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 탈출 계획은 세웠다. 애초에 훈련만 아니면 마나르는 내가 어딜 돌아다니던 신경쓰지 않았고 그건 이곳의 직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번에 내가 그냥 대놓고 정문에 어슬렁 거리다 잠깐 산책하고 온다고 나가도 그 누구도 막지 않았다. 그런 날 보는 직원의 눈빛이 영 수상했지만 일단 막지는 않았다.

게다가 달라고 하면 다 줬다. 군인 행군용 내가 들 수 있는 최대한 큰 가방을 주문하니 바로 다음날 내 방 앞에 배달와 있었다. 자그마치 50L짜리였다. 사실 크기 보고 너무 욕심을 부렸나 싶은 생각이 들긴 했으나 생각보다 초능력자의 신체 스펙은 엄청났다.

안에 칼로리 높고 별다른 조리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있는대로 수셔넣고 들어보니 좀 묵직한 감이 있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욕심부리지 않고 천천히 묵묵히 걸어가면 꽤 멀리 갈 수 있으리라. 이제 내 위치를 알 수 있고 보낼 수도 있는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됐다.

이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마나르의 휴대폰을 훔칠 깜냥은 안 되지만 일반인 직원 한 명 정도야 쉽게 빼돌릴 수 있었다. 휴대폰 비밀번호 같은 건 대충 관찰하다보면 보인다.

자 이제 당당하게 정문으로 나가면 그래도 추적이 너무 쉽게 될테니 후문으로 당당히 빠져나가 정문 방향으로 걷고 계속 걸었다. 더 이상 마나르의 집이 보이지 않자 휴대폰 비밀번호를 풀고 구X맵으로 지금 현재 내 위치를 알아보려는데 당연하게 전파방해가 있었다.

각오했지만 막상 보니 좀 막막했다. 그래서 준비한 나침반으로 동쪽으로 계속 향했다. 계속 살펴보다보니 마나르가 생각 이상으로 그곳을 애용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자주 오갈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S급 텔레포터가 있다 한들 S급이 흔한 것도 아닌데 단순히 자기 이동수단으로만 사용하긴 아까울 것이다.

그럼 A급을 쓸 수 밖에 없다. 그렇게되면 자연스럽게 거리에 제약이 생긴다. 게다가 사막이라는 특수한 환경도 있으니 아랍 근처에 있는 사막이라 하면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사막 정도일텐데, 설마 막 사하라 사막 정중앙이고 그러진 않겠지?

아무튼 여기가 중동 지역이라는 전제 하에 동쪽에 우리나라가 있을테고 가다보면 무슨 마을이라도 나타나지 않겠나 싶었다. 묵묵히 걸은지 2시간 정도 지났을까 휴식도 취할 겸 핸드폰을 열어보니 이놈의 전파는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마나르 나 안 찾네? 아니 못 찾은 건가? 흠... 뭐가 됐든 나야 도망가고 좋지.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3일을 내리 걸었더니 다리가 쪼개지는 느낌이다. 발목도 발도 그냥 너무 힘들다. 더 천천히 조금씩만 걸어야겠다. 여기서 못 걷게 되면 진짜 답없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쉬자. 1인용 원터치 텐트를 펼치려고 촥 펼쳤더니 뭔가 벽 같은 거에 부딪혔다.

텐트는 다시 접고 가방까지 맨 다음에 분명 허공인데 벽 느낌이 났던 곳을 더듬거리니 철사로 된 것이 팬스..? 철조망 같은 것이 만져졌다. 오늘은 어차피 여기서 야영할꺼라 모래 섞인 물을 촤악 펼쳐보니 철조망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높이는 대략 2m로 그리 높지는 않아서 타넘지 못 할 정도도 아니었다.

혹시 철조망 너머에도 뭐가 있나 싶어 물을 흩뿌렸지만 뭐가 보이는 건 없었다. 혹시나 이 건너에서는 전파가 잡힐까 싶어 철조망 사이로 휴대폰을 뻗어보았지만 아쉽게도 뭐가 잡히지는 않았다. 아쉽지만 이 철조망을 발견한 것 만으로 꽤 큰 수확이다.

철조망을 쳤다는 건 결국 사람이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 너머로 가다보면 뭐라도 나온다. 일단 사람이 나온다! 전파만 터지면 보담이가 바로 찾을 수 있을테니 희망이 보였다. 빨리 자고 내일 가보자.

다시 텐트치고 침낭꺼내고 랜턴 켜서 캔을 하나 까서 먹고 침낭에 들어가 누웠다. 그런데 3일만에 사람의 흔적을 봐서일까 온갖 생각이 다 들어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도 인생 어떻게든 되긴되는구나 싶다가도 내가 혹시 신기루같은 걸 보고 있는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니 문득 자신의 처지가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나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숨을 쉬고 뭘 먹을 때마다 반은 모래인것 같고 땀에 흠뻑 젖어서 샤워라도 하고 싶은데 지금 상황에선 기껏 해봐야 물로만 헹구는 게 최선이었다. 이래저래 산도 많이 타봤고 오래 걷는데는 자신이 있었던지라 야심차게 도망가고자 마음먹었지만 역시나 족히 쌀 한포대는 거뜬히 넘는 가방을 들고 밖에서 야영을 하며 3일을 내리 걷는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모래바람이라도 불었다간 눈에도 모래가 들어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아니 진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이게 어디서부터 꼬인거지? 마나르 그 미친놈 때문에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냔 말이다. 권력 있음 다야? 권력 있음 그냥 막 그렇게 사람 굴려도 돼? 내가 진짜 서러워가지고... 주인공이고 나발이고 내 알 바냐고. 내 인생 내가 좀 살겠다는데 주변에서 왜 자꾸 이래라 저래라야.

에이씨. 괜히 눈물만 나오고 난리야. 잠이나 자야지.


화장실이 가고 싶어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꾸물거리다 텐트 입구를 더듬거리며 찾으려는데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어서 몸을 좀 더 빼다가 그만 굴러떨어졌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다시 그 방으로 돌아왔다. 순간 내가 꿈을 꿨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끼익-

문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물을 쏘아보내자 마나르가 가볍게 피했다.

"아침부터 힘이 넘치는구나. 나들이는 즐거웠니?"

마나르의 말에 내 탈출이 꿈은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지독히도 무거운 무력감이 나를 집어삼켰다.

결국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마나르의 손바닥 위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나는 그저 기다릴 수 밖에 없구나.

오히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이렇게 되니 궁금했다. 나를 대체 어떻게 영웅으로 만들겠다는 걸까? 지금으로썬 정말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이 있지 않는 한 단순히 강해지기만 해서는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달 수 없다.

"이렇게까지 해서 그럴 마음도 없는 당사자를 어떻게 영웅으로 만들겠다는 거죠?"

"그야 간단하지. 나와 맞먹을 정도로 키워서 너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죽이면 그만이니."

생각보다 누군가에 대한 증오는 깔끔했다. 이런저런 감정이 덕치덕치 붙어서 엄청 불쾌한 기분일 줄 알았는데 별로 그렇게 복잡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잡념들이 싹 사라져 상쾌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래도 망설임 같은 게 들 줄 알았는데.

사람을 이렇게까지 죽이고 싶을 수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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