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해라."



앞으로 우리 가족이 될 여주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좀 더 앳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시발 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내가 그 문을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라도 그랬을 거다. 사생아도 아니고 그저 사랑했던 여자의 딸이라는 이유로 데려와 가족이라고 들이밀었으니, 싫을 만도 했다.



"만나서 반가워. 여주야."



앞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 좀 더 성숙한 목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손이 내밀어졌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그 손을 맞잡았다. 다정한 어투는 아니었으나 친절함이 묻어나는 게 제 동생보다는 의연한 듯 싶었다. 그래서 더 신기했다. 나라면 제 엄마를 죽음으로 몰아간 여자의 딸에게 이렇게 웃어주지 못할 텐데. 엄마는 사창가에서도 제일 잘나가던 창녀였고, 우습게도 그런 직업을 가지고도 지금 나를 아련히 내려다보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었다. 본처도 있고 5살 난 아들도 있었던 주제에. 엄마는 그즈음 나를 낳았고 본인의 자식인지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든 나와 엄마 곁에 머물려던 회장이라는 남자는 8개월 뒤 들려온 제 아들의 출산 소식에 강제로 불려 가야 했다. 그 후론 아주 간간이 볼 수 있었지만, 회장의 본처는 그마저도 아니꼬웠던 모양이다. 남편의 사랑을 얻지 못한 여자는 작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다음 해인 지금 엄마가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회장은 본처가 죽고, 우리 엄마까지 죽고나자 나를 제 호적에 들였다.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는 결과까지 받아놓고서. 미친 게 아니고서야 이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내게는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이 사람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지금쯤 엄마의 빚을 이유로 사창가에서 몸을 팔아야 했을 테니. 이 집 두 형제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으나 솔직히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아무런 죄목이 없었다. 아,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죄목이라면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그렇게 김도영, 김정우와 남매가 되었다.







방으로 올라가려던 내가 누군가를 보고 멈칫했다. 아...인사라도 해야 되나. 예의상 입술을 떼려는 찰나, 그의 손에 들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손수건. 그는 손수건으로 더럽다는 듯이 제 손을 벅벅 닦고 있었다. 그리고 김도영이 결벽증에 걸린 사람처럼 닦아내고 있는 손은 내 손과 맞닿았던 손이었다. 그럼 그렇지. 김도영에게도 나는 역시 이방인이었다. 김도영의 하얀 손에서 손수건이 팔랑거리며 볼품없이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김도영이 나를 보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가고. 사람 집에 숨어사는 벌레처럼 숨죽여 있던 나는 그제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쓰레기통이 가까워졌다. 쓰레기통을 스치듯이 내려다본 나는 곧 쓰레기통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음영 진 쓰레기통 안 구겨진 손수건이 꼭 내 꼴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다음날. 식탁 위의 분위기는 더 처참했다. 누가 봐도 끌려 나온 것 같은 얼굴을 한 김정우는 입에 밥을 쑤셔 넣다시피 하고 있었고. 김도영은 정갈히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으나 이 자리가 그다지 내키진 않아 보였다. 누가 봐도 산산조각 난 이 가정을 제 욕심으로 대충 얽어놓고 혼자만 편한 얼굴로 상석에 앉아있는 건 김 회장뿐이었다. 



"얼른 와서 앉거라."

"늦게 나와서 죄송해요."

"죄송하긴, 아직 잠자리가 낯설어서 힘들었을 텐데."



인자한 얼굴로 뱉어진 회장의 말에 대충 고개를 숙이며 눈치껏 김도영 옆에 앉았다. 적어도 김도영은 내 앞에서 대놓고 싫은 티는 안 낼 테니까.



"보통 이 시간에 식사하니까 내려오면 된다. 한 끼 정도는 가족끼리 다 같이 앉아서,"

"지랄하네."



회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정우가 숟가락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내뱉었다. 



"엄마 있을 땐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으면서..!"

"정우야."



김도영이 나직한 목소리로 김정우를 불렀다. 그래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가슴께를 거칠게 들썩이던 김정우가 김도영과 눈이 마주치자 결국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대화하기 싫다는 듯이 회장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



그리고 그 순간, 김정우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릴 줄 모르고 사태를 관망하던 나와 김정우의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아직 날뛰는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김정우와 몇 초간 눈을 마주하던 내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같은 반으로 배정될 테니 정우 네가 잘 챙겨줘라."



그 소리에 김정우의 고개가 다시 회장에게로 돌아갔다. 지금 나보고..! 거세게 반발했지만, 이 집 위에 군림한 회장 앞에서는 어린애 응석에 불과했다. 그럼, 피 한 방울 안 섞인 나를 다른 이들하고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제 호적에 들였는데. 고작 어린애 반발이 무서울까. 엄마의 병간호를 하랴 아르바이트를 하랴 출석일 수를 제대로 못 채웠던 나는 나보다 한 살 어린 김정우와 같은 학년으로 배정이 되었다. 김정우와 같은 반이 된 것은 내 적응을 도울 겸 형제가 된 김정우와 친해지라는 회장 나름의 배려였다. 뭘 얼마나 사랑했길래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회장이 나를 이 집에 데려왔을 때처럼 나는 냉큼 이를 받아들였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그래. 많이 먹어라."



뻔뻔한 내 대답에 두 형제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닿았다. 



"...그래, 정우야. 여주 좀 잘 챙겨줘."



역시나 어른스러운 김도영은 마음에도 없는 저 한 마디를 뱉은 뒤 다시 식사에 집중했고, 김정우만이 경멸 어린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학교에서 아는 척하면 죽을 줄 알아."



차에 같이 타자마자 김정우가 한 말이었다. 웃기지도 않지. 얜 순진한 거야 멍청한 거야?



"그럴 일 없으니까 너나 나한테 신경 꺼."



어차피 김정우가 굳이 내게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 해도 김 회장이 그렇게 요란하게 나를 호적에 올렸는데 소문이 안 났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김정우랑 같은 차를 타고 등교하는데? 회장 앞에서 싹싹하게 굴던 것과 달리 까칠하게 내뱉으니, 김정우가 허 하고 더 상대하기 싫어졌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아예 고개를 창가 쪽으로 돌려버렸다. 얘는 이게 습관인가 보네. 내가 잘 보여야 될 건 어차피 김회장 하나였다. 우리 엄말 그렇게 사랑해서 호적에 들일 정도면 죽을 때 내 앞으로 유산이라도 조금 떼주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이 집을 조금씩 뜯어먹어서 자립할 정도가 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리고 저 등신.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어차피 내가 비쳐 보이잖아. 나처럼 눈을 감아야지. 마찬가지로 김정우가 썩 보고 싶지 않던 내가 시트로 몸을 묻고는 눈을 감았다.





"...가씨,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나를 깨우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고개를 돌리니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김정우는 그새 저 혼자 내려 학교에 간 모양이었다.



"태워다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서 차에서 내렸다. 학교는 이전에 다니던 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보였다. 건물 한 번 드럽게 크네. 수영장, 골프장, 식당 등 온갖 신식 시설이 있었고. 건물이 한 개도 아닌 데다가 심지어 넓었다. 이층 저층 다니던 나는 결국 번쩍번쩍한 건물 안에서 길을 잃었다. 교무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졌다. 다리 아파 죽겠네. 회장이 사준 교복을 입고 주먹으로 대충 무릎을 쿵쿵 쳤다. 어쩔까... 다 때려치우고 집으로 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하다가 지나가던 여자애 하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 교무실이 어디야?"



여자애가 빤한 시선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말했다.



"아...전학생?"



거봐. 내가 소문 다 났을 거랬지. 딱 봐도 나를 보는 눈빛이 그닥 곱지 않았다. 여기 아니고 옆 건물 2층인데. 고맙다는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나가던 제 친구를 붙잡고 속닥거리며 사라졌다.




담임에게 짧게 설명을 듣고 담임 손에 이끌려 교실로 내려왔다. 앞문이 열리고 담임을 따라 교탁 옆에 섰다. 그리고 이미 와 자리에 앉아있던 김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경멸. 그래, 그의 눈에 담긴 것은 딱 덜도 말고 더도 말고 경멸이었다. 



"안녕, 나는 김여주야. 남은 학기 동안 잘 부탁해."



내 입으로 잘 부탁한다 뱉으면서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주 최악의 학기가 될 거라고.




차라리 김정우와 같은 반이 아니었으면 나았을까. 아니, 똑같았겠지.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내 귀에 정확한 발음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주변에서 소근거렸다. 알바야. 기왕 이렇게 좋은 학교에 들어왔으니 김회장의 도움을 받아 좋은 대학, 좋은 직장까지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털어먹을 수 있는 대로 다 털어먹어야지. 그저 김정우만 굳이 나서지 않으면 될 텐데.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난 태생부터가 참 재수 없는 년이었다.


쑥덕거림이 한 교시 한 교시 지날수록 더 커지고. 아무 반응 없는 나와 김정우에 이젠 정확한 내용까지 내 귀에 들려올 무렵.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한 남자애가 총대를 매기로 한 건지, 느물대며 김정우 책상에 와 걸터앉았다. 안 그래도 아이들의 쑥덕거림이 커지면서 심기가 점점 불편해 보이던 김정우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야, 치워."

"김정우. 그러지말고~ 쟤가 진짜 니 동생이야? 아니, 누나라고 했던가?"



헐 그러면 니보다 쟤가 먼저 나온 거? 눈치 없게 깐족거리는 순간,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책상과 함께 남자애가 뒹굴었다. 



"씨발, 개소리하지 말고 꺼지라고."



열받아서 씨근덕대던 김정우가 쾅! 소리와 함께 거칠게 문을 닫고 사라졌다. 멍청하긴. 그렇게 반응하면 이게 인정하는 꼴 밖에 더 돼? 그냥 개무시 했어야지. 네가 그렇게 나간 덕분에 남겨진 나만 좆됐잖아, 정우야. 순식간에 나에게로 날아와 꽂히는 시선들이 날카로웠다.







김정우가 나를 개무시한다는 걸 알게 된 애들은 똑같이 나를 개무시했다. 사생아라며? 누구네 엄마처럼 어디서 굴러먹다 왔나 보지. 여주는 좋겠다. 엄마처럼 편하게 살면 될 거 아니야~ 김정우의 귓가에 들리도록 내 앞에서 떠들어도 김정우는 신경도 안 썼다. 이젠 애들이 내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차라리 김정우가 있는 교실이 나았다. 여자 화장실에 갔다가 잘못 걸리는 날에는 아주 재수가 없었으니까. 화장실 칸에서 못 나오도록 나를 돌아가면서 밀었다. 그렇게 종이 칠 때까지 낄낄대다가 여주야 늦겠다~ 하고 웃으며 자기들끼리 빠져나갔다. 하도 여자 화장실에서 저 지랄을 하니 다른 반 애들이 나를 못 볼 리도 없고. 이런 내 위치가 전층에 퍼져나가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나마 이런 조롱과 수위가 낮은 터치만 있어 차라리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김정우가 나를 싫어하는 것만 보고 괴롭히기엔 기사가 나를 꼬박꼬박 데리러 왔고 한 번은 김회장 심부름으로 내게 물건을 전해주러 왔었다.



'아가씨 이거 회장님께서 미리 챙겨주셨어야 하는데 못 챙겨주셨다고-'



기사는 내게 깍듯했다. 내게 전해준 물건은 바이올린과 플룻이었다. 나 아직 교양 과목 뭐 할지 안 정했는데. 그냥 둘 중에 하나로 하라는 건가. 옆에 껴있는 건 비타민이었다. 피곤하니까 공부하실 때 드시라고- 정말 쓸데도 없고 생색내기용이구나. 이걸 왜 기사를 보내 내 반까지 찾아와서 주는지 모르겠다 생각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긴 됐다. 악기나 비타민이나 비싸고 좋은 것들인지 애들끼리 쑥덕대더니 나를 괴롭히는 수위가 높아지지 않았으니까. 아마 긴가민가 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회장이 자기 친자식도 아닌 나 하나 때문에 이런 집안 애들을 강하게 처벌하라 밀어붙여 척지는 걸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차라리 지금처럼 적당히 맞춰주는 게 나았다. 이 애들이 회장이 나를 아끼는 건지 안 아끼는 건지 긴가민가해서, 혹시 불똥 튈까 더 수위 높여 괴롭히진 못하게. 만약 내가 이걸 이르고. 자기들이 그렇게 큰 처벌을 받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당연히 그다음엔 더 괴롭히는 수위가 높아지겠지. 나는 더 이상 귀찮고 싶지 않았다.







사물함을 열었다가 속으로 욕을 읊조리며 문을 닫았다. 얘들은 없이 자란 것도 아닌데 정말 왜 그럴까. 체육복이 없어졌다. 분명히 여기 넣어뒀는데 제 발로 도망갔을 리는 없고. 나를 괴롭히는 애들이 훔쳐 간 거겠지. 저번에 필통이랑 교과서가 소각장 쪽에 있었으니 그쪽에 있을 게 분명했다. 그 병신들이 창의적이지 않은 거에 대해 참으로 감사했다. 그걸 지금 다시 주워 입으려니 찝찝하긴 해도... 체육복을 다시 사달라고 하기가 더 뭣했다. 왜냐고 물으면 도대체 뭐라고 말한단 말이야.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찾아오자 싶어 시계를 한 번 보고는 소각장 쪽으로 향했다.



"아..."



정말 재수가 없어도 드럽게 없지. 소각장에는 김정우와 김정우의 친구가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김정우가 짜증 난다는 듯이 미간을 확 구겼다. 무시하고 그 둘을 지나쳐 아직 버려지지 않고 앞에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를 뒤졌다. 



"...너 뭐 하냐."



어이없다는 듯이 물어오는 김정우를 씹고 쓰레기 더미를 헤쳤다. 씨발 왜 없어. 버린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김정우 옆에서 그런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남자애가 입을 열었다.



"안녕. 여주~ 너가 정우 누나야?"



어디 중공업 외동아들이라 했나. 호기심 묻은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딱히 악의가 묻어나지 않았다. 이름은 이민형. 미국에서 자란 검은 머리 외국인.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여자애들이 이민형을 볼 때마다 자기 남친마냥 떠들어준 덕분에 자연스레 상기됐다.



"얘랑 누가 가족이야."



김정우는 퍽 삔또가 상한 건지. 이민형과 나를 향에 눈을 부라리고는 소각장을 홱 나가버렸다.



"어, 음... 하하-"



이민형이 멋쩍게 웃으며 알아듣지 못할 영어를 몇 개 중얼거리고는 김정우를 따라나갔다. 




그 이후로 딱히 다시 말 섞을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체육시간. 초등학생도 아니고. 피구만 하면 나를 향하는 공이나 수행평가를 봐야 하는데 나와 짝이 되면 연습에 성의가 없어지는 애들이 지겨워 체육 창고 뒤편으로 향했다. 땡땡이었다. 체육 점수를 계산해 보니 이번 건 말아먹어도 괜찮았다. 후미진 구석으로 발을 들였는데, 나보다 먼저 와있던 손님이 있었다.



"음 여긴 내 자린데."



이민형이었다.



"그냥 조용히 있을게."

"흐음-"



체육 창고가 지것도 아니면서 고민하듯이 눈썹을 찌푸리는 이민형에 갑자기 짜증이 확 치밀었다.



"여기 니가 전세 낸 거 아니잖아. 잔디도 박규혁이 깔았다며."



그 말에 이민형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너 성깔 있다. "




이민형은 도대체 무슨 포인트에서 내가 마음에 든 건지. 그 후로 아는 척을 해왔다. 솔직히 썩 나쁘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 이민형 아버지 회사를 검색해 봤는데 규모가 내 생각보다 훨씬 컸다. 신데렐라가 되겠다는 그런 멍청하고도 당찬 포부는 아니었다. 난 내 주제를 아는 속물이었으니까. 김회장한테 하듯 그저 콩고물이 떨어질까 봐였다. 내게 도움이 될까 싶어 이민형의 아는 척을 받아줬다.



"말 높여줘? 한 살 누나라며."

"너 어차피 존댓말 안 쓴다며."

"응. 난 한국인도 아닌데 써야 돼?"



그리고는 뭐가 웃긴지 제 말에 실실 웃었다. 너 웃는 거 되게 헤프다. 응, 난 쫌 약간? 헤프지~ 깔깔 웃으며 김정우한테 하듯 내 어깨를 감싸는 이민형에 복도를 거닐던 애들의 시선이 닿았다 떨어진다.



"여주, 매점 가자. 내가 사줄게."



그리고 이민형은 돈도 잘 썼다.



요 며칠 처음으로 편했어서 긴장이 풀어졌다. 이민형이 나를 호의적으로 대하는 걸 본 건지 나를 괴롭히던 애들이 잠잠했다. 체육시간에 나와 짝이 되면 여전히 성의는 없었지만. 죽지도 않고 또 돌아온 빌어먹을 체육시간에 내가 사물함 문을 열었다.



"하..."



그럼 그렇지. 내 인생이 순탄하게 흘러갈 리가. 며칠새 잠잠하나 싶더니. 한걸음 더 도약하기 위해서였나 보다. 이번엔 체육복이 잉크로 엉망이었다. 뭐 어디 음식물 쓰레기가 아니라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런 걸 만지긴 싫었나 보지. 짜증이 잔뜩 난 채로 수돗가로 향했다. 차가운 물을 틀어놓고 지워지지도 않는 걸 벅벅 빨고 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최근 들어 익숙해진 섬유 유연제 향이 난다. 이민형이었다. 맞다. 얘네 반도 지금이 체육 수업이었지. 이민형이 별 표정 없는 얼굴로 물에 젖은 내 체육복을 한 번, 내 얼굴을 한 번 보더니 가볍게 물었다.



"벗어줘?"



그리고는 내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라는 듯 바로 체육복 상의를 벗어 건넸다. 흰 티셔츠를 입은 마르고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난 자존심을 부리기엔 정말 뭣도 없는 년이었고. 남의 호의를 거절하는 객기는 부리지 않았다.



"아래도 여기서 벗어주게?"



그러자 표정 없는 얼굴을 하던 이민형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와하학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치, 여기서는 쫌 그렇지. 화장실 가서 벗어다 줄게."



고맙다는 듯이 이민형의 체육복을 받아들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아, 큰 중공업 회사 외동아들에 허우대까지 멀쩡한 이민형이랑 붙어먹는 건 지뢰였나 보다.

이미 지뢰를 밟은 이상, 어차피 터지기 전까진 발을 뗄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뻔뻔하게 이민형 체육복을 입고 체육 수업에 참여했다. 위옷이며 아래옷이며 줄줄 흘러내리는 꼴을 한 나는 우스웠고. 하는 척 마는 척 하더라도 일단 내 옆에 서있기라도 했던 여자애들은 이젠 아예 내 근처로 다가오지도 않았다. 체육복 위에 박힌 이민형의 이름을 훑는 눈들이 매서웠다. 내가 이걸로 얻은 건 깎이지 않은 태도 점수밖에 없다는 게 기가 찼다. 한편으로는 보란듯이 더 이민형에게 부비고 싶어졌다. 내가 지금부터 이민형하고 아는 척도 안 한다고 날 냅둘 것도 아니고. 어차피 지랄할 텐데. 나만 기분이 좆같으면 기분이 나쁘잖아. 엄마가 내게 그랬다. 넌 그 꼬인 심사때문에 네 인생 꼬면서 살 거라고. 엄마, 근데 내 인생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꼬여있었어. 오늘따라 쓸데없이 햇빛이 좋았다. 강한 햇빛에 눈을 찌푸리며 배구공을 챙겨들었다. 인생은 꼬였어도 수행평가 점수는 챙겨야 했다. 나는 잘하고 상대방은 못하면 내 점수도 깎을까. 협동심을 운운하려나. 인간이 자웅동체도 아닌데 뭐 그리 하나됨을 운운 하는 걸까. 그래도 일단 할 수 있는 걸 하자 싶어 혼자 배구공을 튀기고 있는데 물병을 가지러 가던 김정우와 마주쳤다. 김정우의 눈이 내 가슴께에 단정히 박힌 이민형의 이름을 훑는다. 하 하고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나를 내려다 보는 눈이 너무 빤해서 우스웠다. 왜, 내가 우리 엄마처럼 네 친구도 뺏을 거 같은가 보지? 피하지 않고 눈을 맞추자 마주친 눈동자에 서서히 경멸이 차오른다.



"주제 파악 좀 해."



그리고는 나를 지나쳐 사라졌다. 다른 애들처럼 내게 어깨를 부딪히지도 않았다. 닿기에는 너무 더럽다는 듯이.






지뢰에 지뢰가 쌓여 드디어 펑 하고 터졌다. 

괴롭힘의 수위가 세졌다. 이르지 않으면서도 잘못했다 하지도 않고 자기들을 똑바로 쳐다보는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안 보이는 곳을 꼬집고 때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잡아당겼다. 불시에 내 머리가 싹둑 가위 아래로 흩어져내렸다. 여주야 머리가 너무 촌스럽길래. 집에서 관리 안 해줘? 나를 둘러싼 애들이 깔깔 웃었다. 

필통이 걸레 빤 물에 처박혔다. 굳이 저걸 건져야 하나 싶어 이민형 보고 필통을 가지고 내려 오라고 했다. 이건 또 안 건드렸다. 웃기지도 않지. 체육시간. 익숙해진 땡땡이 장소에서 이민형이랑 노닥거리고 있는데 이민형이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도와줘?"



어조가 한없이 가벼웠다. 별뜻 없다는 듯이. 그 말에 대충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 별로 도움 안 될 것 같아."



그 말에 또 와하학 웃는다. 얜 뭐가 그렇게 웃길까. 하긴 나도 내 부모가 살아서 큰 중공업 회사를 했으면 사는 내내 시도 때 없이 깔깔 거려줄 수 있었다. 이민형이 놓여진 내 새끼손가락을 들어 손장난을 쳤다. 



"여주, 너 쫌 재밌는 것 같아."



그럼 재밌으니까 네가 나랑 이러고 있지. 안 재밌으면 이러고 있겠니. 체육선생님은 땡땡이 치는 이민형을 굳이 찾지않았고. 더불어 내 점수도 깎지 않았다. 이민형의 흥미를 끄는 대신 옆에 붙어 이렇게 덕을 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 불행을 보란 듯이 전시해 줄 수 있었다. 사는 내내 귀한 것만 보고 자랐을 이민형의 반질반질한 까만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응시한다. 피하지 않고 이민형에게 눈을 맞췄다. 고요함이 우리 사이를 훑고 지나간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이 붙었다.







"찝찝해 죽겠네."



치마부터 셔츠, 그리고 머리카락까지 온통 젖어 축축했다. 내가 전보다 이민형과 붙어지내니 약이 바짝 오른 걸까. 어디선가 날아온 우유팩이 퍽 내 머리를 맞추며 그대로 터졌다. 뒤통수가 욱씬욱씬 했다. 뒤돌아봐도 자기들끼리 웃으며 속닥거릴 뿐 네가 뭘 어쩔거냐는 얼굴들이다. 짧게 한숨을 쉬고는 체육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유 비린내에 속이 울렁거렸다. 온몸이 젖든 말든 일단 이 악취를 씻고 싶었다. 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국이 남는다. 모퉁이를 돈 순간, 친구들이랑 농구 하고 세수라도 한 건지. 앞머리가 젖은 김정우와 마주쳤다. 우유가 젖은 머리카락을 타고 뚝 뚝 떨어진다. 김정우가 처음으로 당황한 얼굴로 나를 마주 봤다. 순진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심기가 뒤틀렸다. 너는 나를 그렇게 경멸하고 무시했으면서. 다른 사람들은 그럴 거라 생각 못 했어? 돈 있는 집 지붕 아래, 힘 있는 김회장 아래서 큰 김정우가 남이 할 수 있는 괴롭힘을 상상해 봤자 못되게 말하고 투명인간 취급하는 게 다였겠지. 이런식으로 괴롭힘 당할 거라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을 거다. 내 인생이 또 한 번 배배 꼬인다.



"김정우, 너는 내가 우리 엄마처럼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너도 내가 있는 진창으로 확 밀어 넣어 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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