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과는 멀리 떨어진 곳, 얼음과 눈으로 덮인 지역인 북해빙궁은 일대를 거머쥔 실력에도 불구하고 칩거하는 무파로 유명했음. 혹한과 눈보라가 어찌나 심한지, 어지간한 무림인도 북해에는 다가가지 못했음. 그들이 어떻게 저 추위를 극복하고 살아가는지는 늘 무림의 수수께끼였음. 정도에 오른 고수여도 버티기 힘든 저 추위 속, 북해인은 어떻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혹자는 그들의 궁 안에 빙정(냉기의 정수. 내공 증진의 영약)이 나는 샘이 있어서라 말했고, 혹자는 그들 자체가 아예 냉기이기 때문이라 말했음. 


그리고 기어코 북해에 발을 들였다 간신히 살아나간 누군가가 책을 내어 말하길, 북해의 이들이 희디흰 설원에서 얼음을 다루는 모습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모르겠다 하였음. 그들의 손에서 산같은 얼음과 눈이 쏟아져 내리며, 제가 본 그들의 피부는 얼음보다 파랗고 눈은 피보다 붉었다는 말도 더해졌음. 눈이 마주치자마자 줄행랑을 칠 수 밖에 없었다고. 그들이 중원으로 나오지 않는 것에는 역시 이유가 있었다고. 그들과 비교하면 어두운 피부로 알려진 남만궁의 무림인들이 아름다울 지경이라 몇 번이나 강조했음.   


하지만 북해빙궁에 관한 어지간한 소문은 모두 거짓이었음. 그들도 중원의 다른 무림인들처럼 똑같은 사람이었음. 푸른 피부라니, 북해인의 대다수가 흰 피부이기는 했으나(해가 잘 들지 않아서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유로) 말도 안 될 소리였음. 붉은 눈도 헛소리였음. 마교나 혈교도 아닌데 그들이 붉은 눈을 가졌을 리가. 


다만 소문 중 비슷하게 적중한 것도 있었음. 북해빙궁의 모든 이들은 얼음과 눈을 다루는 무공에 능했고, 그렇기 때문에 추위는 그들의 적이 못되었음. 손에서 얼음과 눈이 나가는 것도 비급 중 하나일 뿐이었음.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라면 벌벌 떨다 얼어 죽을 북해의 추위에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임. 물론, 이것은 가문의 무공이기 때문에 밖으로 전해질 일은 없었음. 


그리고 로키는 그 북해빙궁의 셋째 소공자였음.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로키는 어린 시절부터 몸이 좋지 않았는데, 날 때부터 추위에 적응한 북해의 어린아이들과는 다르게 그는 날씨에 따라 자주 열을 내고 앓았음. 이는 로키의 기가 흐트러져있기 때문이었음. 미숙아이기 때문인지, 혹은 애초에 이렇게 태어날 운이었는지, 로키의 기는 음양이 분명하지 못하고 몹시 흐렸음. 


북해는 얼음과 눈의 땅. 음의 기운이 강한 자가 쉽게 적응하며 살아남는 곳이었음. 하지만 로키는 음기도, 그렇다고 양기가 우세한 것도 아닌... 정말로 흐릿한 기를 보였음. 로키의 혈을 짚으며 진단을 할 때마다 의원은 고개를 저었고, 가주는 근심에 찼음. 약한 자는 품지 않는 것이 냉혹한 빙궁의 법도였으나... 그는 차마 막내아들을 내치지 못했음. 아들을 낳다 숨을 다한 정인을 생각하면 더 그랬음. 그녀는 죽어가며 로키의 이름을 붙이고 아이를 지켜달라 부탁했음. 


쌕쌕대며 힘겹게 숨쉬는 로키를 보며 가주는 깊은 고민에 빠졌고, 곧 큰 결단을 내렸음. 그는 북해 깊은 곳에 사는 천년자패의 진주를 가루로 내 로키에게 먹였음. 내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빙정을 먹였다가는 어떻게 될 지 모르므로, 신비한 영물을 먹이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보았던 것임.


그리고 며칠 뒤 내내 자리에 누워있던 셋째 소공자가 깨어났음.


 



순도높은 음기 가득한 천년자패의 진주는 로키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도왔음. 하지만 로키가 무공을 익히고, 성장할수록 슬슬 그 부작용이 드러났는데.... 바로 그의 음기가 짙어도 너무 짙어졌다는 것이었음. 음기는 북해궁의 무급을 배우고 기후에 적응하는 데에 도움을 줄 뿐이지, 지나치게 많아지면 균형을 잃는 것이 당연했음.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진 것이 사람이요 이를 단련하는 것이 무공의 기초였으니. 거기다 로키는 사내였음. 양에 속한 이어야 했다는 것임. 


하지만 어릴 적 먹었던 진주의 음기는 로키의 단전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로키의 내공이 쌓이는 것과 비례해 제 힘을 키웠음. 멀쩡하던 로키가 갑자기 고꾸라지며 기절하는 일이 빈번해졌고, 북해빙궁의 가주는 옛날과는 다르게 양기를 돋울 영약을 끌어모으며 사색이 되었음.


그러나 겨우 구한 태양환과 공화단도, 이미 로키의 일부로 성장한 천년자패의 진주를 잠재우는 데에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음. 잠시 양기를 쏟아부어 음기를 가라앉히는 것 정도만 가능할 뿐이었음. 웬만한 사람이라면 태양환 두 개를 한번에 먹었다가는 폭발하는 양기에 뜨거움을 견디다 못해 혼절할 텐데, 로키는 이를 먹고도 멀쩡했음.


또다시 의원이 로키의 방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게 되었음. 로키는 좋아하던 무공 수련도 단검 연습도 하지 못한 채 방에만 머물렀음. 북해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한기와 음기마저 작금의 그에게는 위험했음. 로키는 아슬아슬하게, 끊어질 듯한 외줄을 죽 타고 있었음. 


로키가 의원이 내미는 탕약을 받았음. 그릇을 받은 손가락이 잠시 의원과 스쳤고, 어지간한 냉기에는 미동도 하지 않을 의원이 흠칫했음. 차고 넘치는 음기 탓인지 로키는 기골이 장대하고 탄탄한 그의 형제나, 가문의 사제들과는 달랐음. 키는 크나 선이 분명치 않았고, 손가락은 가늘었으며 얼굴이 유독 희었음. 검은 머리카락과 흰 피부가 얼마나 대비가 되었는지, 입술이 푸르게 질리는 날일 때면 몹시 투명하고 아득해 보였음. 체온도 빙궁의 누구보다 낮았음. 그리고 로키 본인은 이것을 싫어했음.


로키가 약을 단번에 들이키고 자조했음. 



'그래서, 나는 이렇게 죽을 때까지 방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 건가?'

'흠흠, 소공자, 이는 가주님의 염려입니다.'

'.......'


이죽대려던 로키는 한숨을 내쉬었음. 그건 그랬음. 누구보다 저를 아끼는 것이 그의 아버지였음. 빙궁의 가주로 차갑고 냉혹하기로 유명한 라우페이지만 연약한-로키는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나- 막내에게는 사족을 못 썼음. 로키 때문에 그는 달에 몇 번이고 가문을 떠나 중원으로 나갔음. 로키의 병....과 같은 체질을 돌려놓을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그리고 그가 공을 들여 여러 술식과 부적을 두른 덕분에, 로키의 방은 언제나 양기가 가득 고여있었음. 저를 진맥하러 온 의원이 도중에 방을 나갔다가 들어와야 할 정도로, 북해인에게는 지나칠 양기였음. 당연하게도 로키에게는 아니었지만. 로키의 몸은 밑 빠진 독처럼 양기를 머금지 못하고 계속해서 줄줄 흘려보냈으므로. 아, 음기로 만들어진 독이라 해야겠군. 로키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음.



'상태는 어떠한가?'


방으로 라우페이가 들어왔음. 로키의 손윗형제들도 굳은 얼굴로 뒤를 따랐음. 지루한 얼굴을 하는 건 로키밖에 없었음. 의원이 고개를 저었음.


'현상유지조차 되지 못합니다. 방에 머물러 있어 다행인 수준으로.. 이렇게 지속되는 것도...'

'영약을 더 구했네. 그것도 안 되는 것인가?'

'약은 일시적인 방편일 뿐. 공자님의 상태는 그러한 것으로 치유되지 않지요. 허나...'


의원이 로키를 힐끗거리며 눈치를 봤음. 뭐지? 로키가 미간을 좁혔음. 라우페이가 턱을 몸 쪽으로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음. 짧은 일갈이었음. 그러자 의원이 잽싸게 방을 나갔고, 로키는 아버지와 형제를 자세히 볼 수 있었음. 라우페이는 덤덤한 얼굴이었으나, 그의 형제들은 입술을 깨물고 눈을 피하는 모습을 보였음. 


뭐지? 로키가 고개를 갸웃했음. 그리고 또렷하게 물었음. 



'무엇이지요? 그가 드디어 제 죽을 날을 알리기라도 했습니까?'

'로키....'

'아버지. 이것은 미친 짓입니다.'


바닥을 보고 있던 로키의 둘째 형이 불쑥 말했음. 그러나 라우페이는 단호했음.


'네가 나을 방도가 있다.'

'오. 좋지 않은 느낌이 드는군요.' 로키가 흥얼댔음.


그러자 이번에는 세 사람이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뱉었음. 그리고 정말로 미친 소리가 날아왔음.


'너를, 무림맹주의 아들과 혼인시키기로 했다.'


로키는 홱 고개를 쳐들고 눈을 홉떴음.


'뭐라고요?'

'영물과 환으로도 네 기운이 안정을 찾지 못하니, 최후의 수단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여러 의원에게 물어도 답은 하나가 되었지. 양기 강한 이와 결합해 기운을-'


라우페이가 뭐라뭐라 말을 이어갔지만 로키는 반도 제대로 듣지 못했음. 내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로키는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음. 


'저더러 지금 다른 사내의 아래에 누워 남은 여생을 보내라는 말을 하십니까?'

'너를 위해서다.'

'그렇다면 저는 사양-'

'그리고 가문을 위해서이기도 하지.'


라우페이는 말을 이었음. 최근 마교가 재등장해 무림이 뒤숭숭해진 상황이고, 북해궁마저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음. 마교라. 수십년 전 마교가 일으킨 피바람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 무림의 모두가 알았음. 그때에 분명히 온 정파가 힘을 모아 마교인의 맥을 끊었는데. 기어코 다시 일어난 건가. 로키는 서적으로 접한 바 있는 마교의 잔혹함을 떠올렸음. 


그리고 라우페이의 말에 따르면 놀랍게도 이 혼약은 무림맹주가 제안한 거였음. 중원에 나갔던 라우페이에게 은밀하게 접촉해 온 그는 로키의 상태에 관해서도 이미 숙지하고 있었으며, 로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환단마저 내밀었다 했음. 그리고 라우페이에게 혼약이 가져다 줄 이점을 상세하게 읊어주었다고. 당황한 라우페이에게 무림맹주는 더욱 진지한 어조로 이것으로 로키의 병증이 나아질 것이라 말했음. 


자랑은 아니나 그의 아들이 로키와는 반대로, 넘치는 양기로 곤란을 겪고는 했다는 것임. 물론 수련을 통해 잘 제어하고 있으나, 두 사람이 결합해... 몸을 섞게 되면 기운이 자연스레 오고갈 것이며 단순히 음양이 중화되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의 내공마저 깊어질 수 있다 했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측면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둘이 혼인하면 나쁠 게 하나 없다는 소리였음. 숨이 턱 막혔음. 로키는 머리를 마구 헤집었음. 아버지의, 아니 가주의 눈빛이 말하는 바는 명백했음. 이미 결정이 난 것임.


로키가 중얼거렸음. 하나 궁금한 것이 있었음.



'.......그 아들 쪽은 사실을 잘 받아들였답니까? 비색을 즐기는 사내라도 되던가요?'

'그건 그가 알아서 한다고 하더구나.'



이쪽과 매한가지로 그냥, 통보하겠다 이거군. 로키는 얼굴 모를 무림맹주를 속으로 마구 욕했음. 그자는 틀림없이 비밀과 수수께끼로 가득한 의뭉스러운 영감일 것임. 자식들에게도 비밀을 감추다 죽을 때나 되어서야 슬쩍 털어놓고 가버리는 그런 인간일 것이 뻔함. 말해보라고요! 이런 말이라도 들었다가는 기절해서 상황을 회피하고, 최강의 적을 몰래 감춰두었다가 죽기 전 유언처럼 '사실 말이지, 너희가 쓰러뜨려야 할 적이 있단다, 잘 해보거라' 할 인간. 로키는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상상에 입술을 마구 비틀었음. 그러다 눈을 깜빡였음. 북해인에게도 잘 없는, 맑으며 투명한 녹색의 눈동자가 흔들렸음.



'무림맹주에게는 분명 혼인하지 않은 딸이 있다 들었습니다만.'

'그건 그러하지. 허나 네 체질이 이렇지 않으냐.'



할 말이 없었음. 로키는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콱 박았음. 이 상태로 여인과 교접한다면 얼마 있지도 않은 양기를 빨려 그대로 기절할 것이 뻔했음.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인가. 로키는 입을 다문채 아버지와 형제를 무시했고, 라우페이는 로키에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일을 진행시키겠다고 전했음. 당연하게도 로키가 북해를 떠나 무림맹주의 아들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 했음. 이 땅에 있는 것보다 해가 잘 드는 중원으로 나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참나, 그동안은 그렇게 중원에 가겠다는 걸 막아놓고. 로키는 삐딱하게 생각했음. 한번만 나갔다 오겠다는 저를 이 방에 콱 가둬두었던 게 누구였는지. 로키가 툴툴거리며 볼멘소리를 냈음. 첫째와 둘째 아들이었다면 당장에 경을 치고 호되게 혼날 경거망동한 행동이었으나, 라우페이의 눈은 촉촉해지기만 했음. 옆에서 로키의 형제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음.


로키가 무시하든 말든, 이미 정해진 혼담은 이루어질 것이었음. 라우페이는 무림맹주-오딘인지 나발인지-가 보냈다던 양기를 채워주는 벽곡단이 든 함을 로키의 자리 옆에 두었고(함을 내밀때 슬쩍 로키의 눈치를 보았으나 로키는 얄짤없이 그를 바라보지 않았음) 살짝 시무룩해진 채 방을 나갔음. 고개를 돌리고 벽만 바라보던 로키는 세 사람이 나간 뒤에야 슬쩍 자개함을 건드려 보았음. 곱게 빚어진 벽곡단이 가득 채워져 있었음. 무림맹주의 지위가 허튼 것은 아닌지, 딱 보기에도 아주 고급스러웠음. 


로키는 대충 하나를 입에 넣고 맹렬히 씹었음. 쓰지 않았음. 로키가 얼굴을 구겼음. 맛이 좋아서 짜증났고, 몸이 훈훈해지며 정신이 맑아지는 게 양질의 양기가 들어있는 것이 분명해 더 짜증났고, 짜증나는데도 양기가 돌자 착실하게 힘이 도는 몸뚱이가 원망스러워서 더 더 짜증났음.


그렇게 해서 로키는 무림맹주의 둘째, 얼굴조차 모르는 남자와 결혼할 팔자가 되었음. 중원으로 떠나는 날이 다가올수록 로키는 점점 우울해졌음. 아버지를 따라 중원에 자주 드다들던 무사를 꼬셔 무림맹주와 그의 가솔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알아낸 정보가 그닥.... 희망차지 않았기 때문이었음. 



무림맹주에게는 자녀가 둘 있지요. 첫째는 혈화라 불리는, 기묘한 무공을 익힌 여인이라 하였습니다.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모를 검과 창으로 대드는 이를 도륙한다 하지요. 그녀를 무시하던 남궁가의 무림인 하나가 손도 쓰지 못하고 제압당한 것이 장안에서 제일 가는 이야깃거리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이르길,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마교와 혈교의 살인귀보다 흉포해질 수 있다 합니다. 


그리고 도련님이 만나실....(닥쳐. 로키가 눈을 부라렸음) 크흠흠, 둘째......도 몹시 강력한 고수로 알려져있습니다. 젊은 데도 내공이 상당하고, 이대로라면 다음 무림맹주도 그가 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지요. (이건 그의 누이인 첫째가 그 자리가 귀찮다고 말한 탓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가문 대대로 전해지던 천뢰검을 물려받았다고 하더군요. 죽어가는 산맥의 정기가 담겨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검인데, 이름 그대로 벼락을 부를 수 있다는 소문이 돕니다. 또 그는... 으음..... 오만하고 성정이 거칠며.... 화를 잘 내고.... 어... 인내가 짧고...



거기까지 들은 로키가 참지 못하고 눈을 뾰족하게 떴고, 저도 모르게 화가 나 괜히 얼음을 쏘아보냈음. 으악! 도련님, 너무하십니다! 들려오는 소리는 무시했음. 다른 이를 찔러보아도 나오는 정보는 비슷했음. 오딘의 두 자녀는 똑같이 성격이 더러운 듯했음. 


로키는 순순히 혼인을 받아들인 척 행동하면서 위기를 타파할 계획을 짜기 시작했음. 중원까지는 빠르게 달려도 나흘이었음. 도중에 빠져나올 틈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었음. 모르는 남자 아래에 깔려 평생을 살라니 미친 소리가 아닐 수 없었음. 그런 미친 짓을 할 바에야 다른 미친 짓을 하고 말지. 로키의 눈이 반짝 빛났음. 





그래서 로키는 도망쳤음. 중원으로 향하는 도중에 도망치려던 계획은 삼엄한 경비로 실행되지 못했으나, 얌전히 중원에 도착하자 라우페이의 경계가 한풀 누그러져 틈을 노릴 수 있었음. 로키는 체념하고 운명을 받아들인 것처럼 순순히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척했고, 지붕과 창 밖에 동행한 무사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을 때 몰래 창문에서 뛰어내렸음. 아버지와 형제, 가솔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평생을 그 이름도 모르는 사내에게 저당잡혀 살 수는 없었음. 



[몸을 고칠 다른 방법을 찾겠습니다] 뜻은 간단하게 남겨 두었으니 뭐... 어떻게든 될 터였음. 아마도. 일행이 무림맹주 일행과 만나기로 한 것은 이틀 뒤였음. 이틀만 잘 버텼다가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면.... 로키는 내공을 갈무리해 기를 감춘 뒤, 그의 특기인 환술을 발휘해 얼굴과 체구에 변화를 주었음. 짙은 먹색의 머리카락은 밝은 갈색으로, 맑은 녹색의 눈은 어두운 고동색으로 변화했고, 묘하게 가늘던 몸선은 거칠고 투박해졌음. 보이는 것만 다르기 때문에 실제로 접촉이 일어나면 이상한 느낌이 들 테지만, 사람과 부딪히는 일은 가급적 피할 것으므로 괜찮을 터였음. 음. 이것도 아마도. 


한가지 걱정인 것은... 몸이 얼마나 버텨줄까 하는 거였음. 약을 다 챙겨오기는 했는데, 과연.... 로키는 슬쩍 소매 속에서 벽곡단을 꺼내 입에 물었음. (보이지 않는 공간에 물건을 저장하는 것 또한 로키가 잘하는 잡기였음) 아직은 넉넉했지만 주의해야 했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중원이 가만히 있어도 양기가 흘러넘치는 곳이라는 사실이었음.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날씨마저 좋으니, 눈닿는 모든 곳이 따스했음. 땅에서마저 훈훈한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음. 확실히, 아버지가 저를 이쪽으로 보내려 한 이유가 있었음. 아니, 그럼 진작에 여기에서 살게 하던가. 로키가 속으로 꿍얼댔음. (이건 연약한 막내를 곁에 두고자 한 라우페이의 고집이었는데, 로키는 짐작하지 못함)


헉. 길거리 좌판의 경대에 환술로 변한 몸을 비추어보던 로키가 숨을 내뱉었음. 저 멀리 사색이 된 가솔들이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음. .....로키는 괜히 찔려서 몸을 돌렸음. 어딘가 들어갈까. 그는 거리를 걸으며 최대한 사람이 많아 제가 쉽게 묻힐 곳을 찾아 힐끔거렸고, 대로 한가운데에 위치한 커다란 식당을 발견했음. 안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도 그러했지만, 외관도 퍽 괜찮아 보였음. 붉고 번쩍이는 등과 장식이 호화롭게 걸려있는 데다, 점원만 해도 스물이 넘어 보이고, 무엇보다 3층 전부가 손님으로 빽빽한 것이, 안에 들어가면 저 하나 쯤은 바로 많은 인파 중 하나에 묻혀 존재감을 잃을 것 같았음. 변한 외모이면 더더욱.



로키가 성큼 안으로 발을 옮겼음.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무거나 주문했음. 더운 채소볶음과 고기볶음, 두부요리는 생각보다도 빨리 나왔고, 점소이의 무신경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맛은 꽤 괜찮았음. 북해에서는 보지 못한 채소들은 입에 제법 잘 맞았음.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사람을 관찰하던 로키는 1층에 앉은 사람들이 다 똑같은 붉은색 장신구를 허리춤에 차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음. 노리개 같기도 한 그것은 네모지고 납작한 검은 돌과 여러 가닥으로 꼬인 붉은 실타래가 연결된 모양새였음. 검은 돌에는 또 무어라 한자로 적힌 듯했으나 거기까지는 보이지 않았음. 로키는 가만히 눈을 뗐음. 더 주시했다가는 관찰하고 있는 것이 들킬 것 같았음. 장신구를 찬 자들의 기운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고.


으음. 뭐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겠지. 로키는 얼른 먹고 자리를 뜨자고 생각했음. 일단 자신은 정보를 모아야 했음. 북해 밖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으니, 어디를 목표로 해야 할 지도 모호하기만 했음. 실력 좋은 의원이 어딘가 있으면 좋을 텐데. 로키가 차를 마시며 생각했음. 가문을 담당하던 의원도 꽤나 실력 좋은 이였지만, 그래도 제 체질을 완벽하게 고치는 것은 엄두도 못 냈음. 묘안이 없을까. 어디 깊은 산 속에 신통한 의원이 하나 쯤 살 법도 한데. 대게 그런 법이 아니었던가? 괴팍한 의원이 산에 틀어박혀 산다거나 하는 설정.... 로키가 뺨을 긁적였음.


그리고 그가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가려 할 때, 소란이 일어났음. 음? 계산대에서 값을 치른 로키가(도망칠 때 슬쩍 빼낸 동전 몇닢이 있었음) 고개를 돌렸음. 대낮부터 얼큰하게 취했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익은 장정 여러명이 한 사내를 툭툭 밀치며 천박하게 욕을 지껄이고 있었음. 취한 이들은 로키가 본 것처럼 붉은색 장신구를 달고 있었고, 가만히 그 손길을 감내하는 사내는 장신구가 없었음. 아, 나처럼 분위기 파악 못하고 일층으로 와버린 사람인가 보군. 로키가 눈썹을 슬쩍 밀어올렸음.



'거기, 다시 말해 보시지? 무어라고? 으응?'

'......'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내가 느릿하게 시선을 올렸음. 로키의 눈이 좁아졌음. ......이상한 자였음. 복면인지 두건인지를 두르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눈과 코는 훤히 보였음. 한쪽 천이 반대쪽 귀끝에 붙어 있는데, 꿰맨 것도 아니고 대충.... 손으로 천을 붙잡고 있음. 뭐야 저거? 바보인가? 로키가 눈을 깜빡였음. 헛기침을 한 사내는 얼른 천을 쥔 손을 끌어올려 콧대 중간까지 가려지도록 했음. ....팔푼이가 맞는 성 싶은데. 로키가 생각했음.


그리고 취한 이들도 정확하게 로키와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음. 저들끼리 크게 웃더니 낄낄거리기 시작함.



'푸핫! 두려워서 얼굴조차 드러내지 못하겠나?'

'크흐흐.'



흥 오른 이들을 보던 얼굴을 가린 사내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음. 그 딴에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취한 행동이겠지만, 입과 코를 가린 천이 날숨으로 무지막지하게 펄럭였기 때문에 전혀 진지한 느낌은 없었음. 더 바보같았음. 로키는 속으로 혀를 찼음. 그리고 아직도 앉은 채인 사내를 가만히 살펴보았음. 청명하니 푸른 눈이 인상적인 남자였음. 눈만 보면 어디가 모자란 이는 아닌 것 같은데. 흐리지도 않고, 탁한 것이 끼어있지도 않음. 총기 가득한 눈이었음. 그러다 로키는 문득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음.


사내에게서는 내공의 기운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음. 흐으음. 이거 재미있어지겠는데. 로키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음. 일반인이라해도 태어날 때부터 다소의 내공은 보유하고 있었고, 사람이 본디 가진 내공을 갈고 닦아 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이 무림인이었음. 로키에게조차 농축된 음기의 내공이 있었고, 눈앞에서 취해 주사를 부리는 저 무뢰배들도 내공이 있었음. 옅고 탁하나 분명 존재했음. 


그런데 저 푸른 눈의 사내에게서는 아무런 기운이 감지되지 않는 거였음.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경우가 딱 두 가지 있었음. 하나, 기가 줄줄 새 죽기 일보 직전의 병자라거나...



'우리에게 시비를 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딸꾹, 알려주지! 이 홍적패의 위용을-'


둘, 미세하게 흐르는 기까지 섬세하게 다룰 수 있는 고수라거나.


'입맛을 버렸군. 식사를 더는 하지 못하겠어.'



사내가 중얼거렸음. 낮고 묵직한, 마치 내공을 실어 전음을 보내는 듯 또렷하게 날아와 박히는 목소리였음. 주변인들이 모두 절로 움찔하고 말 그런 목소리이기도 했음. 사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취객들은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건지 더욱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주먹을 들어 휘둘렀음. 물론, 사내에게 그 주먹이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음.


'으억'


가볍고도 섬세한 움직임으로 사내가 그의 앞을 가로막은 취객들을 쓰러뜨렸음. 탁, 소리도 안 날 손짓이었음. 정확하게 혈도만 짚어 기절시키는 솜씨는 능숙하다 못해 숙련되어 있었음. 로키는 붉은 장신구를 단 취객들이 우수수 쓰러지는 것을 보며 몸을 돌렸음. 역시 중원. 고수들이 많이도 존재하나 싶었음. 막 들어온 식당에서도 저런 이가 있다니. 로키는 살짝 눈을 일그러뜨렸다가 풀었음. 제 처지가 실감났기 때문임. 몰래 달아난 지금, 북해궁의 무공을 드러내놓고 사용했다가는 당장에 위치가 발각될 것이 뻔함. 그렇다는 건 무공은 꿈도 못꾼다는 거였음. 단검술에도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글쎄... 저 사내 같은 고수와 맞닥뜨리는 일이 발생한다면 단검은 별 도움이 안될 성 싶은데. 자신은 점혈을 공부하지도 않았고...


아니지. 로키가 슬쩍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음. 저런 이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되지. 그래. 로키는 최대한 몸을 사리기로 마음먹었음. 길거리에 저 이상하게 얼굴을 가린 사내 같은 이가 깔려있는 거라면 작은 시비라도 다퉜다가는 그대로 세상을 하직할지도 모름. 음? 로키는 저 사내가 천을 잡은 한 손을 내리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음. 저이는 정말로, 오른손 하나로 사태를 마무리한 것임. 그제야 그가 평범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무리가 슬금슬금 쓰러진 이들을 못 본 척하며 물러났고, 로키 또한 보지 않고 듣지 못한 척 눈을 돌렸음. 


'....?'


채 가려지지 않은, 아랫 속눈썹이 도드라진 그의 푸른 눈동자와 제 눈이 잠시 부딪힌 것 같은 것은... 기분 탓일 거였음. 틀림없이.






'가진 것 다 내놔!!'


그리고 식당에서 나온지 한 시진도 되지 않아 로키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로키가 사납게 눈을 일그러뜨렸음.


일의 발단은 사실, 로키에게 있었음. 환술로 얼굴과 체구를 바꾸었다고는 하나, 그 내실은 여전히 로키였음. 중원에 처음 나와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한 천둥벌거숭이였단 말임. 로키는 좌판에 놓인 물건들을 유심히 관찰하거나, 지나가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나무와 풀을 흘낏거려댔음. 흰 눈과 푸른 얼음만이 가득한 북해, 그것도 그의 방 안에서만 살다가 온갖 색이 어우러진 밝은 곳으로 나오니 정말로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신기했음. 거기다 날씨가 온화해서인지 이곳의 동물들은 모두 작고 연약하게 생겨 로키의 마음을 말랑거리게 했음. 송곳니가 로키의 팔뚝보다 긴 얼음늑대만 보고 자랐었는데, 손바닥에 들어올 듯한 저 작고 부드러운 털 난 동물이 얼마나 귀여운지. 로키는 담장에서 눈을 감고 꼬리만 살랑거리는 생명체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십 분이나 지켜보았음. 그리고 로키가 세상 소중하고 신기하다는 눈으로 응시한 동물은 이 마을에 잔뜩 깔린 고양이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남들 -특히 어리숙한 이를 귀신같이 캐치하는 부랑배들- 이 보기에 로키는...... 그냥 딱 잡아먹기 좋은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음. 오, 저거 잘만 하면 구워먹을 수 있겠구먼. 사기와 협박을 일삼는 거리 부랑자들이 로키를 보며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음. 



그리고 로키가 거리를 벗어나 몰래 으슥한 골목에 접어들어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 먹는 것을, 그러다 거하게 기침을 터트리는 것까지 보자, 뒤를 쫓던 무뢰배들은 저게 엄청난 물고기라는 확신을 내리게 되었음. 역시나 세상물정 모르는 촌놈같았음. 옷차림이나 행색은 수수한 수준이었지만... 품 안에 금붙이를 가득 들고 있을지도 모르지. 소맷단 안에서 뭘 꺼낸 것도 그렇고. 그들이 로키에게 슬금슬금 접근하며 침을 삼켰음.



로키는 물론, 몸이 싸해지는 느낌에 벽곡단을 하나 집어먹었을 뿐이었음. 혹 거리에 가문의 사람이 있을까 골목으로 들어간 것이었고, 혹 누군가 저를 바라볼까 몰래 그늘에 숨어 환을 하나 꺼낸 것이었고, 그러다 사레에 들릴 뻔해 기침을 한 것이었음. 그는 누가 자신을 보고 있으리라는 것도 -가문 사람을 만날까 익숙한 기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평범한 시선은 느끼지도 못한 거였지만- 자신의 행동이 오해를 불러올 거라고 상상도 못했음.


아무튼 로키가 한참이나 기침을 하고, 입을 가린 채 쿨럭거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 거기에는 벌겋게 눈을 빛내는 수상한 남자들이 넷이나 있었음. 뭐야. 취객인가. 로키는 태평하게 생각했음. 그리고 그중 대장같은 이가 앞으로 나서며 저 말을 던졌음. 


'가진 것 다 내놔!'

'......'


로키는 가만히 숨을 골랐음. 자, 이제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 단검을 꺼내 이 치들을 처리한다. 둘, 모른 척 도망간다. ......둘 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음. 대충 저들의 기를 보니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는 자들이기는 했지만, 단검을 꺼내 싸우다 큰 소동이라도 나면 곤란했음. 아버지가 저를 쉽게 포기할 리 없었음. 괜히 이곳에서 소란을 일으켰다가 눈에 띄기라도 하면... 당장 끌려가서 칭칭 묶이고 말 것임. 로키가 최악의 상상에 몸을 부르르 떨었음.


그 모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로키를 둘러싼 사내들이 사악하게 웃으며 킬킬거렸음. 



'방금 소매에서 뭘 꺼냈지! 다 봤다구. 그것 말고도 가진 것을 모조리 내놓으면 숨은 붙여주지.'

'.....글쎄, 그쪽들이 이걸 먹었다가는 죽을 텐데.'

'오, 의원인가? 좋아... 당장 순순히 벽에 등을 붙여'



로키가 심드렁하게 이야기하자 오해는 더더욱 커졌음. 진짜 그런 수도 있군. 로키는 아무렇지 않게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세번째 방법을 떠올렸음. 저자들의 입에 제 약을 물리는 것만으로도 깔끔하게 마무리 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도 기각이었음. 저들이 넘치는 양기를 버티다 못해 옷을 다 벗어제끼고 헉헉거리다 쓰러지는 꼴을 보고싶지도 않았거니와, 그랬다가는 당장 또 아버지의 귀에 말이 들어갈 테니까. 자신은 어디까지나, 아주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움직어야 했음.


이걸 어쩌지. 식당에서 봤던 사내처럼... 점혈을 좀 배워 둘 걸 그랬나. 로키가 뺨을 문지르며 생각했음. 이 모습도 또 어떻게 해석한 건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비열하게 웃는 사내 넷이 슬금슬금 로키에게로 다가왔음. 손을 앞으로 쭉 뻗은 채로. 


더러운 손을 어디다 대려고. 로키가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음. 정말로 제 주머니를 털 작정인지, 앞에 선 둘이 작은 칼까지 꺼내들었음. 옷이라도 찢을 생각인가 봐. 로키는 중원에는 기본적인 도리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고 생각했고, 작은 얼음이라도 불러내야 할까 고민했음. 그냥 휙 뛰어서 이곳을 뜰까. 하지만 의원에 관한 이야기를 수집해야 하는데.... 그때, 들은 적 있는 또렷한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음.



'넷이 하나를 상대하려 하다니. 지나치게 무례하지 않은가?'



어. 로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음. 거기에는... 해를 등지고 선, 그 때문인지 스스로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푸른 눈의 사내가 있었음. 얼굴을 가리지 않은, 삐딱하게 벽에 기대어 서 팔짱을 끼고 있는 사내가. 로키는 이번에야말로 그와 똑똑히 눈을 마주쳤음. 


북해는 거의 매일같이 눈보라가 휘몰아쳤음. 바람이 잠잠한 날이 드물었음. 하지만 아주 가끔, 사납게 문을 뒤흔들던 바람이 죽은 듯 고요해지는 때가 있었는데, 그런 때 하늘을 올려다보면 끝없이 맑은 푸름에 압도당해야 했음. 로키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았음. 저 사내의 눈이 꼭 그런 색이었음. 보는 이쪽이 간지러워지는, 푸른 눈.










제가 북해궁의 웬 사내와 혼인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토르는 너무나 놀라 이 자리에 누이가 있다는 것도 잊고 -그의 누이는 예의 없는 것을 정말로 치가 떨리게 싫어했음-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음.


'예??????'


그리고 북해보다 차가운 검은 눈을 마주했음.


'앉아라'

'아니, 누이-'

'앉으라고'

'......'


시퍼렇게 날이 선 눈이 말을 안 들었다가는 멍석에 말아서 절벽에서 떨어뜨려 주겠다고 고하는 듯했음. 열 번째 생일이 조금 지났던 때, 누이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경험해야 했던 슬프고도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토르의 뒤통수를 쿡쿡 찔렀음. 토르는 얌전히 자리에 다시 앉았음. 하지만 그의 얼굴은 가라앉지 않았음.


'아버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이 자리에서 놀란 것은 토르뿐이었음. 오딘은 오늘 날이 참 맑다는 말을 하는 사람처럼, 느긋하고 평온한 어조로 턱을 쓰다듬었음.


'너와 북해궁의 소공자를 혼인시키기로 했다'

'북해궁이요. 거기다, 소공녀도 아니고, 소공자...?'

'크흠'


작게 헛기침을 한 오딘이 사정을 설명했음. 북해궁의 막내 소공자가 어릴 적 부터 크게 앓아 많이 병약하고 -병약해봤자 저를 한 손가락으로 얼려죽일 북해인임은 변하지 않았음. 토르가 더욱 사납게 미간을 좁혔음- 가녀리다는 말부터, 병색으로 인해 독특한 체질이 되었다는 것까지. 사내이나 음기가 가득한 이라는 말에는 토르도 헛웃음을 토할 수 밖에 없었음. 이쪽은... 양기가 지나치게 과해 고민이었으므로.


그의 누이가 지루한 낯으로 중얼거렸음.


'잘 됐구나. 너와 천생연분아니냐'

'.......'


토르의 주먹에 울컥 핏줄이 섰음. 


토르는 한 해에서도 가장 양기가 강한 날, 가장 양기가 강한 시간에 태어났음. 그래서인지 늘 활력이 넘쳤음. 그것이... 넘치다 못해 곤란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건 최근의 일이었음. 몸 안의 열을 주체하지 못할 때마다 토르는 산을 휘젓고 다니거나, 차가운 폭포 아래에서 몸을 흠뻑 적시곤 했음. 하지만 그렇다고 기운이 잠잠해지는 것은 아니어서, 치솟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인내심 없고 충동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때도 있었음.


'아버지, 이건-'

'이건 가문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최근 마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너도 들었겠지. 북해궁이 우리의 전력이 되어준다면 몹시도 든든할 게야'


가문까지 나오니 덧붙일 말이 없었음. 오딘은 태연하게 며칠 뒤 중원에서 그들 무리와 만나기로 하였다는 소식까지 전했고, 토르는 꼼짝없이 얼굴도 모르는 남자 -그것도 저보다 두 배는 키가 클! 오, 세상에. 북해궁에 관해 서술한 서적을 들추면 들출수록 토르는 죽을상이 되어갔음- 와 혼인하는 입장이 되었음.


그럴 수는 없지. 토르는 이번 여정에 누이가 동행하지 않은 것에 하늘에게 감사했음. 누이의 눈만 없다면야 슬쩍 도망가는 건 일도 아니었음. 토르는 호위와 식솔들이 잠시 한 눈을 파는 틈을 타 [저는 더 큰 고수가 되기 위해 떠납니다] 라는 서신만 남긴 채 줄행랑을 쳤고, 혹여나 잡힐까 전전긍긍하며 꼬박 이틀 밤을 길에서 새웠음.


밤을 새우는 건 기실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음. 더 큰 문제는.... 허기였음. 허기를 견디다 못한 토르는 거리에서 제일 번잡한 식당으로 들어갔음. 질 낮은 부랑배들이 떼를 지어 일층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지금 토르에게는 그런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음. 토르는 주문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음식을 주문해 깔끔하게 해치웠고, 텅 비어있던 위가 슬슬 채워지니... 주위의 웅성거림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음. 


'그래서 내가 그 자를 흠씬 두들겨팼지. 아이 대신 저를 때리라며 순순히 엎드리던걸'

'크흐흐. 엉엉 우는 꼴이 참 우스웠겠어'

'당연히. 그건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옆에서 빽빽 울던 애새끼도-'


이걸 어떻게 흘려들으며 식사를 한 거지. 절로 거북해지는 속에 토르가 인상을 썼음. 그는 무림맹주의 아들로, 온 무림을 수호해야한다는 의무를 가르침받으며 자랐음. 약자를 괴롭혔다며 천박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 무뢰배들을 가만 둘 수 없었다는 소리임. 그래서... 토르는 일부러 내공을 둘러 전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음. 


'더럽고 치졸하기 짝이 없군.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인가? 인의라고는 전혀 없는 꼴이야'


그러자 일 층의 패거리들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음. 이곳에서 천뢰검이라도 휘둘렀다가는.... 가게가 폭삭 무너지는 것뿐 아니라 '아버지 여기를 보십시오.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하늘에다 방을 내거는 게 되어버릴 것임. 무공은... 최대한 사용하지 말자. 토르는 그리 생각하며 씩 웃었음. 그리고 웃자마자 아차 싶어 좌판에서 산 천으로 얼굴을 가렸음. 만에 하나 저를 알아보는 이가 있기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니까. 자신이 술에 소질이 없는 것이 정말로 아쉬웠음. 어머니는 비급과 온갖 술에 능하신데, 왜 자신은 검 말고는 딱히 주술을 부릴 수 없는 것인지. 


토르가 얼굴에 두른 천을 단단히 붙잡았음. 음. 제 행색을 비웃는 소리가 한층 커져갔지만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음. 기절만 시켜 둘까.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오른손가락을 풀 때, 주위에 가득한 잡배 무리의 혼탁한 기와는 다른..... 맑고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음. 


'..?'


토르는 천천히 눈을 그쪽으로 향했음. 수수한 옷차림의 수수한 사내가, 표정없는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음. 스쳐지나가는 순간 잊어버릴 흔하디 흔한 얼굴의, 특색없는 이였음. 하지만 이상하게도 토르의 온 신경이 저 이를 주시하라고 말하는 듯했음. 뭐지. 토르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음. 


그러나 토르가 저에게 달려드는 남자들을 점혈로 기절시키고, 움츠러든 무리에게 은근하게 제 기운을 풀어 압박하며 일을 마무리하고 나니 수수한 사내는 사라지고 없었음. 아쉬웠음. 토르가 흠칫했음. 아쉽다니. 이름도 모르는, 우연히 같은 식당에 있었을 뿐인 사내에게 아쉬움을? 토르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음. 제게 와닿던 그 서늘한 시선. 그것이 아직도 뺨에 붙어있는 것만 같았음. 그리고 하나 확실한 것은.... 그가 저를 보던 게 나쁘지 않았다는 거였음. 아주 잠시 느껴졌던 그 이색적인 기운도 그렇고.... 어디 시골에서 수련하다 올라온 이였을까? 흔히 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는데. 혹 먼 이국에서 온 자일까... 


그리고 길거리를 걷던 토르는 그를 다시 발견했음. 


흠. 저이가 이곳에 익숙지 않다는 건 확실해보였음. 뭐가 그렇게 신기하고 재미있는지. 담벼락 위에서 낮잠을 자는 고양이마저 그에게는 지대한 관찰의 대상인 듯했음. 이 동네에서는... 발에 채이는 것이 고양이인데(진실로 그가 발로 고양이를 찼다는 것이 아님. 토르는 동물을 사랑했음). 장신구들을 반짝이는 눈으로 보는 것도 그렇고. 딱 소매치기 당하기 십상인 행세였음. 그리고 그건 토르만의 생각이 아니었음.


'음...?'


토르는 여전히 길의 온갖 것을 구경하며 다니는 남자의 뒤로 수상한 자들이 따라붙은 것을 보았음. 이런. 그가 작게 혀를 찼음. 순간 느껴졌던 기는 깨끗하였는데, 내공을 배우는 자는 아닌가? 저리도 대놓고 따라붙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토르는 순진한 청년을 자신이 구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음. 이런 것이 아버지가 누누이 말씀하시던 자질과 고결함일 것임. 토르는 씩 웃었다가, 기운을 지우고 청년과 청년을 따르는 남자들 뒤로 숨었음. 


그리고 현재에 다다름. 






'넷이 하나를 상대하려 하다니. 지나치게 무례하지 않은가?'



좋아. 아주 멋진 대사로군. 토르는 사람 좋게 웃으며 눈을 찡긋거렸음. 황망한 얼굴로 저를 보는 청년과, 칼까지 꺼내든 남자들에게. 허리춤의 천뢰검이 저를 꺼내라는 것처럼 웅웅거렸지만, 이를 사용할 수는 없는 일. 토르는 속으로 검을 달래며 맨 몸으로 앞으로 나섰음. 



'오늘은 인간같지 않은 이들과 잦게 조우하게 되는군. 참으로 이상한 일이야'

'뭐지? 너도 이놈과 한패냐?'



제 손이 비어있는 것에 자신감을 얻은 것일까. 칼을 든 사내들이 쉿쉿 힘껏 낮은 목소리를 냈음. 토르의 한쪽 눈썹이 높게 위로 휘어졌음. 저자들이 툭 밀어내기만해도 고꾸라질 인간들이라는 것을 금세 파악한 탓임. 토르의 흥미는 다시금 맑은 기운의 청년에게로 향했음. 제 갑작스런 등장에도 동요치 않는 덤덤한 얼굴. 아. 토르는 좀 더 또렷이 느낄 수 있었음. 따스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맑으면서 서늘한 저 내공.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고, 토르는 마른침을 삼키며 묘한 고동색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음. 그리고, 토르가 눈을 깜빡였음. 


저 이의 어두운 눈동자가 한 순간이지만 반짝이는 녹빛으로 보였음. 산과 들을 집처럼 쏘다니느라 녹음의 푸름에 익숙한 토르였음. 심지어 그의 무서운 누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 녹색이어서, 집에서도 누이의 손이 닿은 곳곳에는 녹색이 잔뜩 깔려있었음. 그는 초록에 정말로 익숙했음. 하지만 그런 토르도, 선명하고 또렷한 녹빛을... 누군가의 눈에서 찾아본 일은 없었음. 


처음이었음. 저런 눈을 본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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