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혁은 건대 헌팅 포차에서 번호 따고 다니는 족속들을 극혐했다. 저기, 제 스타일인데 번호좀. 호재가 옆 테이블 가서 수줍은 척 번호 따면 한심한 표정 지은 채 야렸다. 한 번 하고 싶어서 안달 난 동기랑 같이 술 마시는 게 쪽팔렸다. 호재야. 여자들은 그런 거 싫어해. 자고로 연애는 자만추. 첫 눈에 반한다는 거 아무도 안 믿어. 아니 애초에 첫 눈에 반할 리가 없지. 얼굴만 보고 어떻게 사랑에 빠지냐. 

일단 같이 지내보다 보면 감정이 생기는 거라고. 얼굴 보자 마자 심장 두근거릴 리 없다고. 연애는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거라고. 이동혁이 올곧게 믿어온 지론이었다. 이동혁이 해온 연애가 그 말을 증명했다. 증명 해야만 했다. 사회 토론 동아리 면접 때 가운데 앉아있었던 면접관 누나. 키 작고 단발머리에 얼굴은 좀 귀염상. 쫄아있는 신입생 이동혁한테 날카로운 질문 많이 했다. 이틀 뒤 합격자 공고에 제 이름 석 자 적힌 거 보고 동혁은 어깨 으쓱했다. 이동혁 말발 아직 안 죽었네. 그 누나가 저 좋아서 붙여준 줄도 모르고.


이동혁 귀엽게 생겼다고 뽑아준 3학년 누나는 제 마음 티 내지 않았다. 선수였다. 이동혁이 자연스럽게 자길 좋아하도록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그 누나 큰 그림 오진다. 연애 경험 많은 누나와 거기에 코 꿰인 순진한 열일곱. 동혁은 제 첫 연애를 그렇게 묘사했다. 누나가 토론 준비 잘 해왔다고 머리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좋았다. 그 작은 손으로 제 머리 쓰다듬어주면 손 내려서 볼도 문대고 싶었다. 손에 땀 찰 때까지 꼭 잡고 복도 거닐고 싶었다. 

누나는 연하 다루는 법을 잘 알았다. 복도에서 만나면 하이파이브 하며 살짝 깍지 끼기. 체육 시간 겹치는 날엔 이동혁에게 포카리 스웨트 한 캔 뽑아다 주기. 토론 자료 준비한다는 명목하에 시내로 불러내서 잔뜩 멋 부린 이동혁이 놀아주기. 에어컨 바람 춥다고 이동혁 져지 받아 하루 종일 걸치고 다니기. 달큰한 향수 냄새 살짝 입혀서 건네주기. 그래서 걸려들었다. 

매일 누나 생각 나고 누나 보고 싶어요. 누나가 토론 시간에 또랑또랑 말하는 거 귀여워요. 찬혁이 형한테 안 지고 반론 할 때 진짜 멋있어요. 토론 할 때만 안경 쓰는 그 컨셉질도 사랑스러워요. 그래서 자꾸 보고 싶어요. 저 누나 좋아하는 거예요? 응 동혁아. 너 나 좋아하나 봐.  9평 끝난 날 오후 여섯 시 동아리 교실에서 이동혁은 첫 키스 했다. 고개 끄덕이면서 환히 웃는 누나가 예뻐서 입술 맞댔더니 순식간에 말캉한 혀가 제 혀 옭아맸다. 와... 대박. 누나 한 번만 더 해도 돼요? 제 앞에 있는 누나는 살풋 웃더니 동혁의 허리 끌어안고 입술 문댔다. 나 누나랑 맨날 키스 해야지. 


그리고 6개월 뒤에 차였다. 수능보는 누나 배려한답시고 잘 만나지도 않았다. 누나 대학 가면 누나네 대학교 놀러 가야지. 대학생 된 누나는 얼마나 더 귀여울까. 누난 서울로 대학 갔다. 2월부터 엠티며 신환회며 뒤풀이며 연락 안 돼도 기다렸다. 그럴 수 있지. 내가 대학생이어도 저렇게 놀 것 같아. 누나 괜찮아요 재밌게 놀아요 ㅎㅎ 답장 해놓곤 손톱 잘근잘근 씹었다. 

하루에 통화 한 시간씩 하던 게 일주일 세 번으로 줄었을 때. 이십 분 통화하고 피곤해서 잔대놓고 페이스북 초록 불 띄워놓는 걸 10번 넘게 봤을 때. 태그돼서 올라온 사진 끝자락에 멀끔하게 생긴 남자애랑 얼굴 맞대고 사진 찍고 있는 누나를 발견했을 때. 동혁아 누나 학교 갈게. 동혁아 잘 자. 두 번 답장하던 누나한테 스무 번 카톡 보냈을 즘에 이동혁은 차였다. 잠수 이별과 환승 이별 환장의 콜라보. 

이주일간 통화 카톡 문자 다 씹더니 누나는 페이스북에 연애 중 올렸다. 얼굴 맞대던 멀끔하게 생긴 남자애랑. 와... 누나 대박이네요. 자존심 빼면 시체인 이동혁은 잡지 않았다. 바로 페이스북 카카오톡 문자 전화 차단하고 남자 없이 잘 살아 개사해서 불렀다. 울고불고 임창정 소주 한 잔 부르는 하수가 아니었다. 누나 많이 좋아하긴 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닌가 봐요. 그냥 잘 사세요. 저도 잘 살 테니까. 


그리고 고2 겨울에 같은 반 예진이. 한 달 동안 짝사랑 했다길래 받아줬다. 너 자만추라며 미친놈아. 같은 반이니까 자만추 아냐? 3개월 사귀다 헤어졌다. 고3 여름방학에 후배 다영이. 오빠 토론 하는 모습 보고 반했어요. 이동혁의 열일곱 생각나게 하는 멘트로 고백하길래 귀여워서 오케이 했다. 9평 전에 찼다. 미안. 오빠 대학가야 돼. 어쨌든 이것도 자만추였다. 동아리 하다가 사귀었으니까 자만추지. 

대학 가고선 경영에서 제일 예쁘다고 소문난 성아가 대놓고 꼬시길래 먼저 고백했다. 감동한 표정으로 안겨 오는 성아랑은 꽤 오래갔다. 6개월. 생각해봤는데, 나 너 안 좋아하나 봐. 이동혁이 경영 18 사이에서 쓰레기 취급 받게 된 그 멘트 날리고 헤어졌다. 그 꼬라지 고2 때부터 봐온 인준은 혀 끌끌 찼다. 동혁아 너는 자만추가 아니라 사없추야. 사랑 없는 만남 추구 이 또라이 새끼야. 이별하고 쿨한 척 작렬했던 이동혁. 첫사랑한테 상처 받아서 더 이상 누구 먼저 좋아할 용기가 없었다는 걸 저만 부정했다. 





"자만추고 자시고 첫 눈에 반할 수 있는 거라니까?"

"아니 인준아."

"뭐."

"너는 로맨틱충이라 그게 되는 거라고."

"너는 그냥 네 감정을 모르는 거야"

"..."
"너 예진이나 다영이나... 김성아 좋아하긴 했냐?"

"그니까 사귀지"

"그게 좋아하는 거면 난 나재민이랑 벌써 혼인 신고 마쳤어 미친놈아"

"님은 열심히 첫 눈에 반해서 사랑하세요. 나재민이랑 캐나다 가서 결혼 하세요."

"네 씨발 님은 평생 누구 좋아하지도 말고 쓸쓸하게 지내세요"

"축복 감사요"





너나 뜨겁고 로맨틱한 사랑하세요. 

스무 살 이동혁은 사랑 불신론자 되어 혼자 실버타운 가서 늙어 죽을 계획 세웠다.

이혜연 만나기 전까지는.




**



"이동혁 진짜 좆됐다..."

"나도 아니까 조용히 좀"

"도시대 2학년 2학기 쓰레기 시간표 1위에 선정합니다."

"와 진짜 좆됐다. 나 어떡하냐?"

"성과 사랑? 야 이거 고학년 때 학점 채우는 용으로 듣는 거 아냐?"




성과 사랑. 학점 채우기 용으로 듣는 꿀 교양. 학기 초에 정한 짝과 데이트 하며 과제 수행하고 커플 되면 a+. 한 달에 한 번 밤에 통화하는 과제도 있다. 학점 남고 애인 만들고 싶은 고학번들이 3초 컷 마감 시킨다. 망해버린 시간표에 뵈는 거 없이 클릭질 하다가 얼떨결에 고학번 수업 담아버린 이동혁. 언니 제발 남자 친구 만들라고 이 수업이라도 들으라는 후배의 닦달에 신청해버린 이혜연. 복학한 이혜연 피해 1년 휴학했다 돌아와서는 별 생각 없이  수강 신청한 이민형.




그렇게 셋이 만났다.

성과 사랑 수업에서.




오티 날부터 지각한 혜연은 강의실 뒷문 열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뒤통수에 숨 들이켰다. 이민형이 왜 여기 있어? 휴학했다던 이민형이 돌아왔다. 금색 머리칼은 흑빛으로 물들이고 여전한 체크남방 입고선 앉아 있었다. 생각 정리할 틈도 없이 출석 부르는 교수의 목소리에 자리를 찾아 앉았다. 2년 만에 이민형을 마주했다. 변한 건 머리칼밖에 없는 이민형과 눈이 마주쳤다. 토할 것 같은 기분에 혜연은 입을 막았다. 누가 식도에 손 넣어서 휘젓는 것 같았다. 헛구역질 났다. 꾸역꾸역 씹어 삼켰던 달디 단 도넛과 버블티가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2년 동안 잊고 있던 그 감정이 속을 타고 올라왔다. 이혜연, 이혜연 없어요? 



"선배"

"...."

"혜연 누나"

"어?" 

"교수님이 불러요. 출석."



죄송합니다 교수님. 이혜연 출석 했습니다. 혜연은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민형의 눈빛이 느껴졌지만 애써 피했다. 사람 뚫릴 것처럼 쳐다보는 건 여전하구나. 이민형 시선 피해 고개 돌리니 보이는 건 옆자리 남자애였다. 까맣네. 어딘지 모르게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까만 애. 얼굴은 까만데 귀는 왜 이렇게 빨개? 술 마시고 수업 들어왔나... 혜연이 정의한 이동혁의 첫인상. 근데 너 내 이름 어떻게 알아? 제가 선배를 어떻게 몰라요. 



"아 인사 먼저 해야 하나."

"난 너 몰라."

"전 선배 알아요. 안녕하세요."

"아... 어."

"선배 저랑 짝 하실래요?"

"친구 없니."

"네 없어용. 저랑 짝해요."

"니가 누군지는 알아야 짝을 할 거 아냐."

"저 선배랑 같은 과. 경영학과 18학번 이동혁이요."




과씨씨로 1학년 야무지게 말아먹은 이동혁은 헌내기 되던 해에 다짐했다. 이동혁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이미지 복구 오지게 해야한다. 경영 쓰레기 이동혁. 동혁은 제 앞에 붙은 수식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먼저 고백했으니까 먼저 차면 안된다는 법 있나. 만나면 입술 들이밀고 허리 감싸 안는 성아가 부담스러웠으니까. 오버워치 좀 할랬더니 자기 이제 안 좋아하는 거냐며 카톡 테러하는 성아한테 지쳤으니까. 그래도 맘씨 고운 이동혁은 티 내지 않았다. 내가 미안해. 내가 널 왜 싫어해 성아야. 사람 좋은 웃음 지으며 머리 쓰다듬으면 그제야 성아는 안심하고 손 잡아 왔다. 

이동혁은 성아와의 이별을 위해 정시 원서 낼 때보다 더 많이 고민했다. 오버워치 하느라고 밤 새본적은 있어도 연애 고민 하느라 밤새운 건 3년 만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나 너 안좋아해. 솔직하게 말했더니 김성아는 상경관 앞에서 세상 떠나가라 울었다. 성아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잖아. 제발 뚝 해. 넌 이 상황에도 지나가는 사람들만 신경 쓰이지? 이 쓰레기새끼... 다음 날 학교 나가보니 이동혁은 경영 쓰레기 되어 있었다. 에타에도 경영학과 18 이*혁 개쓰레기라고 욕하는 글로 가득했다. 내가 왜? 그래도 이동혁은 눈치 빨랐다. 1학년 2학기 쥐죽은듯이 살았다. 이동혁 쓰레기 여론 사그라들 때까지 사리고 또 사렸다. 


이제는 이미지 쇄신할 때지. 그렇게 나간 2학년 1학기 개총에서 이혜연을 봤다. 저는 16학번 이혜연입니다. 나이가 좀 많긴 한데... 2학년이랑 같은 수업 듣는 게 많아서. 무튼 잘 부탁드려요. 엉거주춤 일어나서 자기 소개하는 혜연을 보고 동혁은 4년 전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속이 간지러워. 누가 심장 잡고 비트는 것 같아. 얼굴에 열 올라. 너무 오랜만이라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어. 이거 술 마셔서 그런 거야 인준아? 

귀염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데. 고양이처럼 생겼는데 말 하는 건 되게 강아지 같다. 앞에선 친구들이 소맥 말아 마시라고 부추기는데도 눈은 자꾸 혜연이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이동혁 이 새끼 집중 못하네. 야 누가 이동혁 전용 폭탄주 말아줄 사람. 소주 9에 맥주 1 타서 들이키는데도 취하지 않았다. 자기소개하고 수줍게 웃던 그 얼굴만 계속 생각났다. 구석에 앉아서 깨작깨작 술 마시고 있는 혜연 옆에 앉고 싶어졌다. 이동혁은 인정 해야 했다. 황인준이 주구장창 말했던 첫 눈에 반하는 그 기분. 대가리에 종이 댕댕 치고 주변은 화사해 보이고 소음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그 기분. 돈 많이 벌어 실버타운 들어가서 벽에 똥칠하면서 살겠다던 이동혁. 복학생 이혜연 마주하고 사랑 불신 접었다. 무신론자 이동혁은 제 감정 인정하고 신에게 감사 기도 올렸다. 



첫 눈에 반하는 거 있는 건 가봐요.

자만추 좆까라 그래. 

이동혁은 어떻게 해서든 이혜연과 연애해야 했다. 

















다음 편은 주말 내로 늦으면 월요일 내로 올라갈 것 같아요. 원래 한 번에 다 올리려 했는데 너무 길어질 것 같기도 하고, 동혁이에 대한 설명이 어느 정도 필요할 것 같아서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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