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밤에 만난 두 사람은 똑같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곧 서리가 오려는지, 밤 공기가 슬슬 추워지고 있었다.



오늘 실험은 전혀 순탄하지 않았다. 


약물에 대한 내성과 반응을 실험한다고 여러가지 약을 먹인 것도 그렇고, 마지막에 가서는 꼭 흐트러진 모습을 보아야 겠다는 건지 거의 치사량에 가깝게 약을 주입했다. 


아마 데렉이 만류하지 않았다면 치사량을 넘겼을지도 모르지.



"데렉씨."



아이니시스는 표정이 없는 얼굴로 데렉을 올려다 보았다. 


그 티 없이 맑은, 푸른색의 눈이 데렉을 비추고 있었다. 



데렉은 아무 이유 없이, 한 순간 자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꿰뚫려 보이는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당신이 저를 꽃밭에 초대했을 때, 저도 당신에 대한 걸 읽어볼 수 있었어요."



"... 네?"



갑자기 뜬금 없는 소리에 데렉이 반문했다. 


갑자기 나온 이야기가 



"아주 전부는 아니고, 부분적으로요."



"아이니시스..."



"그냥 아이니라고 불러주세요. 


너무 길고... 서로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요."



로브의 소매자락을 꽉 움켜쥔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 


데렉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렉에게도 '씨'라는 경칭을 빼주었으면 하지만 그건 힘들겠지. 


서로 나이 차이가 있으니까.



"그래요, 아이니. 그런데 그건 왜 말하는 건가요?"



어떻게 들여다 보았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방법에 대한 문제는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짚히는 건 있었다. 


충분히 위협이 있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아이니는 데렉이 자신을 꿈으로 초대한 것에 대해 너무 평온하게 받아들였다. 


심상세계로 끌려 들어가는 그 상황에서 데렉의 기억을 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대단해서요."



아이니는 데렉을 보며 밝게 웃었다. 


은하수가 담긴 것 같이 맑게 빛나는 눈과, 밝은 미소는 여전히 데렉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 자신의 피해도 감수하면서 나섰잖아요. 


나라면 그렇게 못 했을 거에요."



"정확히 뭘 어떻게 보았기에..."



"가장 최근의 용 사냥에서... 


용의 권속이 된 사람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마지막으로 환상을 보여주었죠?



그리고 여기로 오기 바로 직전에 마을의 아이를 구해준 것 까지 보았어요."



왠지 민망해져서 데렉은 얼굴을 오른손으로 덮었다. 


딱히 잘못한 일은 아닌데, 오래된 일기장을 누군가 들춰 본 것 처럼 많이 민망했다.



"그 사람을 그냥 죽였어도 되었는데, 아마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겠죠. 


그 마법에 맞은 사람을 포함해서.



하지만 당신은 심상세계를 열고 그 사람이 가장 보고 싶어하던 것을 보여주었어요. 


누군가는 당신의 마음 편하자고 하는 위선이라고 하겠지만... 


저는 그 마음이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아이니는 데렉의 왼손을 부드럽게 쓸었다. 


누군가의 등을 토닥여주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듯이. 


그리고 자신의 로브의 안쪽, 셔츠 깃에 달린 브로치를 만져보았다. 


생각보다 단단하고 무거웠다. 


용인이 되었던 소녀에게 받은 브로치는, 데렉의 손을 거쳐 아이니의 로브에 달렸다.



"마을에서 호메라는 아이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여기까지 좀 더 여유롭게 올 수 있었을 거에요. 


적어도 악천후에 시달리며 노숙을 하지는 않아도 되었겠죠."



"하지만 저의 전우와 아이를 구했잖아요."



"잘못했다는 게 아니에요. 


대단한 일이에요. 보통은 못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주는 것이 고맙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데렉은 생각보다 자세하게 알고있는 아이니에게 놀라는 것과 동시에, 케인의 부작용에 대한 언급이 떠올랐다.



'적어도 사용자의 정신을 갉아먹거나 자아가 없어지는 등의 후유증을 떠안고 있을 거네.'



텔레파시에 대한 권위자가 그렇게 장담하고 있었다.



"아이니, 나는..."



"계속 이야기 하게 해줘요."



그 단호한 말에 데렉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는 것 만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겠지.



"그러다가 당신의 상처를 보고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상처?"



"네. 가장 깊은 상처인 것 같던데요. 


동생에게 찔린 그 상처요."



데렉은 다시 그 상처를 찔린 것 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잘은 모르겠지만, 많은 권력과 이권이 걸려 있는 자리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견제하고,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상황을 움직이게 하려고 그런 짓을 하는 거겠죠."



갈비뼈 아래에 있는, 커다란 역삼각형의 상처. 


데렉이 자신의 동생에게 칼을 맞은 상처를... 


아이니는 말하고 있었다. 



"그 상처가 너무 크고,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았죠. 


비가 올 때 마다 때때로 격통이 있어서... 


여기로 오는 동안 악천후에 말을 타며 상당히 힘들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어느 새 정신을 차리자, 데렉의 귓가로 빗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심상세계로 끌어당겨진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 들리는 바람소리를 조금 변조해 빗소리로 바꾸었을 뿐. 환영이나 환상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아마 아이니가 깊게 공감하고 마음속에 떠올린 것이 현실로 흘러 넘치는 것 같았다.



"당신은 고귀한 사람이에요. 


그런 상처에도 굴하지 않고 생판 모르는 남을 도와주잖아요. 


비꼬거나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아이니는 그렇게 말하며 데렉의 왼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자신의 손과 뺨에 비해, 데렉의 손은 거칠지만 따뜻했고 온화했다.



문득, 아이니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말을 안 하면 되지 않을까. 


적어도 며칠 동안의 실험동안은 별 일이 없었고, 실험이 진행되는 중에는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거다. 


살아있기만 하다면 데렉은 여기에서 다시 나를 데리고 나와서 하늘을 보여줄테니까, 잠깐이라도... 


이 따뜻함에 기대어 어리광을 부릴 수 있지 않을까.



'안되지...'



고개를 살짝 저으며 웃음과 함께 그 생각을 떨쳐내었다.



이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이다. 


여기에서 나에게 묶여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을 위해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길에는, 분명 내가 없겠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사람을 돕고 세상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당장 며칠 후에 죽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지만 당신에게는 목적(目的)이 없어요."



아이니는 뺨에서 데렉의 손을 떼어놓으며 단언했다.



"무슨 소리죠?"



"다른 사람... 가장 가까웠던 사람에게 크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실망하고. 


그러면서도 자신과 관계 없는 사람을 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약간의 돈으로 먹을 것을 구하고, 구해준 사람의 웃음을 보며,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 뿐이잖아요."



"아이니..."



"약간의 행복과 일상의 즐거움은 있겠죠. 


하지만 당신도 어떤 뜻과 목적을 갖고 하루하루를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어떤 것이 되고 싶다거나, 어떤 것을 이루고 싶다는 강한 소망이 있나요?"



아이니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서로 눈높이가 맞게 되었다. 



빤히 바라보는 아이니는, 이런 말을 하는 것에 버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이렇게 마음이 가는, 자신의 의무나 책임과 상관 없이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제는 이 사람을 떼어내야 했다.



정곡을 찔려 화가 나는 것도 있었지만, 데렉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어 머뭇거렸다.



"당신이 내게 품는 건 그냥 연민일 뿐이에요. 


물론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고, 저는 굉장히 고맙다고 생각하지만요."



"그런..."



"아니면 마법사들을 포함해 여기 있는 모두 죽이고 나를 빼낼 건가요? 


하나라도 살려두면 포위망이 만들어질 텐데."



"나는..."



"나 같이... 비루하고 절망으로 가득 찬 인생을 위해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당신을 찾는 사람은 앞으로도 많을 거고, 당신의 손이 필요한 사람들은 지천에 널려 있을 텐데."



데렉은 놀란 얼굴로 아이니를 바라보았지만 끝내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 부터 지금까지, 데렉의 행동 동기는 모조리 동정이거나, 연민이었다. 


아이가 이런 짓을 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아이니에게 보여준 모든 행동은, 데렉이 베풀어주는 감정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건 순수하게 고마워요. 


데렉씨가 저를 감시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 볼 일도 없었겠죠."



아이니는 다시 엷은 미소를 얼굴에 걸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데렉은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부정할만한 말재간이 없었다.



"정말 고마워요.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 거에요."



뒤에 숨겨진 말을 모를 리가 없었다. 


'비록 며칠 남지 않았지만'.



"갑자기... 왜 그러는 거죠? 


왜 밀어내려고 하는 거에요."



"저는 곧 죽잖아요? 


서로 친해져 봐야 서로에게 미련이 될 뿐이에요."



데렉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양 손으로 부여잡았다. 


결국 자신은... 그것이 절망인지도 모르는 아이가, 머리까지 고통의 한 가운데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럴싸한 위로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왜 데렉씨가 울어요."



다시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는 아이가, 온통 상한 손을 움직여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 울음소리를 감추려는 듯이 바람이 세차게 초원을 휩쓸고 지나갔다.



낙엽도 바람을 따라 바닥을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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