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어차피 일 년이었다. 길어 보이지만 결코 길지 않은 시간임은 그 속에 있어 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운이 좋으면 영화 한 편, 더 좋으면 광고도 몇 개 찍을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이건 아주 운이 좋았을 경우의 이야기다. 아주 깨끗한 셔츠에 무늬를 넣는 것에도 반드시 시간은 걸린다. 어떤 구도로 넣으면 좋을지, 어떤 무늬를 넣어야 할지 온갖 것에 대해 고민을 하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한참을 골똘하게 생각한다. 그 시간이 누군가에겐 일 년, 혹은 그 이상이 필요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도 역시 운이 좋은 경우의 이야기였다. 이미 얼룩이 진 셔츠를 입고 있는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다. 탈세로 시작된 이야기는 곧 갖가지 무성한 소문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커졌다. 그 무슨 해명도 변명으로 둔갑할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아주 대단한 재벌 집 사모님의 스폰을 받는다는 소문도, 아니 아예 출신이 그쪽이라는 소문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물러나 버렸다. 그 중 어느 것도 진실인 것이 없는데, 침묵은 거짓을 진실로 바꾸고 곧 내 앞에 거대한 장막을 쳤다. 이 속에 숨어 다시는 나오지 말라는 듯.


“...전화를 안 하시겠다.”


묻자마자 닦아내지 못한 얼룩은 이미 깨끗한 천에 단단히 들러붙어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물로 지워내는 간편한 방법이 통할 리 없는 것을 아무리 빨아봐야 옅어지기만 할 뿐 흔적은 여전했다. 그것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려,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드는 것에 일 년이라는 시간은 고작이라고밖에는 달리 붙일 이름이 없었다.


“......”


그 시간만 버티면 내 약점 같은 건 다 없던 일로 해주겠다는 계약서를 가만히 떠올리던 나는 이내 손에 쥐고 바라보던 것을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으며 이내 눈앞에 보이는 건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뭐가 되거나 말거나 버티면 그만인 그 고작의 시간이 벌써 며칠이 또 흐른 뒤였다.


“네가 안 오면 내가 간다 이거야.”


일단 쉬어요. 김종현은 이렇다 할 대답 대신 모호한 말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곧 전화 주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단이라는 말에 잠자코 김종현의 연락을 기다렸던 나는 그러나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 일단이 벌써 이틀이란 시간을 잡아먹었다는 것에 그대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 하자는 거야.


“.....”


전에 있던 곳처럼 대단히 크고 번지르르한 건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깔끔한 인테리어가 투명한 유리문 너머 한눈에 들어왔다. 회사라기보단 사무실이라고 부르는 편이 아직은 어울리는 공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나는 바로 보이는 안내 데스크가 텅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내 그대로 닫혀 있는 문을 밀고 들어섰다. 밥 먹었어요? 나 배고픈데. 이틀이란 시간이 흐른 것을 깨닫고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긴 했지만, 섣불리 취할 수 있는 다음은 없었다. 먼저 감시하겠다고 나섰던 건 김종현인데,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먼저 전화라도 하면 되게 매달리는 것 같고 없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은 착각보단 경험상 확실한 이론이었다. 그렇다고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았다. 시작을 안 했으면 몰라도, 한 번 결심한 일엔 굳이 후진하는 법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아닌 척 나라는 존재를 상기시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뿐이었다.


“...뭐가 이렇게 조용해.”


그럼 밥 먹어요. 그리고 정확히 20분 후에 도착한 메시지에 가부좌를 틀고 휴대전화만 노려보던 나는 이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꼴에 대표 방은 또 따로 있으시겠다.”


누가 이딴 대답 듣자고 기다린 건 줄 아느냐고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일단 억누른 나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그러게 최민기를 건드리길 왜 건드려. 같이 살자는 말 같은 건 왜 해. 진짜 같이 살면서 나랑 사는게 얼마나 피곤한지 똑똑히 알게 해준다, 내가. 듣는 사람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외출 준비를 마친 내가 거울 속에서 마주했던 얼굴과 똑같은 얼굴이 고스란히 비치는 대표실 유리문 앞에 서서 그 안을 잠시 뚫어져라 응시하다 곧 그대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네, 그럼 다음 주에 미팅 한 번..”

“.....”

“하시죠.”

“.....”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


노크를 하긴 했지만 허락을 구하는 건 아니었다. 텅 빈 사무실에 함부로 쳐들어오는 낯선 외부인은 아니라는 경고와 알림 같은 정도였다. 그래서 들어오라는 대꾸가 있기 전 노크를 끝내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나는 노크 소리와 함께 돌아왔을 고개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보며 완전히 정지한 것을 보고 이내 가볍게 눈만 찡긋거렸다. 하던 일 계속해요. 그리고 꼭 그런 얼굴로 알아서 자리를 잡고 앉은 나는 그런 나를 따라 시선이 움직이며 동시에 구겨지는 미간을 보며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거창하게 붙여 놓은 대표실이란 문구가 어색하게 협소한 공간은 좋게 말해 아담하고 소담했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절대 놓지 않을 거라는 의지가 엿보이는 정갈 하다 못 해 텅 빈 공간을 차근차근 둘러보던 나는 곧 네, 수고하세요 하는 마지막 인사에 그대로 다시 고개를 돌려 김종현을 바라보았다.


“뭡니까?”

“뭐긴요, 나 몰라요? 최민기잖아요.”

“,,,,,”

“뭘 그렇게 놀라요. 못 올 사람이 못 올 곳 온 것처럼?”

“.....”


예상했던 첫마디에 뻔뻔하게 중얼거리자, 잠시 전화를 하던 자리에 선 채로 나를 바라보고 서있던 김종현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내가 앉은 소파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 김종현을 가만 바라보다 다시 주변을 휙휙 둘러본 나는 이내 의아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김종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기 정식 회사 맞죠? 유령 회사 같은 거 아니고?”

“....”

“근데 무슨 직원이 하나도 없어요? 설마 혼자예요?”

“혼자면 안 됩니까?”

“너무하시네, 나 같은 탑스타를 잡았으면서.”

“보통 탑스타는 주말에 일을 하죠. 안 놀고.”


말을 해도 꼭 그렇게밖에 못하죠? 진짜 이쁘게? 어? 한 마디도 질 생각이 없다는 듯 던지는 말에 있는대로 노려보자 그제야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튼 김종현이 곧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어디 가요. 그런 김종현을 향해 반사적으로 물은 나는 대꾸 없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는 꼴을 그저 빤히 바라보았다.


“마셔요, 커피 말고는 이거밖에 없어요.”

“.....”

“왜요, 바나나 우유 싫어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

“내가 커피 안 마시는 거 말 한 적 있나 해서요.”


대꾸 없이 옮긴 걸음이 멈춘 곳에서 살짝 허리만 굽힌 김종현이 내민 것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보통의 손님 접대와는 조금 다른 눈앞의 물체에 그대로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런 나를 향해 설명을 덧붙이며 다시 자리를 잡고 앉은 김종현은 곧 여전히 의문으로 가득한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 곧 제 몫으로 꺼내 온 듯한 생수를 집어 들었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그 정도도 모를까 봐.”

“뭐 나한테 사람이라도 붙였어요?”

“그쪽이 그 정도는 아닐 텐데.”

“뭐라구요?”

“최민기씨 커피 안 마시는 건 인터넷만 뒤져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마시라는 듯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곧 앞에 놓인 바나나 우유를 그대로 집어 들었다. 아, 이건 빨대가 있어야 하는데. 하여튼 센스라고는 없어요, 진짜. 빨대 없이 바나나 우유를 누가 먹어요? 중얼중얼거리는 나를 보며 들고 있던 것을 잠자코 내려놓은 김종현이 곧 먹기 싫으면 곱게 내려놓아도 된다는 듯 고갯짓을 하는 것을 보며 이내 입구를 단단히 막고 있는 녹색의 마개를 나는 사정없이 뜯어냈다.


“어떻게 왔어요.”

“어떻게 오긴요, 차 타고 왔죠.”

“...내가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뭘 묻는 건데요.”


달달한 것이 나쁠 리 없었다. 입안에 들어온 달콤한 것을 야금야금 꿀꺽거리며 의도가 뻔한 김종현의 말에 성의 없이 대꾸한 나는 곧 큰 눈을 깜빡 이지도 않고 바라보는 것에 곧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밥 먹자면서요. 김종현씨가.”

“내가요?”

“그럼 밥 먹어요. 그렇게 보냈잖아요.”

“그건.”

“밥 먹으라고 말 한 사람이 밥은 책임져야죠.”


그 말 역시 그런 의도가 아니었음은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핑계가 필요했다. 매달리는 것 같지 않고, 질척거리는 느낌 없이 김종현을 만나러 올 핑계가. 일단 같지도 않은 이틀의 일단이 지나버린 내게 이런 억지 같은 핑계라도 생긴 게 다행이었다. 김종현의 대답은 이미 들은 것이나 상관이 없었다. 충분히 밀고 들어 올 수 있는 충분한 시간 속에서도 계약서 대신 죽을 사 들고 나타났던 그 순간 김종현의 대답은 뻔했다.


“밥 먹자는 말 하려고 온 겁니까?”

“네.”

“.....”

“매일 우리 집에서 같이 먹자는 말 하려고.”

“.....”

“데리러 왔어요, 내가 김종현씨.”


제멋대로 인 것 같지만, 늘 마지막 선택권은 내게 있었다. 아무리 계약서에 적혀있다 한들, 그것을 무기로 내가 허락하지 않은 공간을 침범할 사람은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그 계약사항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김종현이 술에 취해 뻗었던 다음날 나와 동거를 하겠다며 나타났던 건 가벼운 경고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3년 동안 죽은 듯 살며 잊고 있었던 그 세계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 내가 누구였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가 잊어버리고 있던 아니 잊고 싶었던 것을 끄집어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 김종현은 그런 것들을 내게 조금은 과격하고 충격적인 그렇지만 끝내 무례하지 방법으로 상기시킨 것이다. 어쩌면 톱스타였고, 어쩌면 만인의 최민기였던 지금의 그냥 나에게.


“무슨 속셈입니까?”

“속셈이라뇨?”

“왜 굳이 나랑 살겠다는 거예요.”

“말했잖아요, 거짓말했다고. 나 술 취해서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도 안 나요. 내가 당신한테 실수를 했는지, 욕을 했는지 아무것도.”

“.....”

“그래서. 계약서대로 하겠다구요.”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하나의 시그널이었을 그 행동의 결말을 김종현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며 펄쩍 뛰다 못해 야단을 할 최민기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는 것으로 끝내고 싶었을 얼굴이 내 대답에 살며시 일그러졌다. 예상치 못한 결론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에 나는 곧 앞에 놓인 우유를 그대로 집어 들었다.


“혹시 알아요? 계약서대로 안 했다가 나중에 내가 피 볼지?”

“무슨 소립니까?”

“일 년 됐는데, 그쪽이 갑자기 내 발목 잡으면 어떡해요.”

“...네?”

“그렇잖아요. 나는 복귀하면 무조건 잘 될 거예요. 나는 최민기니까. 근데, 내가 잘 되어봐라? 그럼 당신이 내가 얼마나 아깝겠어요? 아, 얘를 일 년만 쓰고 놔주긴 너무 아까운데. 아마 그럴걸요?”

“.....”


그리고 그것을 한 모금 꿀꺽하고는 이내 곧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자 금세 덩달아 심각해졌던 김종현의 얼굴이 점점 다른 의미로 심각해지고 있었다. 일그러졌던 것들이 차분하게 하나씩 판판해지고, 이내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살짝 기울어졌던 상체가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가서 내가 그때 너 한 번 봐줬으니, 이번에는 네가 양보해라 하면서 우기면 나만 손해 아닌가?”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그럴 사람이라고 써놓고 다니는 사람 없거든요.”

“안 그럴게요. 됐죠.”

“당연히 안 그래야죠. 그러니까 서로 찝찝한 것 없이 계약대로 하자구요.”


더이상은 들을 가치가 없는 말에 얼마 안 남은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김종현이 곧 빈 페트병을 내려놓으며 이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짜 나랑 살고 싶어요?”

“네.”

“.....”

“살면서 시시때때로 깨달으려고요. 김종현씨가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

“......”


김종현이 나를 각성시키기 위해 쓴 방법이 그것이라면 김종현의 방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럴 거였으면 끝내 다정하진 말았어야 했다. 다정이라고 느낄 수도 없는 순간을 다정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김종현씨는 아니겠지만, 나는.”

“....”

“나는 당신이 아닌 누구라도 다정하게 굴면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

“무슨 말인지 알죠.”

“......”


얼룩진 셔츠를 깨끗하게 만들 방법은 없었다. 그냥 그 위에 얼룩이 보이지 않도록 새로운 색을 입히는 것이 고작의 시간을 이길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그걸 나보다 먼저 시작해버린 김종현이 내 얼룩을 밟고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룩을 주렁주렁 매달고 서 있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기억 안 난다는 말 사실이에요. 하나도 기억 안 나요. 당신한테 무슨 소리 했는지.”

“.....”

“근데 그건 기억이 나요.”

“.....”

“괜찮아요? 술 많이 마셨어요? 라고 그쪽이 물어본 거.”

“.....”


괜찮아요, 내 손 잡아요. 절대 붙잡으면 안 되는 손을 내밀며 나를 향해 중얼거리는 얼굴을 바라보며 가만히 흐릿한 기억을 더듬던 나는 곧 연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던 전화를 떠올리며 김종현을 향해 중얼거렸다.


“데리러 온다 그랬죠. 당신이.”

“.....”

“그리고 내가 바로 다시 전화했을 거예요.”

“......”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

“뭐 그러지 말라고 했거나 그랬겠죠.”


다정할 생각도 없으면서, 감정을 다정이라 착각하게 만들어버리는 김종현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곧 질끈 눈을 감았다 뜨며 나를 응시하는 김종현에게서 살짝 시선을 틀었다. 그 다음은 기억이라고 할 순 없었다. 몇 시간 간격으로 걸려온 김종현의 전화는 기억이 아닌 기록이었다. 단지, 그 기록이 기억보다 더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가 정말 당신이랑 계약한 당신 배우라서 내 상품 가치 때문에 걱정이 되었던 거라면.”

“.....”

“김종현씨는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데리러 왔어야 해요. 내가 싫다고 하든 말든.”

“.....”

“내가 술에 잔뜩 취했다는 걸 알자마자 무슨 조치라도 취했을 사람이에요, 내가 아는 당신은.”

“.....”

“근데 안 그랬잖아.”


어쩌면 밤새 한숨도 못 자고 걸었을 전화를 떠올리며 중얼거린 나는 곧 나를 빤히 바라보는 김종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바라보았지만, 나는 딱히 김종현에게 듣고 싶은 말이 없었다. 우리 사이엔 필요한 말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김종현씨가 나를 정말 걱정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당신 배우라서가 아니라, 그냥 진짜 나를.”

“.....”

“나를 걱정해주는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나를 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얼굴을 보며 말을 끝낸 나는 곧 그대로 입을 다물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주의 좀 해줘요. 그런 말을 덧붙일까 말까 하는 찰나의 고민도 숨에 섞여 있었다.


“내가 같이 사는 걸로 해결이 됩니까?”

“...네?”

“당신이 나에 대해서 하는 오해 다 풀 수 있냐고 묻는 겁니다.”

“오해요?”

“네, 오해.”


그런 고민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차분한 음성에 다시 숨을 들이마신 나는 곧 단호하게 중얼거리는 얼굴을 보며 그렇다 아니다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얼마간 더 응시하던 김종현은 이내 됐다는 듯 먼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네?”

“같이 살자구요, 원하는 대로.”

“진짜요? 진짜 나랑 살 거예요?”

“왜요, 못 믿겠어요?”

“네. 녹음이라도 할까 봐요.”


혹시 또 딴소리 할지도 모르니까. 잔뜩 긴장한 채로 앉아있던 나는 한순간 들려오는 경쾌한 결론에 그대로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나를 보지도 않고 제 영역으로 돌아가 자리를 잡고 앉는 김종현을 따라 걸음을 옮긴 나는 곧 힐끗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이내 막 꺼내려던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넣었다.


“뭐 할 말이 아직도 남았습니까?”

“나 안 데려다줘요?”

“데려다주기까지 해야 해요?”

“당연하죠. 차도 안 가지고 왔는데.”


볼일 끝났고, 들을 말 끝났으면 이만 가라는 듯 나를 바라보던 김종현의 눈이 금세 커졌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살짝 빼 나를 위에서부터 쭈욱 훑어보고는 곧 있는대로 미간을 구긴다.


“그럼 어떻게 왔는데요.”

“차 타고 왔죠, 남의 차.”

“그렇게요? 모자도 안 쓰고?”

“뭐 어때요. 집 앞에서 택시 타서, 여기 앞에서 내렸는데.”

“.....”

“기사님들은 나 알아보지도 못해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가 역력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김종현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중얼거리던 나는 곧 김종현이 막 자리에 앉자마자 꺼내 든 두툼한 것을 곁눈질로 보고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잠깐 기다려요. 잠깐 확인할 게 있으니까.”

“대본이에요?”

“네.”

“벌써 대본도 들어와요?”

“훔쳤어요.”


굳이 세심하게 보려 하지 않아도 눈에 익숙한 것이 먼저 내게 확신을 주었다. 어떻게 보아도 대본이 확실한 두께의 종이 뭉치를 손에 든 채 중얼거리는 김종현에게서 멀어지며 다시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나는 곧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살짝 경악하는 얼굴을 했다가 곧 의미없는 말임을 깨닫고는 앞에 놓인 우유를 집어 들었다.


“나 영화 데뷔시킨 감독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있었어요.”

“.....”

“전부 반대했는데 신인을 주연으로 쓴 게 수상하다고.”

“.....”

“신인 때 내 연기 보면 그런 소리 나와도 뭐 할 말 없는데, 여튼 그랬었어요.”

“.....”


절반 정도 어중간하게 남은 우유가 내 손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우유처럼 힘없이 흔들리는 기억을 끄집어내 중얼거린 나는 곧 갑작스레 꺼낸 이야기에 분명 궁금한 얼굴을 하고 있을 김종현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바닥이 그런 곳이에요. 아무 말이나 만들어서 하고, 변명하지 않으면 그렇구나 해버리는 곳.”

“.....”

“그런 곳에서 굳이 나 같은 약점투성이의 인간을 쓰겠다 할 리가 없어요.”

“.....”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으니까.”

“.....”

“내가 없는 동안에도 세상은 잘만 돌아갔는데, 굳이 나를 쓰면서 잘 돌아가던 걸 어긋나게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고작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김종현이 내 얼룩을 얼마나 감출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감추기는커녕 오히려 김종현이 감추려 한 무언가가 더 나를 얼룩지게 만들 수도 있었다. 김종현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옅어진 채로 익숙해져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던 시간이 그 잡은 손 때문에 다시 복잡하고 어지럽게 얽힐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미 김종현은 내게 손을 뻗고 내 얼룩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겁도 없이 그 손을 잡아버렸고.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나 그쪽 원망 안 해요, 내 복귀가 물거품이 된다고 해도.”

“.....”

“좋은 대본이 들어 올 리도 없고, 날 써주겠다는 정신 나간 곳도 없을 거고.”

“.....”

“당신은 내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나는 내가 불가능하다는 거 알고 있어요. 알고도 그쪽이랑 손잡은 거고.”

“......”

“그러니까 부담 가지지 마요. 어차피 잘 될 거라는 생각도 없으니까.”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고작 일 년이라는 시간동안 할 수 있는 한 가장 최선에서 멀어지는 것, 그래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후회도 미련도.


“신종 협박입니까?”

“네?”

“잘되게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런 거 아니거든요?”


어차피 안 될 걸 알면서 최선을 다해봐야 남는 것은 상한 마음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진지하게 꺼낸 말을 담담히 듣던 김종현의 목소리가 조금의 감응도 없이 표정만큼이나 담담하게 터졌다. 기껏 생각해서 말했더니. 겨우 그딴 반응이냐는 듯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앙칼지게 눈을 부릅뜨자, 곧 나를 향해 돌아온 시선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책상에 내리치며 정리되는 것과 동시에 다시 정면으로 옮겨갔다.


“부담을 가지건 말건 그건 내 몫이니까 당신은 당신 할 일이나 해요.”

“내 할 일 뭐요, 내가 뭘 못하는데.”

“하나하나 말 해줘요?”

“해봐요, 해봐.”

“.....”

“왜 못해요? 해보라니까?”


꼭 할 말 없는 사람들이 말로 해야 하냐는 소리 하더라.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김종현을 따라 시선을 옮긴 나는 곧 대답 대신 나를 바라보다 이내 벗어 두었던 재킷을 집어 드는 꼴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입술을 사선으로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할 말 없으면서 센 척은.


“갑시다.”

“어딜요?”

“데려다 달라고 한 사람 나였습니까?”

“진짜 데려다주려구요?”

“가짜로 데려다줘도 되는 거였으면 지금이라도 혼자 가는 건 어때요.”


어중간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굳이 남길 필요는 없겠다 싶어 막 입으로 가져가던 찰나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대로 서둘러 입에 들어간 것만 머금은 채 손에 든 것을 재빨리 입에서 이별 시킨 나는 곧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비스듬히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택시 부를 줄 알죠.


“아, 진짜 인간이 뭐 이래요.”

“그러니까 사람 말을 왜 자꾸 의심하는데.”

“그거야...”

“내가 못 믿을 인간인 건 알겠지만, 이런 것까지 의심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그냥 해본 소리예요, 그냥.”

“그거 다 마시고 갈 겁니까?”


네, 다 마시고 갈거예요. 한 번을 안 져주는 인간이라는 눈빛도 잊지 않았다. 굳이 그 타이밍에 택시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것인지 대놓고 김종현을 노려보던 나는 아직 남은 우유를 입 안에 탈탈 털어 넣으며 이내 소리나게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는 곧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종현을 향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뭐가요.”

“생각보다 회사가 멀쩡해서요.”

“왜요, 진짜 유령 회사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시작하는 회사 중에 이렇게 변변한 사무실 있는 곳이 별로 없으니까요.”


나 처음 연기하자고 데리고 갔던 아카데미도 반지하였어요. 직원이 한 명도 없이 텅 빈 사무실을 가로질러 걸으며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에 살짝 고개만 돌려 나를 힐끗거린 김종현이 곧 엘리베이터의 하강 버튼을 누르며 먼저 멈춰 섰다.


“내가 나쁜 인간이긴 하지만 예의는 있습니다.”

“그게 무슨 술은 마셨지만 음주 운전은 아니다 같은 소리예요?”

“최소한 내가 해야 할 일은 한다는 소리예요.”

“.....”

“당신같은 사람 데리고 오면서 이 정도 사무실도 준비 안 할 만큼은 아니라 이말입니다.”

“.....”


물론, 당신이 원래 있던 회사들에 비하면 예의 축에도 못 끼겠지만. 엘리베이터에 비치는 얼굴을 대신 마주하며 가만히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나는 때마침 도착해 쩌억 배를 가르는 것 안으로 먼저 들어서는 김종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당신은 당신 할 일만 해요.”

“.....”

“최민기답게 살아요.”

“.....”

“자기 예쁘고 잘생긴 거 너무 잘 알아서 재수 없는데도 당신이 꼭 필요해서 쓰지 않으면 안 됐던 그때처럼.”

“.....”

“겸손은 내가 합니다.”

“.....”


내 예의가 헛된 일이 되지 않게. 나를 보지도 않고 한 발 앞에 선 채로 중얼거리는 김종현의 말에 대꾸하려던 입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그대로 막혀버렸다. 그리고 찾아온 침묵은 순식간에 공간을 점령한다. 할 말이 끝난 사람과,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사람의 의미없는 숨소리만 지루하게 이어지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한 육중한 기계가 얼음의 땡을 외쳤다.


“뭐해요, 안 내려요?”

“.....”

“최민기씨.”

“내려요.”


그 속에서 여전히 얼음 상태였던 나는 이내 먼저 걸음을 옮기다 곧 뒤따라 나오는 발걸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돌아서며 닫히려는 문을 서둘러 손으로 붙잡아 세우는 김종현을 빤하게 응시했다.


“왜요, 내가 또 뭐 실수했습니까?”

“그건 아니고...”

“.....”

“그냥 좀 쪽팔려서요.”

“.....”


차 어디 있어요? 마지막 말과 함께 덧붙인 말에 나를 바라보던 김종현이 어디라는 대꾸 대신 손에 들린 것을 꾹 눌렀다. 그 신호와 함께 바로 옆에서 번쩍거리는 것을 확인한 나는 이내 운전석에 올라타는 김종현보다 먼저 조수석에 올라탔다.


“안 물어봐요?”

“뭘요.”

“뭐가 쪽팔리는지. 보통은 물어봐야 하는 순서잖아요.”

“잠깐 생각 좀 했습니다.”

“.....”

“한두 개가 아닌 것 같아서.”


그 중 어떤 게 쪽팔리는 건지 생각 좀 하느라 미처 물을 타이밍을 놓쳤다는 말을 잘도 평범한 얼굴로 하는 김종현을 가만히 노려보던 나는 곧 이내 입술을 삐죽이며 시동을 거는 김종현의 손과 동시에 팔을 옆으로 돌려 안전벨트를 주욱 잡아 뺐다.


“의자 불편하면 맞춰요, 당신한테.”

“됐어요, 어차피 또 누가 타면 바꿀 텐데.”

“맞춰요. 당신 말고 탈 사람 없으니까.”

“....”


굳이 티를 내려고 한 것은 아닌데 앞뒤 간격이 제법 좁다는 느낌은 있었다. 그것에 반사적으로 다리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앉았던 나는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대로 고개를 돌려 막 핸들을 돌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김종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면 겁나는 거 알아요?”

“왜 겁이 나요?”

“이번엔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그럴까.”

“참나, 나 지금까지 그쪽한테 헛소리 한 번도 안 했거든요?”

“내가 그동안 들은 말이 진심이라면 그게 더 문젠 거 같은데.”


됐어요, 내가 그쪽이랑 무슨 말을 해요. 어차피 논리를 들이밀어도 저만의 이론으로 사람 말 문 막을 게 뻔한 김종현과 실랑이를 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아서 말문을 닫고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이내 여전히 비스듬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놓여 있는 내 다리를 보고는 슬그머니 의자 옆으로 손을 움직였다.


“내가 너무 솔직했나 해서 쪽팔렸어요.”

“.....”

“그렇잖아요. 대놓고 나는 너한테 감길 수도 있으니 사람 헷갈리지 말라고 한 거니까.”

“.....”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혼자 떡보고 군침 뚝뚝 흘린 걸 너무 내 입으로 말한 것 같아서 괜히 쪽팔려서요.”

“.....”


내 손에 이리저리 맞춰진 의자에 앉은 다리가 곧 편히 반듯하게 놓였다. 덕분에 편해진 자세로 앉은 나는 이내 차가 완전히 큰 도로로 빠져나오자마자 느리게 끝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원래 대본은 기막히게 외우는데 말은 잘 못 해요.”

“.....”

“정확히는 꾸며서 하는 말.”

“.....”

“그쪽처럼 나 듣기 좋은 소리로 사람 착각하게 만드는 것 같은 건 더더욱 못하고.”

“.....”

“그래서 매번 나는 손해를 봐요. 내가 내는 패는 늘 내 약점이라서.”


운전에 집중해서는 아니었다. 얼마든지 내게 돌아올 수 있는 시선이었지만 김종현은 오롯이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의 시선은 주말 오후 어느 시간, 그런 것치고는 잘 뚫리는 강남대로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보고 있는 것의 끝을 의미 없이 붙잡으며 중얼거리던 나는 곧 신호에 걸려 멀어져 가는 차 안에서 멀어져 가는 앞차의 꽁무니가 눈앞에서 흐리게 사라지자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계절을 담은 바로 옆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식으로 솔직하고 쪽팔리게 결론을 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

“우아하게 상대를 이기는 법을 나는 몰라요.”

“.....”

“이겨본 적이 없어서.”

“.....”

“그래서 쪽팔렸어요. 사람 기분 좋게 만들면서 자기 멋있는 소리 하는 김종현씨 말 들으니까.”


내가 쪽팔린 이유는 거기까지였다고, 그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고개를 돌린 나는 당연히 나를 보지 않고 있을거라 생각했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것에 놀라 반사적으로 살짝 상체를 뒤로 뺐다. 사거리의 신호는 쉽게 바뀔 생각이 없었다. 아직은 한 번 더 기다리라는 듯 붉은 색으로 번쩍이는 것을 앞에 둔 채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에 괜히 머쓱해 먼저 고개를 돌려버린 나는 이내 지루했던 신호가 드디어 바뀐 것에 유난스럽게 반응했다. 어, 신호!


“아, 그렇다고 내가 그쪽을 멋있게 봤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 하지 말구요.”

“오해는 최민기씨가 한 것 같은데.”

“...네?”

“나 누구 기분 좋게 만들자고 없는 말 하는 사람 아니에요.”

“....”

“그런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당신이랑 그렇게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고.”


바뀐 신호에 별말 없이 시선을 옮겨 운전을 하는 김종현과 혼자만의 어색한 침묵을 이어가던 나는 순간 퍼뜩 스치는 생각에 반드시 해야 할 말을 이어붙였다. 그 말에 내내 대꾸 없이 듣기만 하던 김종현의 입이 이번엔 지체없이 열렸다. 농담을 말하지 않는 입은 이번에도 단조롭게 제 할 말을 뱉어냈지만, 듣는 나의 귀는 필사적으로 그 음성을 담았다.


“최민기씨 예뻐요.”

“.....”

“잘생겼고.”

“.....”

“난 당신이 그런 최민기처럼 살길 바라는 거예요. 그게 사실이니까.”

“.....”


예쁘다, 잘생겼다, 아름답다, 최고다라는 소리는 단 한 번도 지겨운 적이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훨씬 더 치러야 할 대가가 없는 말은 그저 내가 잘 듣기만 하면 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대가 없는 그 말들이 가장 먼저, 빛을 잃고 벼랑 끝에 선 나를 멀어졌다. 나를 둘러싼 나는 한 번도 변명조차 해보지 못했던 것들에 막혀 나를 떠나가 버렸던 그 말은 곧 자존감이라는 간단한 한 글자가 되어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반짝거릴 때가 있긴 했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박살이 난 채 얼룩진 것은 사랑 받지 못한 채 그렇게 어느 한 구석에 처박혀있었다.


“최민기씨가 쪽팔릴 건 멋대로 내 감정을 다정으로 오해한 게 아니라.”

“.....”

“내 앞에서조차 겁을 내는 겁니다.”

“.....”

“난 적어도 당신이 내 앞에서만큼은 재수 없을 정도로 뻔뻔했으면 좋겠어요.”

“.....”

“그래야 내 겸손이, 자만보다 더 강해질 테니까.”


그렇게 처박아두었던 것을 제멋대로 끄집어내 내 앞에 내려 놓고 여전히 내게 손을 뻗고 있는 김종현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던 나는 곧 익숙한 골목에 멈춰 서는 것에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놓으며 곧 그대로 시동을 끄는 김종현을 바라보았다.


“자신 있어요?”

“네.”

“뭔지 듣지도 않고?”

“당신이랑 관련된 일은 뭐든요. 나는 뭐든 다 할 겁니다. 당신이 내 배우가 된 이상.”

“.....”

“그러니까 당신은 최민기이기만 해요. 그거면 돼요.”


내가 진짜 마음먹고 예쁘고 잘생겨지면 감당 안 될 텐데 괜찮겠냐 물으려 했다. 가벼운 농담 같은 소망을 뱉어내며 괜찮겠다 대답을 할 김종현을 보며 나는 어쩌면 그냥 비웃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너 나 절대 감당 못 할 거라고, 그러니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을 거라고 고작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느냐고, 나는 절대 최선을 다하지 않을 거라고 가볍게 조소하려던 나는 그러나 그보다 먼저 단호하게 쏟아지는 대답에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못됐다, 진짜.”

“내가요?”

“그럼 나겠어요? 당신 같은 사람하고 같이 살겠다고 마음까지 먹은 착한 내가?”

“..같이 살겠다고 찾아 온 사람 나 아니고 그쪽인데.”

“알아요, 아니까 사람 헷갈리게 좀 하지마요.”


그러다 문득 치밀어 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에 그대로 눈을 흘기며 입술을 삐죽인 나는 곧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구겨지는 미간을 노려보다 이내 벨트를 풀어내며 그대로 조수석 문을 열고 멈춘 차에서 내려섰다.


“내가 뭘 헷갈리게 했는데요.”

“아, 몰라요.”

“.....”

“배고프니까 밥이나 먹어요, 야채곱창.”

“.....”


따라 내리는 김종현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선 나는 마당을 가로 질러 이내 닫힌 현관문의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던 나는, 내내 따라붙던 걸음 소리가 없는 것에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왜 안 들어와요?”

“....”

“야채 곱창 시키면 돼요. 잘하는 집 있어요.”

“곱창은 나중에.”

“아, 왜요. 나 먹고 싶은데.”

“그럼 혼자 먹어요, 나는 다시 가봐야 해요.”


가긴 어딜 가요? 고개만 돌아갔던 김종현을 향해 완전히 돌아선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같이 살자고 잡으러 가기까지 했더니 다시 간다고? 무슨 이런 법이 있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김종현을 똑바로 바라본 나는 곧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보며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는 얼굴을 향해 그대로 얼굴을 구겼다.


“같이 살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같이 살 땐 살더라도 일은 해야 하잖아요.”

“무슨 일이요?”

“내가 당신 일 말고 무슨 일을 하겠어요.”

“.....”

“그리고 당장 갈아입을 옷 정도는 챙겨오게 해주죠.”


나 지금 너무 무방비 상태로 끌려온 것 같은데. 토를 달 수 없는 명확한 이유에 김종현을 향해 잔뜩 불만을 품고 있던 얼굴을 천천히 풀며 나는 곧 뭐 그럼 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번 들썩였다.


“아니 그래도 야채 곱창은 먹고 가지 그래요? 밥은 먹어야 하잖아요.”

“미팅이 있어요. 지금 이미 늦었고.”

“나 되게 대단하게 복귀 시키려나 봐요.”

“부담가지지 말라더니 되게 부담 주네.”

“가지고 싶다고 한 건 그쪽이니까.”


그건 맞다는 듯 이내 살짝 웃어버리는 김종현을 보며 순간 눈이 커졌던 나는 곧 제가 웃은 것을 전혀 모르는 듯 금세 여상하게 바뀐 얼굴로 나를 향해 시선을 옮기는 것에 이내 서둘러 덩달아 표정을 바꾸었다.


“나 늦었어요.”

“알았어요, 가요. 가.”

“.....”

“가라니까요.”


붙잡지 않을 테니까 어서 가라는 듯 고갯짓을 한 나는 다시 한번 시계를 보고 그대로 돌아서는 김종현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김종현과 반대인 집 안으로 몸을 돌려 섰다.


“금방 올게요.”

“......”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 나는 집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복도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돌아섰다. 완전히 대문을 나서기 전 나를 향해 돌아선 채 인사를 한 김종현은 돌아선 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밥 맛있게 먹어요.”

“....”


그리고 다시 돌아서는 김종현을 향해 이번엔 내가 말을 이었다.


“김종현씨.”

“.....”

“그런 게 못된 거예요.”

“.....”


고작 일 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얼룩져버린 최민기라는 내 이름을 다시 반짝거리게 하기엔 너무나 부족한 시간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고 실패해버리면, 더 비참해질까 봐.


“그럼 내가 기다리게 되잖아.”

“.....”

“당신이 언제 올까, 계속 기다리고 싶잖아.”

“.....”

“그럼 자꾸 그쪽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내가.”

“.....”


그런데 마음은 달랐다. 마음에게 일 년은 너무나도 길고 지루하고 많은 기회가 있는 시간이었다. 미웠던 사람이 예뻐질 수도, 싫었던 사람이 좋아질 수도 있는 아주 길고 충분한 시간이 갑자기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나쁜 사람이라는 김종현을 사랑하게 되어버릴 수도 있는 시간이.


“올게요가 아니라.”

“.....”

“‘갈게요라고 해야 해요, 이럴 때는.”

“.....”


그래서 나는 그 길고 긴 마음의 일 년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절대, 다시는 상처 받지 않도록. 

절대, 다시는 사랑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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