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 속은 파도치지 않는다

w. 목장




“반찬 남겨서 다 버리지 말구.”

“알았어.”

“엄마가 전화하면 좀 받아라.”

“알았어.”

“대답은 잘해.”




현정은 저녁 아홉 시 넘어서야 집을 나섰다. 환기로 잠깐 열어놓은 창 사이로 풍경소리가 요란했다. 풍경을 다는 짧은 순간에도 다툰 백현과 현정은 오랜만에 시킨 짜장면으로 저녁을 대충 때웠다. 한기를 매상으로 느낀 백현은 창을 닫았다. 미리 받아놓은 따뜻한 욕조 물이 알맞게 들어찼다.




2007. 12. 06




“어제 미안했다.”




욕조에 나온 백현이 일찍 나가려는 현정을 불러 세웠다. 운 탓에 부어오른 눈을 만지던 현정이 짧게 대답했다.




"나도."




사거리 앞에서 만난 찬열과 등교하던 백현은 길에 보이는 오락기 앞에 서지만 않았더라면 늦지 않았을 거다. 네가 하자며! 찬열이 억울하게 말하면 백현은 괜한 땅바닥만 신발코로 지지기 바빴다. 몰래 들어갈 작전을 펼치고 도착한 뒷문은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욕이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네, 백현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다가도 담벼락을 바라봤다.




“잘 잡아.”




찬열의 어깨를 밟고 담벼락 위에 앉은 백현이 찬열에게 손을 뻗었다. 찬열은 단박에 담을 넘었다. 헐, 백현이 부러움에 보면 찬열이 우쭐거렸다.




“야, 종대랑 애들 뒤에서 라면 먹는다는데 들렸다 가자.”

“콜.”




종대에게 연락을 받은 찬열이 말했다. 돌아가야 하는 탓에 언덕을 조금 오르자 경수의 등이 보였다.




“안녕.”




백현이 어깨너머 인사했다. 경수는 미동도 없이 앞만 바라봤다. 백현이 되물었다. 뭐 해? 그러자 찬열이 안 가냐며 부추겼다. 먼저 가라며 등을 민 백현이 경수 옆에 섰다. 난처한 표정이었다.




“뭐야, 바이올린 가방이 왜 저기 있어?”

“떨어트렸어.”




경수가 보고 있는 건 철조망 너머 떨어진 바이올린 가방, 그건 거짓말이었다. 누군가 고의로 한 짓이었다. 보다 못한 백현이 책가방을 벗어 조심스럽게 철조망을 타고 넘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구멍 사이사이 걸어 타고 내려간 백현은 바이올린 가방을 한쪽 어깨에 얹은 채, 다시 올랐다. 구멍이 큰 게 다행이었다. 발이 들어가는 크기에 재빠르게 올라온 백현이 경수에게 건넸다. 밑바닥에 흙이 묻은 바이올린 가방을 손으로 털던 경수가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




백현은 뭐라 더 묻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 경수의 내려간 표정을 보면서 감사하단 말에 그저 옅게 웃으며 반으로 돌아가는 일밖에.




/




“너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학주한테 뒈지게 혼남.”




찬열이 조회가 끝날 때까지 오지 않던 백현을 기다리다 결국 혼났다고 아침부처 으름장을 놨다. 백현이 미안하다며 매점에서 점심 먹고 간식으로 먹을 컵라면을 다섯 개 정도 샀다. 사물함에 넣은 라면 하나가 떨어져 데구르르 굴렀다. 백현이 그걸 집어 일어서면 발 하나가 보였다. 허리를 세워 반듯하게 일어서면 보이는 사람, 3학년 4반 도경수.




“먹어.”

“나 주는 거야?”

“그럼 누구 줘.”




사과 맛 피크닉 하나를 쥐여 준 경수는 곧장 몸을 돌려 백현의 반을 빠져나갔다. 찬열이 흥미롭게 세운 교과서 사이에 눈만 내밀었다가 책상 밖으로 튀어올랐다.




“대박, 도경수가 이거 줬어?”

“응.”




웃던 백현의 나사가 빠진 것을 직감한 찬열이 뒤로 슬슬 빠졌다. 백현이 물기가 서늘하게 진 피크닉 하나를 소중하게 품에 들다 사물함에 들려있는 책과 컵라면을 쓸어 꺼냈다. 툭, 투박한 소리가 바닥에서 나고 네모난 사물함 속에 딱 하나 세워져있는 피크닉이 전세를 냈다. 기분이 좋아 점심을 대차게 먹은 탓에 라면을 먹기로 한 약속은 5교시 쉬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이동 수업이라 헷갈렸다고 한다고 하면 5 분 정도 더 벌 수 있었다.




찬열과 옆 반 종대 그리고 백현과 다른 아이들까지 대략 여섯 명 정도가 뒤뜰 벤치에 앉아 라면을 흡입했다. 라면이 익기까지 삼 분도 아니다. 이 분이면 충분했다. 바삭바삭한 게 좋아 늘 그렇게 먹던 백현은 오늘따라 라면 국물이 적어 식수를 더 부으려 잠깐 수돗가로 향했다.




“그 새끼 가방 어디있냐?”

“아까 가보니까 없던데?”

“아예 갈기갈기 찢어놓을걸.”




백현은 라면에 국물을 더 붓다가도 건물 틈 사이에 들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가방? 몸을 숙여 식수대 옆에 고개를 내밀었다. 라면은 잠시 올려두고 가까이 다가가 보는데 담배 연기 틈 사이로 남자 둘 정도가 보였다. 백현은 더 잘 들리도록 귀를 내밀었다.




“학급 발표회 나간 게 꼴사나워서 몇 번 골려주려는데, 독한 새끼 눈 한번 깜짝 안 하냐.”




학급 발표회라는 말을 듣자마자 백현은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 학급 발표회는 백현이 경수를 좋아하게 된 시작점, 눈물까지 흘리며 경수의 바이올린을 들은 날이었다.




“돈 없어서 학원도 못 다녀, 학교에서 연습하는 거 너 알고 있냐?”

“도경수가? 걔 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조롱하는 말에 들고 있던 백현이 일어섰다. 이름도 들었겠다. 백현은 바로 달려가 남자애 입에가 물고 있던 담배를 잡아 바닥으로 던졌다. 멱살을 들어올리면 옆에 있던 친구놈이 말렸다. 백현은 아랑곳 않고 소리쳤다.




“너지?”

“뭐?”

“도경수 가방 던진 것도 예전에 때린 것도.”

“거슬려서 그랬다 어쩔래, 너 실음과 변백현 아니냐?”




백현의 얼굴과 명찰을 보던 남자아이, 백현이 명찰을 보자 홍현태라 적혀있었다. 사건의 주범이 분명했다. 음악실에서 얼굴이 부어 백현과 마주했던 날, 맞은 건가 긴가민가했던 게 이제야 확실해졌다. 결국 거하게 싸움이 났다. 선빵은 그 애, 살려달라고 애원한 것도 그 애. 죽일 정도로 때려야지 했던 백현은 아쉬운 상태로 끝났다. 달려온 종대와 우월하게 큰 찬열의 방해였다. 저 새끼 강냉이는 하나 더 터트려야 하는데, 백현은 씩씩거렸다. 마지막으로 던진 컵라면의 국물이 시원하게 현태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진짜 미쳤나! 울리는 현태의 목소리에 백현이 발길질을 했다. 다른 애들은 죽자고 달려드는 현태를 말리기 시작했다.




“너…, 다 큰 새끼가.”

“이미 다 컸다! 좀만아.”




현태의 말에 백현이 받아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딱 스물아홉 몸으로 왔다면 더 족치는 건데, 어린 생각을 해 버린 백현은 자신의 모습에 웃음이 몰려왔다. 맞네, 나 성인인데 뭐 하는 거지. 군대 전역한 이후로 욕이 안 붙었는데, 과거로 오니 입에 착착 감기는 게, 마치 누가 입에 기름칠을 해 놓은 것처럼 나왔다. 뭔 새끼, 뭔 놈. 감정 조절 안 되는 것 또한 그랬다. 정말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이 본능적으로 나와서.




“니들 뭐 하는 짓이야!”




항상 고교시절 싸움판이라면 이쯤에 선생님이 등판한다. 학교 폭력에 예민한 선생에게 걸린 이후로 하교 후 상담실에 나란히 앉아있는 상황에 처한 백현과 현태, 곧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경수 사이에 작은 침묵이 흘렀다. 선생님은 연락을 돌리러 잠시 자리를 비웠고, 현태와 백현을 번갈아보던 경수가 물었다.




“때렸어?”




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숙였다.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서였다. 하교 후 음악실도 못 가고 상담실에 발목 묶인 경수의 긴 한숨이 이어졌다.




“왜?”

“눈에 거슬려서.”




현태는 거슬린다는 말을 한 백현을 째려봤다. 백현이 뭐, 입모양으로 말하자 주먹을 쾅 책상에 내려치는 거다. 백현이 눈 밑에 쓸린 상처를 만지다 아까와 다르게 나긋하게 말했다. 도경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가해자 새끼가 되게 당당하네, 지금 피해자가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게 말이 되냐?”

“…….”

“도경수 눈에 거슬린다며 나는 너 거슬려서 그랬는데.”




경수는 그만하라며 백현을 말렸다. 아니, 왜? 그런 경수의 모습이 답답한 백현은 울컥 가슴 속에서 무언가 치고 올라왔다. 도경수, 넌 화도 안 나나 봐, 어이없는 백현은 고개를 숙였다가도 너무 감정만 앞세운 건 아닌가 곧 후회가 밀려왔다. 얼마 안 가 들어오는 학주는 경수를 돌려보냈다. 백현과 현태는 반성문과 더불어 몽둥이로 맞았다. 때린 이유를 물었을 때 백현이 솔직하게 말했다. 경수의 가방을 철장 밖으로 던지는 것을 봤다고. 때린 것까지. 상황 설명을 마친 백현이 상담실을 나와 가방을 가지러 반으로 향했다. 몇 번 더 부른다는 선생의 낮은 말까지 새겨들으며 말이다. 수시도 끝나고 생기부 작성도 끝났겠다. 서로간의 합의만 잘 보라는 선생의 말에 상담실을 나왔다.




[ 님 누구 팼어? 추카해 >.< 이제 님 용돈 내 꼬야 ^0^~! ]




현정의 문자에 신경질적으로 폰을 주머니에 넣은 백현이 앞문을 열었다. 찬열이 그새 불었나보다. 가방을 챙기던 손은 멈췄다. 교실 끝 뒷자리에 어색하게 앉아있는 경수가 다가왔다. 백현이 시선을 피했다. 조용했다.




“왜 그랬어.”




백현은 상처 때문에 가려운 눈밑을 긁으며 말했다. 너 괴롭혀서. 아까와 같은 한숨으로 백현을 보다 문득 창밖을 봤다. 한참을 보던 경수는 주머니에서 밴드 하나와 작은 연고를 꺼냈다. 백현이 조금 차갑게 말했다.




“나 손 아파.”

“붙여달라는 거지.”

“응.”




긁힌 주먹을 보이자 경수가 다가왔다. 경수한테 여기 다쳤어, 여기도라며 아예 광고를 하던 백현이 의자대신 책상 위에 앉았다. 경수는 양 손으로 야무지게 포장을 뜯어 상처 위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따가울까 조심스럽게 바르는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보이자 백현의 입매가 움직였다. 꽤 위험한 거리…. 백현이 생각했다.




“변백현.”

“어?”

“너….”




입이 움직였다. 동그란 입술이 오밀조밀, 하지만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백현의 앞이 까맣게 변했다. 분명 물음에 대답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하얀 천장과 안구를 뚫을 만큼 강한 빛이었다. 곧 커튼이 젖혀지고 약품 냄새와 함께 다급히 깨어난 백현의 손을 잡은 사람은




“깼어?”




현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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