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pink martini - Amado Mio 







1.

민수는 여전히 학교에서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고독을 감내하고 있었다. 1년이란 시간이 긴 것은 아니지만, 아직 초등학생인 어린아이에겐 단 한 시간의 점심시간도 괴로운 법이었다. 하지만 그 고독은 어느 순간부터 다른 누군가에게 정신을 쏙 빼앗겨 아이 스스로 깨닫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오늘 오후에 있던 체육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해민          김민수.

 

 

 

짝을 이뤄 활동하는 시간에 본인과 함께 할 학우가 없어 여느 때와 같이 조용히 빠져나와 벤치에 앉으려던 민수를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부른 해민이 제 얼굴 위로 내리쬐는 뙤약볕에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른다. 이번엔 좀 더 우렁차게.

 

 

 

해민           야!!!! 김민수!!!!!!!!!!!

 

 

 

이제 막 벤치에 앉으려던 민수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자신을 쳐다보자, 해민은 어이가 없단 듯 말했다.

 

 

 

해민           뭐하냐고. 짝지라잖아.

민수           ..나?

해민           그럼 여기 김민수가 너 말고 누가 있는데.

범일           (체육복 바지를 무릎 위까지 둥둥 걷으며) 아 정신 못 차리냐고~ 다른 애들 다 지금 자기들끼리 짝지어서 벌써 시작하잖아. 근데 거기 가서 앉아버리면 어떡하냐. 셋이서 해야 하는데.

민수           ......

해민           우리 뭐 공 한 번 찰 수나 있겠냐?

 

 

 

본인들과 함께 조를 이루자는 아이들의 제안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민수는 ‘아, 어...’ 웅얼거리며 주춤주춤 운동장으로 내려간다. 다 짝을 지었냐는 담임의 말에 민수의 양옆으로 아이들이 서서 네, 하고 대답하자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한 아이가 씩씩거리며 다가와 순식간에 민수의 어깨를 팍!! 밀었다. 이에 힘없이 밀려난 민수가 그대로 엉덩이를 찧으며 쓰러지니, 범일은 믿을 수가 없단 듯 휴대폰부터 꺼내 들었다.

 

 

 

범일           (동영상 재생 버튼을 누르며) 이야,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란 담임 쌤 말을 아주 거하게 까잡숴드셨죠?

아이2         너희 진짜 뭔데?

범일           뭐가.

아이2         왜 저 새끼 챙기고 나 왕따시키는데!!!

범일           누가? 우리가? 누구를? 너를?

아이2         야!!!!!!!!

 

 

 

해민은 바닥에 쓰러진 민수를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그러더니 두 손을 탁탁 털며 잼잼거리는 민수의 손을 물끄러미 보더니 마음에 안 든단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야, 너 손바닥에서 피난다. 이에 해민은 망설임 없이 담임을 불렀다.

 

 

 

해민           선생님, 이 새끼가 얘 밀쳤어요!

아이2         야!!!!!!

해민           김민수 손에서 피나요!

담임           뭐?

 

 

 

피가 난단 말에 우르르 몰려온 아이들이 네 아이를 둘러싸기 시작하자, 담임은 어떻게든 아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으름장을 놓았다. 너희들은 저기 가 있어! 눈치를 보며 더 구경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움찔거리면서도 움직이질 않자, 이번엔 제대로 호통을 치며 아이들을 격리했다. 너희 넷은 따라와.

 

 

 

아이2         얘네가 저 무시하고 김민수 쟤랑만 놀잖아요!!!

담임           그랬어?

해민           예.

담임           왜 그랬어?

해민           쟤가 김민수 왕따시켜서요.

담임           그랬어?

아이2         예, 뭐 예?

담임           그랬냐고.

아이2         ..아뇨, 안 그랬는데요?!

범일           지랄 구랏사이마세~!

담임           범일이 너, 선생님이 그런 말 쓰지 말라 했지.

범일           (두 손을 곱게 모으며) 스미마세...

 

 

 

기어이 벤치 뒤 화단으로 넘어와 아이들을 일렬로 줄 세운 담임은 차례차례 상황에 대한 입장을 묻기 시작했다. 일본어를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억양은 진짜 일본인처럼 유창하게 ‘이랏샤이마세~’ 이러고 있는 범일은 기어이 담임에게 한 차례 경고를 받았다. 너 한 번만 더 일본어 하면 진짜 혼나.

 

 

 

아이2         저 진짜 왕따 안 시켰어요!!

해민           저번에 비 온 날, 네가 얘 용민이 새끼한테 왕따 당하는 애니까 우산 씌워주지 말라며.

담임           그랬어?

아이2         아니, 선생님 그게 어떻게 왕따예요!!!! 그냥 그렇다고 말해준 거지!!

해민           그래놓고 민수 누나가 차 태워준다니까 쪼르르 올라탄 새끼 누구냐. 너 아니야?

민수           아니 그건...

범일           (아이2를 가리키며) 유 다이 유 다이.

담임           범일아아!!!!

범일           (작게 중얼거리며) 오케이 바이.....

담임           (이마를 짚으며) 범일이 넌 지금부터 입에 지퍼 닫아.

 

 

 

결국 상황 정리가 안 되자, 담임이 일단 기다리던 반 아이들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기어이 일이 터져버렸다.

 

 

 

해민           네 새끼가 얘 왕따시키는 건 되고, 다른 애가 네 새끼 왕따시키는 건 안 되냐? 그리고 우리가 널 때리길 했냐 뭘 했냐.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뭔 시발 왕따야. 네 말대로라면 우린 그냥 너랑 말 안 한 것뿐인데, 안 그러냐? 그게 왕따야? 그냥 우리가 너랑 말하기 싫으니까 안 한 거지? 야, 그렇게 친구 많은 새끼가 뭐가 걱정이라고 고작 우리 둘이 너한테 말 안 건 거 가지고 지랄이야.

아이2         뭐?

해민           왜, 용민이 그 새끼가 친구 안 해준대?

아이2         이 새끼가 진짜!!

범일           아이 야메떼 야메떼!

 

 

 

순식간이었다. 상황이 개싸움 육탄전이 된 건. 아이가 해민에게 달려들려는 걸 말리려던 민수가 힘에 밀려 조회대 벽에 쿵! 하고 부딪혔고, 그 둘을 말리려고 달려온 범일이 중간에 끼어들다 기어이 아이가 날린 주먹을 해민 대신 맞고 말았다. 말릴 생각이었지 맞을 생각은 전혀 없었던 범일은 그제야 ‘아이 씨발!!!!!!!!’ 하고 한국어를 내뱉으며 아이에게 똑같이 돌려주려는 걸, 해민이 참으라며 말리다가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해 셋 다 그대로 화단 위에 우당탕탕 넘어지고 말았다.

 

 

 

민수           (기겁하며) 서, 서, 서, 서.. 선생님!!!!!!!

 

 

 

결국 화단 위에 곱게 핀 꽃들을 마구잡이로 깔고 앉아 구르고 뒹굴며 서로에게 사정없이 주먹을 꽂던 아이들은 기어이 서로의 머리채를 잡으며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아야 했다.

 

 

 

 

 

 

 

 

 

 

 

 

 

 

 

 

 

 

 

 

2.

결국 담임의 연락을 받은 할머니는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를 방문했다. 아이들의 부모들 또한 똑같이 연락을 받고 서둘러 도착했다. 해민과 범일이 아이를 가리키며 쟤가 먼저 얘를 왕따 시켰다고 말하자, 아이 엄마는 뒤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해민           넌 오늘이 우리랑 얘기하는 거 끝인 줄 알아.

 

 

 

그 말에 아이 역시 넘어가기 직전이다.

 

 

 

민수           (모든 걸 포기한 얼굴로) ......

범일           (민수에게 조용히 속삭이며) 저 새끼가 또 지랄하면 그땐 용민이 새끼 조질 테니 걱정 마.

민수           ..범일아, 조용히 해...

범일           어허, 넣어둬. 넣어둬.

민수           (환멸) ......

 

 

 

민수는 그저 저 때문에 할머니가 학교까지 와야 했단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말썽을 부리지 않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라 생각해왔는데, 저의 문제로 할머니가 학교까지 불려왔으니 근간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범일           저 새끼가 나쁜 놈인데 뭘 쫄고 그래.

범일母       (등짝을 찰싹 때리며) 그만 안 해?

범일           악..!

 

 

 

어느 정도 결론이 나고 아이들에게 억지 화해를 시킨 후에야 교무실을 벗어날 수 있었던 부모들은 전부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로 터덜터덜 복도로 나왔다. 할머니는 담임과 아이들의 부모에게 인사를 하며 민수의 손을 잡고 먼저 돌아섰다. 가자, 민수야.

여전히 자긴 왕따 시킨 적이 없다며 울던 아이는 기어이 부모의 손에 질질 끌려 도망치듯 건물을 빠져나갔고, 범일은 집에 가서 보자는 엄마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스미마세.. 스미마세...’ 연거푸 용서를 빌었다. 남겨진 해민은 우리도 어서 가자는 부모의 말에 그저 민수와 할머니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에 해민의 아빠는 ‘왜?’ 하고 물으며 아이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더니, 저벅저벅 걸어가던 두 사람을 다급히 불렀다.

 

 

 

해민父           어르신, 같은 방향이시면 저희 차로 가시죠.

 

 

 

이에 옆에 있던 민수를 쳐다보던 할머니는 이내 씨익 웃으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고 손사래를 쳤다.

 

 

 

할머니           같이 온 사람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민父           아, 그러시구나. 그럼 조심히 가세요.

할머니           예.

 

 

 

저 때문에 할머니가 무척 실망해 거절한 거구나 싶어 점점 더 시무룩해진 민수는 여전히 왜 그랬느냔 타박 하나 없이 그저 조용히 제 손을 잡고 걸어가는 할머니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민수           ......

 

 

 

너무 죄송해 죄송하단 말조차 안 나와 그저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만 있던 민수는, 정말 학교 정문 앞에서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던 영을 발견하고선 깜짝 놀라 무작정 그에게 달려갔다. 누나!! 영은 어슬렁어슬렁 차에서 내리더니 이내 저에게 달려오는 아이의 머리를 헝클이며 웃었다.

 

 

 

단영           얌마, 뭔 사고를 쳤길래 할머니까지 학교로 부르고 그래?

민수           그게 아니고...

 

 

 

때마침 교문을 지나가던 범일이 그를 발견하고선, 다급히 제 엄마의 손을 이끌고 달려와 영의 앞에 섰다. 뭐야, 꼬마 너도 사고 친 거야? 영의 물음에 범일은 ‘하잇~!’ 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범일           엄마, 이 누나가 내가 접때 말한 그 돈 많은 누님이야.

 

 

 

이에 범일의 엄마는 우아한 얼굴로 영과 인사를 나눈 후, 아들의 등짝을 다시 한번 세게 갈겼다. 팍! 어린 노무 자식이 말본새가 그게 뭐야?

 

 

 

 

 

 

 

 

 



 

 

 

 

 

 

 

3.

자야와 세훈이 결혼을 준비한다는 소식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최대한 조용히 진행하고 싶었던 자야는 제 속도 모르고 온 동네방네 떠들어 다니는 세훈에게 차마 자제하란 말을 하지 못한 채 제 휴대폰만 꺼놓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솔눈을 챙기기 위해 잠깐 켜놓은 그 사이에도 둘의 소식을 묻기 위해 전화한 연락들로 아이와 전화조차 하지 못하게 되자, 기어이 자야는 결혼할 때까지 휴대폰을 절대 켜지 않겠다며 제 책상 서랍에다 휴대폰을 훽! 던져놓았다.

 

 

 

자야           내 주변에 인간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다.

서향           그래도 그중에 절반 이상은 축하하기 위해 연락하신 분들이겠죠.

자야           축하는 무슨, 평생 독신으로 살 것처럼 굴던 인간이 뜬금없이 결혼한다니 왜 하는지 궁금해서 달려드는 거겠지.

서향           흐음... 그래도 전 누가 전화해주면 반갑던데.

자야           상 받으러 오라 하는 전화나 반갑지.

서향           흐흐흐흐흐.

 

 

 

하루종일 서향과 함께 대학가를 중심으로 산책하듯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퇴근하기 위해 자리를 정리하던 중, 누군가 우당탕거리며 요란스럽게 작업실 건물로 들어오는 걸 들었다. 그러곤 잠시 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기에 누구나 하고 봤더니, 바로 영과 태영이었다.

 

 

 

영           결혼한다며!

 

 

 

그의 두 손엔 와인과 스카치가 들려있었고, 태영의 손엔 식당에서 포장해 온 음식들이 가득했다.

 

 

 

태영           백 군, 저녁 약속 없으면 먹고 가요. 대방어랑 한우 육회 사 왔으니까.

단영           먹고 가. 먹고 가.

 

 

 

하지만 서향은 그들끼리 편하게 즐겼으면 하는 마음에 눈치껏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며 꾸벅 인사하고 나갔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자야는 오늘 하루 고생했다며 그를 현관까지 배웅해주었다.

 

 

 

           표 작가 결혼한대요.

           * 정말요?

           그러니까, 너무 신기하죠.

           * 와...

 

 

 

산과 전화 중이던 영은 ‘이 사람도 너 결혼하는 거 신기하나봐.’ 하고 웃었다. 테이블로 돌아와 소파에 털썩 앉은 자야는 스카치를 따며 물었다.

 

 

 

자야           대체 내가 결혼하는 게 뭐 그리 놀라운 일이라고 다들 그러냐.

 

 

 

이에 태영은 낄낄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태영           아마... 내가 속세를 벗어던지고 종교에 귀의하겠단 파급력과 비슷하지 않을까?

자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태영           됐고, 오 대표도 불러. 같이 마시자. 내 차에 술 더 있어.

자야           짝으로 사오셨나봐?

태영           내가 아무리 그래도 천하의 장태영인데, 마트에서 어떻게 술을 짝으로 사니.

자야           자기애 오진다.

 

 

 

스카치를 내려놓고 그제야 서랍에서 휴대폰을 꺼낸 자야는 몇백 통씩 쌓여있는 부재중 연락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학을 뗐다.

 

 

 

자야           이제 나이도 나이니, 슬슬 인간관계를 좁힐 필요가 있는 것 같아.

태영           근데 넌 여태 뿌리고 다닌 게 있어서 언젠가 한 번은 식 올려야 했을걸?

자야           그치, 내가 언니한테 쏟아부은 돈만 몇천이지.

태영           아~ 말이 또 그렇게 되나~

 

 

 

단조로운 연결음 끝에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응, 자야. 세훈이 전화를 받자 자야는 곧바로 스피커로 돌려 볼륨을 키웠다.

 

 

 

자야           집이야?

세훈           * 응, 솔눈이랑 저녁 준비 중이었어.

자야           아.. 그래?

세훈           * 왜? 늦어?

자야           그게 아니라, 방금 퇴근하려던 중에 장 배우랑 단 감독이 작업실을 박차고 들어오더라고.

세훈           * 아하~

자야           동네 잔치해도 될 만큼 먹을 걸 엄청 사 왔는데, 혹시 이제 막 시작한 거면 솔눈이랑 올래?

세훈           * 음.. 감자탕을 하긴 했는데.

단영           감자탕? 너무 좋지~

태영           집에서 감자탕 하는 남자, 흔치 않지. 신랑수업 따로 돈 들여서 안 들어도 되겠다, 야.

세훈           * 어우, 감자탕만 하겠어~?

태영           그냥 솥 채로 들고 와, 우리도 오 대표 손맛 좀 보게.

단영           위스키에 감자탕, 최고지.

 

 

 

정신이 쏙 빠지도록 감자탕을 구애하는 두 사람의 재촉에 세훈은 하하하 웃으며 어쩔 수 없단 듯 알았어, 하고 답했다. 그럼 솔눈이랑 지금 바로 작업실로 갈게. 자야는 애 옷 단디 입혀 보내라며 피식 웃었다. 그러곤 한참 뒤에 두 사람의 발걸음이 작업실 밖에서 들리더니, 곧 솔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솔눈           어어....

 

 

 

이미 모든 술을 격파중인 이모들을 눈앞에서 마주한 아이가 밤바람에 벌겋게 언 얼굴로 우물쭈물대자, 그 모습마저 이모들 눈엔 그저 사랑스러운지 영과 태영이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단영           아이고, 우리 귀염둥이 왔네.

 

 

 

그 뒤로 세훈이 감자탕을 든 채 힘차게 들어온다.

 

 

 

세훈           귀염둥이 입장~!

태영           환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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