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나는 황해리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황해리와의 대화는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취조같기도 했고, 넋두리같기도 했다. 어찌 됐든 황해민에 대한 이야기를 오랜만에 했다. 일이 일어나고 일이년 직후는 황해민에 대한 이야기가 잦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가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날 때마다 그 얘기는 볼쑥 튀어나오고는 했다. 그 사람들이 친절하게 내 감정을 물어봐 줄 때마다 나는 잘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했었고, 사람들은 금세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는 했다. 몇몇 사람들이 풀던 황해민에 대한 설들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 가벼운 말들이 끝나고도 나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북경에 살던 열여덟살 유학생이었던 적이 있었고, 그 후로 불행히도 삶은 계속되었다. 나는 사실 황해리를 만난 적이 한 번 더 있었다. 열아홉때였다. 당시 열네살이던 황해리도 그때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황해리도 열네살적의 기억을 계속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도 나와 같이 시간이 멈춘 사람들이 있었구나. 어쩐지 안도했던 것 같다. 


나는 중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어가 서툴렀고, 영어는 더더욱 서툴렀다. 같은 반 중국인들과는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손짓·발짓을 동원해 나름 재미있게 놀고는 했다. 그렇게 놀고 서너 시쯤 기숙사로 돌아오면 황해민은 의자에 나쁜 자세로 앉아있고는 했다. 같이 지낸 지 한 달 정도 되니 우리는 꽤 친해졌다. 처음보다 말을 거는 횟수도 잦았으며, 귀찮은 장난을 치고는 했다. 학교가 끝나면 매점에 가거나, 제대로 칠줄도 모르는 탁구를 하거나, 주말에는 학교 밖으로 나가 놀았었다. 황해민은 나보다는 중국어를 잘했다. 한 학기를 중국인들과 같이 지내는 차반에서 보냈다고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것 치고는 잘 못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기에도 충분했고, 중국인 선생님이 나에게 하는 말쯤은 통역해줄 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 황해민의 통역은 너무 불친절해서 오히려 통역이 없는 편이 말을 알아듣기가 쉬웠다. 사감이 나에게 화색이 도는 얼굴로 나를 붙잡고 복도에서 2분가량을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통역을 부탁하자 황해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밥 먹었냐고 물어보는데. 라고 한마디로 끝냈었다. 진짜냐고 몇번을 물어봤지만 황해민은 귀찮아지는 게 싫다는 듯 자리를 피했다. 결국 나는 황해민을 급하게 쫓아나서느라 그 이야기가 뜻하는 바를 영영 모르고 말았다. 그런데도 나는 별 불만 없이 황해민을 따라다녔다. 외출을 나가서 황해민이 데려간 피자집은 맛있었고, 그답지 않게 신기한 곳도 많이 알고 있었다. 어떤 곳은 고층건물로만 가득 차 있었는데, 바로 옆에는 중국식 가옥이 있는 곳도 있었고. 일본 영화에 나올 것만 같은 네온사인으로 가득 찬 거리도 갔었다. 황해민은 그 동네 루프톱 바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물담배가 있고 3층 정도 되는 건물이었다. 적당히 높은 그곳에선 거리풍경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보였다. 인터넷도 빨랐으며 수요일에는 칵테일을 싸게 파는 곳이었다. 황해민은 그런 곳에 나를 앉혀두고 콜라를 마시게 했다. 멀뚱히 쳐다보는 나를 앉혀두고 황해민은 물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30분가량을 혼자 피우다가, 갑자기 메스껍다며 헛구역질을 하고는 했다. 아무 말도 없다가, 술이 조금 취하면 오랫동안 주절거리고는 했다. 나는 싼리툰 三里屯 이 진짜 좋아. 중국같지도 않고, 한국같지도 않고, 이런 곳은 어느 나라에서도 못본것 같아. 아, 진짜로 씨발. 내가 옛날에 읽은 책에서 주인공이 한 30년 전에 싼리툰에 살았는데, 그때는 여기가 외국인만 모여 사는 지구였거든? 아 근데 진짜 배고프다. 숙사 들어가기 전에 피자 먹고 갈까? 저기 피자 맛있는데 있는데. 형, 저희 아까 거기 가서 피자 먹었잖아요. 그랬나? 우리는 항상 바보 같은 말을 주고받고, 나는 항상 취한 황해민을 데리고 학교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갈 때는 지하철을 탔지만 돌아올 때는 택시를 탔다. 취한 황해민을 끌고 가다시피 부축해서 학교 안으로 돌아갈 때마다 경비원은 우리를 질렸다는 듯이 쳐다봤다. 기숙사로 돌아가면 황해민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에 엎어졌다. 나는 황해민이 벗어던진 양말을 빨래통에 담아넣고 샤워를 했다. 나갔다 온 날이면 피곤해 죽을 것 같았지만 어찌 됐든 샤워를 하고, 담배냄새가 콤콤히 밴 외출복을 빨래통에 던져넣었다. 황해민은 잠들지도 않고 베개에 얼굴을 댄 채로 토할 것 같다며 지껄여댔고, 나는 황해민의 침대로 기어들어가 몸을 누이고는 했다. 건장한 남자 한명만 누워도 좁은 그 싱글베드에서 불편한 섹스를 하고, 그게 끝나면 황해민은 제 손과 발을 내 몸에 갖다 댔다. 그 차가운 감촉에 화들짝 내가 놀라면 항상 그렇게 웃어댔었고, 땀나니까 네 침대로 꺼지라는 황해민의 한마디에 내 침대로 돌아가야 했었고. 


헤어질 때 잡은 황해리의 손은 따뜻했다. 그건 유일하게 황해민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황해리는 이상하게도 지하철역 앞에서 내게 악수를 요청했다. 오늘 얘기하니까 재밌었어요. 다음에 또 봐요. 재미있었다고 하니 의아했지만, 나도 그러리라 하며 약하게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해리는 황해민과 있었던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했고, 제 오빠가 무슨 음악을 좋아했었는지, 무슨 영화를 자주 봤었던건지, 학교생활은 어떻게 해나갔는지 등의 이야기 역시 듣고 싶어 했다. 나는 네가 얼마나 짜증 나는 사람이었는지 얘기하려다가, 예를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 그 단점들을 장점으로 포장해서 이야기했다. 자주 섹스를 했다는 이야기는 빼고 진행되었다. 황해리는 제 오빠에게 있었던 일들과 내 이야기들을 잘 들어주었다. 한 시간 반 정도 일방적인 대화가 계속되었고 해가 떨어지는 것 같아 그만 일어나자고 했다. 해리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탁자에 널린 제 소지품들을 주머니에 대강 쑤셔 넣었고 나도 뒤이어 일어났다. 황해리의 컵에는 아직 반이나 아이스티가 남아있었다. 

- 저희 오빠랑 많이 친하셨어요?

한 시간 넘게 이야기할 정도는 됐죠. 나는 더 이상 그 질문을 들어도 숨이 턱 막히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만 했다고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황해민과 내가 같이 방을 쓴 것은 겨우 한 학기 정도였고, 그것도 채 마저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급식실에서 밥을 같이 먹지도 않았었으며, 학년이 달라 수업도 따로 들었으니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만 하다고 울분을 마무리 지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황해민이 8일에 한번 걸러 청소당번을 했다는것을 알지 못했고, 네가 청소당번까지 빼먹으면 담임이 더 이상 자신을 인간으로 볼 것 같지 않다 라는 웃기는 이유로 다른 건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청소만은 꾸준히 한다는 사실따위는 몰랐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 네시 오분, 종례까지 하면 네시 반. 청소까지 하면 다섯 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나는 항상 네시 십 분 정도에 교실을 나왔고, 네가 수업하는 5층으로 걸음을 옮겨 너를 한 시간 남짓 기다리고는 했다. 오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기다리는 게 싫지 않았다. 

네시 사십 분에는 스쿨버스를 타러 다들 교실을 나간 지 오래였고, 스쿨버스를 타지 않는 사람들은 청소당번따위 하지 않고 매점으로 직행하거나 숙사로 돌아갔었다. 

네시 사십 분 이후의 교실은 네가 잠든 주말 기숙사 다음으로 내가 가장 너에게 좋아한다고 많이 말한 장소였다. 다른 곳이었다면 제발 닥치라는 소리를 들을 말도 교실에서는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다들 가버린, 초겨울의 빠른 어둠이 내리깔린 교실에서는 나는 심지어 너에게 입까지 맞춘 적도 있었다. 

너는 내게 한 번도 기다리라는 소리를 한 적이 없었지만 먼저 가라는 소리도 한적 없었고, 그래서 나는 네가 그만 나를 나름대로 좋아하는 걸 거라고 생각해버렸다. 그리고 그건 틀린 생각도 아니었던 것 같다. 

애정이 묻어있는 기다림과 청소 후 너와 같이 환승이 많은 만원지하철을 타고 번화가로 아무 목적도 없이 놀러 가는 길. 지하철에서는 항상 네 고물 핸드폰으로 같은 노래를 듣곤 했었지. 나는 그 모든 것을 사랑했다.

뼈가 에는 바람이 몰아치는 중국의 겨울에도 반팔위에 교복 윗도리만 걸친 네가 추워 보여 목도리를 둘러줬더니 답답하다며 벗어던진 일까지. 나는 모두 기억하고 사랑하는데. 결국에는 그런일들은 나 말고 아무도 모르게 되었지. 



-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냐?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황해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 아니. 화내는 게 아니라 진짜 물어보는 거야.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그때는 어물쩍 대답하지 못하고 넘어갔지만, 네 말을 몇 년간 곱씹은 이후로 지금은 반문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형, 만약 형한테 그런 일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나는 이제 스물 다섯살인데 형은 왜 아직 스무살일까? 시간은 왜 이렇게 느리게만 가는 걸까?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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