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사를 처음 본 것은 중학교 3학년의 겨울이었다. 그 첫 만남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있다. 잊을 수 없는 그날은 바깥에 나가기만 하면 살얼음 같은 바람을 따라 머리카락이 사정 없이 휘날렸고, 그 때문에 모두 복도를 나가는 것조차 꺼릴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어찌나 바람이 세차고 차갑던지 등교할 때 얼굴이 아플 지경이었다. 때문에 난 점심을 먹자마자 곧장 교실로 올라왔고 폭염주의보가 내렸던 날에도 축구를 하던 코니 역시 한겨울의 추위만큼은 도저히 안되겠는지 자기 키만한 담요를 잽싸게 두르고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춥냐.”

“어, 추워서 뒤질 것 같아.”

“오늘 확실히 날씨 미친 것 같아. 근데 넌 쪄 죽는 날에도 축구하던 놈이 이상하게 추위엔 약하더라.”

“야, 쟝. 너 나랑 몇 년을 친구 먹고도 모르는 거냐? 실망이다. 나 겨울 완전 싫어하잖아. 오늘 학교 오는 데 머리 꽁꽁 어는 줄 알았어.”

“그러니깐 내가 겨울 오기 전에 머리 좀 기르라고 했잖아. 그렇게 말을 안 듣더니.”

쯧쯧. 혀를 차자 코니가 말상은 조용히 하라며 인상을 찌푸린 채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다. 그러곤 자긴 이제 자겠다며 얼른 네 자리로 돌아가라고 손을 훠이훠이 했다. 코니가 바로 누워버리는 덕에 흥미가 떨어진 난 뒷자리 창가 쪽 내 자리로 돌아갔다. 내 짝 역시 자고 있었고 난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턱을 괴고 멍하니 창밖만 바라봤다. 먹구름이 잔뜩 낀 게 금방이라도 비나 눈이 올 것만 같다. 이 정도의 날씨니 아마 눈이 내리겠지. 느리게 움직이는 구름을 눈으로 쫓다 운동장을 보니 어디서 온 건지 모를 검은 봉투만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땅에 닿을 듯 닿지 않으며 그것은 잘도 날았다.

어어, 떨어진다. 나뭇가지에 여러 차례 걸릴 뻔한 것도 슬금슬금 피하며 꽤 오랫동안 날던 봉투는 끝내 구석에 떨어졌고, 바람에 의해 다시 날 준비를 하던 그것은 누군가의 새카만 운동화에 밟혀 그대로 멈췄다. 운동화는 계속해서 뒷걸음질 쳤다. 그로 인해 봉투는 밟히고 또 밟혔다. 자연스레 올라간 시선 속엔 운동화만큼 새카만 긴 생머리의 여자애가 있었다. 머리가 바람에 사정없이 휘날리는데도 어째선지 이 추운 날에 마이도 입지 않은 채였다. 그와 상반되게 앞에 있는 여자 무리는 제대로 패딩을 입었다. 네다섯 명의 무리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뭐라 뭐라 말하며 여자애의 어깨를 계속해서 밀치고 자기들끼리 웃었다. 뒷모습이라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애는 난처한 상황인 게 분명했다.

어떡하지. 선생님을 부를까? 처음 겪는 일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지켜만 보는 사이 뒷걸음질 치던 여자애는 왼쪽 발이 운동장 턱에 걸리면서 힘없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로 일어날 줄 알았으나 넘어진 그 상태 그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무리가 여자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대로라면 정말이지 무슨 일이라도 날 것만 같다. 상황을 지켜보던 난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

“니들 거기서 뭐하는 거냐!”

숨을 잔뜩 몰아쉬며 1층 복도에 다다르자 학생 주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봤나보다. 안심이 되어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 기껏 정리한 머리는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 오는 바람에 다시 엉망이 됐다. 이 날씨에 바깥은 역시 나올 게 못 된다. 잽싸게 패딩의 지퍼를 올렸다. 학생 주임이 다가오고 있었고 무리는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 중 가장 침착해 보이는 한 명이 여자애한테 손을 뻗으며 능청스레 말했다.

“친구가 넘어져서 일으켜 주려던 것뿐이에요, 쌤. 그치?”

한 명이 시작하자 무리의 다른 애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맞아요. 괜찮아, 미카사? 추운데 얼른 일어나. 그러나 여자애는 미동조차 없다. 그녀의 운동화에 밟힌 봉투만이 계속해서 그곳을 벗어나려 발버둥 칠뿐이었다. 그러다 학생 주임이 도착했고, 내밀어진 손은 결국 거칠게 거둬졌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문득 여자애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옆모습이 머리카락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무리가 분명 따가운 눈초리를 줬을 텐데 끝까지 손을 잡지 않은 게 신기했다. 너무 무서워 그대로 굳어 버렸거나. 아니면 강추위에 얼어버렸거나. 둘 중에 하나일까. 멀찌감치 서 있던 발걸음을 옮겨 여자애 쪽으로 다가갔다.

학생 주임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무리를 바라보다 미카사란 여자애를 보곤 흠칫했다. 그리고 이내 헛기침하며 물었다. 크흠, 아커만. 아무 일도 없는 거냐. 여자애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학생 주임을 쳐다보곤 한번 끄덕였다. 세찬 바람이 머리를 흐트러뜨리자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여자애의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 새하얀 이마와 상반되게 볼과 귀가 잘 익은 자두처럼 새빨갛다. 만져보지 않아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코에선 맑은 콧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입술에 닿자 여자애는 코를 훌쩍였다. 몇 번을 더 훌쩍였으나 콧물은 계속해서 흘렀다. 감기에 걸린 게 분명했다. 이 날씨에 저렇게 얇게 입고 있는데 걸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여자애의 코에서 자꾸만 콧물이 흐르는 게 신경 쓰여 주머니에 손을 넣어 봤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코와 반대로 눈은 깔끔했다. 솔직히 말하면 울고 있을 줄 알았다. 새카만 눈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이 깊다. 이렇게 검은 눈은 얼마 살지 않았지만 인생을 통틀어 처음 봤다. 텅 빈 눈동자 속에 무엇인가 담겨 있을 것만 같다. 이를테면 우주 속 행성 같은……. 그렇게 홀린 듯이 여자애의 눈에 일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그것은 마치 슬로우 모션을 한 것처럼 느리게 깜빡였다.

“그럼 점심시간 다 끝나가니깐 다들 얼른 들어가 봐라.”

“네.”

무리가 들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 몇 분이지. 코와 귀가 슬슬 시렸다. 사정없이 흩날리는 머리는 정리하려는 마음을 버린 지 오래다. 나 대체 뭐하러 나온 거지. 생각해 보니 나와서 한 거라곤 그저 상황을 지켜본 게 다였다. 이래서야 교실 안에서와 다를 게 뭘까. 헛웃음이 나왔다. 여전히 코를 훌쩍이면서도 여자애는 도통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강추위에 정말 얼어붙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이왕 나온 거 내가 땡이라도 쳐줘야겠다. 그런 우습지도 않은 생각을 하며 다가가려던 차, 허공에 멈춰있던 시선과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었다. 마주친 눈빛은 생각보다 훨씬 깊었고 이내 날 잠식해 들어갔다. 그대로 난 얼어붙었다. 


*쟝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진행되는 에렌미카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건데 여기까진 그냥 쟝미카네요.. 그래서 그냥 쟝미카라고 적고 올렸습니다. 예전에 구상하고 썼던 거라 여기서의 미카사 설정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요. 샤이니의 Dangerous라는 노래를 듣고 구상한 건 기억나는데.. 여기서 더 이어서 쓰게 될 지는 미지수입니다ㅠㅠ 보고 싶어하시는 분이 계셔서 재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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