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bgm을 들으며 읽어주세요!


* 볼드체는 일본어 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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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볕이 내려쬐는 명치정(지금의 명동,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거리 한 복판에 신식 포드 차량들이 줄지어 섰다. 검게 칠해진 차체는 위압감이 들 만치 번쩍번쩍 광을 내며 지나던 이들을 끌어 모았고, 가장 중간에 선 차에 사뿐한 걸음으로 다가 선 이는 복숭아뼈 근처에 머무르는 옥색 원피스를 걸쳤다. 이 일대에서 꽤 이름 난 부상(富商)의 외동딸인 그 이는 몇 해 전 남편이 급사(急死)한 후로 아비의 집에 불명예스럽게 얹히어 살다 비로소 새 남편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차에 오르려던 그 이는 문득 뒤를 돌았다. 하나 뿐인 딸을 시집보내는 아비는 제법 처연한 눈으로 딸을 바라보며 섰다가 딸이 내민 손을 맞잡아주었다. ‘아무리 부잣집이래두 그 늙은 영감한테 저리 고운 딸을 보내는 게 어찌 맘이 편하겠나.’ 하고 수군대는 소리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청청한 나이에 과부로 사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냐는 말이 이어지던 것도 잠시, 아비의 손을 잡은 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자 일중이 고요해지며 혀 차는 소리마저 잦아들었다. 검은 차체 아래 박힌 바퀴가 요란한 소리를 내자 흙먼지가 가득 일었다. 



차에 오른 이는 차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멀어져가는 것을 내다보다 아직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흰레이스장갑을 낀 손으로 살짝 눌러 닦고 고개를 숙였다. 생기 없이 창백한 얼굴에 어울리는 붉은 색으로 칠해진 입술 새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손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요리조리 돌려보자 눈물은 멎었지만 여전히 가련한 표정이다. 그러다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만 바라보던 이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린다. 운전수가 흘끗 눈을 돌릴 만 치 카랑한 소리를 내며 웃는다. 배를 부여잡고 허리를 숙이자 어깨가 들썩이고,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괴이한 소리가 차 안을 메우매 운전수는 짐짓 소름이 돋는 것을 숨긴 채로 광증환자와 같은 아씨에게서 고개를 돌리었다. 그 이는 며칠 뒤 불길에 휩싸일 저택과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며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난 환희 속에 있었다. 



새 남편은 아비보다 무려 17살이 많은 영감으로, 몇 명의 부인들이 죽어나간 세월을 맞고도 허리가 조금도 굽지 않고 눈에서 나는 빛은 중장년의 그것보다 형형하다고 했다. 본디 조선인이나 합방 때 공을 세워 자신은 황국신민으로 새로 태어났음을 자부하고 산 세월이 꽤 되었고, 그 이의 팔자에 인복이라곤 없는지 여러 부인을 거쳤음에도 슬하에 아들을 단 하나 두었는데 그마저도 성년이 되기 전에 어딘가에서 잃었다했다.


여기까지가, 집을 떠나오기 전 아비에게서 들은 것 중 이 일대의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 차에 오르기 전 맞잡은 손으로 건네받은, 약지손가락 만한 유리병이 차창으로 내리쬐는 볕을 받아 반짝였다. 


“그러니 그 영감이 죽으면 그 재산이 다 어디로 가겠느냐 말이야. 카에코, 아니 연이야. 내 딸아. 이 아비 말이 뭔지 알겠니? 이제 그게 다 네 것이 된다. 너만 잘하면. 응?”


“두 어 방울만 밥이나 국에 타면 맛을 모른다더라. 꼬박 한 달을 빼놓지 않고 먹여야 한다. 혹시 몰라 주방 아이들 일도 이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해놨고, 너만 잘하면 돼.”       


“연이야.”


“너 여섯 살 되던 해에 그 집 마당에서 본 일 너도 여즉 기억할거다 그렇지? 그 영감이 네 엄마한테 어떻게 했었는지.”


“우린 우리 몫을 찾는 거야. 응?”


유리병을 만지작거리는 내내 아비의 목소리가 망령처럼 귓가에 울렸다. 일생의 소원이겠지. 집에 하인으로 들어 사는 동안 저를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하던 그 영감을 죽이고, 죽은 엄마의 목숨값으로 재산까지 몽땅 빼앗아 버리는 것. 기대에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평생의 소원을 목전에 두고 한껏 설레는 마음을 안고 있을 것이다. 연은 아비의 뻔뻔한 눈동자를 떠올렸다. 제 소원을 왜 나더러 이루라 하는지,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왜놈에게 팔아넘기듯 시집을 보냈을 때에도, 그런 눈을 했더랬지. 그 영감이 아끼던 화병을 내다판 저 대신 도둑으로 몰려 매질 당해 죽은 엄마의 무덤 앞에 섰을 때에도. 뻔뻔하게 그런 눈을 하고. 오로지 남들 앞에서만. 


기분이 가라앉으려 하니 과거사는 다 그만두고서라도, 연은 아비의 뜻대로 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딸 된 도리를 따지어 아비의 소원 중 반절을 이루어줄 생각이었다. 그 영감을 죽이는 것. 그러나 재산은 그 누구도 갖지 못하도록, 불길 속에 휩싸여 아무런 값어치도 없는 까만 재로 남아 사람의 뼛가루나 흙먼지와 같은 것들과 뒤섞여버리도록 할 작정이었다. 분에 차 마룻바닥에 발을 구르고 윗니와 아랫니를 딱딱 소리가 나도록 부딪치며 닥치는 대로 물건을 부숴댈 아비의 모습을 떠올리다 픽, 하고 웃었다. 부유하다고는 하나 일개 상인의 딸일 뿐인 저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겠다는 늙은이의 심중 따위는 궁금치 않았다. 그 역겨운 심중을 다 알기 전에 죽여 버려야지. 생각했다.


아편 반절을 몽땅 먹여 죽이고 


그 커다란 저택이 불길에 휩싸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남은 아편 반은 내게 주어야지.


이만하게 참고 살았으면, 나도 행복할 자격이 있으니까.






연은 기름이 떨어진 차 안에 홀로 남아 있었다. 운전수는 차 기름을 채우는 이와 낄낄대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연은 차창 밖을 내다보던 중 옆에 멈춰 선 인력거에 눈을 두었다. 인력거에 앉은 이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꽤 비싸 뵈는 양복식의 바지를 입고 모던보이들이 즐겨 신는다는 흰가죽구두를 신었다. 다리 옆에 놓인 짐가방은 각진 모양에 은은하게 광이 나는 가죽으로 된, 저런 이는 죽을 생각 따위는 하지 않겠지 아마도. 한참 넋을 놓고 관찰하던 연을 놀래키기라도 하듯 쿵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에 차체가 울렸고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들었을 때에 열린 차 문 사이로 방금 전 관찰하던 이의 다리가 보였다. 곧 허리를 숙인 이가 연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겠군요. 짐가방이 갑자기 떨어지는 바람에.”


정중한 투의 일본어였다. 남자의 얼굴은 조금 검으나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윤이 났다. 가로로 길게 뻗은 눈의 꼬리는 움직이지 않았으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간 채였다. 진심으로 웃는 것이 아니라 웃는 체 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연은 낯선 이들의 앞에서 곧잘 짓던 제 표정과 닮은 그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곧 눈을 피하며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뒤늦게 달려온 운전수가 이것저것 묻기에 괜찮다 짧게 답하고 안쪽 자리에 자세를 고쳐 앉자 남자는 신사다운 손짓으로 인사하고 차 문을 닫았다. 차가 다시 출발하며 인력거가 멀어졌다. 연은 연신 허리를 숙여가며 뭐라 주절대는 인력거꾼 앞에 선 남자가 제가 탄 차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는 것에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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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송구하지만 지금 주인 나리께서 잠시 용무를 보러 외출하셨어요. 응접실에 뫼시라 하시었습니다.”


낯선 호칭으로 저를 부르는 늙은 하녀의 뒤를 따르며, 연은 집안을 둘러보았다. 다다미가 깔린 방안에 서양식 탁자와 의자들이 있고 벽에 걸린 그림은 일본 미인도로, 귀하나 잡스럽고 아름답지만 괴이한 느낌을 내는 집이었다. 


막상 그 영감과 얼굴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조금 긴장이 되던 중에 다행이라고 생각한 연은 차를 내어온 하녀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소파 등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작게 끼긱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눈을 뜨자, 다다미를 밟고 선 누군가가 보여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눈앞에 선 것은 상상하던 노인보다 키가 훌쩍 큰 젊은 남자였다. 아까의. 


‘모던보이..’하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것을 연이 깨달았을 때 남자는 눈만 깜빡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인기척에 뒤늦게 뛰어 들어온 늙은 하녀가 남자와 마주하고, 하녀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입에서 다다미 바닥이 끼긱 댈 때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도..도련님! 아니... 어떻게..”


남자는 놀란 하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조선말 호칭이 익숙한 듯 웃어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눈은 웃지 않고 입꼬리만 올린 채였다. 연은 그를 바라보다가 하녀에게로 눈을 돌렸고, 하녀는 어느 새 눈물로 함뿍 젖은 얼굴을 하고 연이 선 방향으로 두 손을 공손히 뻗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아아..그러니까 이 분은 마님이세요. 새로 오신.”


하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다시 일본말로 더듬대며 연을 소개했고, 남자는 하녀에게 잠시 주었던 시선을 거두고 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집의 주인처럼 앉은 남자가 손님처럼 선 연에게 말했다.





“...그래? 처음 뵙네요. 어머니.”



척 봐도 또래 혹은 저보다 어려보이는 연을 남자는 아주 자연스러운 투로 어머니, 하고 불렀다. 뒤이어 웃는 남자의 눈꼬리가 조금 휘어져 보인 것은 착각일 거라고, 연은 생각했다.  








나는 그를 보았어. 그를 보자 얼굴이 달아오르고 또 창백해졌지.

이성은 잃은 내 영혼에 동요가 일어났어.

눈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말도 할 수 없었어. 

온 몸으로 한기를 느끼는가 하면 또 불타는 듯 느꼈었지.

나는 알아보았어. 베누스를, 그녀의 무서운 불꽃을,

여신이 저주하는 혈족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열심히 기도하면 그 고통을 모면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래서 베누스의 신전을 세우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것을 장식했던 거야.

온 종일 제물들에 둘러싸여,

그것들의 배를 갈라 거기서 길 잃은 내 이성의 흔적을 찾으려 했었지.

치유할 수 없는 사랑에 무능한 처방이었다.

내 손은 제단 위에 헛되이 향불을 피워 올렸던 거야.

이 입이 여신의 이름을 부르며 애원하고 있는 순간에도,

내가 숭배한 신은 힙폴뤼토스였고, 내가 향불을 피우는

제단의 발치에서조차 그만을 바라보면서,

감히 이름도 부르지 못할 그 신에게 모든 걸 바치고 있었던 거야.

나는 어디를 가든, 그를 피했지. 아, 얼마나 비참했던가!


더 이상 스스로 책망하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마의 사랑의 불꽃은 이제 그저 평범한 사랑이 된 것입니다.

마마의 불꽃을 죄로 만들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던 그 혼인의 매듭을

테세우스 왕이 죽음으로써 끊어버렸으니까요.


<파이드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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