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설이 눈을 깜빡였다.


"네? 우리 교 망했어요?"


영인은 검을 뽑았다. 칼끝이 막 검집을 벗어나기 직전 유설이 덧붙였다.


"농담이에요. 알고 있었어요. 바보도 아니고, 제가 그걸 모르겠어요?"


마영, 혹은 교영은 천마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무공이 강하다고 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자연스레 유설 역시 남다른 판단력과 정보력, 지성과 실행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었다. 한 달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주앉아 말을 섞는 지금은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정말 유설이 강하기만 한 머저리라면, 영인을 찾지도 못했을 것이다. 영인은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잡설이 길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너희는 졌다. 내게 필요한 것들을 줄 수 있나?"


천마는 깊은 상처를 안고 도망쳤다. 사마영 중 하나는 목이 날아가 죽었다. 실전에 나설 수 있는 무인도 삼 할 가까이 잃었다. 무력집단으로서의 마교는 반쯤 시체였다. 유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지기반 없는 고수는 팔 하나를 떼놓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설의 목소리는 당당했다.


"당연히 있죠."


확신이 넘쳐흘러 오만해 보일 정도였다.


"어떻게?"

"우리는 잡초니까."


유설이 입을 가리고 키득 웃었다.


"혹독한 겨울이 와도 잡초는 끝내 살아남아요. 잎과 줄기가 뜯겨나가도 뿌리는 질기게 남죠. 온갖 곳에 섞여 있고."

"이번에 죽은 이들도, 잎과 줄기일 뿐이다?"


유들유들하던 미소가 잠시 흐려졌다. 


"그렇게 말하는 건 조금 잔인한 것 같네요……."


부담스러울 정도로 똑바로 와 닿던 유설의 시선이 살짝 어긋났다. 마음을 읽히기 싫다는 것일까. 영인은 굳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널리 퍼져 있고, 드러나지 않은 사람도 많아요. 휘두를 창칼은 부족해도 귀는 밝지요. 영인 언니는……."


영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눈매가 매서워진 만큼 칼날도 칼집에서 한 뼘 더 빠져나왔다. 분명히 알았을 텐데 유설은 자신의 묘도(苗刀)에 손을 대는 대신 영인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똑똑하고, 끈질기고, 강하지만, 귀는 어두우시잖아요?"


그녀의 시선이 잠시 탁자 위에 머물렀다. 마른 육포에 멀건 국물. 풍족한 식사는 아니었다.


"지갑도 얇으시고."


모든 일에는 돈이 든다. 마교를 토벌하고 악인을 징벌하여 협의를 세우는 데까지도. 


"제가, 저희가 귀가 되고 지갑이 되어드릴 수 있어요."

"……그런가."

"네. 제 옷 한 번 만져 보실래요? 이것도 꽤 비싼 건데."


유설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표정으로 말하는 법을 익힌 것처럼 속마음이 선명하게 비쳤다.


영인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필요 없어."

"그러지 말고 한 번 만져 봐요. 감촉 되게 좋으니까."

"아니."


그 옷이 아니라.


"너희 도움이 필요 없다고."

"네?"

"네 말대로, 나는 지갑도 없고 귀도 없다. 너와 손을 잡으면 곧바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지.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잖나?"


여기서 유설의 손을 잡으면, 그 모든 것이 빚이 된다. 유설은 영인에게 많은 걸 줄 수 있지만, 영인은 유설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


"뭘 요구할지는 모르겠지만, 유쾌한 거리가 되진 않을 것 같군."


그러니 받지 않을 것이다.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뿐이고, 그 하나에게 받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 쟁취하면 된다. 남궁가의 방계로서, 남자인 척 연기했던 여자로서 영인은 그렇게 살아왔다.


영인은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서 반가웠다. 아마 다음에 만날 땐 적이겠지."


가문에서 쫓겨났어도 영인은 정파의 검사이고, 교가 반쯤 무너졌어도 영인은 마교의 기둥이었으므로.


"잠깐만, 아직 내가 뭘 원하는지도 안 들었잖아요? 지금 그냥 가면 평생 쫓아다니면서 방해할 거야."

"……끈질기긴. 그래. 들어나 볼까. 대가로 원하는 게 뭐지?"


유설이 눈을 번뜩였다.


"언니 마음."

"뭐?"

"언니 여자 좋아하잖아. 나도 여자 좋아해요. 많이 좋아해. 경험도 많고요. 후회 안하게 할 자신 있는데."


영인은 후회했다. 무시하고 갈걸.


그리고 후회는 빠를수록 좋은 법이었다. 그만큼 빨리 고칠 수 있으니까. 영인은 못 들은 척 유설을 내버려두고 떠났다. 등 뒤에 날 선 전음(傳音)이 꽂혔다.


[후회하지 마요. 다음엔 오늘처럼 달콤한 제안은 없을 거니까.]



* * *



한 달 반 뒤, 유설은 다시 한번 영인을 찾았다. 꽤 힘들었다. 그녀는 그림자처럼 움직였고 좀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유설이 영인과 견줄 만한 고수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영인을 따라잡지 못했다면 아예 찾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적잖은 수고 끝에 만난 영인은 휘장 뒤에 숨어 있었다. 보이는 것은 뼈대 단단한 다리뿐이었다. 유설은 물끄러미 휘장에 비치는 영인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영인이 어깨를 조금씩 떨며 웃었다.


"뭐라고 했더라……. 한 달 전처럼 달콤한 제안은 없을 거라고 했던가."

"……그랬죠."

"그럼 어디 들어나 볼까. 이번엔 무슨 제안이 하고 싶어 찾아왔지?"


여전히 반쯤 망한 종교의 기둥인 유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턱을 살짝 든 채 채 그녀를 내려다보며, 한 달 반 만에 항주(杭州) 사파의 지배자가 된 영인은 비뚜름하게 웃었다.




사실 안 끝났어요. 원래 3부작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4부작이 됐네요..... 完 편에서 뵙겠습니다... 뾰로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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