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오늘도 가? 스파-”

“스‘타’크 인턴십 말이지? 당연하지, 네드.”


목소리에 힘을 준 피터가 억지로 눈을 접어 웃으며 꽉 대답했다. 네드가 아하하… 짧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본 다음 몸을 살짝 낮추며 속삭였다.


“친구, 너 오늘은 상태가 영 아니라구.”

“무슨 소리야? 나 완전 쌩쌩, 에취, 해, 에취!”

“뭐라고? 네 기침소리 때문에 묻혀서 하나도 못 들었어.”


어깨를 살짝 들었다 놓은 네드가 이내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 얼굴도 빨개. 열도 나는 것 같은데, 오늘은 쉬어야 하는 거 아냐? 피터는 둘러맨 가방을 앞으로 휙 넘겨 책을 탈탈 쏟아넣고 잠그며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퀸즈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네드? 그리고 연이어 재채기가 세 번. 네드는 팔로 엑스 자를 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워, 널 사랑하지만 감기까지 함께 하고 싶진 않다. 팔뚝으로 콧등을 꾹꾹 누른 피터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잠깐 멍한 순간을 놓치지 않은 네드가 눈을 가늘게 뜬다. 피터? 그제야 화들짝 놀란 피터가 두어 번 머리를 털었다. 햇빛이 내린 갈색 머리칼이 부드럽게 흐트러진다.


“아무튼, 난 괜찮아.”

“괜찮기는. 약이라도 사 먹어. 오늘은 일찍 퇴근하고.”

“방금 그거 되게 ‘의자에 앉은 사람’ 같았어.”

“그래. 내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명하노니, 정 어려우면 아이언맨에게라도 도움을 청하도록 하시오.”


순간 피터가 퍽 터지는 웃음소리를 낸다. 네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웃어? 피터가 아주 약하게 네드의 어깨를 쳤다. 방금 그거 웃겼어.


“스타크 씨한테 이런 걸 어떻게 말해? 바쁘신 분이 이런 걸 신경 쓰실 리가 없잖아. 겨우 감기란 말이야.”

“네가 그렇게 말해도, 그 사람이 너 꽤 챙겨주는 거 아냐? 저번에 스페인어 시험 일등했다고 했더니 선물도 따로 보내줬잖아.”

“그거 네가 장난친 거잖아. 안 그래도 나중에 만났을 때 내가 얼마나 변명했는데.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아냐고.”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해피에게 보내던 문자에 ‘그리고 저 오늘 스페인어 시험 일등했어요! 완전 멋지죠! 착한 어린이 상을 탈 만하지 않나요?’를 쳐버린 사건이었다. 피터가 소리를 지르며 분주하게 패닉한 다음날, 학교에 있는 동안 메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가 인턴십에서 수석을 했다며? 상이라는데. 하는 문자와 함께 보낸 사진은 최고급 셰리와인이었다. 난 먹지도 못하는 걸 착한 어린이 상이라고 보내셨다니 하는 억하심정이 반, 제 문자를 읽었다는 민망함이 반이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 성급하게 와인 감사해요, 잘 먹었어요 그런데…로 시작한 변명은 넌 그거 아직 잘 먹었다고 할 나이 아니지 않나? 로 단칼에 끊긴 다음에 이어지진 못했지만. 아무튼, 피터가 다시 머리를 푸드득 털었다. 네드의 말을 듣다 보니 머리가 좀 멍한 것 같기도 하고, 살짝 어질거리는 시야를 정리한 피터가 말을 이었다.


“난 진짜 괜찮아.”

“네 고집 정말 못 말린다. 그래도 아이언맨에게 말하는 옵션은 잊지 마.”

“에이, 스타크 씨는…”

“꼭 도와달라고 하는 게 아니더라도,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걸 신경 쓰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 순간 말을 잃은 피터가 어? 하고 짧게 되물었지만 네드는 이내 핸드폰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 뿐이다. 마주 손을 흔들며 돌아선 피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신경을 써주시는 편인가? 본인은 그렇게 의식을 못하고 있었지만, 비슷한 처지인 네드가 그렇게 말한다는 건…. 피터가 크게 재채기를 했다. 으, 진저리를 치며 걸음을 뗀 피터가 생각을 뒤로 밀어둔다. 일단 친구의 말대로 오늘 빨리 퇴근하려면 일을 신속하고 성실하게 처리할 수밖에.

 



“그럼 이만!”

“고마워요, 스파이더맨!”


벽에 붙여둔 소매치기에게서 되찾은 백을 돌려준 스파이더맨이 경례를 날리며, 위로 훌쩍 날아오른다. 백을 품에 안은 채 그 늘씬한 뒷모습을 보던 여자가 살짝 갸웃한다. 그런데 방금, 좀 삐끗하지 않았나?


“으악-!”


잘못 발사된 웹슈터 때문에 공중에서 휘청한 피터가 옥상 위로 나동그라지듯 엎어진다. 아야야. 다치진 않을 테지만 습관처럼 나오는 앓는 소리에 캐런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피터, 괜찮아? 으응. 얼버무리며 대답한 피터가 몸을 일으켜 고쳐 앉았다. 살짝 어지러워서 그랬어.


[ 아까도 말했지만 네 체온이 지금 38.9도야. 이 정도면 살짝이 아니라 꽤 높은 열감기야. 몸살 기운도 있고. 당장 집에 가서 휴식하는 걸 추천해, 피터. ]

“아, 으응. 가야지. 해피한테 문자만 보내고.”


위험천만한 자세로 난간 위에 걸터앉은 피터가 다리를 달랑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빨리 처리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해는 벌써 져버렸다. 슬슬 날이 추워지려나 봐. 혼잣말에도 캐런은 상냥하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네 체온이 낮아서 춥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현재 기온은 무척 따뜻한 편이거든. 어둠이 깔리고 있는 퀸즈를 내려보며 피터가 키패드를 두드린다.

오늘도 퀸즈를 안전하게 구했어요! 소매치기 3건, 경미한 교통사고 2건 방지, 그리고 길을 잃어버린 할머니 모셔다 드리고, 미아가 된 남자애를 부모님에게 데려다 줬고, 음. 별일 없어요. 그러니까, 스타크 씨가 걱정하실 만한 그런 큰일은 없어요. 퀸즈는 언제나 별일로 가득차긴 하지만, 신경 쓰시지 않도록 스파이더맨이 잘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으음.”


전송을 누르려던 피터가 잠깐 고민한다. 낮의 네드의 말이 불쑥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어차피 오늘 사건들은 시시해서 감기 상태여도 크게 문제는 안 됐고, 곧장 집으로 들어갈 건데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오히려 그러니까 그냥 경쾌하게 컨디션 보고처럼 하면 괜찮으려나. 턱을 매만지던 피터가 뭐라고 다시 키패드를 더 두드렸다. 이걸 보내? 말아? 고민하다가 기침이 터져 나오려는 기분에 휙 마스크를 잡아 얼굴을 빼낸다. 엣취! 그리고 디링 하는 소리와 함께 전송 완료 메시지가 뜬다.


“헉.”


아, 그리고 정말 별건 아니지만 저 감기에 걸렸어요! 스파이더맨도 감기는 피해갈 수 없나봐요 헤헤…. 정말 사소하네요 역시 지우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으아 어떡


“…하지.”


모르겠다. 마저 재채기를 하고서야 마스크를 쓴 피터가 코를 훌쩍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몇 번만 줄을 타면 되지만, 혹시 아까처럼 삐끗할까봐 지하철을 타고 갈까 고민을 하던 순간이었다.


“스파이더맨!”

“응? 으악!”


본능적으로 날아오는 총알을 느끼고 피한 피터가 휙 몸을 돌렸다. 어설픈 복면을 쓴 남자는, 그러나 행동까지 어설프지는 않았다. 금방 총알을 피한 피터에게 연이어 작은 단검 같은 것들이 연달아 날아왔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왜 나한테 이래? 당황한 피터가 날아오는 것들을 향해 거미줄을 쏴서 봉해버리며 몸을 날린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총알이 날아들었다.


“으악, 누구신데 저한테 이러는 거예요!”


높은 건물이라 어딘가로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이고, 무엇보다 범죄가 아니라 스파이더맨 자신을 노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피터가 몸을 웅크렸다. 그 위로, 이번에는 더 묵직한 살기가 스친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옆 건물에 빗맞은 흔적이 후두둑 떨어진다. 시민의 비명소리에 피터가 황급히 몸을 돌리고 손바닥과 손목을 내밀었다. 웹슈터가,


[ 피터, 거미줄 용액이 떨어졌어. ]

“뭐? 앗, 잠깐만-”


급한 대로 옆에 널브러져 있던 공구를 들어 다시 한 번 공격을 막아낸다. 이번에도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열기가 느껴졌다. 주머니에 용액이, 하던 피터가 확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잠깐 머뭇거린다. 손가락을 주르륵 타고 흘러내린 용액 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챙그랑 하는 소리에 낭패감을 느낀 피터가 쉬지 않고 몰아치는 공격을 피해 훌쩍 몸을 굴렀다.


“잠깐만요, 그렇게 무작위로 공격하면 시민들이 다친다구요!”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야! 내가 너 때문에-”

“으악!”


무력으로 부딪쳐야겠다 싶은 피터가 공격을 피하며 거리를 좁힌 다음, 남자의 손목을 꽉 틀어쥔다. 악력에 우드득 소리와 함께 총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멀리 걷어찬 피터가 다시 휘청거렸다. 조금 쉬다가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몸살이 심해진 것 같았다. 그 틈을 탄 남자가 반대편 손으로 스파이더맨의 뺨에 주먹을 날린다. 잠깐만,


“으아악! 아파!”

“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구요!”


단단한 슈트에 주먹이 나간 남자가 이를 간다. 그 번쩍거리는 스파이더맨 슈트도…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네? 한 피터가 다시 들어오는 공격을 가뿐하게 피하며 남자의 복면을 벗겨내 던진다.


“당신은-”


피터가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가 억울한 듯 입술을 짓씹었다.


“누구세요?”

“네가 날 알 리가 없지!”

“아니, 그러면 왜 절 공격하세요? 절 아세요?”

“스파이더맨을 모르는 뉴욕 사람이 있어?!”

“저에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전 범죄자들을 열심히 잡은 것밖에 하지 않았는데요! 피터가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와중에 기침이 또 나올 것 같다. 얼굴이 뜨겁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조금만 더 하다간 쓰러질 것 같아서, 결국 피터가 이쯤하고 그를 잡아두기로 결정했다. 누군지 알아보는 것은 이따가 캐런과 함께 뒤져보면 될 것이다. 때마침 캐런의 목소리가 울렸다.


[ 피터, 조심해. 외계 물질이 남자의 품에서 감지되고 있어. ]

“응? 그런 게 어떻게-”


쿵.

아까와는 달리 무시무시한 폭발음과 함께 피터가 옥상 반대편 끝까지 날아간다. 피터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어깨가 날아간 것처럼 타는 고통이 지글거린다. 거친 숨을 뱉으며 피터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남자가 붉은빛이 맴도는 테이저건을 든 채 헐떡거린다.


“아저씨, 그거 정말 위험한 거-”

“시끄러워!”


저걸 어떻게 구했지. 피터가 아픈 감각조차 사라질 것 같은 어깨를 쥔 채 머리를 굴렸다. 용액은 부족하고, 심지어 감기조차 걸렸다. 남자는 정체불명의 외계 무기를 들고 있고, 저에게 원한이 있는 듯하지만 피터로서는 얼굴조차 처음인 자였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혀를 짓씹으며 고민하는 스파이더맨을 보자 조금 개운한 얼굴이 된 남자가 킬킬거렸다.


“어쩔 수 없어. 그 자를 원망하도록 해, 스파이디.”

“그 자? 잠깐만요, 우리 대화를 통해 풀지 않을래요? 우리 굉장한 오해가 많이 쌓여 있는 것 같거든요!”

“내가 할 대화는 없어! 난 복수를 하는 것뿐이니까!”

“복수라뇨, 나조차도 아직 어벤져스가 아닌데, 으악!”


다시 한 번 게이지가 찬 테이저건에서 붉은 광선이 나온다. 높이 점프해 겨우 그것을 피했지만 역시 뒤쪽의 건물에서 펑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피하면 피해가 생기고, 안 피하자니 가루가 될 것 같은데. 그전에 내가 무슨 일을 했기로소니 이렇게까지 복수를 당하는 거야? 피터가 다시 한 번 그의 몽타주를 머릿속에서 열심히 굴렸지만 나오는 게 없었다. 이렇게까지 큰 원한을 살 정도의 일을 한 적도, 그럴 만한 배짱이 있는 범죄자도 아직까지 스파이더맨의 손에 잡힌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은 소위 말해 어벤져스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 아니냐고요!”

“아니, 난 정확하게 잡았어. 그 슈트만 봐도 알아.”

“내 멋지고 잘빠진 스파이더맨 슈트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 자의 작품이잖아!”


남자의 일갈에 위이잉 소리와 함께 피터의 눈이 조리개처럼 작아진다. 그 자라면,


“아이언맨…?”

“나도 그에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겠어!”


광선이 피터의 뺨을 스친다. 얼굴이 날아갈 뻔한 피터가 소리를 질렀다.


“아이언맨은 이 슈트가 열 개도 넘게 있어요! 이거 박살내봤자 기별도 안 갈 거라고요! 그리고 애초에 왜 나한테,”

“슈트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노리는 건 너다!”


그 말에 몸을 굴리던 스파이더맨이 그대로 잠깐 멈춘다.


“저요?”

“그래!”

“이게 무슨 소리야!”

[ 피터, 그는 방금 ‘그가 노리는 게 스파이더맨 슈트가 아니라 스파이더맨, 즉 너’라고 말했어. ]

“아니, 캐런.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왜…”

“난 주소를 제대로 찾은 게 맞아.”


다시 게이지가 찼는지, 붉게 올라오는 테이저건의 총구를 본 피터가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은 부저가 울리는 것처럼 어지럽고 몸은 더운 동시에 또 추웠다. 그리고 피터는 계속해서 대화를 놓치고 있었다.


“난 아이언맨에게 복수를 하려는 거다.”

“아이언맨한테 복수를 할 수가 없어서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예요?”

“아니, 난-”

“정확히 나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 거지.”


뒤에서 흘러나오는 매끄러운 목소리에 피터가 고개를 휙 돌리면, 새빨간 슈트와 금색 얼굴 속에서 안광처럼 푸른빛이 선뜩하게 떠올랐다 사라진다.


“아이언맨!”

“오랜만이야, 윈저.”


동시에 피터의 손바닥으로 무언가 날아든다. 거미줄 용액. 던져준 아이언맨이 마치 윙크라도 하듯 고개를 까딱인다. 웹슈터에 맞춰 끼운 피터가 날아오르려다 비틀거린다.


“꼬맹이, 넌 가만히 있어. 이건 내 문제야.”

“젠장!”


낭패라는 표정의 남자가 마구잡이로 테이저건을 쏴댄다. 그 와중에도 노리는 것은 피터의 쪽이라, 당황한 피터가 움직이기도 전에 막아선 아이언맨이 충격을 모두 흡수한다. 아머가 파지직 소리를 내며 에너지를 흡수했다가, 천천히 손바닥에서 동그란 구 모양의 빔이 만들어진다.


“잠깐만요, 스타크 씨. 그 사람은 평범한 인간이에요!”


그 목소리에 아이언맨이 칫, 하고 작게 투덜거리더니 주먹을 꽉 쥔다. 사라진 빔 대신 충격파를 날리자 남자가 겨우 몸을 날려 피한다.


“저 사람은 누구예요?”

“몇 년 전에 나한테 당했던 악당 중에 하나야. 용케 유럽에서 여기까지 날아와 복수를 꾸몄네. 시시하게 끝났지만.”

“복수라고요? 하지만 왜 저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파이더맨을 콕 짚어 찾아왔다. 아직까지 헷갈리는 표정의 스파이더맨을 흘긋 본 아이언맨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당연하잖아. 그와 동시에 남자가 그 말에 포효 같은 대답을 내질렀다.


“그야 네가 아이언맨의 연인이니까!”


네?


“그래, 그러면 그의 보호가 얼마나 삼엄할지도 예상했어야지. 혼자 있었다고 정말로 얘가 혼자 있는 줄 알았어?”


간단하게 대답한 아이언맨이 남자의 앞으로 날아가 무기를 빼앗아 던지고는 그대로 가볍게, 아머를 입은 손등으로 머리를 후려친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기절하는 남자의 허무한 실루엣을 선 채로 멍하니 보던 피터가 그제야,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요란하게 기침했다.


“별일 아니라기엔 소리가 우렁차네, 꼬맹이.”

“그게 아니고… 쿨럭.”


다시 한 번 팔꿈치 안쪽에 대고 기침을 하는 사이, 얼굴에서부터 찬찬히 해제한 아머에서 빠져나온 토니가 가뿐하게 옥상 위로 섰다. 혹시 모르니 쓰러진 남자의 손발목을 채우고 돌아선 토니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가지고 가서 먹고 자라.”

“감기약… 설마 이것 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감시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하셔서 모르고 못 오실 줄 알았는데. 그 중얼거림에 뜨끔한 얼굴을 금세 지운 토니가 겸사겸사, 하고 대꾸했다.


“안 오면 큰일 날 뻔했잖아. 이런 걸 달고도 눈치를 못 챘어?”

“아, 감사해요. 스타크 씨.”

“아프면 말하고 쉬란 말이야. 네가 정상이 아닐 때 무조건 나에게 보고가 가도록 캐런을 개조한 버전으로 슈트를 업그레이드 해줘?”

“아뇨, 아니에요. 이건 심하지도 않고, 콜록,”


뭐가 안 심하다는 건지. 하는 표정을 한 토니가 이번에는 손수건을 꺼내서 건넨다. 아, 감사해요. 똑같은 말을 두 번째 하면서 피터가 받아들었다. 입가를 닦으며 스파이더맨, 피터가 돌아섰다. 기절한 남자를 내려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토니가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귀찮은 것들이 붙기 시작했네. 하긴, 난 적이 많으니까.”

“저기. 스타크 씨.”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고는 있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도 이런 경우는 많이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너도 타워, 아니 이제 업스테이트지. 그쪽으로 들어오는 게 어때. 이런 일이 일일이 생길 때마다 대처하기도 힘들고. 좀 부담스러우면 내가 선택한, 안전이 검증된 집으로 이사하거나. 변명은 그냥 스타크 인턴십에서 제공하는 사항이라고 둘러대. 메이와 같이 가도 돼.”

“스타크 씨.”

“내 성격이 이래서 말이야. 좀 내 시야 안에 두는 걸 좋아하는 게, 욕심이 많은 것도 있지만 알잖아. 원한을 산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다 기억할 수도 없어서 내가 확실히 지키는 게 좋거든. 네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내 마음이 쓰여서.”

“저기, 스타크 씨!”


그제야 말을 멈춘 토니가 몸을 돌려, 피터를 보았다. 피터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열 때문이군. 손을 대볼까 생각하던 토니가 고개를 저었다. 가능하면 내일 학교도 쉬라고 하고 싶은데. 아니면 의사를 보낼까. 메이가 알면 사달이 날까봐 두려운 거면, 잠깐 이쪽으로 들러서 진찰을 해도 괜찮고.


“아까 저 아저씨가 한 말…”

“어떤 거?”


토니는 피터를 언제쯤 집으로 데려다줄지 가늠하고 있었다. 아머로 안아 옮기는 건 자존심이 상해할 것 같았고. 해피를 부르려면 시간이 좀 걸렸다. 맘엔 안 들지만 택시를 부르거나-


“저희가 연인이라는 거요.”

“그래.”


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이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일을 한 것은 꽤 되었다. 아이언맨이 다녀갈 때마다 슈트가 업그레이드되는 것은 유명해지기도 했고. 그리고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공식적으로도 가깝게 지낸다는 것은 다들 알 수 있을 터였다. 윈저처럼 집요하게 복수를 위해 아이언맨을 살폈다면 물론 당연히…


“아닌데요?”

“-뭐?”


피터가 뺨을 긁었다. 토니는 입을 벌린 채, 피터를 바라보았다. 멋쩍게 웃은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가 다시 한 번 천진하게 대답했다.


“저 아저씨가 오해하신 것 같아요.”


왜 저를 공격하시나 했어요. 깜짝 놀랐네.


“사귀는 거 아닌데 말이에요.”


고개를 들던 피터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니까, 아이언맨이자 토니 스타크의 얼빠진 표정은 처음 봤기 때문에. 열이 올라 뜨거운 귀를 만지작거리며, 피터가 멍하니 덧붙여 물었다.


“그렇죠…?”


토니 스타크의 얼굴은, 그러나, 이렇게 묻고 있었다.


“아니었어?”

 


* * *


 

“오늘 학교는 갈 수 있겠어?”

“괜찮아요, 메이. 저 가뿐해요. 약도 먹었고…”


말을 하던 피터가 입을 다문다. 메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금세 피터가 머리를 탈탈 털었다. 그래도 오늘 하루는 마스크 하고 다녀, 하는 메이의 말에는 금세 고개를 끄덕인다. 헐렁하지만 평소보다 두꺼운 후드티를 입은 피터가 가방을 덜렁 매고는 집을 나섰다. 습관처럼 가벼운 기침이 나왔다.


“이걸 어쩐담.”


메이가 점심을 먹고 챙겨 먹으라며 준 약을 떠올리며 피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약은 어제 토니가 건네준 것들이었고, 그래서 약을 먹을 때마다 생각이 날 수밖에 없었다. 피터의 아닌데요? 라는 말에 무시무시한 얼굴이 되어서 금세 아머 안으로 들어가, 그리고 미련 없이 돌아나간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가.


“난 전혀 몰랐는데…”


하지만 스타크 씨, 어딘가 굉장히 자존심 상한 얼굴이었고.

덩그러니 옥상에 남겨진 피터는 한동안 멍하다, 겨우 집으로 돌아와 토니가 준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 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했다. 주로 검색어는 토니 스캔들, 토니 스타크 스캔들, 토니 스타크 고백 따위의 것들이었다. 스캔들이 화려하게 수놓은 그의 연애 이력엔 별다른 고백이나 인정의 말이 없었다. 스킨십을 하는 사진이 찍혀 있거나, 공식 석상에서 가벼운 키스나 포옹으로 대신하거나. 물론 그런 가벼운 포옹은 피터와도 종종 했던 것이고, 피터는 토니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랩에서 연구하거나, 가끔 있는 작전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가끔 먼저 토니가 찾아오기도 했다. 학교가 끝나면 데리러 와서 요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밥을 먹고. 피터가 좋아하는 옛날 영화들을 보고, 높은 확률로 피로가 쌓인 토니가 피터의 어깨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잠들거나. 그러면 피터는 팝콘을 치우고 토니의 어깨까지 담요를 덮어주고 옆에서 공부를 했다. 한참 뒤에 일어난 토니가 비척비척 침실로 돌아가면 피터는 쪽지를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럴 땐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해피나 다른 사람들이 피터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 모든 연애가 적확한 단어의 고백이 이루어진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건 아니라고 해, 피터. ]


캐런의 충고 아닌 충고가 귓가를 맴돌았다. 피터가 뺨을 꾹 눌렀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난 스타크 씨를 그런,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이 없는걸! 하는 말에 캐런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며 사라졌다. 이후 새벽부터 아침까지 해피도 아니고 토니 개인 번호로 연락을 했지만 모두 묵살됐다.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하거나, 쪽팔리거나, 아니면 정말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피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엣취, 작은 재채기가 흘러나왔다.


“피터!”

“아, 네드.”

“감기는 괜찮아?”

“으응. 약 먹고 잤더니 괜찮아.”

“야. 그리고 오늘 아침에 나한테 이런 게 왔더라?”


네드가 내민 건 꽤 부피가 있는 상자였다. 이게 뭔데? 네드가 이미 열어보았는지 대답해 주었다.


“찜질 팩 같은 거. 너에게 갖다 주라고 되어 있던데.”

“뭐? 누가.”

“누구겠어.”


그리고 상자를 뒤집어 보이면, TS 라고 적혀 있는 메시지. 피터가 어… 하고 작게 얼버무렸다.


“네 어깨가 쑤실 거라면서. 특별한 치료제가 들어 있으니까 꼭 잘 때 하고 자래. 근데 왜 이걸 네가 아니라 나한테 보냈는진 모르겠네.”

“아… 난 알 거 같은데.”

“어?”

“아니야. 고마워.”


낚아채듯 박스를 가져간 피터가 고개를 살짝 털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쨌든, 어제 입은 피터의 상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게. 피터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디선가 토니 스타크가 그를 내려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이걸, 미안해해야 하는 건가. 어떻게 해야 하지.


“그나저나 어제 네가 말한 거. 그건 뭐야?”

“아, 맞다. 가방에 들어있는데, 이따가 실험실에서 보자.”

“어제 널 공격한 남자가 들고 있던 무기였지?”

“응. 그건… 툼즈 씨가 잡혀가고 나서는 더 이상 본 적 없었던 거야.”


네드가 흥분한 듯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그에게 몸을 붙였다.


“뭐야, 그가 탈옥이라도 한 걸까?”

“뭐? 아니, 아니. 그러면 기사가 크게 났을 거야. 스타크 씨…도 나한테 말해줬을 거고. 하지만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누군가 또 무기를 빼돌려서 유통하거나, 아니면 뭔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겠지.”

“그러면 큰일이잖아!”

“그래. 그러니까.”


피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뭔가 나서야 하는 거 아냐? 들뜬 네드의 목소리에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게, 원래라면.


“스타크 씨와 알아보려고 했는데…”


당분간을 어려울 것 같다. 한숨을 삼킨 피터가 잔뜩 신나서 뭐라고 외쳐대는 네드에게 적당히 대꾸하며 발걸음을 뗐다. 그래도 이 사안이 아주 가벼운 것만은 아니니, 그의 말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피터는 가방 안에 가라앉아 있는 테이저건의 무게를 느끼며 앞으로 다가올 여러 가지 새로운 국면에 대해 고민했다. 새로운 외계의 무기들, 아직 낫지 않은 스파이더맨의 감기, 그리고… 토니 스타크.



 

 



인피니티 워를 보고 너무 좋아졌는데 인피니티 워 이후 이야기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쓸 수가 없는 토니피터의 타협점... 뒤늦게 홈커밍 보고 덕질하는 척 하기 (ㅠㅠ) 행복한 뉴욕로코액션물을 쓰고 싶었습니다~! 뭔가 연애 쪽으로는 영 느린 피터랑 그런 피터 두고 속터지면서 막.. 괴로운... 어른 토니의 이야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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