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의 시작과 끝을 생각해 본다면 각각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타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시작과 끝은 한순간으로서의 시점이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시작과 끝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사이를 중간이라는 존재가 잇는다. 그래서 중간은 시점이라기보다 시간이라 할 수 있다. 택배의 시간에서 중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택배 회사의 시스템일 것이다. 물건은 시간에 따라 사용하면 닳듯이 중간의 시간에서는 어떤 흔적이 남겨진다. 그러나 택배 어디에서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찾아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택배 자체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관심의 대상은 택배 상자 안에 든 물건이다. 보내는 사람은 물건을 잘 받았는지, 받는 사람은 물건이 잘 출발했는지만을 떠올리며 기다릴 뿐이다.


 새벽부터 집하장에 모인 각지의 택배를 선별하고 옮기는 손은 무관심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택배 회사의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며 내용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작업 수행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게 택배는 무관심한 손을 거쳐 최종적으로 택배 기사에게 양도된다. 더불어 무관심도 같이 양도되어 현관문 앞에 툭 던져진다. 이렇게 택배는 시작과 중간과 끝 모두에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속에 품고 있는 물건에 대한 관심에서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상정했던 택배의 시작과 끝에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둘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이러한 소외 현상은 칼 맑스의 말대로 노동자와 생산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 상품에는 중간이라는 시간만 부재할 뿐이지 시작과 끝이라는 시점은 명백하게 있다. 왜냐하면 일반 상품 자체에 관심을 두고 구입해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택배는 시작과 중간과 끝 모두에서 배제되어 있다. 모든 시간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시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뜻한다. 즉, 시간을 초월한다고 할 수 있다.


 시간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관심을 통해서다. 그 무관심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포장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 상품은 이동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포장된다. 생산 -> 유통 -> 소비의 단계 순의 이동을 거치기 때문에 두 번의 포장이 필요하다. 유통을 위한 포장과 소비를 위한 포장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과자를 담는 봉지 포장, 그 봉지를 담는 박스 포장처럼 이중으로 포장된다. 생산과 유통을 거쳐 소비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유통을 위한 포장은 제거되고 소비를 위한 포장만 남게 된다. 그리고 소비도 끝나게 되면 소비를 위한 포장도 제거되어 모든 포장이 비로소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유통을 위한 포장과 소비를 위한 포장은 서로 다른 지위를 갖게 된다. 막 다뤄도 되는, 막 다뤄서는 안 되는 구분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관심은 이중 포장에서 만들어진다. 막 다뤄도 된다는 관념이 결과적으로 무관심한 태도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택배로 상품을 구입하는 것과 직접 구입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택배는 이중으로 포장되어 소비자의 손에 들어오는 반면 일반 상품은 이중으로 포장되지 않은 채 손에 들어온다. 누런 택배 박스에 붙은 테이프를 제거하고 첫 번째 포장을 제거하면 두 번째 포장과 마주하게 된다. 두 번째 포장 역시 제거하면 상품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많은 경우 상품과의 거리에 따라 존재의 가치가 정해지기 때문에 첫 번째 포장인 택배 박스는 버려지는 운명에 처한다. 하지만, 두 번째 포장인 상품 박스는 소장되는 운명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둘 다 버려지게 된다면 상황은 역전된다. 택배 박스는 폐지가 되는 가치를 갖지만, 상품 박스는 쓰레기 되어 가치를 잃기 때문이다. 그 순간 폐지는 막 다뤄서는 안 되는 존재로 바뀌고, 동시에 존재의 위치도 바뀌게 된다. 따라서 택배 박스는 사용되어짐이 멈추지 않는다. 상황에 맞게 택배 박스가 되었다, 폐지가 되었다가 한다. 그렇게 끝없이 변모함으로써 영생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초월이다. 바로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시작과 끝은 특정 시간의 시작과 끝을 나누는 분기점이다. 특정 시간이 끝나면 다른 특정 시간으로 이행된다. 따라서 시작은 또 하나의 끝이고, 끝은 또 하나의 시작이다. 그래서 사건은 그 중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시작으로부터 끝으로부터 중간으로부터 모두 배제되어 있는 택배는 분명한 사건으로 보이지만, 조건을 충족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언제나 뒤로 밀려나고 있음, 언제나 배제되고 있음을 택배의 사건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택배는 시점과 시간이 만들어지려는 순간 그곳에서 이탈해 영원히 시점과 시간에 속박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시점과 시간으로부터 이탈하며 존재의 위치를 계속해서 뒤바꾸는 택배는 시간과 공간에서 모두 자유로운 것이다.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은 순간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택배의 순간이동성 때문에 택배가 언제 도착하는지 알기란 불가능하다. 항상 예상보다 빨리 오거나 늦게 오며 예상이라는 틀을 전복시킨다. 언제나 불쑥 순간이동을 해 찾아올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택배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택배 박스 안에 다른 목적지의 또 다른 택배 박스가 들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상상을 해 본다. 그렇게 택배가 곧 상품이 되어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택배의 자유로움이 상실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된다면 순간이동 역시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택배에 대한 무관심은 어쩌면 택배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롭게 언제 어디로든 순간이동을 하기 위해 택배 스스로가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택배의 자유를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택배 안에 또 다른 택배를 넣는 장난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우리는 그저 택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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