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2)





후끈했던 안과 달리 밖으로 나오자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두꺼운 누빔 옷을 뚫고 지나갔다. 땅거미가 서서히 내려가고 있는 장시(시장)에는 이맘때쯤이면 붐빌 때였지만 지금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오늘 노름판에서 수확은 괜찮으셨습니까, 누님?”

유유자적하게 텅 빈 장시를 제 것처럼 걷고 있던 상대의 뒤로 소리 없이 누군가 다가와 장옷을 슬쩍 잡아당겼다. 그러나 상대는 놀란 기색 전혀 없이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너냐? 뭐 이렇다 할 만한 건 없었다. 아! 여우에 관한 건 좀 흥미롭긴 했지만. 아무튼, 부탁받은 일이 너무 시시한 터라.”

누님이라 불린 도영은 설명도 귀찮다는 듯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누님, 그래서 아버님이 부탁하신 일은 할 겁니까?”

누님을 부르며 옆자리로 슬그머니 따라붙는 사내 역시 가죽으로 만든 두꺼운 갖옷을 입고 있었다. 6척이 조금 넘는 키와 단단한 몸이 두꺼운 옷 때문에 큰 산처럼 보여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서글서글한 눈매와 웃을 때마다 생기는 눈 밑 보조개는 친근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도영이 걸음을 멈추고 제 동생을 매섭게 올려다보았다.

“너! 내 곁에 올 때는 설랑(雪狼)을 떼어놓고 오라 했을 텐데!”

그녀가 매섭게 몰아대자 도윤이 그 큰 어깨를 볼썽사납게 움츠리며 한 발짝 물러섰다.

“아니, 얘는 내 신수인데 어떻게 떼어놓고 와요?!”

도윤이 뾰로통하게 대꾸했지만, 도영은 홱 돌아설 뿐 듣지도 않는 것 같다.

“우리 백구가 날카로워졌으니 저리 멀리 떨어져서 오너라.”

그러면서 ‘자자, 진정해. 착하지.’라며 허공을 향해 손짓한다. 그 눈빛이 매우 다정해서 지켜보고 있던 도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알고 있다. 내가 조심해야지. 저 성질머리를 누가 받아주겠느냐. 너도 그리 기죽을 거 없다.”

그러나 도윤 또한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를 허공의 대상과 함께 대화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주위에 누군가 있었다면, 이 두 사람을 향해 허우대 멀쩡하게 생긴 젊은 사람들이 어쩌다 저리되었냐며 안타깝게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

 

근정전 위로 짙은 먹구름이 흘러간다. 그들은 한낮 겨울의 미미한 태양 빛조차 비추지 않고 있었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대전 주변을 둘러보던 김성규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 이곳이 이리되었는가.’

백발이 성성한 그의 모습은 곧 은퇴를 앞둔 고고한 학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복장은 궁에서 일하는 관원 같은 차림새다. 그는 편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개 관원인 듯한데, 움직임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를 맞이하는 편전 앞 상궁과 궁녀들도 자연스럽게 그를 맞이했다. 마치 자주 본듯한 느낌이었다. 환관 한 명이 발 빠르게 다가와 그의 존재를 알리자 여러 개의 문이 열리며 그를 안내한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자리한 끝자락으로 어둑한 인영(人影)이 보였다.

“제가 보내준 예복은 어디다 내팽개쳐두고 왜 또 그런 칙칙한 관복을 입고 오셨는지.”

핀잔을 주는듯했으나 말투에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처럼 스스럼없는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김성규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제가 입고 온 짙은 감색의 시복을 내려다보았다. 태상왕 때부터 입고 궁궐을 들락날락했던 옷이라 많이 해진 건 사실이나 궁에 들어올 때 이것만큼 편한 옷도 없었다.

태상왕이 직접 내려준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한 호패도 있긴 했으나, 왠지 이 옷을 입고 들어오지 않으면 물건을 잃어버린 듯 불안하기까지 했다.

성규는 아마 제가 이제 늙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새 임금님이 주신 의복도 즉위식 때 한 번 입고 온 이후로는 영 손이 가질 못했다.

그런 성규를 이해한다는 듯 임금은 깃털처럼 가벼운 웃음으로 응수했다. 평상시 밝은 기운으로 조정 신료와 상왕을 흐뭇하게 하던 그림자는 요즘 따라 그 빛이 흐트러져 어두운 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

하지만 관록 있는 노인의 눈에는 그 그림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를 향해 느릿하게 돌아서는 그림자 주변으로 붉은빛이 아른거렸다. 음험하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빛이 주변을 에워싸는 듯해 성규는 마른침을 조심히 삼켰다.

전과는 다른 기운에 성규는 제 앞에 있는 어린 임금을 아련히 쳐다보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제 자식들과 어울려 학식 하던 모습을 지켜봐 온 터라 임금에 대한 마음이 남다르기는 했다.

“스승님이 보시기에도 이 나라가 지금 혼란스러운 것이, 조정의 고관 대신들과 왕의 측근들에게 흉사가 닥쳐 찌들어가는 원인이, 모두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낮인데도 어둑한 실내를 환하게 밝힌 등불 사이로 이제 약관을 넘긴 젊은 임금의 얼굴이 피로함에 물들어 보였다. 왕이기 때문에 듣고 보아야 하는 사사로운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이 생기발랄했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그와 더불어 즉위한 지 이제 1년도 채 안 된 경친왕 이부호에게도 흉이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성규는 저를 스승이라 부르는 부호를 바라보았다. 어릴 적부터 성규에게 존대하며 지내온 탓인지 임금이 돼서도 저를 높여 부르는 걸 아직 고치지 못한 상태에 성규는 조그마한 미소를 그렸다.

부호는 키가 크고 다소 마른 몸이었지만 마디가 굵어 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에 흔치 않은 밝은 갈색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찬찬히 들어 올린 수려한 손짓으로 동곳을 꽂아 올린 머리를 살짝 매만지며 성규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그 눈빛에 오만함은 없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상태지만 임금으로서 교육을 받고 제 주변을 다스리며 살아온 사람답게 부드러움 속에서도 위엄은 있었다.

성규 자신은 특별한 관직이 없는 그저 ‘신(神)’을 조금 다룰 줄 아는 사람이나, 태상왕과 상왕을 도와 다시 나라를 세우고, 어릴 때부터 부호와 친밀하게 그가 가진 신수를 가르쳤던 터라 임금은 스스럼없이 그를 스승이라고 불렀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무지한 자들이 수군대는 거에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부호는 편전이라 할지라도 굉장히 간편한 차림새로 용포와 익선관도 벗은 채였다. 얼마 전부터 갑작스럽게 몸에 열기가 찾아온 탓이다. 원인은 아무도 몰랐다. 때 이른 겨울이 찾아옴과 동시에 생겨난 것으로 이런 시기에 자기는 추위를 타지 않아 얼마나 좋냐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열기가 심상치 않음은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방한용으로 누빈 도포와 두툼한 겉옷까지 챙겨입고 들어와 벗어둔 성규의 옆에만 작은 화로가 두 개는 있었지만, 그래도 춥긴 추웠다. 발끝 손끝이 차가운 공기에 얼어 둔해질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조차도 부호에게는 힘든 모양이다. 더운 것인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성규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성규도 마땅히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저잣거리에 떠도는 소문처럼 궁에는 천 년 묵은 여우도 없었다. 차라리 여우가 살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거다. 원인이 눈앞에 있는 거니 어떤 수를 쓰든 잡으면 되니까.

허나, 천년 묵은 여우를 죽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몇십 년이 훌쩍 지난 옛날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당시 태상왕 이경은 우리 모두 앞에서 여우시체를 태웠었다. 시커멓게 타들어 가며 온갖 저주를 퍼부었던 여우의 얼굴이 성규의 뇌리에 아직도 강렬하게 박혀 있었다.

“저 때문에 스승님께서 또 어려운 일을 맡게 되셨네요. 안 그래도 이제 더는 이런 일은 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제 기반이 아직 튼튼하지 않아 도움이 필요함을 이해해 주십시오.”

걱정과 함께 몸속의 열기 탓에 부호는 본의 아니게 한숨을 내쉬며 영견으로 제 얼굴을 훔쳤다. 수려한 이목구비에 어쩔 수 없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성규는 상왕이 즉위하고 나라가 안정을 찾으면서 더는 왕족과 관계된 일은 사양할 생각이었다. 제 자식들도 저와 어미를 닮아 남다른 능력들이 있었지만, 아이들 만큼은 앞으로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다. 태상왕 이경이 관직을 주겠다 했을 때도 극구 거절했다. 성규도 젊었을 적에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을 하는 일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제 아내였던 채윤영이 허무하게 죽는 모습을 보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라는 다소 회의적인 사상이 자리 잡았다.

그렇다 한들 한 번 맺어진 이들과의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타고난 건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본인의 바람과는 다르게 남매 모두 결국 어미가 했던 길을 따라 걷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도영이와 도윤이 모두 요즘 할 일도 없이 집에만 있었던 터라, 이번 기회에 전하께 보탬이 된다면 소신이야말로 감읍할 따름입니다.”

성규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음. 그..... 도영 누님은 잘 계신가요?”

자신을 높여 부르는 것처럼 제 딸인 도영을 아직도 누님이라 부르는 것 또한 버리지 못한 습관이다. 성규는 미소를 지으며 설핏 웃음소리를 냈다. 이 와중에도 도영의 안부를 묻는 임금의 얼굴이 봄날 따스하게 스며드는 햇살처럼 빛나 보였기 때문이다.

열기로 가득해 다소 붉게 물든 얼굴이 꼭 부끄러워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만약 임금이 아니었다면 귀엽다며 머리를 쓰담 해줬을 거라고 성규는 생각했다.

“전하의 하례와 같은 성정 때문에 제 여식은 아주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뭐, 그게 제 덕분이겠습니까. 도영 누님이 워낙 좋으니.....크흠.”

부호는 괜히 쑥스러워져 헛기침했다. 그는 자신보다 4살이 많은 도영을 떠올렸다. 관직을 거절하긴 했지만, 개국공신이나 다름없는 성규의 특별한 이력과 제 할아비인 이경과 각별한 인연으로 성규의 아이들은 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도영 누님이 올해 스물여섯이던가요?”

“그렇사옵니다.”

“그럼 혹시.....”

말끝을 흐리는 부호의 의중을 알아챈 성규가 이번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식에게 혼사는 불구하고 지나가는 검은 털도 본 적이 없는지라. 아니, 애초에 혼인을 할 생각이 있는지, 아니 그것보다 누군가와 연정을 나눌 생각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니, 제가 뭐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저 오랜만에 도영 누님이 생각도 나고, 이번 일에 발 벗고 나서주겠다고 하니 궁금해서.....”

성규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그새를 못 참고 부호가 변명하듯 웅얼거렸다. 이럴 때는 위엄있는 왕의 모습이 아니라 첫사랑에 빠진 풋풋한 소년의 느낌이 들었다.

부호의 주변으로 예사로운 붉은 기운이 넘실대는데도 표정은 정말 순수했다. 성규는 이내 안타까움과 동시에 귀여운 손주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영이에게 이번 일을 잘 해결하고 나면 꼭, 전하께 직접. 고하라 명하겠습니다.”

성규는 그래 뭐 그까짓 거,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얼굴이라도 뵙게 해주자 싶었다. 어릴 때부터 유독 도영을 졸졸 쫓아다니며 예쁘게 굴었던 모습이 떠오른 탓이다. 자식들만큼은 왕실과는 연결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나이가 든 탓인지 금세 산 너머로 사라진 모양이다.

부호는 힘든 와중에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박성철 대감께서 보내신 서신은 읽어 보셨습니까?”

만족한 부호의 얼굴을 보고 성규는 그제야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덧 도영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순서가 뒤로 밀리게 되었다.

성규는 얼마 전 이경과는 군신(君臣) 관계이자 세 사람 모두 막역한 사이인 박 대감으로부터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안 그래도 이미 장계가 임금에게도 올라간 모양인지 때마침 부호가 성규를 찾았고, 그는 박 대감의 서신을 부호에게 전해 준 상태다.

이미 궁궐의 일들과 부호의 기이한 건강상태 때문에 조심스럽게 드나들던 참이었다. 성규는 제 결심과는 다르게 결국 왕실의 일에 다시 끼어들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어쨌든 도영에게 맡기게 된 일은 얼마 전 평안북도에 자리한 북계면에서 외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 두 곳을 담당하던 수령이 올려보낸 장계가 시초였다. 장계에는 몇 달 새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는데, 시신을 찾지 못했기에 실종이라고 처리했지만, 모두 열 살 미만의 아이들이고 많은 눈으로 길목이 막힌 상황에서 없어진 것으로 보아 죽은 게 아닌가 추측한다고 전할 뿐이었다. 반면, 사건의 내막을 위한 인력보다는 마을의 생계를 위한 구조와 인력이 더 필요하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었다.

하지만 박 대감으로부터 받은 서신은 장계의 내용과는 사뭇 달랐다. 서신의 내용은 기본은 장계와 같았으나 한 가지가 달랐다. 박 대감은 ‘그곳’ 마을 사람들이 의심스럽다는 토를 달고 있었고 자신이 보고 들은 ‘이상한 일’에 대해서도 적어놓았다.

“박 대감께서는 잘 지내고 계신 겁니까?”

박 대감이라 불리는 박성철은 공신이자 좌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른 충직한 신하였다. 이경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상왕 이성을 도와 재건하는 데도 큰 공을 세웠으나 갑자기 죽은 어린 막내아들과 연이어 터진 가족들의 비극으로 인해 모든 관직을 버리고 저 먼 북쪽 땅으로 건너간 지 5년이 넘었다.

“그가 자리를 보전하고 그곳으로 내려간 지 5년이라 소인도 얼굴 본 지는 꽤 되옵니다. 그동안 서신에서는 별다른 문제 없이 건강히 잘 지낸 것으로 보입니다. 아시다시피 한창 전란 중에도 혼자 여기저기 잘 들쑤시고 다니던 위인 아닙니까. 적응도 잘하고.”

성규가 헛헛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는 어딜 내놔도 잘 살 인간이긴 했다. 어린 아들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아직 이곳에서 열심히 좌의정으로 죽을 때까지 일하고 있을 사람이기도 하고.

부호도 같이 아련한 미소를 띄웠다. 저와 함께 나라를 이끌어 줄 것만 같았던 충신이 모든 걸 뒤로한 채 훌훌 떠나간다고 했을 때는 할아버지 바짓가랑이를 잡고 가지 말라고 우는 어린 손자가 된 기분이었음을 떠올렸다.

부호는 도영이 이 일을 수락했다는 소식에 곧바로 왕명을 내렸다. 성규로서는 굳이 왕명까지야 싶었지만, 너무나 먼 북쪽 땅, 거기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부호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사람이 왕의 신의를 받는 중요한 인물임을 알리는 게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한 건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이때까지 성규의 집안은 왕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벼슬이나 조정 일에 간섭 혹은 탐을 내지 않았고 언제나 적당한 ‘선’을 지킬 줄 알았다. 이번 일도 도영이나 성규가 대대적으로 조정에 밝혀지는 걸 꺼렸고 또 부호 역시 자신에게 생긴 이상한 변화를 밖으로 새어나가게 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지금도 성규를 비롯해 이와 관련된 자들은 모두 조심히 움직이는 형편이었다.

다만, 왕명은 도영이 가는 수령에게는 전달 될 예정이다. 최대한 도영이 편히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그편이 더 좋기도 했다.

 

 

 

*


 

“도영이와 도윤이는 들어왔느냐?”

집으로 돌아온 성규가 행랑아범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바로 끄덕였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 당기는지. 당장 내 방으로 오라 해라.”

핀잔 섞인 말투였지만 자신에게 하는 게 아님을 안 행랑아범이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방으로 들어온 성규는 조그마한 서랍장에 넣어두었던 필사한 서신 한 통을 꺼내 읽었다. 이미 보고 또 보았던 내용이지만 다시 한번 상기하고 싶었는지 그는 미간까지 한껏 찌푸리며 서신에 쓰인 단정한 글자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곧이어 밖에서 도착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훤칠하고 아리따운 두 남매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성규는 그들의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일찍 어미를 여의고 어찌어찌 정신없이 키운 자식들이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하게 자란 모습이 다행이다 싶었다.

아닌가. 성규는 흐뭇했던 마음에 스멀스멀 먹구름이 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꼈다.

성규의 맏딸 김도영은 올해 스물여섯 살이 되었고 아들 김도윤은 올해 스물네 살이 되었다. 두 사람 다 성규의 학구열로 이미 과거까지 합격했고 도영의 사주에는 과수(科數과거에 급제할 운수)까지 있어 무슨 시험이든 척척 붙었으니 가문이 대대손손 큰 복을 이룰 거라 했는데..... 물론 제 집안이 무슨 나라 밥 먹고 사는 고매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리고 저런 사주를 봐 준 게 어딘가 장난이 많이 묻어 있던 제 아내 채윤영의 점괘이긴 했지만, 그래도. 게다가 헌헌하고 반듯한 얼굴들이라 남부럽지도 않은 건 사실이었고, 그런데.

“도대체 허우대 멀쩡한 자식새끼들이 둘이나 있는데 어찌 이리 한량처럼 싸돌아 당기기나 하고. 너희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이렇게 허송세월 보내기만 할 것이냐?”

하다못해 장사꾼이라도 되면 모를까. 왕실과는 앞으로 연을 맺지 않겠다 했지만 그렇다고 일도 하지 말란 소리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성규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버님. 한량처럼 싸돌아다니다뇨. 아시면서. 오늘도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아니, 혼을 도와주고 이리 왔건만. 게다가 종종 아버님의 일도 도와주고 있는데, 그리 말씀하시면 너무 섭섭합니다.”

도영이 괜히 샐쭉거리며 대거리를 했다.

말이나 못 하면. 성규가 제 딸을 가자미눈을 하고 쳐다보았다. 아이는 언제 어디서나 남정네들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단순히 편해서였다. 그리고 그런 도영을 성규 역시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부호가 즉위하면서 여인들의 옷차림뿐만 아니라 지위에 따른 관복이 필요하지 않은 이상 의복에 큰 제약을 두지 않도록 바꾸기도 했다. 새 임금의 의도야 뻔했지만, 그런데도 오랜 세월 익숙해진 사람들의 관습과 관념은 쉽게 바뀌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 있어서 성규는 정말 깨어있는 사람인데, 그의 선조 때부터 여성들도 밖으로 나가 일을 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 첫째이고, 그의 아내 채윤영이 자식들에게 허물없이 가르쳤던 성품이 집안의 가풍처럼 자리 잡은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럼 이참에 아예 직업으로 삼아라. 돈 받을 건 받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베풀면서.”

“무당집이오?”

그래, 이렇게 허송세월하느니 차라리 무당집을 차리는 게 나을 성싶었다. 신수를 부릴 줄 알고, 신기가 있어 오랜 세월 동안 왕실과 이어져 오긴 했으나 성규는 이번 일만 끝나면 다 접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성질로 봐선 무당일을 하면서 적당히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마음도 들었다.

 



사나래=사도화 쓰고 싶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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