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https://posty.pe/anyutq

*형현 알오물 2세 + 쪼

*전반은 2세와 재석이만 등장/후반에 아빠들 등장

*아마 다음편이 마지막(이길 바람)



원중 고등학교 2학년 조재석군이 휴일을 보내는 방법을 알아보자. 첫째, 어머니께 무릎을 꿇는다. 이때, 108배로 단련된 어머니의 무릎보다 먼저 다리가 내려가야 한다. 운동선수의 신체를 활용하지 못하고 방심할 경우, 그날의 추가 용돈은 없는 거나 다름 없다. 감히 효자가 하늘 같은 어머니의 무릎을 꿇게 만든 잘못을 져서 하루 종일 심부름과 안마를 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과감해지는 순발력!

무릎을 꿇고 정중하고 간절하게 빌어 용돈을 얻었다면, 스마트폰 어플을 켜야 한다. 익숙하게 고속버스 어플에서 가장 빠른 버스를 예매하는 거다. 버스가 없다면 금액 부담이 크지만 ktx를 이용하자. 어머니의 귀염둥이 막내는 형님이 벌어주신 돈으로 넉넉한 집안 살림을 고려해서 폭풍 애교를 부려 무사히 엄카로 기차 예매도 가능하다. 조씨 집안 귀염둥이 막내는 휴일을 위해서라면 자존심이나 나잇값, 수치 같은 거 버린다! 어차피 작전대로 잘 진행된다면 나중에 다 자기한테 잘했다고 말한다는 확신도 있었다. 

기차(버스)표를 끊었다면, 이제 남은 일은 한 가지다. 바로 찐_마지막_진짜진짜_최종_귀염둥이 막내인 조카 2세군을 만나는 것 뿐! 작중 배경과 무관하게 2023년에는 만 나이를 적용한다. 그러니 만 나이로는 여전히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얼마 자라지 않은 만 5세, 2세군은 재석에게 너무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조카일 수밖에 없다. 양부모 닮지 않은 성숙한 정신연령의 소유자인 2세는 재석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막내인 이상 삼촌의 말을 듣는 건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재석이는 옛적에 안면 튼 2세의 할머니에게 허락 받고 어린이집에서 2세를 픽업해 시내로 나와 평소에 자주 먹지 못한다는 피자를 사준다. 

"진짜 매번 피자 먹어도 돼? 삼촌이 더 맛있는 거 사줄 수 있는데!"

"맞나. 형은 돈 아끼라. 아직 학생이지 않나."

볼 때마다 몸은 크지 않고 사투리만 느는 2세였다. 요새는 부산 애들도 사투리 잘 안 쓴다는데 2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모양이다. 구수한 어린애의 말버릇은 중독심이 심하다. 재석이는 그렇구나- 하고 넘기면서 다음엔 꼭 피자나 햄버거보다 맛있는… 예를 들어 스테이크 같은 고기를 사주리라 다짐한다. 다음에 형 카드 쌔벼서 사주면 결국 자기 아빠 돈으로 먹으니까 뭐라고 못하겠지!

그 후부터는 간단한 근황 잡기 시간이다. 

"아빠가 집에 왔다. 이제 숙소 안 들가도 된다고 했다.”

“헉 진짜? 감독님 숙소 나왔어? 왜? 형들한테 뭔 일 생긴 거야? 희찬이는 별 말 없던데.”

“아이다. 그냥 성적 좋고 분위기도 좋은데 감독이어도 어른 하나 꼽사리 끼는 게 영 불편타 했다.”

“진짜 별 일 아니네. 아, 그럼 오늘 현성이 형이랑 있어야 했지 않아? 막 나 만나는 거 괜찮아?”

“괘안타. 형이라면 할무이도 안심이니까 아빠도 별 말 안한다. 대신 이따 집 들가서 뽀뽀 열 번 해줘야 한다.”

뽀뽀 귀찮다고 말하는 2세는 진심으로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아빠한테 뽀뽀해야 하는 얼라가 되어야 하다니! 막 이런 느낌. 재석은 가끔 조카에게서 나는 아저씨 향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분명 얘는 인생 2회차일 거야. 웹툰에서나 보던 비밀이 진실이 될까봐 조금 무서운 재석군은  2세가 어느 날 갑가지 ‘삼촌아… 내 이번이 두 번째 인생이다.’ 라고 털어놓을 날이 오지만 않기를 바랐다.

“다 묵었나? 내는 배가 부르다.”

“어어. 잠만… 난 좀만 더 먹을게.”

“천천히 무라. 내는 삼촌 기다리면서 아빠들 다시 이어줄 생각 해볼 테니까. 저번 작전이 잘 안되지 않았지 않나.”

“그치. 우리 형이 의심이 많아 갖고 미안…….”

“아이다. 우리가 너무 서둘렀던 탓도 있어.”

의젓한 2세의 말에 재석은 저렇게 작은 아이도 제대로 행동을 반성하고 의젓한데 아침부터 엄마의 무릎에 애교를 부린 자신은 무엇인가 고민한다. 2세는 역시 제정신 똑바로 박혀 있었다. 친형은 당연히 닮지 않았고, 현성이 형을 크게 닮은 거 같지도 않았다. 저번에 자긴 큰 이모의 말투가 옮았다고 했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누님의 모습이 2세를 통해 그려졌다. 아마 우리 형보다는 아니어도 엄청 쿨하고 멋진 사람일 거야. 

현성이와 엮일 때 빼고는 아직까진 형이 제일 멋진 재석이였다. 물론 곧 자신이 형보다 더 멋져질 예정이었다. 

어린 2세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서 빠르게 피자와 사이드로 시킨 오븐 스파게티를 흡입한 재석은 물리적으로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2세의 손을 꼭 잡고 피자집을 나왔다. 다음 행선지는 재석이 2세를 만나러 올 때마다 이용하는 2세의 단골 카페였다. 당연히 보호자들 모두 카페 위치를 알고 있었고, 사돈네는 자주 들리는 예스 키즈존이었는데, 아직 사돈네 중 누구와도 마주친 적은 없었다.

2세는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후련하게 알림장과 빈 간식 통, 장난감이나 준비물이 든 유치원 가방은 재석에게 맡긴 채 카페에 들어갔다. 

“이리 온나!”

“안녕하세요!”

몇 번 봤다고 눈에 익은 카페 직원은 재석이 주문하기도 전에 두 단골이 매번 시키는 블루베리 스무디 2개를 내왔다. 적당히 빈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작전을 검토하기 위해 두툼한 스프링 노트를 꺼냈다. 

이 노트로 말하자면, 재석이 2세를 만난 날에 사서 형석과 현성의 러브러브 대작전을 개요부터 진행 상황까지 빼곡히 근 3년여간 꾸준히 기록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도중에 한 사람은 군대에, 다른 하나는 미국에 가는 바람에 제대로 실천은 하지 못했지만.

드디어 때가 왔다!

재석은 얼마 전 경기장에서 마주친 형석을 떠올렸다. 시간 남아도는 군대에서 지도자 과정을 밟고 모교의 코치가 된 현성이 형은 예전보다 살이 좀 빠졌고, 예민함은 덜해진 느낌이었다. 말 안 듣는 선수들과 경기 일정으로 피곤해 보이긴 해도 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지. 

사람이 얼굴에 여유가 생겼다. 초조함 대신 들어선 걱정과 열의에는 아직 재석이 이해하지 못할 연륜도 보였다. 가끔 집에 와 얼굴을 보는 형과 비슷한 얼굴. 각자의 자리에서 안정적인 삶을 찾아간 사람에게서만 보이는 안정감이 있었다. 

아, 이젠 마음 놓을 수 있겠구나. 두 사람에게도 다음을 말해도 괜찮겠구나 싶었다. 

“지금뿐이야. 형한테 떡밥 뿌려두고 왔어. 잊고 지내던 첫사랑 소식에 아주 귀가 쫑긋했거든. 안 그런 척 나한테 현성이 형 소식 물어보더라.”

“내도 슬슬 시동 걸고 있다. 아빠한테 다른 아빠 얘기 물어본나. 쪼까 피곤해 보이긴 해도 아빠, 얘기할 때 즐거워 보였다.”

그런 아빠는 처음 본다고 말하는 2세의 얼굴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그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니 문득 재석은 2세가 아직 한창 부모님이 고플 시기라는 걸 깨닫고 만다. 그렇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해도 2세는 이제 학교에 들어가 받아쓰기하고 더하기 빼기를 배울 아이였다. 

아무리 조부모와 이모들이 잘 챙겨준다 해도 현성을 보고 싶다며 울 때도 있었고, 평범하게 자신의 얼굴을 물려준 형석을 궁금해했다. 부모님의 행복을 핑계 삼지만, 아이는 그저 그 행복이 자신에게도 전해지기를, 그리하여 자신까지 행복해지길 바랐다. 

자식의 아픔을 모르는 못난 아빠들을 정신 차리게 해줘야지. 세상에 사랑한다는 이유로 만나지 않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  

처음, 두 형의 연애를 응원하고 싶던 재석은 2세와 보내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갈수록 형들보다는 2세를 위해 움직이게 되었다. 저보다 어린아이가 부모님을 다시 이어지게 하겠다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하고 애처로운가. 

재석은 2세를 위해서라면 형에게 2세의 존재를 폭로해 당장이라도 막장 아침 드라마풍으로 두 사람을 이어지도록 할 의향이 낭낭했지만, 아쉽게도 재석의 계획은 2세 선에서 정리되었다. 

제 존재는 자신이 직접 말하고 싶다는데 제삼자가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럼 일단 아빠를 서울로 보내야 한다.”

“곧 우리 쪽에서 연습 경기 하나 있으니까 문제없을 거야.”

“그럼 내만 따라가면 되는데. 우째 아빨 따라갈까…”

“할머님께 부탁해 보는 건 어때?”

형 천재 아이가?! 

재석은 맹세코, 2세가 그때만큼 크게 환호하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계획은 이러하다. 

첫째, 우선 형들을 한 장소에 모은다. 

둘째, 최근 한국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형석이 관중과 모교 관계자들에게 둘러싸인 사이, 2세가 안전한 지상 라운드에서 탈출한다.

셋째, 2세와 합류한 재석이 안전하게 아이를 형석에게 옮긴다.

넷째, 어디로 보나 친자식… 심지어 결혼도 안한 혼외자식인 2세를 보고 당황한 형석에게 2세가 “아빠!”라고 외치며 안겨 든다.

마지막으로, 2세를 찾으러 온 현성에게 이 상황이 발각되어 부모 양측은 몇 년 만에 재회를 이룬다.

즉, 아침 막장 드라마풍 정면돌파인 것이다!

참고로 2세는 막장 드라마를 사랑하는 조부모의 아래에서 무럭무럭 자란 막장 꿈나무였다.



마 그렇게 된 거다. 아, 서울 사람인데 하도 부산 어린이와 붙어 다녔더니 사투리 어투가 입에 붙었다. 요즘 연습할 때, 그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경상 지역의 사투리 탓에 영중이 형이라든가 감독님한테 한 소리 듣는 편이었다. 

작작 좀 지상고 애들이랑 어울리라고. 인별이나 께톡으로 소통할 시간에 연습했으면 영점 잘못 잡는 실수는 하지 않았겠냐고 一.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요전번 이후로 종종 준수 형과 연락하는 영중 형이어서 사실 그렇게 타격이 크진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했지. 

그리고 가장 자주 연락하는 희찬이는 생각만큼 사투리를 많이 하지 않는다. 다은이나 태성이라면 모를까, 걔는 표준어 잘 쓴다고요. 형들이 뭘 알겠어요. 저한테 절대 밝혀서는 안 될, 눈에 넣어 죽어도 안 아플 조카가 하나 있는데 걔가 그렇게 똑똑하다는 걸 말하지 못하는 이 설움을! 

나 걔만 보면 아주 예뻐 죽겠어서 휴일에 강행군한 거 하나도 안 피곤하다니까요. 아, 이건 거짓말. 온몸이 아주 삭신이었다. 아! 밀지 마요! 남이 스트레칭하는데 체중 싣지 마! 국민이 형! 완전 심보 고약한 혹부리 영감이에요?!!

재석아, 솔직히 말해 봐. 요즘 뭔 일 있지? 아니요. 왜 그렇게 생각하신 거죠, 휘성이 형? 저는 대전 다녀온 적도 없고 성심당 빵은 구경도 못 해봤으니까 어디 갔다 왔냐고 묻지 말아 주세요. 대전보다 먼 곳 다녀왔어요. 

나는 어디 갔냐고 묻지 않았는데. 알아서 이실직고를 하는 구나. 그래, 부산 갔다 왔니? 혼내지 않을 테니까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 봐. 

말할 수 없어요. 말하면 안돼요. 

왜?

말해서는 안 되니까요. 

그러니까 말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뭐야?

그것도 말할 수 없어요. 의리는 지키라고 있다고 배웠으니까요. 

너 진짜 답답하다.

마지막 말은 마인크래프트 교진이 형이었는지, 조용하게 골 연습하던 수진이일 리는 없으니, 국민이 형 중 한 명이 범인이겠다. 흑흑 주변 모든 형들에게 욕을 처먹었지만 재석이는 포기하지 않아요! 아니 사실 벌써 입이 근거려서 미칠 거 같으니까 지상고 애들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2세와의 재회를 기약하고 계획을 가다듬은 재석은 때마침 오프와 연습 경기가 겹친 날, 형석에게 응원 와줄 것을 요구했다. 주전 단 동생 응원을 어떻게 한 번 오지 않느냐고 말이지. 그리고 우리의 조형석군은 조재석군의 친형답게 동생의 애교 섞인 불만을 웃으면서 격파했다.

“너도 중학생 때 딱 한 번 내 경기 오고 말았잖아? 그리고 이 형님은 너무 인기가 많아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요~”

“지상고랑 연습 경기인데도?”

“저번에 우승한 학교? 대단하네~ 그래도 싫어. 안 가. 약속 없는 오프가 얼마 만인데! 날 집에서 끌어내리지 말아라!”

“형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변했어!”

“응~ 형은 변했으니까 섭섭한 재석 아가는 썩 방으로 물러가세요!”

“엄마! 형이 나 내쫓으려고 해!”

거실 소파 아래에 비스듬히 누워 마치 아저씨처럼 배를 긁적이는 형석을 그 누가 한국 프로 농구 최강의 포가로 볼까. 일단 재석은 형석의 꼴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 저런 사람이 2세 만들기에 보탬이 되었다고 믿고 싶지 않아. 진지하게 아들과 상봉시키는 걸 재고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부엌에서 엄마를 불러봤자 그분은 사사롭고 한심한 형제 싸움에 등장하지 않으신다. 재석은 낙심한 마음으로 꾸물꾸물 덩치에 맞지 않게 형석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신중하게 떡밥을 깔 시간이었다. 조형석이라는 대어가 낚일 떡밥이 필요했다. 

“형, 형. 지상고에 감독 바뀐 거 전에 말했지?”

“어엉. 그치. 그게 누구였더라 一?”

“이현성 감독님. 형이랑 동갑인 사람이었어. 내가 유일하게 응원하러 간 경기에서의 상대팀 선수였지.”

“뭐? 현성이가 부산에 있어? 왜? 아니… 아니야. 그렇지. 그럴 수도 있겠구나……. 잘 지내는 거 같았어?”

“나야 모르지요~ 인사도 대충 했고 나는 거기 형들이랑 경기하느라 바빴는걸! 애초에 상대 선수가 감독님한테 개인적으로 아는척 할 일이 있나?”

없을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다. 이쪽 판은 워낙 좁아서 가족이나 지인의 지인이 상대편에 나타날 가능성이 아주 하늘로 솟구친다. 지천으로 널렸다는 말이다. 

재석은 형석이 조금 생각할 텀을 주고 다시 살살 속을 자극했다. 

“근데 좀 선수 시절보다는 마른 거 같으셨어. 뭔가 익숙해서 말인데, 나 지상고 감독님 예전에 본 적 있었어?”

“너 어릴 때…… 입시 끝나고 부산 여행할 때 왔었지. 잠깐 얼굴 봤을 거야. 학생 때는 친했으니까 몇 번 사진도 보여줬을걸?”

"그렇구낭. 담 연습 경기 때 인사해야겠다! 형이랑 친했다니까 안부 전해줘도 되지?!"

"...재석아, 연습 경기가 언제라고 했지?"

월척이다, 오예~!



지상고는 확실히 전과 달리 신경 써 준 티가 나는 버스를 타고 왔다. 구태여 마중 나가는 코치를 따라 주차장에 온 재석은 재빠르게 지상고 농구부원들을 훑었다. 아직 한 해가 넘어가지 않아 여전히 빈약한 선수진. 다 한 번씩 경기에서 맞붙은 얼굴들이었다. 

재석은 방정맞게 손을 흔들며 인별로 부쩍 친해진 희찬과 인사를 나눴다. 그러면서 시선은 은근슬쩍 현성을 향한다. 재석의 시선을 따라 좀 징그럽게 눈치 빠르고 관찰력이 좋은 상호의 시선도 따라왔지만, 재석은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무슨 의심을 해도 다 이해한다. 함께 왔으니까 2세의 얼굴을 봤을 테고, 딱 봐도 닮은 두 사람에게 의문이 들었겠지. 

하지만 아직 밝힐 때가 아니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현성의 품에는 잠에 든 2세가 안겨 있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차로 거뜬히 4시간은 걸리는 여정에 지친 듯 잠든 아이는 후드를 푹 눌러쓴 그대로였다. 재석을 바라보는 현성의 시선이 흔들렸다. 설마 주차장에서 바로 재석을 만날 줄은 몰랐겠지. 

재석과 현성을 번갈아 보는 지상고 농구부원들… 그리고 이 대치를 의아하게 여기는 원중고의 코치. 코치는 미리 연락 받은 듯 현성의 품에 2세를 보고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대신 어쩔 수 없는 사유로 일터에 가족을 데려온 현성에게 사무적인 얘기를 꺼냈다. 

"시합 중에는 아들 분이 관중석에 있어야 할 거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아, 네. 대학 선배가 봐주기로 했습니다."

"다행이네요. 바로 체육관에 가시죠."

재석은 코치와 떨어져서 친한 지상고 쪽으로 붙었다. 당장 2세와 현성에게 가고 싶지만, 현성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줘야 했다. 지상 사람들에게도 협조를 구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 

슬금슬금 희찬 다음으로 영중이 덕분에 안면이 익은 준수에게도 인사하면서, 재석은 대놓고 현성 쪽을 눈짓하며 스마트폰을 들어 올려 방금 만든 따끈따끈한 단체방을 보여주었다.

이거로 우리 소통해요, 라는 의미다. 에헴. 

"형들이 생각하는 거 내가 아는 데까지 말해줄 테니까 걱정 말아요."

"너 뭐냐?"

"원중고등학교의 자랑스러운 포가이자, 감독님 품에 안긴 애 삼촌입니다."

두둥탁. 재석은 때맞춰 다은이 입으로 낸 효과음에 맞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았다.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은 지상고 사람들이 모두 재석에게 관심을 보였다. 아아, 이 사람들! 그러다가 현성이 형이 눈치채버려욧 -! 재석의 꿍얼거림은 동시다발적으로 울린 학생들의 스마트폰 알람음에 외면받았다. 

어느새 깬 2세가 앞서 코치들과 함께 걷는 현성의 어깨 너머로 카톡을 보낸 것이다. 제 손바닥보다 큰 스마트폰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2세를 위한 이모들의 선물이었다. 못난 동생이자 오빠와 크게 닮지 않아 의젓한 2세를 믿기에 이모들은 과감히 플렉스했고, 2세는 다소 방임주의인 아빠의 허락하에 자유롭게 스마트폰 사용했다. 

2세가 주로 사용하는 어플은 카톡과 이북 사이트로 좋아하는 동화 오디오북으로 읽기였다. 유튜브는 형석의 영상 찾아볼 때만 들어간다.

어유, 누구 조카이기에 이렇게 기특해! 나도 빨리 멋진 어른이 되어서 2세한테 비싼 선물 사줘야지! 첫 연봉으로 꼭 한정판 장난감 총 사줄 거다. 꼭 2세를 밀리터리의 세계로 데려와야지. 같이 즐겁게 덕톡을 나누는 거야. 가족 중에 밀덕이 없어 힘든 시절이여 안녕~! 




유성은 의젓한 아이였다. 

열 달을 품어 낳은 아이였건만, 현성은 가끔 자식에게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타인을 발견했다. 

출산하고 나서 함께 있어 주지 못한 시간이 길어서인가. 길어봤자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곁에 있었다.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5, 6년 전의 현성은 제 아이보다 꿈과 미래가 더 중요한 어린애였다. 

부모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원한 적 없던 아이에 예상치 못한 존재를 밝은 마음으로 반기지 못했다. 계속 도망만 치면서 자신의 잘못을 외면했다. 그 없이도 충분히 다른 가족에게 사랑받는 아이였다. 누구나 아이를 돌봤으니 그 하나 쯤은 무심해도 되지 않을까… 멍청한 생각을 했다.

프로 농구에서 퇴출당하고 여러 일이 있었다. 다시는 현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몸이 되었고, 대학 은사의 권유로 지도자 자격을 준비했다. 그가 도와야만 코트에서 뛸 수 있다는 사람이 있음을 배운 현성이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제 유치한 고집으로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은 아이였다. 

미안하다고 얼마나 사과했는지 모른다. 죄를 뉘우치는 일은 평생 해도 부족했다. 아직 더 많이, 그가 필요할 때마다 내버려 둬서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다. 

일찍부터 사랑하지 못한 죄가 있으니, 어찌 당당히 얼굴을 들 수 있겠는가. 현성이 불민한 자신을 용서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아이가 곁에 있어 주지 못한 시간 따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사랑해 주는 것.

현성은 뭐든 간에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차라리 제 이름의 일부를 물려받은 아이가 부모 역할 하나 제대로 못 한 그를 탓하고 원망했으면 나았을 텐데. 완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 마음에 탈이 나던 시기에는 그렇게 비겁하고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다. 

끔찍한 속마음이네. 빼도 박도 못하는 부모 자격 실격 아이가. 

때문에 현성은 아이를 볼 때마다 타성처럼 죄책감에 젖었다. 그가 유성에게 거역할 수 없는 데는 이뤄 표현하지 못할 무조건적인 사랑과 그보다 더 큰 부채가 있었다. 

자신 같은 사람보다 더 조건 좋고 여유로우면서, 제 문제 때문에 유성을 외면하지 않고 어느 때라도 아이를 사랑할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부모여서 말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아도 유성은 진실로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이런 반짝이는 보물을 내가 낳았다니 믿기지 않는다. 아빠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양쪽 무릎을 내어주고, 잠에 빠진 아이가 깨지 않도록 천천히 등을 토닥여 주면서 그런 주접도 떨었다. 

날 닮지 않아 다행이지 않아? 그 말에 함께 늦은 야식을 먹던 두 혈육은 씁쓸한 반응이었지. 

“니는 가끔 튀어나오는 그 자낮을 고쳐야 한다.”

“맞나.”

“평상시에는 밝게 잘하면서 왜 아 일에만 소극적이게 되는데? 니는 좋은 아빠다. 자신을 가져.”

“아이다. 내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어.”

“오빠야, 씨만 뿌리고 깜깜무소식인 새끼는 절대 좋은 정자 기증자가 아이다. 개쌉호로새끼지!”

“야야, 니보다 그래도 연상이다. 유명한 선수고. 말 가려 해라.”

누이의 만류에도 현성은 아이를 바라볼 때마다 돌아오는 반짝이는 애정에는 분명 더 적합한 사람이 있다고 믿었다.

그보다는 누이를 더 닮았다가도, 누이들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현성은 아이에게서 또 다른 아빠가 보았다. 

유성에게서 발견하는 옛 친구의 잔해에서 현성은 그가 자각하지 못한 감정의 편린을 파헤쳤다. 남들은 아이의 얼굴에서 재석을 떠올리지만, 그는 한 번도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헷갈리지 않았다. 

조형석이 금마를 쏙 빼닮지 않았나. 눈과 코, 웃을 때마다 올라가는 입꼬리 모양새, 쭉쭉 긴 팔과 다리에 튼튼한 골격. 무엇보다 현성은 아이가 제 모발을 물려받지 않은 점에 감사했다. 아이는 형석처럼 뿌리가 굵고 두꺼운 모발을 가졌다. 다소 뻣뻣해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강인함을 물려받았다. 

동시에 아이는 그가 사랑한 형석의 부드러움을 지녔다. 이번에는 내면의 얘기였다. 현성은 아이를 키우다 보면 종종 잊고 지내던 청춘의 한 페이지 속 책갈피를 찾아냈다. 

철저하게 계획했고 합의했으면서도, 이후에 가위로 종이 자르듯 잘라내 버리지 못한 밤이 있었다. 




“현성아.”

“와?”

“앞으로 힘든 일 있을 때마다 날 원망해. 그리고 절대로 용서하지 마.”

“무슨 소리고? 내가 와 니를 원망해야 하는데?”

“우리가 할 이 미친짓에 그 정도 지분은 가져가고 싶어. 이후, 나는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오늘이 내 마음의 마지막이겠지.”

“내는 원망할 권리를 얻는 대신 그런 니를 감당해야 하고?”

“응. 딱 하루야. 하루만 네가 날 가져줘라.”

그리고 사정 없이 버려줘. 

스무 살, 현성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을 했다. 


느긋하게 쓰고 싶은 걸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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