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으아, 으아아!"


자다가 등허리를 얻어맞은 지호는 침대에서 내동댕이쳐져서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리곤 눈물을 닦아내며 자신을 발로 찬 게 분명한, 침대 위에서 씩씩거리고 있는 자신의 애인을 올려다보았다. 자다가 봉변을 당한 건 억울했지만, 아까 자기 전 상태를 미루어 보건데 아직 정상일 리는 없겠다 싶어 조심조심 눈을 맞추었다.


"...자기야. 왜애?"

"옛날 일 생각나서 짜증나."

"왜 또...? 언제...?"

"그때 너네 집 처음 간 날."

"아...."


지호는 머리를 긁적이고선 낑낑거리며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왔다. 무릎을 끌어안고 그 사이에 고개를 처박은 모습이 그날 얼마나 속상했는지를 말해 주는 것 같아서 지호는 마음 한켠이 시큰해졌다. 그래서 두 팔을 벌려 꼬옥 품고선 "미아내...." 하며 꿍얼댔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구지호는 포인트를 잘 못 짚었다.


"개빡쳐!"

"으아악!"


갑자기 머리를 드는 애인 덕분에 지호는 턱을 들이받혔고 덕분에 혀를 씹어서 단번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반면 씩씩거림은 이제 격노로 그라데이션을 이루며 번지고 있었다.


"미친 거 아니야?!"

"아으. 댜기.... 왜애."

"거기가 어디라고!"

"우리 딥(우리집?)?"

"어이없어."

"대테 하난 포인트가 모아...."


그날 네 명이 만난 게 싫었던 건가. 지호는 그래도 몇 년이나 지나서 꺼낼 만큼 화가 날 사건이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다시 꼬옥 끌어안았다. 이번엔 고개를 들어도 턱을 다치지 않게 어깨에 살포시 올리고 정박자로 토닥여 줬다.



31.1.


"언니, 미호랑 잘... 헉!!!!"


지호는 지원에게 인사를 하려 나왔다가 눈을 의심했다. 잔뜩 지쳐서는 거실바닥에 엎어져 있는 지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옆에서 미간 사이를 꾸욱 누르고 있는 상아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는지 물을 탈탈 털며 나오는 하얀까지. 지호는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언니, 하, 하얀이도? 여기는 왜 온...."

"뭐야. 구지호. 무슨 소란... 허?"


지호를 뒤따라 방에서 나온 서율 역시 전혀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지호의 방에서, 누가 봐도 구지호의 티셔츠 같은 옷을 입고 나타난 서율에 상아와 하얀은 표정을 마치 꽝인 복권인 것처럼 꾸깃하게 구겼다. 


"야! 선배 너 왜 거기서 나와?"

"지호 너...?"

"하."


기가 세기로는 UFC 챔피온급인 지원이었지만 세 여자의 스파크 튀다 못해 불꽃이 타오르는 눈빛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미호는 지호의 방에서 달려나와 지원에게로 향했고 서율은 흠칫하며 지호의 팔을 잡았다. 지호와의 스킨십(?)에 상아는 미간을 좁혔고 행동파 하얀은 지호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왜 그러고 있어? 어이없어."

"언니, 이게 무슨 일이야...?"

"구지호. 너 조교님한테 반말해? 아무리 막역해도 그건 좀 아니지."

"얘가 나한테 반말 하는 거랑 친구분이랑 무슨 상관이죠?"

"아니. 지금... 지원 언니!?"


거실에 뻗어 있던 지원은 이유를 모르겠지만 개판 5분 전인 상황에 중재를 하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줄줄이 사람을 달고 오게 된 주범을 들어올렸다.


"자. 모든 건 미호 탓이야. 그니까 얘를 갈궈."

"...? 그게 지금 주인이 할 소리야?"

"근데 진짜 얘 때문이야."



31.2.


지원은 좀 떨어진 아파트 단지에서 미호를 산책시키고 인근 테라스 카페에서 우아하게 티타임을 즐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티타임을 제안한 사람은 다름 아닌 과거의 과외제자, 하얀이었다. 


"오~! 지원 쌤 오랜만이에여!!"

"그러게 간만이구만. 미호야. 하얀 언니야."

"먕! 먕!"

"어우. 쪼끄만 게 사납네."


하얀은 그래도 쪼그려앉아서 쪼쪼쪼 소리를 내며 미호를 불렀고 용맹하지만 또 사람은 되게 좋아하는 미호는 쪼르르 달려가 혓바닥을 내밀고 헥헥거렸다. 


"예쁜데 바보 같애. 구지호 닮았어."

"지호 동생 미호잖아. 누굴 닮았겠어."

"그 전에 키우던 애는 이름이 뭐였져?"

"여운이. 여운이는 나 닮아서 똑똑했는데...."


무지개 다리를 건넌 여운을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미어지는지 지원은 먹구름이 드리운 표정으로 답했다. 그 표정은 지호를 빼다박아서 얼굴이나 성격은 안 닮아도 자매는 자매인가 싶었다.


"나 진짜 먹고 싶은 거 다 시킨다?"

"고고요."


어찌 되었든 지호와 재회하는 데에 혁혁한 공이 있는 지원이었고, 앞으로도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하얀은 지원에게 한 턱 쏜다는 것으로 꾀어냈다. 마침 가고 싶다던 브런치 카페가 공원 인근이었고, 겸사겸사 강아지를 좋아하는 하얀이 미호도 데리고 오라고 해서 두 사람과 한 마리의 만남이 성사된 것이었다.


"구지호도 데려오징!"

"걘 지금 뭐 정신 없을걸. 산책 나가자고 말했는데 자는 척하는 건지 자는 건지 대답 없길래 걍 발로 밟고 나왔어."

"왜 정신 없어요? 아 하긴 시험 바빠 보이긴 하더라요?"

"어제 난리도 아니었지. 구지민도 그렇고 왜 그렇게 사람을 달고 오는 거야."

"사람?"

"어. 친구였나. 아주 떡이 되어선.... 어?!?"


공원을 질주하는 갈색 물체는 분명히 발밑에 있어야 하는 견공이었다. 지원은 얼굴이 새하얘져서는 망가진 목줄을 보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총알같이 튀어나갔다. 


"으아아악! 저 망할. 야 구미호!!!!!"

"헐? 미친. 언제 나갔대요?"

"몰라. 으아! 거기 강아지 좀 잡아 주세요!!!"

"강아지가 아니라 개네. 개야. 아오."


하얀은 지원의 짐과 목줄을 들고 쫓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점원에게 덜컥 손목을 붙잡혔다.


"손님! 계산은 하셔야죠! 주문 다 들어갔는데!!"

"아니... 그, 지금 개가 도망쳤다니까요?!"

"포장해 드려요?"

"아니. 아이... 아뇨 걍 주세요...."


하얀은 이미 점이 되어 보이지 않는 지원과 미호에 포기한 듯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꺄악!"


주말을 맞이하여 오빠 부부에게 끌려나와 강제로 공원에서 광합성을 하던 상아는, 조카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풀숲을 헤치고 나온 갈색 멍멍이에 까무러칠 뻔했다. 조카, 태원이는 오랜만에 재회한 미호(미미)에 다른 의미로 까무러치고 있었다. 미호 역시 구면이라고 헥헥대며 태원과 상아에게 치댔다. 


"미미! 미미다! 꼬모! 미미 이제 주인 업써! 우리 멍멍이 하자!!"

"아니... 얘는 왜 여기 혼자."


상아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지호에게 전화를 하려고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때 고함소리와 함께 파김치가 된 여자가 나타났다.


"자, 잡았다!! 야 이 구미호. 이 똥강아지야!!!!"

"응?"

"아이고. 진짜 감사합니다. 이 망나니가 주인 닮아 갖고...."


녹초가 되어서는 90도로 인사를 건네는 여자는 지호와는 너무 인상이 달라서 상아는 미간을 좁혔다. 미호를 내 줘도 되나? 주인이 아니라기엔 이름을 똑바로 불렀는데. 그런 상아의 머릿속을 읽은 건 아니겠지만 태원의 의견 역시 동일했다.


"에~?! 미미 주인 누나 아닌데에!"

"응?"

"하얗고 까만 누나였는데에!"

"태원아. 이분은 지호가 아냐."

"엥?"


지호라는 이름에 지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요란한 벨소리를 내며 지원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미호는 벨소리에 맞춰 먕먕 짖어댔다. 


- 아, 쌤! 그렇게 나가 버리면 어캐요!!!

"아. 야 미안하다."

- 미호는 잡았어요??

"응. 근데...."


지원은 통화를 하면서도 슬쩍 상아를 바라보았다. 지호랑 아는 사이인가? 그 구지호가 지인이 있다고?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자신의 동생의 지인이라기엔 영 이해가 안 갔다. '젊은 엄마인가? 나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무엇이든 탐구하고 싶어하는 이과 지원의 호기심이 동했다.


"구지호, 동생 아는 분 같아서. 같이 갈게."

"아."

"꼬모 뭐야? 멍무이 우리랑 이제 사는 거야?"

"조용히 좀 해. 권태원."

"우씽."

"아까 사준 똥 모양 젤리 먹고 있어."

"진짜?!"

"그, 저는 구지원이고 지호 언니거든요. 이렇게 뵌 것도 뭐 나름 인연이니까, 잠깐 차라도 한 잔 하실래요? 지호 친구랑 같이 있거든요. 지금."

"...지호 친구요?"


상아 역시 이 상황이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지원이 지호의 언니라는 건 꽤나 분명해 보였다. 지호의 친구라는 사람도 꽤나 신경이 쓰였다. 


"뭐 잠깐이라면...."

"좋았어. 그럼 갈까요."




"엑!! 조교님?"

"구지호 친구라는 게 너니?"


카페에서 식어가는 메뉴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하얀은 지원과 미호를 데리고 나타난 상아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상아는 역시 구지호 성격상 그 나물에 그 밥이지 싶다가도 가족이랑도 만나는 사이일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가 싶어 견제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얀은 상아 뒤에 쫄래쫄래 따라와 미호랑 놀고 있는 태원에 한층 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조교님 애예요?!"

"아니거든?! 조카야!"


지원은 '조카구나. 아는 척 안 하길 잘했다' 안도하는 한편, 하얀이 조교님이라고 부르는 상아에게 물었다.


"조교님? 조교님은 조카랑 놀러 나오셨나 봐요."

"오빠가 데이트 나오면서 애보기 시킨 거죠. 뭐."

"아~ 오~ 조교님도 오빠있구나. 예에~~"


주먹질이라도 하자는 건지, 보리보리쌀이라도 하자는 건지 다짜고짜 주먹을 들이대는 하얀에 상아는 미간을 구겼다. 


"저두 오빠 있거든요!"

"그렇니."

"둘은 어떻게 알아요? 신기하네. 되게 친해 보이네."

"친해요!" "안 친해요."


상반된 대답에 지원은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태연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뻔뻔할 정도로 능숙한 모습에 상아는 아무리 봐도 지호랑 같은 핏줄 같지 않다고 의심했다.


"어제 오늘 내가 아는 구지호 지인이 두 배는 늘었네요. 신기하네."

"고작 둘 늘었다고 두 배야? 구지호 쌤 인간관계 어떡해요."

"셋이니까 정확히는 2.5배네. 걔 친구 둘이야."

"안습... 근데 셋?"

"어. 어제 술에 떡이 된 애 집에 데려와서 재웠거든. 학교도 오지게 멀면서 무슨 깡인지."

"네? 그게 무슨 소리죠?"

"...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응?"



31.3.


지원이 아주 대충 설명만 해 주고 방으로 쌩 들어가 버리고 지호가 세 사람이 먹을 간식을 사온다며 나간 동안 세 명은 거실에 대치하고 있었다. 평소엔 하얀을 견제했던 상아였지만, 딱 봐도 지호의 낙낙한 티셔츠를 입고 있는 서율은 신경이 안 쓰이려야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뭐야. 한 거야? 망할 구지호. 나랑은 사귈 때 그렇게 꼬셔도 모르더니. 견제하며 눈치를 보느라 좀처럼 깨지지 않던 정적, 포문은 서율이 열었다.


"휴일에 집에 놀러 오다니. 꽤 막역한 사이신가 봐요?"

"선배 지금 자기 소개하는 거예요?"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닌데."

"신서율 학생은 학교에서 몇 십 킬로는 떨어진 곳에 술먹고 왜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어요?"

"아이씨...."

"윗사람 질문에 답하셔야져. 선배."

"윗사람...?"


윗사람이라는 발언에 타격을 입은 상아는 황망한 듯 눈이 동그래졌지만 이내 다시 미간을 좁히고 서율을 바라보았다. 서율은 정확히 어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두 사람에게 선을 긋고 싶었다. 


"그냥 친구랑 술 마시다가 지호 보고 싶어서 부른 거고. 지호가 '사랑스러운' 제가 '너무. 너무. 걱정돼서' 데리고 온 거예요."

"와. 무슨 성악하는 줄? 스타카토 무엇?"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지호랑 뭐 했어?"

"오. 나이스 질문!"

"너는 왜 아까부터 조교님 편을 들어?!"

"조교님이 내 편이니까~!"

"?"


서율은 도무지 이해도 납득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상아를 돌아보았다. 상아는 천진난만하게 이야기하는 하얀과 의심이 가득 담긴 서율의 눈을 피해 도르륵 눈을 굴렸다. 


"야. 후배님. 서하얀."

"왜요. 왜. 흥."

"조교님 니 편 아니야."

"아 뭐래. 이간질? 웃겨."

"아니. 이간질이 아니라.... 어떻게 구워 삶으셨어요? 대단하시네?"

"내가 구워 삶은 거 아니야. 쟤가 감자니? 구워 삶게."

"아 먼 소리예요. 알아듣게 좀 말하지? 누가 감자래."


서율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 소리내어 웃고선 시선을 회피하는 상아를 노려보고선 하얀에게 말했다.


"구지호 구여친."

"뭐래. 자기소개 좋아하네?"

"후배님. 뭘 대단히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난 이만 일어날게. 안녕."

"엥! 조교님 어디 가여!"


자기가 속인 것도 아니지만 입 다물고 있던 것도 사실이라 민망해진 상아는 자리를 뜨려 했지만 서율이 더 빨랐다.


"조교님이셔."

"뭐래. 조교님 알아요. 국문과."

"조교님이시라고. 내가 아니라. 네가 견제할 사람."

"아 먼 소리냐고. 조교님이 뭐 구지호 구여치...."


그리고 하얀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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