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미르 발렌타인

부제 : 스뎅그릇이 불러온 환경 호르몬 첨가 초콜릿

 

남들이 보기에 카르제니아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성군의 자질, 뛰어난 검술 실력, 그리고 유능함까지.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완벽하기만 할 수 있을까. 카르제니아도 못하는 것, 숨기고 싶은 것이 있었다. 예를 들면 오이를 싫어한다는 사실이나, 음치라는 사실이나. 그리고 지금 막 숨기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생겼다.

 

“...”

 

카르제니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시꺼먼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표정만 본다면 나라의 중대사라도 결정하는 듯했지만, 실제로 그녀가 마주한 문제는 그것보다 더 심각하고 사소했다. 시작은 좋았다. 곧 있으면 밸런타인데이였고, 그녀가 사랑하는 미르를 위해 직접 초콜릿을 만들려고 했다. 그녀는 초콜릿을 직접 만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쯤이야 요리사에게 도움을 받으면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역성혁명도 해봤는데 초콜릿을 만드는 것쯤이야 쉽지. 칼은 요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자신감이 넘쳤다. 분명 초콜릿이 녹기 쉽도록 잘게 썰기는 쉬웠다. 사람을 써는 것보다야 훨씬. 하지만 녹이는 것이 문제였다. 요리사는 그녀에게 방법을 알려준 뒤 잠시 할 일을 하러 자리를 비웠다. 카르제니아는 방심했다. 녹인 다음 생크림과 섞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아무리 요리를 해본 적이 거의 없는 자신이라도 쉽게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방심한 대가는 처참했다.

 

이걸 미르에게 먹일 수는 없다. 플라스틱을 쓰지 말아야 했나. 환경 호르몬이 잘 우러난 비주얼인데. 카르제니아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새카맣게 탄 초콜릿을 주걱으로 뒤적였다. 탄 냄새가 났다. 진짜 망했구나. 요리라는 것은 쉽지 않았다. 분명 시키는 대로 중탕으로 했는데. 초콜릿이 너무 천천히 녹는 것 같아 불을 올린 것이 문제였을까? 어쩌다 초콜릿이 아니라 석탄 비스름한 걸 만들어버렸을까. 분명 저번에 미르와 같이 쿠키를 구웠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칼은 한숨을 쉬며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두었다. 그래도 틀에 넣어보면 모양새는 좀 낫지 않을까. 그녀는 꾸덕꾸덕하게 탄 초콜릿을 억지로 틀에 밀어 넣었다. 물론 이걸 미르에게 먹일 생각은 없지만, 처리는 해야 하니까. 그녀가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환경 호르몬이 첨가된 초콜릿을 만들고 있을 때, 누군가가 부엌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금은 식사를 준비할 시간도 아니고 들어올 사람이 있던가. 그녀가 눈을 돌리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여보? 여기서 뭐해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만.”

 

미르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시각이면 그녀는 보통 집무실에 있지 않나. 그를 마주한 카르제니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망해도 한 번만 망할 것이지, 하필 지금 그와 마주칠 게 뭐람. 그녀는 망한 초콜릿이 담긴 틀을 급하게 뒤로 숨겼다. 민첩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카르제니아답게, 행동이 아주 빨랐다. 빠르기만 할 뿐 어색하게 굳은 표정까지 감출 수는 없었지만. 미르하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가 부엌에 들르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처음 그녀에게 쿠키를 만들어준 이후로, 미르하는 칼에게 줄 간식을 만들겠다며 주방을 들락거리곤 했다. 더군다나 얼마 안 있으면 밸런타인데이지 않나. 미르하는 단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그녀의 입맛에 맞춰 브라우니라도 구워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주방에 왔는데, 선물의 당사자를 마주쳐버렸다. 그것도 아주 어색한 분위기의. 미르하의 시선이 널브러져 있는 주걱에 닿았다. 주걱에는 검은색과 고동색 사이의 무언가가 묻어있었고, 그릇에도 비슷한 것이 묻어있었다. 그것의 정체를 추론하던 미르하가 작게 한 단어를 중얼거렸다.

 

“초콜릿…? 여보, 혹시….”

 

진짜 망했다. 카르제니아는 이제 당황한 것을 숨기지도 못했다. 몰래 만들어서 깜짝 선물할 예정이었는데, 보란 듯이 들켜버렸다. 심지어 멀쩡한 초콜릿을 만들던 것도 아니었다. 저번에 손수건을 만들었을 때도 그렇고, 왜 자꾸 선물을 준비하다가 들키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어떻게 하지. 잠시 고민을 하던 카르제니아가 내린 결정은 도망이었다. 어차피 미르 하나쯤 따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선물을 또다시 들킬 바에야 도망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연이은 실패에 평소와 달리 나사가 하나 혹은 두 개쯤 빠진 생각이었지만, 칼은 혼란에 빠진 나머지 이상함을 알아채지 못했다.

 

“여보는 몰라도 됩니다. 아무튼, 몰라도 돼요.”

 

칼의 행동은 늘 그렇듯 빨랐다. 몰라도 된다는 말로 그의 질문을 막아버린 그녀는 얼른 초콜릿 같은 망한 무언가를 들고 자리를 떴다. 미르하가 붙잡을 새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가 마음을 먹으면 말릴 수 있긴 하던가.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부엌에 홀로 남겨졌다. 카르제니아가 당황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일부러라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려 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초콜릿이란 단어 하나에 당황해서 도망까지 치다니, 귀엽다고 해야 할지. 그녀가 도망친 자리를 바라보던 미르하가 주걱에 묻어있는 초콜릿을 쿡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았다. 쓰다. 어떻게 생각해도 제대로 탄 맛에 그의 표정이 한순간 찌푸려졌지만, 이내 미르하는 웃음을 흘렸다. 탔든 어쨌든 그녀가 직접 만들어준 초콜릿이 아닌가. 아마 칼은 들킨 게 부끄러워서 도망간 것 같지만, 이번 발렌타인에는 그녀가 직접 만든 초콜릿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그렇게 미르하는 한참 동안 미소를 띤 채 부엌에 머물렀다. 그녀의 계획을 모른 척해주기로 하고 수제 초콜릿을 기대한 그였지만, 결국 칼은 망한 수제 초콜릿을 주는 대신 가게의 것을 사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그것을 미르가 알게 된 것은 밸런타인데이 당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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