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분에 땀 흘렸더니 찝찝한데 나 욕실 좀 써도 돼요? "

" 개수작 부리지 마 " 


투덜거리긴 했지만 은호가 무거운 짐을 들게 할 수는 없어서 가벼운 박스를 은호에게 들게 하고 무게가 나가는 것은 제가 들고 올라와 식탁에 올려두고 민재는 의자에 앉아 장 봐온 것들을 정리하는 은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로써 세 번째 데이트가 끝이 났으니 은호와 진지하게 대화를 해야 하기도 했고, 집안에 발을 들이고 나니 이대로 그냥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턱을 괸 채 은호를 어떻게 구워삶을까 고민을 하다가 하나만 걸려라 하는 심정으로 아무 말이나 마구 던졌다. 


" 그럼 나 갈증 나는데 아까 사 온 맥주 한 캔만 줘요." 

" 자, 여기 " 

" 아니, 물 말고 맥주 " 

" 쓰읍 " 

" 나 기운 없어서 걸을 힘도 없어요. 밥 주세요 " 


어떻게든 조금 더 있어 보겠다고 뻔하디 뻔한 말을 들으며 은호는 앞으로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육아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은호는 민재가 그러거나 말거나 냉장고 정리를 마치고는 세탁실로 걸음을 옮기자 뒤를 졸졸 따라오는 민재가 느껴졌다. 


애새끼가 아니라 개새끼인가. 것도 작고 귀여운 강아지가 아니라 그냥 큰 개.


컬러, 재질대로 분류해 둔 바구니에서 수건을 넣어 돌리고서는 조금 전에 사 온 드로즈를 민재의 품에 안겨주고 턱 아래를 살살 간지럽히듯 긁어주자 민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심심하면 이거나 빨아. " 

" 인간적으로 속옷 빨래 시키는 직장 상사가 어딨습니까? " 

" 아, 나 지금 직장 상사야? 그럼 이리 주고 그만 가보시죠. 강 인턴사원 " 


손바닥을 내보이며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욕실로 쪼르르 들어가는 모습에 은호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빨기 위해 가지고 들어간 것이 본인 것이란 걸 여전히 눈치채지 못한 민재가 귀여웠다. 이미 할 거 다 했고 이제 와서 내숭 떨 필요 없이 앞으로 저의 집에서 외박을 하게 될 민재를 위한 것이었다. 


시베리아허스키인 줄 알았더니 사모예드 같기도 하고, 세탁실을 나오자 때마침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현관으로 나가 배달 온 치킨을 받았다. 치킨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소주와 맥주, 맥주잔을 꺼냈다. 


" 어? 치킨 냄새다 " 

" 치킨 좋아해요? " 

" 없어서 못 먹죠. " 

" 그럼 그렇게 노래 부르던 맥주 한잔합시다. "


금방이라도 내쫓을 것처럼 굴더니 언제 또 이런 걸 준비했는지 은호의 앙큼함에 피식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은호는 저와 민재의 잔에 적당한 비율로 소주와 맥주를 섞어 채우고는 잔을 들었다. 


" 자, 마지막 데이트 마무리하죠 "

" 건배사가 영 별로네 " 

" 마무리는 맞잖아? " 

" 마지막은 뺍시다. " 

" 뭐, 하는 거 봐서 "

" 나 화나게 하지 말죠? " 

" 화내려고? " 

" 하는 거 봐서요 " 

" 아, 진짜 애들 앞에서는 숭늉도 못 마신다더니, 알겠으니까 마셔요. 첫 잔이니까 원샷- " 


벌컥벌컥 술을 마시고 다시 술잔을 채우고 나니 괜히 어색해져서 치킨만 젓가락으로 쿡쿡 찔러댔다. 막상 판이 깔리니 이 나이에 '우리 사귀자' 하고 시작을 하는 것도 어쩐지 간지럽고, 민재야 진작부터 마음을 내보였으니 제 마음도 보여야 할 땐데 어떻게 말해야 제대로 전달이 될까 


" 치킨이 싸우자고 덤벼요? 왜 치킨 괴롭혀요 " 

" 아... " 


민재는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은호를 가만 쳐다보기 시작하니 은호는 괜히 혼자 어색해져서 맥주잔을 들고 마셨다. 민재는 '나 지금 어색해 죽겠어요' 하고 쓰여있는 은호의 얼굴에 피식 웃었다. 


" 나부터 말할게요 " 

" ... 뭘? " 


민재는 주머니에서 그동안 자신이 갖고 있었던 은호의 팔찌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 이제 이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같은 팔찌 돌려주고 싶은데, 주인이 나타날까요? " 

" ..... " 

" 난 결정했고, 내 결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민은호 씨에 대해서 더 알아가고 싶고, 많은 것들을 함께 하고 싶어요. 착각도, 어린 패기도 아닙니다. 물론 내가 한참 모자란 것도 잘 알아요. 열심히 따라잡을 테니 지켜봐 주시면 안 될까요? " 

" 지켜봐 줄 수는 있어도 도와줄 수는 없어요 " 

" 도움은 저도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 

" 이 정도는 눈감아 주겠지 그런 거 없어요 " 

" 네 " 

" 다른 팀원들보다 더 혼낼지도 몰라요. " 

" 그게 오히려 더 도움이 되겠네요. " 

" 아, 그건 있겠네요. 특혜 " 

" 어떤 거요? " 

" 회식장소 본인이 원하는 메뉴로 정하고 예약해놓기? "

" 아, 과장님 입맛 까다롭던데 " 

" 네, 그래서 아마 예약 잘 못 하면 다음 회식 때까지 괴롭힘당할지도 몰라요. " 

" 회식하기 전에 미리 당신이랑 답사 가야겠네 " 

" 나 이용하겠다는 겁니까? " 

" 특혜를 잘 활용하는 거라고 하죠 " 


민재의 대답에 못 말리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식탁 위에 팔찌를 집어 들고는 다시 민재에게 내밀어 보였다. 


" 채워줘요. " 


자리에서 일어나 은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손목에 팔찌를 채워준 뒤, 손등에 입 맞추고선 손을 놓아주었다. 대신 은호의 두 볼을 감싸고는 이마, 눈, 코, 볼, 입술에 차례로 짧고 부드럽게 제 입술을 가져갔다가 떨어트렸다. 제 볼을 감싸고 있던 손이 멀어지자 은호는 그 손을 다시 붙잡고 당겨서는 민재의 입술을 감쳐물었다. 촉, 초옵, 느릿하게 입술을 떨어트리고 서로를 쳐다보다 동시에 피식 웃었다. 


오래 알고 지낸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스며들고 빠르게 타오르는 연애를 삼십 대가 되어 하게 될 줄을 몰랐다. 지레 겁먹고 밀어내지만 않았다면 더 빨리 시작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어둔 선을 천천히 좁혔다가 또 갑자기 훅 들어와 그 자리에서 다시 좁혀온 민재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사랑을 받지도 주지도 못하고 나중엔 민재를 놓친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기다려줘서 고마워 " 

" 결국 잡혀줘서 고마워요 " 


은호와 민재의 입술이 다시 맞물리려고 할 때 식탁 위에 놓여있던 민재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둘은 동시에 움찔하며 시선이 핸드폰으로 향했고, 너무나도 잘 보이는 곳에 있어서 발신자의 이름이 보지 않으려고 해도 너무나도 잘 보였다. '2팀 혜진 선배님' 혜진이라면 기획 2팀에 민재를 좋아한다고 소문난 사원이었다. 그 여자가 민재의 번호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은호는 민재의 어깨를 쓱 밀었다. 


이제 막 서로에게 닿았는데 닿은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다른 이가 둘 사이를 파고들려고 하고 있었다. 앞으로 민재는 더 남자다워지고 미래가 창창한데 자신이 민재를 정말 붙잡고 있어도 될까, 민재가 남들과 다른 성향이라고 해도 그것을 모르는 이도, 아는 이도, 얼마든지 민재에게 다가올 수 있고 지금은 저를 사랑한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은호는 스스로도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민재의 밝은 미래에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후회 어쩌고 했던 마음이 순간 흔들렸다. 


은호는 맥주잔을 들어 마셨고, 핸드폰 액정을 확인한 민재는 거절 버튼을 옆으로 밀었다. 며칠 전 점심시간에 팀원들과 점심을 먹고 들어오다가 혜진과 부딪혔고 혜진이 들고 있던 커피가 민재의 셔츠를 더럽히는 바람에 보상하겠다며 핸드폰 번호를 알려달라 했었다. 제 책상에 주전부리를 갖다 놓는 사람이 그녀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부담스러운 마음에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괜찮다고 했지만 그러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집요하게 굴고 바람에 점심시간도 끝나가고 있어서 하는 수없이 번호를 알려줬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회사에서도 마주쳐야 했고, 저보다 선배이기에 차마 차단을 못하고 있었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전화가 올 줄은 몰랐다. 


" 그게.. " 

" 굳이 설명 안 해도 괜찮아요 " 

" 들어요, 난 당신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싶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내 모든 걸 궁금해해줬으면 좋겠어요. 말했잖아, 솔직해지자고 "

"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아도 힘들어요. 아는 만큼 집착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 

" 난 당신이 내게 그래줬으면 좋겠어. 집착도 하고 투정도 부리고, 가끔은 기대기도 하고. 혼자서 떠안고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나도 당신에게 그러고 싶어. " 

" ... 말해 봐요. 그럼 " 


민재는 은호에게 말한 대로 은호의 사소하고 작은 것이라도 많은 부분을 알고 싶었고, 상처가 있다면 치유해주고 앞으로 있을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일방통행은 싫다. 제가 은호에게 그렇게 해주고 싶은 만큼 은호도 제게 그래줬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고, 일방적으로 그런다면 분명 자신들도 모르게 어긋날 것이었다. 


은호에게 저의 마음을 전하고는 혜진과의 일도 설명했다. 이제 겨우 붙잡았는데 붙잡기 무섭게 다시 달아나게 둘 수 없었다. 만약 입장을 바꿔 반대의 상황이었더라면 저는 당장 설명하라고 따져 물었을 거였다.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같은 팀원이 아닌 다른 팀 사람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냐고, 


모든 것을 알고 싶고, 닿고 싶다고 말하는 민재의 눈은 진심이었다. 흔들림 없이, 망설임도 없이 제 마음을 전하는 민재의 목소리와 눈빛. 나이도 한참 어리면서 생각하는 것과 그 마음은 저보다도 어른 같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나이도 어리고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햇병아리에게 넘어간 자신이 감당해야 할 벅찬 사랑이었다. 이 마음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동안 가슴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두었던 저의 본 모습을 과연 햇병아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 차단해. 차단하고 왜 차단했냐 따지면 나한테 데리고 와. 감히 누굴 것을 넘봐 " 

" 누구 건데? " 

" 몰라서 물어? " 

" 직접 듣고 싶어서 그러지 " 

" 내 거, 강민재. 너 실수한 거야. 내가 집착도, 질투도 얼마나 심한지 알게 되면 도망가고 싶어질 거야. 그래도 절대 안 놓아줄 거니까 각오해야 해. " 

" 얼마든지, 그럼 이제 우리 하던 거 다시 할까? " 

" 씨발, 그걸 누가 말하고 해. 진짜 분위기 망칠.... " 


분위기 망칠 거냐는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아야 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덜미를 감싸 쥐고 입술을 부딪혀온 짐승 연하남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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