첩자가 아닌 걸 증명해라!”


거기서 더 나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역자!”


하지만 토도로키에게 원하는 것은 모두 같았다.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비명 같은 함성이 무투장을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토도로키는 우두커니 서서 그 고함소리를 듣는다. 좀처럼 상황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혼이 빠져나가 둥둥 떠서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


여기서 모든 게 끝나면, 그러면 어떻게 되지?

이전에 어떻게든 도망쳐 나왔던 것은 나츠오 덕분이었다. 두 번씩이나 달아나진 못할 것이다. 무투장 뒷문에는 고용된 건달들이 한가득 지키고 있었다. 숨을 들이킨 순간 경기장의 붉은 흙먼지가 코를 덮쳤다. 향풀 냄새가 배인 흙이다.

천천히 고개를 든 후, 다음 순간 그는 바쿠고를 쳐다보았다. 복면 속에서 조용히, 간청하듯 속삭였다.




“내가 데려온 사람이다.”


그러자 바쿠고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꼭 토도로키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토도로키는 어쩐지 현실보다는 액자 안의 그림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들여다본다. 공자의 붉은 옷을 입은 바쿠고는 토도로키가 아는 평민복을 걸친 바쿠고보다 훨씬 느릿하게 움직였다. 기이한 권태가 느껴질 정도였다. 아주 느린 속도로 일어서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젊은 공자는 턱을 오만하게 치켜들고 서서 좌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북국에서 직접 데려왔다고.”


확성 개성이라도 쓴 듯 무투장 안을 선명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다음 순간 토도로키는 그가 진짜로 확성 개성을 쓸 수 있는 해설자를 옆에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공작가의 사람에게 첩자니 반역자니 뭐니 지껄이는 놈은.”

“찾아서, 내가 직접 처벌한다.”


무투장 안은 조용하다. 꼭 입이 꿰매진 것 같았다.


“반드시. 바쿠고 공작가의 문장을 걸고다.”


무표정하게 말을 끝낸다. 가라앉는 군중의 수군거림 속에서 토도로키는 그제야 눈앞의 철문이 열리고 상대가 뛰어나오는 광경을 아주 느린 속도로 본다. 망토 속에 숨겼던 오른손을 천천히 꺼낸다.




* * *




대회가 끝난 무투장 주변에는 색종이며 폭죽의 잔해가 잔뜩 떨어져 있었다. 토도로키는 그가 무투장의 뒷문으로 찾아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전투가 끝나면 항상 그랬으니까. 키리시마 가에서 관리하는 객사까지 가는 길지 않은 거리도 그는 혹시나 위험할지 모른다면서 토도로키를 데리고 동행했다.

뒷문 앞에 우두커니 선 채, 그는 품안에 귀중하게 챙겨 넣은 왕궁 무투대회 참가권을 꾹 쥐어 본다. 이제 겨우 한 고비를 넘은 셈이니까 몸을 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숨 돌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보름이 가까웠는지 유독 커다란 달 때문에 곳곳에 하얀 달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토도로키는 눈을 들어 커다랗게 뜬 달을 바라본다.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야!”


흰 달빛을 받아 멀리서부터 반짝이며 빛난다. 붉은 망토를 헐렁하게 걸친 공자는 급히 뛰어왔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네놈, 그렇게 사라지면 대체 어떡하는데. 뭐라도 연락을 했어야지!”

“…….”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가뜩이나 소문도 흉흉하고 도시가 죄다 난리가 났는데! 키리시마도 매생이 머리 새끼도 하나같이 모른다고만 하지, 대체 무슨 일이 있던……!”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달려가서 바쿠고를 와락 껴안았다. 바쿠고의 거친 숨소리가 가라앉을 때까지 잠자코 끌어안고만 있었다.

바쿠고는 조용히 팔을 올려 토도로키의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토도로키는 한참 만에 속삭였다. 목소리가 젖어 있다는 것은 뒤늦게야 알았다.


“네 생각 했어.”


붉은 우단 망토 위의 흰 귀가 점차 망토와 똑같은 빛깔로 새빨갛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나도거든.”


바쿠고가 작게 툴툴거렸다. 꿈 속의 바쿠고와는 하나도 닮지 않았지만 토도로키의 마음은 마냥 벅차올랐다.


“……고맙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토도로키가 겨우 몸을 떼면서 머쓱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바쿠고는 눈매가 날카로운 눈을 일순간 둥그렇게 뜨더니, 다음 순간 씩 웃었다.


“고마우면 술이나 한 잔 사라고. 상금 받았잖냐?”


너무 밝은 달빛 때문에 어지럽다. 토도로키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다. 꼭 취한 것처럼 팔다리가 흐느적거렸다.





여느 때처럼 키리시마의 객사에서, 토도로키는 독한 술과 호화로운 안주가 가득 차려진 술상을 가운데에 둔 채 바쿠고와 마주앉아 있었다. 바쿠고가 거침없이 망토를 벗어젖힌 덕분에 토도로키도 주춤거리면서 복면이며 망토를 하나씩 벗어 내렸다. 둘 다 아까의 사건으로 엄청나게 긴장해서인지 술이 유달리 달게 느껴진다. 토도로키는 바쿠고가 넘치도록 가득 따라 준 잔을 입가에 대면서 물었다.


“예상하고 있었나, 그런 일이 있을 걸?”


“시절이 하수상하다고.” 바쿠고도 질세라 술을 넘긴다. “소문을 믿진 않아도 알아 두긴 해야 하니까. 근데 네놈에 관한 이상한 얘기들이 자꾸 돌잖아.”


토도로키는 어쩐지 오기가 생겨서 술잔을 벌컥 들이킨다. 키리시마가 주고 간 술은 목넘김이 무거운 편인데도 걸림이 없이 내려간다.


“첩자니 반역자니… 북국의 창부 출신이니 하는 말들 말이지.”

“아, 그래. 웬 놈팽이가 퍼뜨리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꼭 선동이라도 당한 것처럼 빠르게 퍼졌다고.”


술잔을 내려놓자 뒤늦게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뺨과 귀가 붉어진 토도로키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중얼거렸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


“뭐?”

“반쪽은 북국 피가 섞였고, 창부 짓도 서슴지 않으니까… 아예 틀린 소문도 아니다.”


바쿠고는 인상을 찡그린다. 나직하게 말을 건넨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좀 마라.”


토도로키는 복잡하게 가라앉은 심정으로 그를 쳐다본다. 질문을 던질까 말까 수차례 망설였지만,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바람에 결국 마음을 정한다.


“바쿠고. 너는… 나를 어떻게 믿나?”

“뭐?”

“내가 첩자나 반역자나… 너에게 해를 끼칠 짓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어떻게 믿냐고.”


진지하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어째 바쿠고는 술잔을 든 채 피식 웃는다. 같잖은 질문을 들었다는 표정이라서 토도로키는 당황했다.


“야, 보통 첩자나 반역자들은, 공작가 아들이랑 단둘이서 같이 있게 되면 수작을 못 부려서 안달이라고. 정보를 캐내든, 알랑거리든, 숨길 게 있어서 수상쩍게 굴든 말이다. 나 정도 되면 손에 쥐고 있는 정보는 당연히 고급이고, 적어도 이 나라에서 반역을 도모할 생각이면 우리 할망구랑 얽히지 않고는 불가능하니 뭐라도 해 보려고 덤벼드는 쪽이 이득이지. 그런데도 네놈은 나한테 바란 게 아무것도 없잖냐. 처음부터 네놈이 바란 건 정체를 밝히지 말아 달라는 것 하나뿐이었잖아?”

“그건…….”

“첩자치곤 너무 얌전했다고, 쇼토 공.”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레 덧붙인다. “그리고, 창부 짓을 했는지도 딱히 잘 모르겠던데. 네놈은 누가 봐도 그린 듯한 초짜였거든.”


토도로키의 목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꿈에 나왔던 바쿠고의 반짝이는 흰색 피부를 떠올렸고, 그 다음에는 새벽빛을 받아 하얗게 번득거리던 바쿠고의 목덜미가 문득 생각났다. 토도로키는 순간 오한을 느낀다. 간신히 고개를 떨어뜨린다.


“몰랐군.”


끝내 찌르지 못했던, 혈관이 끊겨 피범벅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목덜미. 등골이 자꾸만 오싹했다.




밤이 무르익어 갈수록 둘 다 술기운이 올랐다. 토도로키는 이제 얇은 실내복 하나만 걸친 채 멍하게 눈앞의 바쿠고를 쳐다본다. 바쿠고 역시 평소보다 옷이 흐트러져 있었다. 가슴팍이 다 드러날 정도였다.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수십 번 다짐했는데도, 토도로키는 물잔 안에 던져진 각설탕처럼 속절없이 녹아 간다. 경계를 풀고 자꾸만 유예를 만든다.


“아, 줄 게 있다.”


얼굴이 옅은 다홍색으로 붉어진 바쿠고가 품 속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토도로키에게 불쑥 내민다. 토도로키는 바쿠고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눈 결정 모양의 섬세한 은 장신구였다. 위에 붉은 보석을 촘촘히 박아 장식했다.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일단은 받아들지 않았더니 바쿠고가 뺨을 붉힌다.


“받아라, 좀!”

“……이게 뭔가?”

“시장에서 주운 거다! …네놈을 닮았길래.”


그제야 토도로키는 뻣뻣하게 손을 뻗어 받아들고 자세히 살펴본다. 딱 봐도 장인의 손 아래서 세밀하게 가공된 것 같은 눈 결정은 객사의 창문으로 스며든 달빛을 받아 하얗고 붉게 빛나고 있었다.


“네놈 어머니가 북국 출신이시라면서.”

“……그렇다.”

“그리고 네놈 머리털은 빨간색이기도 하니까! 아니, 왜 이걸 설명해야 알아듣는 건데?! 받자마자 알아채야 되는 거 아니냐고!”


바쿠고가 버럭 역정을 내면서 벌컥 술을 들이킨다. 쑥스러운지 홱 돌아간 고개 아래의 목이며 가슴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토도로키는 장신구를 쥔 채로 멍하니 바쿠고를 쳐다본다. 돌려줘야 해. 더 이상의 연결점은 필요없다. 저자와는 오늘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이런 걸 받아서 여지를 남기면 안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욕심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오늘이 마지막이고, 다신 볼 수 없을 사람이라면. 역시 약간의 흔적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만난 적이 있었다는 증표 하나 정도는.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침묵 끝에 토도로키는 받아든 장신구를 옷 속에 넣는다.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불쑥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어머니는… 북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셨던 것 같다.”


그는 바닥을 쳐다보면서 말을 계속해 나간다. “나에겐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적 없었지만… 서재의 책에서 항상 북국의 그림이 그려진 부분만이 닳아 있었으니까… 북국을 그리워하셨던 거라고 생각했다.”


“…….”

“어머니가 그리워하는 곳이라면 분명히 아름다운 곳이었겠지.”


가라앉은 수면처럼 무표정하던 토도로키의 얼굴에 일순간 알 수 없는 파동이 일었다. 마치 회한과도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후작궁에서 태어나서, 바깥에 제대로 나와 본 적이 없다.”


그 말을 하는 토도로키는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한 표정으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내륙에서만 자랐지. 바다는 그림으로 본 적 있지만… 한 번도 가까이서 본 적은 없어.”


“같이 가면 되잖냐.” 바쿠고는 순간 울컥 차오르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깟 바다, 여기서 별로 멀지도 않다고. 가면 되잖아.”


토도로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가볍게 말을 돌린다.


“저기, 북국엔 진짜로 눈이 덮여 있어?”

“그래. 항구부터 꽁꽁 얼어붙어서 눈이 잔뜩 쌓여 있다고. 시도때도 없이 눈바람이 몰아치고… 날씨가 변덕스럽기 짝이 없지.”

“별로 아름답게는 안 들리는데.”

“9년씩이나 눌러붙어 있으면 둔감해지지 않겠냐? 첫인상은 사나워도, 계속 있다 보면 익숙해지니까.”

“……그런가.”


토도로키는 마치 그 장면을, 거센 눈이 몰아치고 하얗게 얼어붙은 북국의 항구를 상상이라도 해 보는 듯 지그시 눈을 감는다. 나풀나풀 내려앉은 속눈썹의 색깔이 달빛을 받아 오묘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바쿠고의 심장이 속수무책으로 울렁거린다.


“아름답다고, 그래도.”

“……아?”


속눈썹이 슬쩍 들리면서 그 사이의 구슬 같은 두 눈이 바쿠고를 도로 쳐다본다. 바쿠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북국, 말이다! 아름다운 곳이 많다고!”

“그런가.”

“그래! 호수랑 산으로 유명하니까! 사시사철 눈이 덮여 있어서 여행객들한테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잘 알고 있네.”

“9년 살았다고! 친구놈이 놀러 오면 등산 여행에 동행하게 되는 게 당연하잖냐!”

“의외군, 그건.”

“대체 어디가 의외냐! 무시하지 말라고!”

“친구, 여행, 등산, 동행… 정도인가.”

“장난하냐!”


얼굴이 시뻘개진 바쿠고가 성질을 부린다. 무의식적으로 술잔을 입가에 갖다댄 채 토도로키가 풉, 웃었다. 그러나 자신이 웃었다는 사실을 깨닫은 순간 입가가 무섭게 뻣뻣해진다.

이러면 안 돼. 칼자국이 가득한 왼팔을 꾹 쥔다.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세게 짓눌리면서 뿜어내는 고통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차려. 여기서 긴장을 풀면 안 돼. 아직 끝난 게 아니야…….


“토도로키.”

“…….”


술기운에 벌게진 얼굴로도 어딘지 진중하게, 바쿠고가 토도로키를 똑바로 쳐다본다. 빨려들어갈 듯 소용돌이치는 붉은 눈을 무심코 바라본 순간 토도로키는 참을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당장에라도 일어나서 방을 박차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굳은 것처럼 도저히 움직이지 않는다. 홀린 듯 바쿠고를 쳐다보게 된다.


“나랑… 약조할 수 있겠냐.”

“…뭘…….”

“모든 게 끝나면… 나랑, 바다에 같이 가 주겠다고 말이다.”


입술이 굳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토도로키는 얼음 조각처럼 우두커니 앉아서 침묵을 지킬 뿐이다. 한참 만에 처참할 정도로 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튀어나왔다.


“어째서……?”


그 질문만은 해서는 안 되었다. 스스로 발목을 자른 셈이었다. 바쿠고는 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존재감으로 토도로키를 짓누르면서 눈을 맞춘다. 덫처럼 옥죄어 온다. 붉어진 얼굴로 힘겹게 말을 고르더니, 떨리는 입술 사이로 툭, 일견 평이할 정도로 던져진다.


“네놈을 연모한다.”


그 순간 토도로키는 아찔해져 눈을 감았다.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을 끝내 듣는다. 얼음이 녹는 소리를.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토도로키는 길고 나긋한 상상 속으로 젖어들었다. 몸통이 떨릴 정도로 낮은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그는 소금 냄새가 나는 해풍을 맞으면서 바다를 향한 채 서 있었다.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무언가를 상상으로 채우는 능력을 대부분 차단해 버린 탓에, 그 낯선 감각에 몸을 열고 더듬더듬 맞추어 나가는 데에는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머리 위로는 정수리를 뜨겁게 데우는 태양빛이 쏟아진다. 밝은 빛에 눈부셔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그는 눈을 감거나 피하지 않고 고집스레 새파란 바다를 쳐다보고 있다. 다음 순간 자신이 손에 뭔가를 꼭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방금 받은 장신구일까. 하지만 고개를 돌려 바라본 순간 그게 바쿠고의 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수평선 너머를 건너다보고 있던 바쿠고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다. 부서지는 태양빛과 파도 소리 사이에서 씩 웃는다. 젊음과 힘에서부터 끓어 넘치는 자신감과 흰 태양 같은 활력.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력.


“착각하지 마라.”


그를 현실로 부여잡고 도로 이끈 것은 왼팔의 상처였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참는다. 구역질 대신 그는 말을 토한다.


“몇 번 잤을 뿐인 사이다. 그런 거창한 이름은 역겨워.”

“……뭐?”


놀라서 흔들리는 눈을 부러 똑바로 들여다본다. 지금 이 순간 감히 피투성이로 난도질한 뒤 버리고 가는 것이 무언지 똑똑히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창부 노릇을 했을 뿐이잖아. 멍청하게 굴지 마라.”

“……토…도로키.”

“마지막으로 자고 싶은 거라면 네 마음대로 해라.”


이를 악물고 옷을 풀어헤친다.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혀를 깨물면서 윗옷을 당겨 벗고 바지의 걸쇠까지 풀었다. 무릎걸음으로 기어 다가가서, 황망하게 올려다보고 있는 바쿠고 위에 올라탄다. 문득 이 행위를 진짜 원하는 게 어느 쪽인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흐트러진 바쿠고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더듬는데 갑자기 팔이 홱 낚아채였다. 몸이 훌렁 뒤집히면서 바쿠고가 도로 내려다보는 자세가 된다.


“웃기지 마라, 네놈.”


분노로 떨면서 바쿠고가 씹어뱉듯 외친다. “네놈 수작질엔 더 이상 안 속는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하염없이 떨리는 손을 감추면서 토도로키가 냉정하게 말한다. 바쿠고는 답답한 듯 토도로키를 쳐다본다. 그의 표정은 일견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너, 엔데버를 죽이려는 진짜 이유가 뭐냐?”

“…….”

“복수 같은 같잖은 소린 그만해라. 네놈은 복수 같은 덴 관심이 없잖아.”


멍하니 올려다보던 토도로키가 바람 빠지듯 웃었다.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든 자에게 복수할 생각이 없다고? 바쿠고, 내가?”


“…….”

“내 삶을 망친 놈한테… 복수할 생각이 없다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서늘하게 노려보는 눈을 간단히 무시하면서 바쿠고는 오히려 코웃음을 친다.


“네놈의 머리가 비정상이라는 말을 듣고 싶은 거면 계속해라. 말릴 생각 없으니까.” 그가 계속해서 내뱉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복수하고 싶어하겠지. 근데 토도로키, 네놈은 아니잖냐? 머리가 이상한 네놈 말이다.”


“…….”

“네놈은 아니잖냐. 어머니와 형제들을 버리면서까지… 복수하고 싶어하는 게 아니잖아……?”


숨 대신 검고 끈적끈적한 물이 기도를 타고 넘어가는 것만 같았다. 손을 슬며시 뻗으려던 순간 도로 바쿠고에게 손목이 틀어잡힌다.


“날 얼려 버릴 생각이냐? 쇼토 공?”

“……놔라.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마.”

“대답부터 듣고 나서 놓지.”

“헛소리만 계속 할 거면 난 이만 가겠다. 몸을 섞지 않을 거라면 놔줘.”


어깨를 퍽 치며 밀어내지만, 바쿠고는 쉽사리 밀리지 않는다. 집요하게 토도로키를 바라봐 온다. 대답을 듣지 않으면 절대로 토도로키에게서 떨어나가지 않을 듯 단단한 눈빛이었다.


“말해라, 토도로키. 나를 믿고 얘기해.”

“…….”

“내가 분명, 도와 주겠다고 했잖냐? 한 번이라도… 제대로 믿어 달라고.”


그 목소리는 너무나 견고해서, 꼭 진짜처럼 들렸다. 한순간이나마 정말 믿어도 될 것처럼 들렸다. 그가 전부 그만두자고 설득하면, 복수니 뭐니 하는 번잡한 일들 따위 다 잊어버리고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하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거대한 자석과 같은 힘으로 토도로키를 끌어서 덫처럼 감긴다.

토도로키는 눈을 감는다. 녹아 가는 모든 것들이 도로 얼어붙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너를 믿으라고?”


그는 일부러 몸을 늘어뜨렸다. 마치 유린해 올 손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렇게 했다.


“처음 만나자마자 강간당한 상대를 믿으라고? 내 약점을 잡아서 나를 창부 취급한 사람을… 내가 설마 믿을 거라고 생각해?”


그다음에는 눈을 치뜨고 비웃는다. 심지어 충격에 얼어붙은 바쿠고의 뺨을 툭 치면서 조롱하듯 뱉기까지 했다.


“왜 아무 짓도 안 해. 그때처럼 범해 보라고, 카츠키 공. 나를 착취하겠다고 했잖아. 얼마든지 그렇게 해라. 창부면 창부답게 대하면 그만이다.”

“…….”

“연모 같은 역겨운 소린 그만두고. ……기분 나쁘니까.”


그제야 툭, 손이 떨어졌다.

힘없이 밀리는 바쿠고에게서 겨우 빠져나온다. 허겁지겁 떨리는 손으로 옷을 줍는다. 자꾸만 신물이며 구역질이 올라오는 이유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다. 재빨리 옷을 주워입고 망토 안의 단도와 무투대회 참가권이 멀쩡히 잘 있는지 확인한다. 바쿠고는 밀려난 그 자세 그대로 주저앉아 있다. 생기가 빠져나간 채 우두커니 토도로키를 바라본다.


“더는 볼 일이 없겠군.”

“…….”

“아, 오늘 도와준 건 고마웠다.”


돌아서서 방을 나간다. 혹시나 뒤에서 잡는 목소리가 들릴까 봐 바짝 긴장했지만 무거운 침묵이 따라올 뿐이었다.



객사의 계단을 완전히 내려왔을 때서야 깨닫는다.

장신구, 돌려주고 왔어야 했는데.

손 안에 쥔 눈 결정 모양을 쳐다보면서 망설인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세밀한 은 세공과 정체 모를 붉은 보석. 버릴까. 시장에서 아무렇게나 파는 물건이다. 그냥 바닥에 던져 버리면 그만이다. 시장에서 주운 거다. 네놈을 닮았길래. 같이 가면 되잖냐. 같이 바다에 가자. 모든 게 끝나면.


“…….”


물건에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는 건 어리석다고 스스로 알고 있다. 방금 바쿠고의 신뢰를, 진지하게 고백해 온 마음을 처참히 짓밟은 주제에 감히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이기적인 일이다. 하지만 만일 숨이 끊어지는 순간 뭔가를 지닐 수 있다면 그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주었던 남자의 흔적을 가슴 가까운 곳에 하나쯤 가지고 싶었다. 짧은 고민 끝에 장신구를 도로 품 속에 집어넣는다. 여관으로 향하는 길을 천천히 걷는다. 머릿속을 채우는 것들을 느리게 지워 나간다. 애초에 선택할 수 없었던 것들이니까 미련도 둘 필요 없다.




여관으로 돌아와 대문 앞을 지나려는 순간, 누군가와 어깨가 퍽 부딪혔다. 토도로키는 얼얼한 통증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여기까지 와서 시선을 끌어 봤자 도움이 안 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죄송합니다.” 중얼거리면서 돌아 빠져나오려는데, 갑자기 코와 입이 우악스럽게 틀어막힌다. 동시에 비릿하고 매콤한 냄새가 들이닥친다.

마비풀이었다. 보통 독한 종류가 아닌 듯 순식간에 관절이 뻑뻑하게 굳는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토도로키가 팔다리를 힘껏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지탱하던 무릎이 무너졌다. 상대는 복면도 벗기지 않고 토도로키의 정체를 확인했다. 확실한 정보를 가진 자였다. 토도로키는 이를 악물고 조금이라도 고개를 돌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얼굴이라도 확인해야 돼. 누구야. 대체 누구야?

버둥거릴 새도 없이 사지가 완전히 굳었다. 그대로 축 늘어져 쓰러지는 토도로키를 받아 안은 남자가 어깨에 짐짝처럼 떠멘다. 안 돼, 움직여야 돼. 끌려가면 안 돼. 아직은 안 돼,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움직이지 않는 왼쪽에서 불꽃을 피우려던 순간 뒷목에 고통스러운 충격이 가해진다. 눈앞이 시커멓게 점멸했다.




* * *




깨질 듯한 두통에 눈을 뜨자 팔다리가 전부 구속되어 있었다. 비강이며 뇌에 송곳 끝을 집어넣고 쑤시는 듯한 고통이 무섭게 밀려오기 시작했다. 익히 알고 있는 마비풀의 부작용이었다. 토도로키는 헛구역질을 하지 않으려고 이를 떨어져나가라 깨문 채 겨우 뻣뻣한 머리통을 돌려 주변을 둘러본다. 몸이 이제 막 약기운에서 풀려나는지 다리며 배에 경련이 일고 있었다.

토도로키가 갇혀 있는 곳은 차가운 돌벽으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방이었다. 군데군데 하얗게 곰팡이가 슬고 공기 중에서는 물비린내가 풍기는 회색의 돌벽.

아주 오래 전, 와본 적 있는 공간이다. 기억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쇠사슬을 부수면서 기어오른다. 머리의 껍데기를 뚫고 살금살금 기어나와 토도로키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본능적으로 개성을 쓰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섬뜩해진 토도로키가 그제야 공중에 붕 뜬 팔과 다리에 씌워진 칼을 쳐다본다. 코끝에 아직까지 남은 풀 타는 냄새를 알아차린다. 개성을 사용할 수 없도록 마비풀이 같이 쑤셔넣어져 있다.


“분명… 주어진 것에 순응하라고 했었는데.”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목소리가 정수리를 적시면서 천천히 흘러내렸다.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고통과 분노로 헐떡거리던 토도로키가 마침내 토하듯 어눌하게 쏟아냈다.


“……개, 자식!”

“오랜만이구나.”

“…….”

“쇼토.”


고개를 들고 정면으로 쳐다본다.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기이한 빛이 번득거렸다.


“가출은 즐거웠나.”


그는 위압적인 덩치로 서서히 다가와서 고개를 숙여 토도로키와 눈을 맞춘다.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면서 참았던 헛구역질이 결국 치밀어올라 터졌다. 우욱, 신물이 올라온 토도로키가 견디지 못하고 입에서 불투명한 액체를 줄줄 토해 냈다. 엔데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제 준비가 됐겠지, 쇼토.”

“…놔, 이거 놔, 아… 안 돼… 풀어, 줘…….”

“네 마음만 준비되면 전부 끝난다.”

“싫, 어… 안 한다고 했잖아, 싫어, 나는 절대…….”


절망으로 흐려진 눈이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다시 헛구역질을 토했다. 연이은 토악질 때문에 토도로키는 피골이 상접한 듯 창백해졌다. 혀라도 깨물려고 했지만 마비풀 때문에 입이 굳어서 단번에 크게 힘을 주는 움직임은 아예 할 수 없다. 무력하게 묶여 있는 토도로키의 눈에서는 점차 분노가 형형하게 끓어오른다. 그가 어눌하게 새는 발음으로 으르렁거렸다.


“차라리 죽여.”

“애처럼 굴지 마라. 내 최고 걸작을 쉽게 죽일 수야 없지.”

“…….”

“너에겐 할 일이 있지 않나.”


입안에서 여태 떠도는 시큼한 탄내와 비린내가 침과 함께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간다. 그는 불꽃이 비쳐 너울거리는 엔데버의 눈동자를 태워 죽일 것처럼 노려본다.


“…읏, 하나도… 변하지 않았, 큭, …당신은… 당신은 미쳤어……!”


엔데버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는 고집스러운 막내아들을 다루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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