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첨으로 오인받는 걸 피하려 일부러 대마법사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것도 이상한 꼴이 되지 않을까? 정말로 대단한 건 사실이니 말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자신이 너무 호들갑을 떠는 걸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로라는 신중히 말을 고르며 대답을 부연했다.

"물론 위대한 마법사이며 모든 지성체의 스승이신 대현자-라고 불리는 공작님께서 하신 일이니 당연히 대단하겠지만요. 그렇지만 저도, 비록 보잘 것 없는 마법사이지만 그래도 의지도 없는 물건에 그렇게 오래도록 일정한 마력이 흐르게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아니까요."

작은 오두막도 아니고 그 커다란 건물 전체에 마법을 걸어두었으니 과연 대마법사가 아니라면 행할 수 없을 이적이었다.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사물에 마법의 흔적이 남아있으려거든 고목에 떨어진 벼락만큼이나 커다란 사건이 있어서 그 충격이 물건에 남아있는 경우거나 아니면 마법사가 계속해서 유지를 하는 경우 뿐이었다. 로라가 알기로 도서관에서 역사에 몇 남지 않을 커다란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으니 이것은 마법사가 보기에도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작은 로라의 상찬에 큰일은 아니라는 듯 겸양을 보였다.

"사실 종종 들러서 유지 보수를 하고 있습니다. 끝없이 갈고닦지 않으면 금방 티가 나는 편이니까요."

"그런 줄은 몰랐어요. 저에겐 아득히 높으신 분인데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애쓰시니 그 성실함을 본받고 싶네요."

"타인의 장점을 쉽게 찾고 시기심 없이 받아들이는 데다가 그걸 당사자에게 돌려주기까지 하는 것이야 말로 쉽게 갖기 힘든 장점입니다."

로라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서 그게 자기를 두고 한 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렇게까지 이야기 해주다니 황송할 지경이었다. 로라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길을 찾지 못하다가 문득 지난번 만남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들이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두 번째인 것도 아니었다. 그날 남 있었던 도서관에서의 만남 이후 두 번째 만남은 그로홀름 대저택에 갔던 날에 있었다. 로라의 아가씨가 쓰러진 바로 그날.

로라는 그날 이 백색 저택까지 찾아왔었다. 꽃을 파는 아이에게, 오물을 버리러 나온 아낙에게 공작 저택이 있는 방향을 물어물어 도착한 저택에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러다 우연히 그때 밖으로 나갈 일이 있던 집사장과 마주쳤었다. 오늘처럼 마중을 나온 것은 아니고 외출을 나가던 길이었다. 그가 어린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말투로, 그러나 의미심장한 뉘앙스로 말했다. 

"도서관으로 가보세요. 전시실에 가보면 기대하던 걸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건 그냥 유명인을 보고 싶어 하는 젊은이에게 전시품 구경이라도 하라는 것도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것 뿐인 것 같지는 않았다. 로라는 자기 생각을 의심하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사장의 말대로, 기대하던 걸 얻었다. 새하얀 옷을 입은 은발의 소년이 마치 약속 상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전시실에 있었던 것이다. 

릴리의 상태는 외부인에게 알려서 좋을 게 없었고 무엇보다 문외한에게 조언을 얻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하지만 동부는 너무 멀었다. 기댈 곳 없던 로라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사실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였다. 믿을 수 있는 신분에 마법에 관한 지식도 갖추고 있는 이와 상담할 수 있었던 건 로라에게 퍽 큰 위안이 되었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면 공작과 이전에 두 번이나 만났다는 걸 릴리에게 말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처음을 말할 수 없는데 어떻게 두 번째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친절한 공작님 덕분에 로라는 원하는 걸 얻었다. 어려울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이가 있다는 안도감 말이다. 그 순간 로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로라는 자신에게 베풀어진 대단한 이의 온정이 과분하다 여겼다. 사람이라면 온당히 그리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래서 로라는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저어…… 전에 하신 말씀 말인데요."

"벌써 결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로라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은발의 소년이 그리 말하며 빙긋 웃어 보였다.

"모든 일에는 다 시기가 있게 마련이고 아시다시피 저에겐 시간이 많으니까요. 적어도 당신을 기다릴 만큼은 있지요."

이건 대답하지 말라는 뜻인가? 로라는 안심이 되면서도 묘하게 불편해졌다. 모든 게 로라에게는 너무 과분한 것 같았다. 좋았지만, 좋으면서도 꺼려졌다. 너무 좋은 일이 생기면 그 보복으로 나쁜 일도 따라올 것 같은 불안한 기분이 드는 탓이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는 좋은 일은 소소한 수준이어야지 이렇게 큰 호의와 기대는 로라에게 너무 낯설고 이상한 것이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저런 사람인데……. 

로라가 흘깃 시선을 들어 공작의 모습을 보았다. 로라의 심경과는 별개로, 섬세한 모양을 한 찻잔을 든 채 태연하게 아름다운 공작은 충분히 손님을 대접하며 주인의 역할을 다했다. 로라 혼자 안절부절못했을 뿐이지 객관적으로 보자면 내내 분위기는 편하고 부드러웠다. 공작이 그러길 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로라는 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을 들인다는 게 어색하기만 했다.

로라가 내심 어색해서 삐걱거릴지라도 공작은 훌륭한 손님 접대를 보였다. 차를 마신 뒤엔 공작이 마차를 내주었다. 물론 저택을 나가는 길도 공작이 함께했다. 저택에서 나가기 직전에 공작이 시선을 주자 집사가 뒤에 있던 시종에게 물건을 건네받아 공작에게 건네었다.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시종이 가지고 나와 있었던 걸 보면 미리 얘기를 한 것 같았다. 

꽃과 잎새 모양으로 테두리를 장식한 은쟁반에 놓인 작은 상자를 공작의 단정한 흰 손이 들어 올렸다. 매끄러운 미성이 뒤따랐다.

"따로 지내시는 곳에 선물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 편이 나을 겁니다. 부디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시길."

그러더니 뚜껑을 열어 로라에게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하긴 무려 그 공작님께서 사소하게라도 선물을 보냈다는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보통 큰일은 아닐 터였다. 당사자인 로라에게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니 말이다. 로라가 상자 안의 내용물을 보았다. 반짝거렸다. 반짝이는 자태의 배경으로 통랑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물건인지는 아시게 될 테니 설명해 드리진 않겠습니다."

로라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물론 장신구라는 거야 눈으로 보니 알겠지만 그게 어떤 물건인지에 대한 설명이 되는 건 아니었다. 로라는 잠시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공작을 힐끗 보았지만 의도를 유추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만 공작이 상자를 열어 보여주는 것마저 완벽하게 우아한 동작으로 해내는 비현실적인 조형이라는 것만 새삼 느꼈을 뿐이었다. 로라는 시선을 되돌려 다시 상자 속에 놓인 걸 보았다. 

곱게 놓인 장신구는 붉은 보석과 금으로 만든 목걸이였다. 루비는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 특별한 게 있더라도 눈으로 봐서야 알 수 있을 리 없지마는 로라는 가구에 숨겨진 비밀 공간을 찾아낼 때처럼 상자에 잘 놓인 목걸이를 유심히 보았다. 문득 빛깔이 검고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작은 진주가 장식되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유색 진주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긴 했지만 결벽적일 정도로 흰빛으로 몸을 휘감을 은발의 공작이 갖고 있다기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누가 뭐라 해도 이런 물건은 사람들 사이에 상급품으로 취급받지 않는 종류였다. 선물이라도 이런 건 보내지 않을 텐데 모든 걸 최고로만 누릴 수 있을 공작이 어쩌다 이런 물건을 갖게 되었을까? 

로라는 작은 부분에서 시선을 돌려 좀 더 눈에 띄는 요소를 살폈다. 붉은 광물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보석 종류는 아니었다. 보석 보다는 준보석 정도 되는 종류 같았다. 유색 수정일까? 이전에 비슷한 걸 본 것도 같았다. 그렇게 자세히 보고 있자니 금빛 줄 위에 물방울 모양으로 깎은 붉은 보석들이 점점이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처럼 보였다. 이상하게 두려우면서도 아름답고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사로잡힐 것 같은 느낌에 로라가 겨우 시선을 떼어내었을 때 마주한 건 그런 로라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공작의 유백색 보석 같은 은빛 눈동자였다. 로라는 불에 닿은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공작은 목걸이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방금 상황에 대해 별다른 얘기 없이 매끄러운 동작으로 목걸이가 든 상자를 닫아 로라에게 건넸다. 

로라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작은 상자를 받아들었다. 이 목걸이도 공작의 호의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나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이 정도 되는 인물에게는 거절도 만용 없이 꺼내기 어려운 법이다.

공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저택을 안내 받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 뒤 돌아가는 길에는 뜻하지 않게 선물도 받았다. 꿈이라면 중간에 소스라쳐 놀라 깨었을 테니 꿈은 아닌 게 분명했다.

로라는 공작이 내어준 새하얀 마차에 앉아서 누구에게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일을 겪었다는 걸 천천히 소화했다. 네 마리 말이 끄는 흰 마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로라가 혼자 타기에는 으리으리한 물건이었고 승차감도 아주 끝내줬기에 생각에 빠지기 좋았다. 물론 로라는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입에 들어간 거라곤 차 밖에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공작의 마차를 타고 이카트의 저택에 도착한 로라를 기다리는 건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이었다. 그야 저렇게 눈에 띠는 마차를 타고 왔으니 아니기도 힘든 일이었다. 공작이 준 선물이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는 거라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정말 곤란할 뻔했다.

로라는 사람들의 기대가 충분히 꺾일 정도로 조절해서 많은 것을 축약해 사정을 설명한 뒤 이 관심을 받아 마땅한 진짜 주인공들을 찾았다. 하지만 호기심으로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알아낸 건 별로 없었다. 필리엔과 함께 저택을 나간 릴리가 아직 저택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만 알게 된 게 소득의 전부였다. 로라는 별수 없이 사람들을 적당히 상대해 떼어내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가씨는 대체 언제 돌아오시는 거지?

로라는 잠시 닫힌 문을 등 뒤에 두고 서 있다가 문득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상자를 다시 꺼냈다. 하지만 열어보지는 않았다. 로라는 귀물을 품기 위해 만들어진 상자의 겉만을 보고 있다가 서랍을 열어 깊은 곳에 밀어 넣은 뒤 서랍을 닫았다. 아까는 핑계로 한 소리였지만 방에 들어오니 정말로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가씨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계신 거람.

로라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유도 없이 기운이 쭉 빠졌다.




자연스럽게 차림새를 단정히 한 대현자가 마치 이어지는 동작처럼 지극히 우아한 태도로 로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차라도 대접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손님을 그냥 보내는 건 아무리 저라고 해도 불명예이니 이 정도는 들어주시길."

릴리는 나긋하고 상냥하게 말한 대현자가 로라를 에스코트하는 걸 보며 감탄했다. 릴리가 선 방향에선 거의 뒷모습이라 얼굴까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흰색도 아니고 잿빛도 아닌 은발만큼은 제대로 보였다. 무수히 많은 이야기 속에서 찬미의 대상이던 대현자의 은발을 직접 영접해보니 과연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쁘긴 예쁘니까.

그때 쭈뼛대던 로라가 후드를 벗고 드러난 대현자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정면으로 홱 돌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릴리 쪽에서는 뒷모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수준 이상의 미인은 숨겨도 티가 나는 법이 아닌가. 게다가 로라는 어릴 때부터 예쁜 걸 좋아했고 취향이 확고했으니 말이다. 그런 로라의 시선을 잡다니 어지간한 미인이긴 한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힐끗 보았는데도 대마법사이자 제국의 유일한 공작인 남자는 역시 은의 귀공자라는 이명에 걸맞게 말 한마디 동작 하나에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새하얀 옷자락의 주름이나 움직일 때 한들거리는 것마저 숨 막히도록 우아했고 후드를 넘기는 손동작마저 느리고 섬세한 춤사위처럼 고상하기만 했다. 대현자의 축복을 받은 도시처럼 로라도 한동안 시각에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릴리는 아주 약간 반성했다. 대현자와는 급이 다르다고는 하나 자신도 로렌의 지배자가 될 몸인데 그동안 너무 격식 없이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게 사람이 지닐 수 있는 분위기이긴 한 걸까? 정적인 춤사위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는 귀공자의 모습은 다른 사람보단 강에 사는 날개가 크고 우아한 새와 비견해야 할 것 같았다. 릴리는 비교를 때려치우고 솔직하게 경탄했다. 

나가려던 것도 멈추고 로라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대현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릴리가 구경할 만큼 한 뒤에 고개를 돌리니 바로 필리엔과 눈이 마주쳤다. 눈치를 보니 아무래도 저택에 남은 두 사람을 보는 릴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뭘 저리 보고 있담.

"왜 그래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그냥 보는 게 아닌 것 같은 걸요."

그러자 필리엔이 조금 고민하는 것 같더니만 대답으로 말 대신 슬그머니 팔을 내밀었다. 릴리는 필리엔이 내민 손을 본 뒤에 깨달았다. 에스코트라는 걸 자신도 하겠다는 말이었군. 릴리도 중서부에 하루 이틀 있었던 게 아니어서 이런 것쯤은 벌써 배워뒀다. 릴리는 웃으며 필리엔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올렸다. 음, 완벽하다. 릴리가 속으로 자찬했다.

"갈까요?"

"좋아요."

필리엔은 물 흐르듯 우아한 귀공자와 비견되어 더욱 뻣뻣하게 보이는 동작으로 릴리와 함께 밖으로 향했다. 



-


릴리 너의 아기새가 널 찾고 있잖아.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니?의 어디서 뭘하는지가 이후 이어집니다.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