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세계관에서 푸바오는 중국 안 갑니다... 🐼



👑


영주 맞다!



제노는 영주가 부리나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쳐다봤다. 뭐지. 제노가 미동도 없이 영주를 기다리고 있자 곧 영주는 제노가 빌려준 핑크색 담요를 내밀었다. 이거 세탁해서 드려야 하는 건데!


영주의 말에 제노는 그제야 기억난 듯 가볍게 탄식을 뱉었다. 생각해보니 그 채팅인지 뭐인지 아무튼 그것 때문에 다 까먹었었다. 빌려준 것도, 이게 누구 전용이었던 것도. 제노가 고개를 저으며 담요를 받아서 들자 영주는 주위를 살피고 조용히 속삭였다.



영주 근데 우리 내일 에버랜드 가는 거예요, 아니면 롯데월드 가는 거예요?

제노 어디 가고 싶은데요?



사실 어디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놀이공원이야 여림이 당연히 고르지 않을 선택지였으니까 여러 데이트 장소들 중 고른 것 뿐. 다른 의미가 없었다. 차가 없는 것도 아니고 뭐... 제노가 제 턱을 쓸어내리며 영주를 쳐다보자 영주는 환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영주 저는 에버랜드! 판다 보는 거 좋아해요?

제노 판다...?

영주 네! 거기 판다들 진짜 귀엽거든요. 근데 들어가면 5분 밖에 못 봐요!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별 흥미 없는 내용이긴 했다. 연애 기간 동안 놀이공원이야 누군가가 겁이 많은 탓에 당연히 가본 적 없었고, 갈 필요성도 없었고. 제노는 자신의 앞에서 에버랜드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하는 영주를 내려다봤다. 본격적으로 핸드폰까지 켜 얘기하는 영주에 제노는 살짝 웃었다.



제노 에버랜드 진짜 좋아하나보다.

영주 네? 그건 맞지만!

제노 응?

영주 제노 씨랑 가서 더더 좋은 거죠! 놀이공원 커플 데이트가 얼마나 낭만적이에요!



제노는 영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그러면 멀리 가니까 내일 아침 9시에 나갈까요? 영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노는 그제야 영주의 어깨를 잡아 부엌 쪽으로 밀었다. 얼른 가서 도영 씨 도와드려요.



영주 저는 더 일찍 가도 되는데!

제노 근데 화장도 하고,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힘들잖아요. 대학생은.

영주 그건 또 맞네... 알겠어요, 내일 9시! 안 까먹어요! 진짜!



제노는 부엌 쪽으로 달려가는 영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판다...? 한번 찾아봐야겠다.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는 제노의 한 쪽 손에는 자신의 핸드폰이, 다른 손에는 영주가 돌려준 담요가 들려있었다.






🍦


집 가고 싶다. 여림은 발코니에 앉아 가만히 허공을 바라봤다. 오늘은 도영이랑 아침 빼고 한 번도 못 봤다. 그렇다고 해도... 퉁퉁 부은 얼굴로 봤으니 딱히 좋은 모습은 아닐 테고.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 당번이 영주 씨랑 도영 씨니까. 내려가기 불편해. 여림은 뻔히 보이는 영주와 제노의 관계에 다리를 모아 앉아 고개를 숙였다.


너무 뻔히 보이잖아, 썸 타는 거. 짜증나. 자기 전 여자친구한테 그런 모습 보여주고 싶나? 지랑 나랑 좋아했던 세월이 얼마나 긴데... 끝없이 이어지는 상상에 여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랑 있을 때의 걔의 모습이 너무 그려져서. 그리고 그걸 서영주 씨한테 한다고 생각하니까. 돌겠다.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너무 밉다.


여림은 발코니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투명 문밖으로 보이는 민형에 여림은 민형을 가만히 쳐다봤다. 민형이 말없이 발코니의 문을 열고 들어와 여림의 옆, 옆자리에 앉자 여림은 민형을 응시했다. 뭐지. 궁금증이 가득한 여림의 눈과 다르게 민형의 눈은 미동이 없었다. 오직 움직이는 건 그의 손가락 뿐이었다.


... 뭐야? 여림이 미간을 찌푸리고 민형을 바라보는 데도 민형은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여림은 이 분위기가 버거웠다. 뭐라도 말을 해야지... 저기. 여림이 말의 운을 띄자 민형의 눈은 모니터에서 여림의 얼굴로 옮겨갔다.



여림 여긴 왜...

민형 아래에 있기 불편해서요. 시끄럽고.

여림 아...

민형 여기 있어도 괜찮죠?

여림 뭐... 제 집도 아니니까요.



민형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시선을 옮겼다. 낯을 가리는 걸까... 아니면 내가 불편해서? 그치만 나랑 아무 관계도 아닌데, 아직. 여림은 힐긋 민형을 쳐다봤다. 멍때리던 시야 속에 불청객이 들어와서 신경 쓰인다. 나가달라고 할 수도 없고... 여림은 순간 실내로 고개를 돌리다 계단을 올라오는 제노의 인영을 발견했다. 모를 수가 없잖아, 걔를.


미친. 하필. 왜. 민형 씨! 여림이 다급히 고개를 돌려 민형에게 말을 걸자 민형은 의아한 눈으로 여림을 쳐다봤다.



여림 여기서도, 그, 어... 회사 일 하는 거예요?

민형 아......

여림 응?






🐯


민형은 여림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룸메이트랑 진짜 닮았네. 얼굴 작고 입술 작고 좀 불안해 보이고. 민형은 자신의 노트북을 여림의 쪽으로 돌려 입을 열었다.



민형 이거 프로그래밍하는 건데 한번 볼래요?

여림 개발자예요?

민형 ...... 얘기 해도 돼요?

여림 저도 모르는데......



어쩌면 저와 무지 닮았다. 민형은 평온함을 유지한 채 손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이걸 이렇게 변환시키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보여요? 순식간에 까만 화면의 하얀 글자에서 한결 익숙한 모습으로 변하자 여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형을 쳐다봤다. 와. 저. 진짜 이런 거 하나도 못하거든요.



민형 이런 거?

여림 그러니까... 음, 뭐라고 해야 하지? 이과스러운 거? 제가 완전 문과형 인간이라.

민형 아.

여림 그래서 아이패드도 필기랑 유튜브, 오티티만 보게 되더라구요...

민형 근데 저는 이게 직업이고, 직업 아니면 굳이 모든 걸 알 필욘 없죠.

여림 그런가요?

민형 그래야 저 같은 개발자들이 먹고 살죠.



민형의 말에 여림이 낮게 웃었다. 민형은 순간 앞을 지나가는 그늘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형체에 민형은 자신의 볼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웬 안 어울리게 핑크색 담요를 들고 있지. 민형이 다시 고개를 돌려 여림을 바라봤다.


이 사람도 나랑 똑같은 걸 봤구나. 민형이 말 없이 노트북을 접자 여림은 그제서야 민형의 행동을 자각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림 저도 내려가서 도울게요! 배고프니까...

민형 아, 요리 잘 하시죠.

여림 잘 하는 건 아니고... 민형 씨는 배 안 고프세요?

민형 저는 아직 괜찮아요. 조금 있다가 불러주실래요?

여림 네. 그럴게요.



여림이 살짝 미소 짓고는 발코니 문을 열어 실내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티가 많이 나는 구나.

그럼 나도 다를 게 없겠네. 민형은 노트북을 다시 열고 한숨을 내쉬었다.











🍑


혹시 여기 있나. 재현은 조심스럽게 준희와 여림의 방문을 두드렸다. 향수 공방 예약과 별개로 여림과 몇 시에 나갈지 일정을 조율해야 하긴 했다. 평소에는 훈련이 없는 날에는 집 안에 콕 박혀있는 게 재현이었지만 이건 프로그램이고 데이트는 해야 하니까. 똑똑. 가볍게 이어지는 재현의 노크 소리와 곧,



준희 ... 뭐예요?



경계하는 준희가 문을 열었다. 머리가 부스스하네.



재현 잤어요?

준희 어... 네. 생각보다 저녁 준비가 오래 걸려서. 전 오늘 할 게 없었고.

재현 아.

준희 왜 저희 방을 찾으셨는지...

재현 여림 씨 있어요?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준희 오호... 내일 데이트가.

재현 ......

준희 아익, 장난인데 반응이 왜 그래, 진짜. 여림 씨-.



나도 딱히 정색한 건 아니었는데. 재현이 머쓱한 얼굴로 자신의 턱을 쓸어내리고 있자 곧 여림이 나와 재현을 올려다봤다. 가만 보면 진짜 안 어울리는데. 여림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재현을 올려다보자 재현은 웃으면서 2층 거실을 향하는 복도를 가리켰다.



재현 여기서 말고 거실 가서 얘기할래요?

여림 데이트 얘기요?

재현 준희 씨한테 들킬 텐데.

여림 헙.

재현 아무튼 그거 얘기요.

여림 네네, 괜찮아요.



재현이 앞, 여림이 그 뒤를 따라 천천히 2층 거실로 향했다. 진짜 내향형이긴 하네. 재현이 먼저 소파에 앉자 여림은 한 발짝 떨어져 재현의 옆에 앉았다. 아. 서운하게.



재현 그렇게 떨어져 앉음 서운하거든요.

여림 ...... 알았다구요.



여림은 삐딱한 얼굴로 재현을 쳐다보다 결국 가까이 앉았다. 10cm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앉은 여림을 응시한 채 재현은 입을 열었다. 우리 둘이 뭐 하는 진 알죠? 재현의 말에 여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재현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곤 마저 말을 이었다.



재현 떡볶이 말고 좋아하는 건 없어요?

여림 ...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재현 근데 맵찔이인 것 같던데.

여림 제 엑스가 가르쳐줬어요?



여림의 질문에 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숨길 이유도 없었고... 여림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재현은 웃으면서 소파에 기대 앉았다. 근데 되게 재수 없더라고요.


재현의 말 하나하나에 여림이 반응한다. 재현은 여림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웃었다. 그렇게 궁금해요? 사실 다 알고 한 질문이었다. 여림이 망설이는 눈으로 고개를 젓자 재현은 팔짱을 낀 채 여림을 바라봤다.



재현 안 알려줄 건데.

여림 헐.

재현 내가 왜 알려줘요.

여림 아니 그렇게 막... 그 뭐지. 뜸 들여놓고?

재현 그래도 얘기 안 해줄 거예요. 떡볶이 말고 뭐 먹고 싶어요?

여림 ... 어어, 저 이런 거 선택 진짜 못 해요.

재현 흐음.

여림 ...... 진짠데.

재현 아니면 나랑 하는 데이트에 관심 없어요?



재현의 도발에 여림의 눈이 커졌다. 곧 이어지는 부정의 말에 재현은 여유로운 얼굴로 여림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무래도 이 여자는 자기 엑스한테 너무 미련이 많아. 그리고 그걸 그 놈도 너무 잘 알고 있고.



여림 진짜 관심 없는 거 아니에요!

재현 근데 꼭 마지못해 하는 사람처럼?

여림 아닌데... 억울해.



입꼬리가 축 떨어진다. 재현은 결국 크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장난인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요? 여림을 허탈하게 만들 만큼 단순한 재현의 말에 여림은 결국 아휴 하는 한숨을 뱉으며 소파에 기댔다. 진짜 사람 미안하게 그러면 어떡해요... 여림의 말에 재현은 여림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재현 못 고르면 내일 제 마음대로 할게요.

여림 네...... 근데 진짜 재현 씨랑 안 하고 싶은 거 아니거든요.

재현 저도 장난이었다니까요.

여림 진짜......

재현 내일 같이 나가서 점심 먹고 향수 공방 가요. 11시까진 2층 거실로 나오기로.

여림 네...

재현 드레스코드는... 청으로 가죠.

여림 ... 그런 것까지 정해요?

재현 이왕이면요.

영주 밥 다 됐어요! 얼른 내려오세요!



재현은 시선을 여림에게서 계단 쪽의 영주로 옮겼다. 저렇게 밥 먹으란 얘기만 하고 사라지네. 저희도 이제 가죠. 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림은 자신의 앞머리를 만지며 따라 일어나 준희를 부르겠다며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재현 난?

여림 ......?

재현 난 안 데리고 가요?

여림 ... 어른이 밥 먹으란 얘기 듣고도 못 내려가요?



한 방 먹었다. 후다닥 자신과 준희의 방으로 향하는 여림에 재현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계단 쪽으로 발을 옮겼다. 제 룸메는. 뭐.


알아서 하겠지. 어른인데.








🐰


영주가 사람들을 부르겠다고 나섰다. 주방에 혼자 남은 도영은 테이블에 반찬을 담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혼자서는 이 정도로 안 차리는데 많은 양을 하려니 감이 안 잡혔다. 근데 내일은 저녁 먹고 들어오는 건가... 아니면 무조건 저녁은 같이? 도영이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어 올리자 불쑥 손이 들어왔다.



여진 도와드릴게요.



하곤 말없이 손을 움직여서 개수를 센다. 조용히 숫자를 세고 움직이는 손에 도영은 여진을 가만히 쳐다봤다. 되게 조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예상을 빗나가질 않는다. 말없이 수저를 놓는 여진에 결국 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영 영주 씨가 2층 먼저 가지 않았어요?

여진 그런데 목소리가 우렁차서.



아. 하긴... 작은 목소리는 아니다. 영주가 밥 되었다며 2층에서 외치는 소리는 도영에게도 들렸으니까. 여진의 말에 도영은 가벼운 웃음을 흘리고는 밥솥을 열었다. 순간 올라오는 김에 눈을 찌푸리곤 밥그릇을 들었다. 맞다.



도영 혹시 어느 정도 드세요?

여진 아. 저는 그 밥그릇 가득?

도영 가득이라고 했으니 남기시면 안 돼요.

여진 그럼 삼 분의 이 정도만 담아주세요.

도영 네-.



여진의 대답에 도영은 적당량을 그릇에 담아 옆에 내려놨다. 자연스럽게 도영의 옆으로 와 채워지는 밥그릇을 하나하나 옮기는 여진에 도영은 슬쩍 말을 걸었다.



도영 혹시 일 같이 해보실 생각 없으세요?

여진 제가 좀 빠르죠?

도영 네. 빠르네요.

여진 그치만 본업이 있어서 힘들어요.

도영 아쉽네요.



그러고보니 국이 없네. 도영은 반찬과 밥이 가득 채워진 식탁을 보고는 제 턱을 문질렀다.



여진 국이 없네요.



순간 제 속을 간파한 여진의 말에 도영은 맞장구를 쳤다.



도영 국도 끓일 걸 그랬나 봐요. 재료가 없어서.

여진 제가 내일 할게요. 저랑 제노 씨가 내일 당번이니까.

도영 내일 데이트 아니세요?

여진 그런데 규칙엔 되도록 저녁은 하우스 내에서 하라고 해서요. 아마 얘기는 해야겠지만.



그러면 내일 제노 씨랑 하나? 다른 데이트 상대들은 저녁 먹고 들어올 수도 있을 텐데. 도영은 여진의 말에 여진을 바라보다 곧 들어오는 민형에 시선을 옮겼다. 영주 씨가 불렀죠?



민형 네. 저 어디 앉을까요?

여진 편한 데 앉으세요.

민형 오늘... 여진 씨 당번 아니지 않았어요?

여진 그래도 사람이 남을 돕고 살아야죠.

도영 그렇게 얘기하면 당번이 뭐가 됩니까...



도영은 일부러 자리에 앉지 않고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왜 안 오세요? 라고 묻는 민형의 말에 도영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물 가져오려고요. 물은 핑계였다. 도영의 목적은 명확했다. 누군가를 피하기 위해서. 적어도 누군가를 옆, 혹은 앞에서 보고 싶진 않아서.


도영은 2층에서 내려오는 준희와 여림을 발견하고는 물컵을 집어 들었다. 일부러 하나씩 천천히, 총 8개의 물컵을 테이블로 옮겼다. 도영은 꼭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어쩌면 제일 이기적인 행동이었을 지도 모르면서도. 제노와 재현까지 내려와 자리를 잡자 도영은 그제서야 자리에 앉았다. 가장 끝 자리. 앞에는 민형, 옆에는 재현.



영주 잘 먹겠습니다-.



영주의 말 한마디로 여기저기서 잘 먹겠다는 말이 나왔다. 도영은 그제서야 안심한 듯 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저는 이렇게 불안한데 상대는 너무 평온해 보여서. 제가 잘못된 것 같았다.






🐈‍⬛


준희는 아직 찬 밥그릇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근데 나 도영 씨랑 대화는 어떻게 하지...? 사실 호기심에 쿠킹 클래스를 골랐지만 감이 안 잡혔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해도 쿠킹 클래스의 종류는 너무 많았다. 그래도 쉬운 거... 아니 근데 도영 씨는 처음에 고를 땐 요리 잘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골랐을 지도...?


준희는 슥, 도영의 쪽을 바라봤다.



도영 근데 재현 씨 진짜 피부 좋은 것 같아요.

재현 저요? 아무것도 하는 거 없는데.

도영 ... 갑자기 확 짜증이.

재현 아, 왜요-.



이거 분명 남자랑 여자랑 연애하는 프로그램 아니었나. 준희는 다시 시선을 밥그릇 쪽으로 돌렸다. 저기에 말 걸어봤자 괜히 시선만 모이고... 비밀 데이트 얘기 해야 하는데 그러면 나 완전 아마추어처럼 보일 거 아냐. 입맛이 뚝 떨어졌다. 솔직히 데이트에 나 관심 없는 것 같아. 뭐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언니들인지 동생들인지 나이를 알아야 친해지든 하든 말지...! 준희는 제작진의 불친절함에 입술을 꾹 씹었다.


띵동. 그 순간 울리는 초인종에 준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나갈게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후다닥 현관 쪽으로 향하는 준희에 다들 식사를 멈추고 준희를 가만히 쳐다봤다. 근데 이게 더 주목받을 만한 행동이긴 한데... 준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앞 우체통에 또 하나의 편지가 놓여 있는 것에 준희는 편지의 겉 봉투를 한참 살폈다.



준희 또 이런 거 왔는데요?

여림 준희 씨가 열어봐요!



준희의 맞은 편에 앉은 여림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내가~ 가져왔으니까~ 내가 열어보는 게 더 나을지도? 준희가 조금 편한 마음가짐으로 다시 의자에 앉아 편지 봉투를 열었다. 근데 여기 안에 뭐가 있지? 준희가 조심스럽게 봉투의 끈을 풀어냈다. 시선이 모이는 게 나쁘지 않았다. 단순 궁금증이니까.


준희는 봉투 속 편지를 꺼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준희 지금 이 자리에서 직. 업. 을 밝힐 수 있습니다.

영주 우와!

준희 아직 안 끝났어요! 다른 정보는 밝힐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나이 이런 건 안 되나 봐요, 그냥 직업만!

여진 직업만으로 사람에 대한 생각이 바뀔 수 있긴 하죠.

준희 그럼 어디서... 부터 하죠?



자연스럽게 시선이 맨 끝에 앉은 도영으로 향했다. 아. 설마 막 요리사 이런 거야? 준희가 가자미눈을 뜨고 도영을 쳐다봤다.



도영 어째 저부터 하는 이 분위기는 뭘까요.

재현 어차피 끝에 앉았으니까~

도영 자리 선정이 잘못 됐네요... 아무래도.



도영은 큼큼 소리를 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근데 난 뭐라고 설명하지...



도영 저는 지금은 해방촌에서 작은 카페 운영하고 있어요.

민형 근데 뭔가 잘 어울려요. 커피랑 잘 어울리는 느낌.

도영 근데 막 커피 그렇게 자주 마시진 않아요. 그냥 그게 잘 맞아서 일을 하는 거지. 그러면 민형 씨는요?

재현 와... 바통 넘기기.

도영 어차피 얘기할 거잖아요.



자연스럽게 준희의 시선이 민형에게로 옮겨졌다. 이민형. 귀엽고 낯 가리고. 안경이 잘 어울리고.


어쩌면 제 엑스와 제일 먼 사람일지도. 준희는 민형의 입이 열리길 가만히 기다렸다.



민형 저는 그냥... 어.

여진 천천히 얘기해도 돼요. 아니면 맞춰 볼까요?

준희 저는 되게 학생 같아요! 너무 어려 보여서.

민형 아하하... 그렇게 어리진 않을 텐데. 저는 백엔드 개발자로 일하고 있어요.



확실히 제 엑스와는 먼 사람이다. 준희는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제 엑스랑 가까운 사람이었으면 절로 가는 마음을 막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랑 다시 연애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민형이 자신의 옆에 앉은 여진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여진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여진 저는 완전 반대긴 한데... 전 지금 웹소설 작가로 일 하고 있어요.

영주 우와! 얼마나 됐어요?

여진 스물셋...? 때 데뷔를 하긴 했는데, 잠깐만 이러면 내가 내 나이를 밝히는 거잖아요.

영주 헉. 그 의도는 아니었는데.








🌷


여진 장난이죠. 나이는 나중에 알려줄게요.



영주는 여진의 웃음에 가볍게 웃었다. 얼결에 여림을 가운데에 두고 얘기를 나눴지만 그래도 여진과 자신은 룸메이트니까. 여진이 재현의 쪽으로 손을 내밀자 재현은 웃으면서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재현 저는 지금...

준희 뜸 들여요?

재현 두구두구 해봐요, 빨리.

준희 두구두구두구.



꽤 쿵짝이 잘 맞는다.



재현 저는 지금 국가대표 수영 코치 하고 있어요.

준희 어쩐지.

재현 어쩐지?

준희 뭔가 뽀송~ 해진 느낌 이랄까요? 씻고 온 느낌?

재현 ... 뭐- 물에 자주 들어가니까요. 씻기도 자주 씻고.

영주 근데 그러면 그쪽으로 준비 한 거예요?

재현 네. 어쩌다 보니 체대 나오고 이렇게 됐어요. 애들이 꼭 저 같아서 좋기도 해요.



남자들이 다 자기랑 잘 어울리는 직업이네. 영주는 자신의 옆에 앉은 여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영주 근데 여림 씨는... 으음. 뭔가 학생 같아요!

준희 어려 보이기도 엄청 어려 보이고.

여림 ... 저 그래도 나이 꽤 많을 텐데. 근데 대학생은 아니고 로스쿨 휴학하고 있어요.

준희 헐. 아니. 로스쿨? 로스쿨이요?

여림 안 어울리죠? 저도 어쩌다 보니 이렇게 돼가지구...

재현 그럼 지금은 왜 휴학 중이에요?

여림 아... 부모님이 권하셔서요. 제가 좀 일이 있기도 했구. 준희 씨는요?



여림의 말에 다들 시선을 옮겼다. 휴학 중이라는 게 굳이 물어볼 것도 없고...



준희 어... 저는 원래 배우 준비를 했다가.

제노 했다가?

준희 지금은 그냥 간간히 모델 일 하고~ 약간 한량처럼 살아요.

재현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더라.

준희 에?

재현 올리브영 거기서 본 것 같은데요?

준희 어... 네! 아마 있을 거예요. 예전에 올리브영 가서 사진 찍은 적 있는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자. 이제 영주 씨! 딱 두 명 남았다.



영주는 자신에게로 옮겨지는 시선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눈앞에 앉은 제노를 보며 웃었다. 저 사람은 알지.



영주 저는 지금 대학교 다니고 있어요! 4학년! 전공은 항공운항과!

준희 와, 역시.

영주 왜요?



영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준희를 쳐다보자 준희는 웃으면서 영주를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준희 약간 진짜 승무원 상~ 이거 아니에요? 친절해 보이고, 예쁘고, 키도 크고!

영주 저를 지금 너무 약간 치켜세우시는 거 아니에요? 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여림 근데 진짜 예쁘긴 예뻐요. 키도 크시고.

영주 준희 씨가 더 큰 것 같은데... 저 70 이에요.

준희 제가 72니까 아주 조금 크네요. 그래도 영주 씨도 큰 킨데?

영주 아이이이. 너무 길어진다. 제노 씨, 얼른 얘기해주세요!



근데 생각해보니 제노의 직업을 모른다. 그냥 아침에 데려다줄 때도 ... 딱히 뭘 물어보질 않았네? 나 약간 진짜 나쁜 사람 아니야? 아니지. 저 사람이 밝히질 않은 거잖아. 영주가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제노를 쳐다보자 제노는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노 저는 객실 승무원으로 일해요, 지금.

준희 그럼 스튜어디스예요? 남자니까 스튜어드?

제노 맞아요.

준희 뭐야. 영주 씨랑 제노 씨 둘이 엑스 커플 아니야? 둘이 씨씨였고?



제노는 별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웃었다. 당연히 엑스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 게 룰이니까 굳이 저와 제노가 아니라고 밝힐 필요는 없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다. 이렇게까지 겹칠 일이었나? 아니 제작진들이 수 쓴 거 아니야? 이렇게까지 겹치는 건 좀 너무했잖아.


영주가 여전히 제노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제노는 자신의 밥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노 도영 씨, 잘 먹었어요. 고생 하셨어요.

도영 아니에요. 내일은 제노 씨니까 고생 하셔야죠.

제노 여진 씨만 믿어야죠, 뭐.



제노의 움직임에 얼결에 다들 정리하는 모양새가 됐다. 아니, 이제노 씨 직업 거짓말한 거 아니야? 아니 하필 왜 내 다음에 얘기를 해서 오해를 사게 만드냐고. 영주는 그 덕에 제노를 쫓아다니는 꼴이 됐다. 제노가 자연스럽게 세면대 앞에 서서 고무장갑을 집어 들자 영주는 제노를 바라봤다.



영주 그거 제가 하기로 했는데!

제노 누구랑요?

영주 도영 씨랑요! 저희 둘이 오늘 당번이었으니까.

제노 그게 설거지 당번까진 아니니까요. 그냥 제가 할게요.



제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무장갑을 손에 끼우곤 물을 틀었다. 영주는 슬쩍 사람들이 모여있는 쪽을 쳐다보고는 제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영주 근데 왜 안 알려줬어요?

제노 뭘요?

영주 제노 씨 스튜어드인 거요! 저 대학생인 건 아셨잖아요!

제노 근데 집에서 어피를 안 하고 가길래.

영주 아.

제노 항공운항과인 건 몰랐죠...?



그러네. 하필 이 사람한테 잘 보이겠다고 어피를 굳이 굳이 학교까지 가서 불편하게 했으니까. 영주가 머쓱한 얼굴로 제노의 옆을 떠나지도 못하고 그저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제노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제노 제가 먼저 영주 씨 직업 알았으니까.

영주 ...

제노 그 대가로 설거지하는 거라고 생각할게요.



부담 안 주려고... 영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잊지 말자. 여기 이 사람 전 여친도 있다는 거.








🍦


하필 승무원. 여림은 과자를 잔뜩 품에 안고 2층으로 올라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걔 직업은 내가 모를 리가 없었고... 하필 제일 연관성 있어 보이는 사람이. 여림은 저와 영주를 본능적으로 비교했다. 키도 더 크고, 조금 더 승무원에 가까운 외모이긴 하다. 짜증나. 여림은 과자를 하나둘 2층 거실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나는 왜 여기까지 끌려 나와서 이 고생을 하는 거지. 이제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기가 좋아했던 여자한테 그럴 수가 있어? 지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를 내가 알고, 어머님이 아시고, 누나가 아는데? 여림은 입술을 깨문 채로 과자의 포장을 뜯었다. 나쁜 새끼. 여림은 순간 울리는 핸드폰의 알림에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오늘 당신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입주자는 누구인가요?

문자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세요

*문자는 상대방에게 익명으로 전달됩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보내라고... 진짜 나쁜 사람들이야, 하여튼. 여림은 방송의 지독함에 고개를 젓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둘이 있을 시간이 없으니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여림의 화살표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여림은 상단에 제노의 이름을 적은 채 핸드폰을 노려봤다.


솔직히 말하면 진짜 보내기 싫다. 그렇다고 안 보낼 수도 없고. 여림은 천천히 메시지를 써 내려갔다.







✒️


여진은 제 엑스를 떠올렸다. 분명 내가 또 문자를 보내면 걔는 힘들겠지. 여진은 그를 너무 잘 알았다. 그런데 어떡해. 내가 그렇다고 다른 남자한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하는 게 오히려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러게 네가 그렇게 좋은 남자가 아니었어야지.


여진은 짧은 문자를 전송하고는 술잔을 챙겼다.



여진 이거 갖고 올라갈까요?

민형 어... 네. 여진 씨, 핸드폰은 보셨어요?

여진 아. 저는 다 썼어요.



더이상 핸드폰을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


그냥 또 편하게 보낼까? 재현은 자신의 핸드폰에 도착한 문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내가 이렇게 고민한다 해도 내 엑스가 알아줄 일은 당연히 없을 것이고. 재현은 와인병을 한 손에 쥔 채로 1층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바라봤다. 근데 귀엽기는 해. 장난치는 맛 나고. 은근히 받아치기도 잘 하고.


그런데 이게. 재현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힘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이게 사랑... 까지 갈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은 최선을 다 해야지. 내가 선택했는데. 재현은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다들 술이 그렇게 마시고 싶은 건가. 어제와 다를 바가 없는 술자리에 제노는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는 건 제노였지만... 전 여자친구랑 있는 술자리는 그렇게 달갑진 않았다. 게다가 술도 잘 마시지 않는 전 여자친구라서 더 그런 건지. 아니면 제가 쓸데없는 질투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건지.


제노는 제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러바오, 아이바오, 푸바오, 후이바오, 루이바오 이름 기억 해놔요!! 🐼🐼🐼🐼🐼


누가 읽어주기라도 하는 듯 목소리가 들린다. 제노는 제 핸드폰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근데 이렇게 문자를 티 나게 보내도 되는 건가? 어쨌든 익명으로 오는 문자긴 한데... 명확한 발신자가 보이는 문자에 제노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곧이어 오는 문자는 뻔했다. 제 전 여자친구였고.


데이트 잘 해. 아니야. 잘 하지 마. 나 없이 재밌게 놀지 마. 짜증나.

당신의 X는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이 문자 역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해서 놀이공원 이런 데 데리고 가면 좋아하지도 않을 거면서. 제노는 제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여기저기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하는 모습에 제노는 자신의 앞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어 뚜껑을 땄다.


... 아. 진짜 모르겠다. 제노는 잠깐 스쳐 가는 생각에 한숨을 내뱉고는 물을 한 모금 삼켰다. 나랑 데이트 안 하면서 왜 나한테 보내. 그 사람은 무슨 죄라고. 제노는 물병의 뚜껑을 다시 꽉 닫았다.










빨리 다른 엑스커플도 까고싶네요

요즘 글태기가 와서 오랜만입니다 😥😥

다음 회차는 DAY 1-2를 묶어서 제노여림 인터뷰 + 다른 출연진 인터뷰가 수록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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