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작품의 내용과 설정은 허구이며, 특정 인물, 단체, 종교, 사건 또한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지금 배가 침몰 중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구명조끼를 입고 갑판 위로 나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연이은 방송에 기범과 민호가 얼어붙었다. 때마침 배가 기울면서 테이블 위에 있던 물컵과 전화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와장창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연출이나 훈련이 아니었다. 놀란 기범이 비명을 치르며 민호의 팔에 매달렸다.


 “이, 이거 뭐야?”

 “몰라. 대체 뭐가 뭔지…….”


 그때 다시 한번 배가 같은 방향으로 기울며 기범과 민호가 앉은 침대가 반대쪽 벽으로 미끄러져 부딪쳤다. 그 바람에 기범의 다친 오른쪽 발목이 충격을 받아 그가 고통 섞인 신음을 흘렸다. 민호가 놀라서 기범을 살폈지만, 기범은 고통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끙끙대는 기범을 보며 민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두방망이질 쳤다.


 문밖에서는 벌써 사람들이 대피를 시작했는지 발소리가 땅을 울렸고 비명이 귀청을 찢었다. 방송이 멈춘 스피커에서는 캡틴의 목소리 대신 윙윙 사이렌 소리가 긴박하게 울렸다. 기범이 다쳤고, 배가 침몰 중이라는 상황에 패닉에 빠졌던 민호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구명조끼!”


 민호는 벌떡 일어나 엉망이 된 방을 뒤졌다. 두 개의 구명조끼를 찾아낸 민호는 기범에게 먼저 입히고 나서 자기도 조끼를 입었다. 그리고 방 문을 바라봤지만, 막상 밖으로 나가려니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문 너머의 공포가 얼마나 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기범이 민호의 손을 잡아 왔다.


 “민호야.”

 “너 발목…….”


 압박붕대를 감은 기범의 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인상을 쓰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긴 민호는 자세를 낮추고 기범에게 등을 보였다.


 “업혀.”

 “말도 안 돼. 너 먼저 나가!”

 “그냥 업혀, 김기범!”


 소리치는 민호의 목소리에 기범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언성을 높이는 최민호는 낯설었다. 천성이 다정하게 나서 기범에게는 언제나 듣기 좋은 목소리만 들려주었던 게 최민호였다. 화가 나도 기범에게만은 소리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이명처럼 기범의 귓가에 윙윙 울렸다. 그 어떤 사이렌보다 위협적이었다.


 한참 반응이 없는 기범을 기다리다 민호가 뒤를 돌아봤다. 기범을 바라보는 눈빛이 올곧고 강했으며, 간절했다. 그제야 기범은 입술을 꾹 물고 민호의 목에 팔을 감아 그의 등에 매달렸다. 단단한 등에서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민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기범의 무게와 기울어진 배 때문에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다. 비틀거리며 문 앞에 다다른 민호가 더 늦기 전에 문을 열어젖혔다.


 마치 TV에서 나오듯 웅웅거리던 비명과 발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선명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구명조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일제히 복도에서 갑판 쪽으로 내달렸다. 그중에는 군중의 발에 밟혀 이미 숨이 끊긴 듯 바닥에서 꼼짝하지 않는 사람도 간간이 보였고, 부모의 손을 놓친 어린아이가 사람들의 발길질을 피해 구석에 숨어 우는 것도 보였다. 문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기범은 저도 모르게 민호의 목을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 긴장을 느낀 민호도 이를 악물었다. 저기에 깔려 죽든, 바다에 빠져 죽든, 매한가지였다.


 “간다.”


 민호의 목소리에 기범이 더욱 단단하게 그의 등에 매달렸다. 민호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그대로 숨도 쉬지 않고 갑판 쪽으로 내달렸다. 군중의 속도보다 민호의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민호는 기범을 놓치지 않으려 팔에 잔뜩 힘을 주고 달렸다.


 갑판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더 아수라장이었다. 수많은 방에서 몰린 사람들이 좁은 계단에 끼어있었다. 그 위를 밟고 올라선 사람들이 계단을 기어 올라가는, 그야말로 살기 위한 지옥의 모습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밟고, 그 사람을 다른 사람이 또 밟고 올라갔다. 계단 난간에 선 직원이 한 사람씩 올라가라고 소리쳤지만, 무리의 비명에 무참히 묻히고 말았다. 민호 혼자면 가능할 텐데 기범을 업은 상태에서 저 계단을 오르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민호가 방향을 바꿔 다른 계단을 찾았지만 거기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올라갈 수 있겠어?”


 등에서 걱정이 가득 담긴 기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계단만 올라가면 하늘이 훤히 보이는 갑판인데, 코앞에 두고 발이 묶였다. 젠장. 민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그냥 여기서는 나 내려두고, 너 먼저 올라가. 응?”

 “그럼 넌 어떻게 올라갈 건데.”

 “나야 무슨 수가 있겠…….”

 “네가 여길 어떻게 올라가냐고!”


 민호의 외침에 기범은 그저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예상컨대 이미 배 바닥은 들이친 바닷물로 엉망일 터였다. 배의 어디까지 잠겼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마지막에 올라간다면 이미 때가 늦은 뒤일 수도 있었다.


 그때 기범의 몸이 얼어붙었다. 배 위에서 마치 천둥이라도 치듯 쿠구궁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기범은 천둥소리에 공포증이 있었다. 소리를 들은 민호도 기범의 긴장을 눈치채고 발을 굴렀다. 아마도 구조헬기가 온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더 다급하게 계단 위로 치고 올라갔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김기범, 내가 지금부터 저길 뚫고 올라갈 건데, 아마 널 업은 손을 풀어야 할 거야.”

 “응.”

 “죽기 싫으면 단단히 붙들고 있어. 내 목이 조여도 우린 살아서 나갈 거니까.”

 “알겠어.”


 대답을 증명이라도 하듯 기범이 민호에게 매달린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잘했어. 덧붙인 민호는 재빠르게 군중 속을 파고들었다.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부딪치기 시작하자 민호의 목과 허리를 감싼 기범의 팔다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민호는 양손으로 사람들과 틈을 만들어 비집고 들어갔다. 등에 매달린 기범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방법뿐이었다. 한 사람씩 올라가라는 직원의 외침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직원이 서 있던 위치를 계산해볼 때, 계단 중간쯤 올라온 모양이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민호는 이를 악물고 사력을 다해 계단을 올랐다. 금장과 붉은 벨벳으로 장식된 계단이 살기 위한 동아줄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게 썩은 동아줄이래도 지금은 잡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올라가는 게 쉬워졌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막힌 수도가 뚫리듯 계단목에서 갑판 위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곳에 민호와 기범도 있었다. 갑판 위는 기울어진 배 때문에 수영장 물이 넘쳐 온통 물바다였다. 신발을 적시는 질척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갑판 위로 막 올라온 사람들의 표정만은 밝았다.


 살았다! 안도감에 먼저 민호의 등에서 기범이 내렸다. 민호도 긴장이 풀려 무릎을 잡고 상체를 웅크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기범은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미안하고 고마워서 차마 할 말이 없었다. 괜찮아, 우리는 살았어. 두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 무렵이었다.


 가장 먼저 감각을 사로잡은 건 천지를 진동하는 헬기 소리였다. 도대체 몇 대가 있는지 귀로는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서운 소리였다. 천둥보다 더한 소리. 기범은 살을 에는 공포에 귀를 틀어막았다.


 그 헬기가 붉은색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그다음이었다. 시커먼 헬기가 배 주변의 상공을 휘감고 있었다. 천천히 문이 열린 헬기에서 검은 물체가 움직였다. 민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것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곧 무장한 사람들이 기관총을 든 채 배 쪽을 노렸다. 그들은 셀 수 없이 많은 헬기에서 각각 문 앞으로 나와 배를 향해 총을 조준했다. 금방이라도 격발하려는 듯 잘 훈련된 모습에 민호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눈을 뗄 수 없는 모습에 민호는 옆을, 허공을 더듬어 기범을 찾았다.


 “기, 기범아. 저기…….”


 눈을 꼭 감은 채 귀를 틀어막고 있던 기범이 민호의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헬기 날개로 인한 거센 바람이 두 사람을 덮쳐왔다. 휘날리는 바람에 눈도 제대로 못 뜬 기범이 하늘을 바라보고 경악했다. 저, 저게 대체 뭐야. 기범은 우레와 같은 헬기 소리도 잊은 채 넋을 놓았다. 두 사람의 뒤를 이어 계단을 오른 사람들도 갑판 여기저기로 흩어지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추고 하늘만 멍하니 바라봤다. 아무래도 잡았던 동아줄이 제대로 썩은 동아줄이었던 모양이다.


 계단 입구가 토해내듯 사람들을 뱉어내고 있었고, 그들은 갑판 곳곳으로 흩어지다가 하늘을 보고 멈추었다. 계속 같은 그림의 반복이었다. 어느덧 갑판 위가 인파로 시커메질 때까지 헬기 속 총구는 침착하게 배를 겨누고 있었다.


 그때 뱃머리 쪽 헬기에서 까만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구경이라도 하듯 아래를 한번 훑어보더니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그걸 본 민호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저건 신호다. 남자가 팔을 내림과 동시에 민호가 기범의 머리를 감싸며 수영장 구조물 뒤로 몸을 던졌다. 이어 총이 격발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이 들린 건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투두두두두-!


 기관총이 맹렬하게 뱉어낸 총알이 배 위로 쏟아졌다. 마치 비처럼 구석구석 꼼꼼하게 피로 적셔갔다. 신음과 비명이 난무했고 도망치는 발소리와 총소리가 뒤엉켜 고막을 찢어낼 듯했다. 아무렇게나 난사하는 것 같았지만 쏟아진 총알은 정확하게 사람을 저격하고 있었다. 민호는 구조물 뒤에 숨어서 사람을 쏘고, 바닥을 빗맞히는 총알 세례를 볼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는 사람들이 추풍낙엽처럼 힘없이 쓰러져나갔다. 그중에는 민호와 기범처럼 구조물 뒤로 피신해가는 사람도 몇 보였다. 피가 튀고, 총알이 튀었다. 민호는 품속에서 바들바들 떠는 기범을 내려다봤다.


 “기범아,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그러나 우레와 같은 소음, 비현실적인 상황에 정신을 놓아버린 기범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민호는 기범을 떼어놓고 아까 올라왔던 계단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그를 노린 총알이 그의 발치, 바닥에 빗맞았다. 시발! 속으로 욕을 삼킨 민호는 풀릴뻔한 다리에 더욱 힘을 주어 뛰었다.


 이미 계단 앞은 인산인해였다. 아까처럼 인파 때문에 못 들어가고 있나 했더니, 계단으로 향하는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민호가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계단 문손잡이를 있는 힘껏 잡아 돌렸다. 그러나 그의 힘이 무색하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돌려도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사람들이 쏟아지면서 민호의 몸을 들이받았지만, 문과 사람들 사이에 낀 민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말도 안 돼.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사람들을 갑판으로 몰아내던 계단이었다. 밖에서 위협을 느끼고 계단으로 돌아오려고 하니 문이 잠겨있다고? 그러고 보니 갑판 위로 막 올라왔을 때, 이상한 점이 있었다. 헬기 속 무장 군인들이 총구를 겨누고만 있던걸. 그건 배를 탄 사람 대부분이 갑판 위로 나오길 기다린 것이었다. 이건 의도적인 상황이었다. 어느 악마의 질 나쁜 장난이란 말인가. 민호는 다시 인파를 헤치고 나와 기범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김기범은 천둥소리를 무서워했다. 하늘이 우르릉 목을 울리는 날이면 이불에 들어가 귀를 막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범은 꼭 그때처럼 귀를 틀어막았다. 차라리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꿈이라면 얼른 깨고 싶은 끔찍한 악몽인데, 탕! 소리를 내며 허벅지 옆 바닥을 스친 총알의 흔적은 더 지옥 같은 현실이었다. 기범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 아예 머리를 감싸 쥐고 덜덜 떨었다. 사방이 비명으로 가득 찼고 총알을 난사하는 소리가 비처럼 쏟아졌다. 이게 대체 뭐야! 비명과 총성의 이중주에 기범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김기범, 정신 차려!”


 어느새 다가온 민호가 거의 넋을 놓은 기범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기범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민호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살려줘, 살려줘! 외치지 못한 비명이 눈물로 쏟아졌다. 민호는 우는 기범을 품에 안고 이를 악문 채 머리 위를 가릴 수 있는 위치로 더 깊이 이동했다. 두 사람이 원한 크루즈 여행은 이딴 지옥 같은 것이 아니었다.


 민호는 그제야 자기가 느꼈던 불안을 이해했다. 배에 탈 때부터, 아니 타기 전부터 느꼈던 불안의 정체. 그래서 챙겼던 잭나이프 때문에 크루즈를 즐기는 내내 오른쪽 소매가 묵직했었다. 민호는 여전히 소매 안에서 요동치는 물건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김기범은 부상이 있었다. 자기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둘 다 죽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기에서 살 방법이 존재하긴 할까? 민호는 구명보트가 있는 복도에서 갑판 쪽을 내다봤다. 구조물 사이사이로 숨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거의 죽은 것 같았다. 수영장 물과 핏물이 섞여서 붉은 파도가 넘실거렸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때 헬기에서 일제히 로프가 내려왔다. 설마. 민호는 하늘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그의 예상대로, 총기를 멘 군인들이 로프를 타고 하강하고 있었다. 갑판 위로 내려온 무장 군인과 헬기에서 빗발치는 총알이 그 어떤 영화보다 비현실적이었다. 기어이 숨은 사람들까지 모두 죽일 모양이었다.


 저들은 누구인가.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이었다. 갑판 위를 거니는 군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의 앞에 무장한 군인이 총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정확하게 민호를 겨눈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민호는 여전히 울고 있는 기범을 꼭 껴안고 웅크렸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기범보다 자기가 먼저 죽었으면 했다. 기범이 죽는 건 제 죽음보다 두려웠다.


 그러나 그다음 들린 소리는 멀어지는 군화 소리였다. 민호가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땐, 제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갔어? 이해할 수 없었다. 무차별적인 살인이 아니었단 말인가. 민호가 넋을 놓은 사이 기범이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민호야.”

 “아니, 아니…….”


 민호는 자길 부르는 기범의 목소리도 제대로 못 들은 듯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다. 넋이 나간 민호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기범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빗발치는 총소리는 여전히 기범의 심장에서 울리듯 쿵쿵거렸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마냥 민호의 품에서 덜덜 떨고 있을 순 없었다.


 어떻게든 살 궁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누군가 기범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기범이 다시 울음을 터뜨리며 민호의 팔을 잡았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민호가 반사적으로 기범을 감싸며 정면을 노려봤다. 그들이 몸을 피하던 벽 옆에 난 문에서 누군가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을 배에 태우며 상냥하게 웃던 여자였다. 여자는 예의 그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구해드리러 왔어요. 자, 얼른 안쪽으로.”


 침착한 그녀의 목소리에 민호와 기범이 서로를 바라봤다. 믿어도 될까? 애초에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뒤에서는 여전히 하늘에서 쏟아지는 총알과 숨은 사람을 찾아 총을 겨누는 무장 군인이 있었고, 앞에는 믿음직하지 못한 여자가 상냥한 목소리로 손짓했다. 차라리 악마의 것일지도 모를 손을 잡자. 그곳이 지옥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곳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민호와 기범은 여자가 이끄는 대로 선내로 들어갔다.


 그녀를 따라 들어간 곳은 배를 처음 탔을 때 들어왔던 화려한 로비였다. 온통 금으로 뒤덮인 외관과 붉은 장식, 우아한 샹들리에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롭기만 했다. 이질적인 건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민호와 기범에게 붙은 무장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총을 든 채, 마치 호위를 하듯 두 사람의 곁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그러나 호위가 아닌 건 눈치로도 알 수 있었다. 이건 감시였다. 조금만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지금 천장을 향하고 있는 총구가 내 심장을 노릴 수도 있었다. 민호는 기범을 부축하고, 기범은 절뚝거리며 걸었다.


 로비 중앙에 도착해서야 무장 군인들은 두 사람의 곁을 벗어나 공간을 빙 둘러섰다. 그 모습까지 모두 지켜본 뒤에야 목 뒤로 받친 기범의 팔을 풀어낸 민호가 익숙한 인영을 보고 입을 벌렸다.


 “민호야, 기범아!”

 “너희가 어떻게…….”


 유소영과 채영지였다. 여전히 드레스 차림인 그녀들은 움직일 힘도 없는 듯 바닥에 주저앉은 채였다. 가만 보니 영지가 총에 맞았는지 어깨에서 흐른 피로 노란 드레스가 붉게 물들어 엉망이었다. 마르지 않은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흘렀다.


 기범이 절뚝거리며 그녀들에게 다가가는 걸 민호가 부축했다. 가까이 붙은 네 사람은 바닥에 앉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의지했다.


 “우린 저 사람이 여기로 데리고 왔어.”


 소영이 정장 입은 남자를 가리키며 속닥거렸다. 기범과 민호의 경우를 이들도 그대로 겪은 모양이었다. 우리도야. 기범이 속삭이며 상냥한 여자를 가리켰다. 민호는 아침 조깅 때 보았던, 기범의 이름을 거론하던 검은 정장 무리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우리 어떻게 되는 걸까.”


 영지가 걱정이 가득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피로 가득했다.






트위터 @Gamnim0120 메일 leann01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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