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


억지로 맨밥 씹어도
반찬은 하기 귀찮은
가루로 약을 타먹든
물로 울음을 삼키든

어느 쪽이라도 변하지 않는
처방전을 주먹 쥐었음을
깨닫고서도 버텨야 하는

부족함을 채우고자가 아닌
넘치는 것을 부어주고픈
빈 페트병이라
찌그러지는

진공상태의 행복으로는
서 있기조차 불가능하다

억지로 이불 덮어도
추위가 그 곁에 누워
주린 배로 잠에 들어도
불안조차 먹어치울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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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천칭에 목을 매달고
얼음으로 손목을 그어도
살고 싶지 않았다고

핏덩이를 꿴 칼날을 핥고
밥알만큼의 약을 삼켜도
죽고 싶지 않았다고

무게중심 없는 생사의 연속선상의
그 어디에도 있고 싶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하는 너를 앞에 두고
일단은 여기 있으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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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도 약도 먹어봤는데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대체 뭘 어디까지 어떻게까지
해야 되는데 이게 나인데
안 된다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 인정해 달라고
디저트같은 사랑까지도
달라고 하지 않았으니까
욕도 약도 굶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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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멈춰서서 보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참는다
다시 없을 일에 머무르다 사로잡힐까

앞서가라 보내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건
내기도 패배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옷걸이 같은 생애에 나는
무엇인가 열심히 던져 걸었던 것 같고

아마도 그걸로 승부를 볼 셈이었나
멈춰서서 보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참는다

조약돌인지 식빵 부스러기인지
길 위로 흩어놓아도 앞으로 나아가지는지는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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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적 신념


찌든 영혼 눌러붙은 기계라고 생각하면
스스로를 돌봄에 있어 덜 피로할 수 있다

잠시 흔들다가 지나갈 바람이라 여기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도 납득하게 된다

의도함이 아니라는 걸 강조해두면
반칙도 기술이라는 위로로써는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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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통


사랑받고 싶다는 말을 바로 못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된다고 봐도 재미는 있겠다
결과적으로는
받고 싶은 사랑을 서로 해 주니
서로 사랑받는 행복이 되겠다

주고 싶음과 주어버림이 다르고
받아버림과 받고 싶음이 다름을
훌륭하게 역설계한 꽃으로 만든 검이라
찔러 넣어도 피나지 않으니까
폐 언저리에 심장에 주거니 받으면서
터지도록 꽂아넣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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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가죽의 자유



고슴도치가 아니라

우리는 인간이었다


껴안는 것에서 조심할

필요가 없는 맨가죽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무엇이든 하려 했다


왜 떨어져 있을 때 더 아픈지

가시 하나 달고 나지 않아

무엇이든 하려 했던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


껴안는 것뿐이 유일히 자유한

우리는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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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



살면서 천둥 한번도 듣지 않고

크는 아이가 없겠냐만은

그건 결코 자장가로는 좋지 못했다


흔들리고 젖으며 피는 꽃보고

간밤에 잘 잤냐고 물어보지 말아


몇 번이고 자장가 대신

우레와 폭풍에 시달린 성장은

성숙해진 지우개처럼 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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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



백미러에
매달린 십자가
사납게 흔들리는 그 위에 뜬
너의 얼굴은 목말라 있었다
피에 굶주린 허연 입가에
목덜미는 붉었다

빗지도 않았을 머리칼이
차시트에 비늘처럼 박혀들어
곤히 잠든 초조함을 뒷좌석에 실은
나는 마취총이라도 찾고 싶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은
나지막히 고개를 저었다

잠에 담궈놓은 천사는 짐승인지
짐승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눈 앞이 온 세상이
아스팔트가 새까맣게 얽었다

흔들리는 십자가로 시선을 돌리는
나는 선악과의 맛에 길이 든
뱀잡이 땅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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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좋은 날



씻겨놓고 눕혀놓은 삶은
발가벗은 미련이었다
너무 맨정신이었다
아직 대낮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오줌싸듯이 줄담배만 펴댔다
창문 열기엔
밖이 너무 밝다
옷가지를 가식해두니
미련이 베게를 고른다
눈 뜨지 말라고
잠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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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메는 교복, 자리잡은 잠옷


철이라던가, 책임 같은 것
무거워 다 들지도 못할 걸
창 밖으로 내던져버린 세월을
머리맡에 두고 일찍 잔다

그 시절엔
왜 그렇게 밤거리를 헤멘지
떠들고 술 붓고 비틀이는 사람들을 보고
무얼 깨닫고 싶었던 것인지

그러니까 세상엔 나 혼자가 아니며
따라서 사랑을 독차지할 순 없다
그런 게 알고 싶었나

증거나 근거를 찾아 다니며
여태 아니라고 믿고 싶어도 이제는 귀찮다

학생이 순응을 배울 때쯤은
교복을 벗은 뒤임을
이불을 덮으니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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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질



월요일의 새벽이 터 오는게 싫다거나
6시의 알람이 듣기 싫다거나
사랑하는 이를 위해 해야 할 빨랫감이
너무 많다거나, 설거지 안 한 그릇도.
것 때문에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좀 더 확실하게
죽을 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따라서, 남몰래 파탄을 꿈꾸었다
잠에 빠지는 꿈이었다
달콤했을까? 당질은 목 말린다
물고문을 당하더라도
목마르지 않게 되진 않겠건만
파멸이 귓가에 간질거릴 때
아마 알람소리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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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벌레


무슨 사연이 있길래
울음으로 밤을 새우나
온 세상의 귓가에 속살이는
네 이야기를 듣노라면
곁에 누운 빈자리와 손을 맞잡고
지샐 수밖에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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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변화


환풍구 프로펠러가
미싱처럼 돌고 도는지
엉겨붙던 햇빛의 곤죽이
꾸덕꾸덕 말라 떨어집니다

10~11시 배송예정이라던
바람이 머리 끝을 두드려
숨통을 놓고 갔습니다

얼음같이 뜬 구름이 다 녹아
하늘 너머로 우주가 보이면
조금 더 살만해질까요?
뭐가 더 나아지나요?

노끈을 풀어야 들이쉬는
바쁜 현대인의 일상 같은 것을
별자리로 올려 보내주실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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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노래


천 가지 불빛들의 야로에 대고
나는 순결을 맹세하네

괴물이 지나간 자리 위의 이들에게
나는 잘 자라고 말하네

삼라의 눈이 감길 때의
자장가를 듣네

흙덩이로 된 심장이 뛰는 이들에게
휘파람을 부네

부러진 갈비뼈 한 대에
불 지펴 횃대 세운 연기 오르면
신께선 고갯짓하며 숨 쉬어 주시리다

깃털처럼 울부짖으며
피어나는 빛의 잎사귀를
한 떨기 꺾어 바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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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탄내


바싹 익은
영혼 타는 냄새
맡아본 적 있나요
머릿속이 허기져서
마음마저 모두 녹아
텅 빈 뇌리를 긁는
쓰라림에 시달린 적

그러고 나면
아까워서
슬픔마저 못 남기겠다고
꾸역꾸역 먹어 치우는
얼음 뜬 후식으로
게걸스레 배 아파하곤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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