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가 꽃을 받아들자 빙긋 웃은 필리엔이 다시 표정을 굳히고 아까 섰던 곳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검을 들었다. 기사들 중 하나가 말했다.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네."

필리엔이 대답하자 조금 떨떠름하게 서 있던 대련 상대들도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릴리가 보기엔 아까 필리엔이 했던 것과 비슷해 보였다. 차이가 있어도 그게 같은 동작을 다른 사람이 취하며 생기는 개인차인지 아예 근본부터 다른 동작인지 분간할 지식이 없었다.

수가 많다는 유리함을 위함인지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방향에서 필리엔을 견제했다. 그러다 필리엔의 오른쪽 앞편에 있던 이가 먼저 덤벼들었다. 발을 옮기며 빠르게 앞으로 전진하면서 거리를 좁히는 동시에 검격이 꽂혔다. 필리엔도 발을 옮기며 검을 들어서 막으며 뒤에서 다가오는 쪽을 견제했다. 

릴리는 조금 전 리르먼이 한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오래된 성씨는 그런 방식인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현재는 귀족의 성이란 작위와 봉토에 따라붙는 제국의 방식이 널리 퍼져있어 원래 중서부에 있던 전통적인 성씨들도 제국식으로 여겨지고 있기는 했으나 본래 의미를 찾자면 이카트와 유사한 경우가 많았으리라.

제국의 입김은 중서부를 깊게 파고들었다. 중서부의 문화나 전통이 제국의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일은 비단 성씨만의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가족 따위의 작은 공동체는 문화적 전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세월이 흘러도 제국의 방식보다 본래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고집 센 몇 토착 가문은 남았을 테지. 

리르먼이 한 설명은 그중 하나가 이카트였다는 얘기였다. 제국의 법도와는 별개로 그들에겐 자신들이 믿는 기준이 있다는 뜻이다. 외부인에게 어떻게 보이든 그들에겐 사라지지 않고 대를 이어 기억되며 지켜온 소중한 전통으로. 

그래서 이카트에 필리엔이 필요했다. 제국의 방식만을 따라 이카트의 이름을 다른 이름과 같은 것으로 만들지 않으며 자신들의 전통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그들의 문화를 유전되게 하기 위해, 이카트의 전통을 따르기 위해. 그런 이유로 리르먼을 대신해 필리엔이 이카트의 이름과 검을 지니고 전장으로 향해야 했다. 필리엔 외에는 할 수 없었던 거다. 

즉, 처음에 릴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필리엔은 전쟁을 계속 치러야 하는 이카트에겐 놓치기 아까운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지극히 전통적인 관점에서 필리엔은 이카트의 이름을 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릴리는 이가 다른 방향으로도 해석될 수 있음을 알았다. 필리엔은 리르먼을 대체할 수 있었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일까? 그러나 전쟁이 있었다. 전까지는 아니었더라도 이번 출정으로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필리엔은 증명했고 그를 인정받았다. 

사생아는 의무도 권리도 없다지만 제국의 인정은 적당한 이의 양자로 입적시키는 정도로 맞추면 그만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기준이 중요하므로 나머지 사항은 번거로운 허식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이카트 내부에 그런 사람이 없을까?

한가지 더 이야기 해볼까? 다른 관점으로 봤을 때 누군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찬탈자의 하극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뜻도 된다. 필리엔에게도 리르먼과 같이 이카트의 이름을 이을 자격이 있으므로. 아니, 지금 상황에서는 이카트의 전통대로라면 오히려 필리엔 쪽이 더 온전한 자격을 지녔다고 보아야 했다. 

그렇게 해석해서 주장하는 의도는 다양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몰아내려 하거나 단지 흔들고 싶거나 아니면 외줄 위에 선 사람을 가볍게 밀치는 행위를 원하는 것이거나. 어느 쪽이든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카트 정통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이들이 지금처럼 평화롭고 화목한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게 되겠지. 

무게를 실어 검을 찔러 넣을 때 콰가각 검이 갑옷을 긁는 거친 소리가 났다. 섬뜩한 소리였다. 

부서진 금속 조각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피가 튀지 않았으니 심한 부상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만 보통 상황도 아닌 듯했다. 필리엔은 휘청이며 뒤로 기울어지는 상대의 가슴팍을 발로 무겁게 밀듯이 걷어차 검을 회수했다. 동작이 교묘하게 이어졌다. 찔러넣은 검은 뽑아내며 들었던 발을 그대로 바깥쪽으로 딛으며 몸을 뒤쪽 방향으로 틀어 검을 휘둘렀다. 공기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필리엔이 검을 찔러넣을 때 완전히 빈 등을 노리고 검을 지르던 이의 투구에 휘둘러진 검이 부딪히며 쾅 소리를 냈다. 자세가 흐트러지며 검이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필리엔은 지체 없이 거리를 좁히며 하나 남은 상대의 검을 든 팔을 왼손으로 붙잡아 당겼다. 상대는 빠져나가려 했으나 벗어나지 못 했다. 악어에 물려 늪으로 끌려들어 가는 영양처럼 보일 정도였다.

제압당한 상대는 도망칠 수 없이 무력했고 필리엔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이후에 일어날 일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예상한 대로 잘 벼려진 철검이 그대로 갑옷을 부수며 상대의 몸통에 검을 찔러넣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음 순간에 보니 필리엔은 검을 든 손으로 상대의 가슴 위를 툭 건드리기만 했다. 

릴리는 눈 위에 맺혔던 잔상을 지우듯 한 번 눈을 깜빡였다. 대련이 끝났다. 쭉 지켜본 릴리도 알 수 있었다. 필리엔은 지나치게 뛰어났다.

"와, 괴물이 따로 없네. 어떻게 그렇게 하는 겁니까?"

필리엔과 대련한 기사 중 하나가 말했다. 그가 입고 있던 갑옷의 어깨 부분이 맹수가 물어뜯은 어린 짐승의 여린 가죽처럼 완전히 너덜너덜하게 떨어져 나가 있었다. 필리엔이 검을 조금만 더 옆으로 옮겨서 찔러넣었다면 날아간 건 기사가 입고 있던 갑옷이 아니라 그의 목이었을 테니 당사자로선 제법 소름 끼치는 모습이긴 했다. 

그러니 병사가 내뱉은 소리는 아마도 무의식중에 터져 나온 감탄사에 가까운 반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들은 순간 릴리는 북부로 가는 관문을 넘어가지 못했을 때 스야가 모닥불 앞에서 대현자에 관해 말하며 필리엔을 칭하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스야는 필리엔을 천지간의 괴인이라 불렀다. 

표현이 똑같지는 않지만 괴물이나 괴인이나 비슷한 말이라 볼 수 있다. 한낱 작은 인간으로서는 닿기도 힘들 아득한 시야를 지니고 있던 대마법사가 부른 호칭을 여기서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이야. 그것도 땅에 발을 딛고 검을 든, 마법과는 무관할 자의 입을 통해.

기사의 말을 들은 필리엔은 눈을 한 번 깜빡일 시간 후에 순순히 대답했다.

"판단력으로 하는 겁니다. 침착하게 상대를 살피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죠."

그러나 말을 받은 건 다른 목소리였다.

"내 동생처럼 하려면 여덟살이 되기 전부터 검을 잡은 천재면 된다. 물론 한눈 팔거나 게으름 부리는 일 없이 매일 단련도 해야 하고."

리르먼이 그들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지팡이에 과하게 몸을 기울이지 않으며 천천히 그러나 느리다기 보다는 신중하게 느껴지는 걸음은 리르먼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리르먼은 단지 그런 습관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슬쩍 웃었다.

필리엔이 리르먼을 돌아보며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하는 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는 건데 어쩐지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동작처럼 보였다. 눈썹을 살짝 팔자로 만드는 표정이라 그렇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 얼굴은 괴인이나 괴물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젊은 남자처럼만 보였다.

"내가 천재는 아닌데."

"너 정도면 천재야. 어릴 때 널 가르친 게 나라는 거 잊지 마라. 처음부터 너처럼 빠르게 흡수하는 사람은 없어. 내가 장담한다."

"하지만 나보다 형이 더 잘하잖아."

필리엔의 순진한 소리에 리르먼은 일단 부드럽게 웃었다.

"그때야 네가 경험을 쌓기 전이었으니까."

누구라도 리르먼에게 부상이 생기기 전의 이야기라 생각하겠지만 아무도 그런 말은 꺼내지 않았다. 리르먼은 만약 자신에게 장애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이제 더는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 건 무용한 가정이니까.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기에 리르먼은 책임져야 할 게 많은 사람이었다.

리르먼이 지팡이 끝으로 땅을 꾹 누르며 몸을 바르게 하곤 필리엔의 어깨를 툭 쳤다.

"하긴 너도 머리가 굵어진 후에는 훈련도 빠지고 쏘다니긴 했었지. 공작 각하께서 필리엔 널 갑자기 데려가신 게 네 풀어진 정신을 잡으려고 그랬었나 보다."

"그렇게까진 아니었는데……."

"알았으니까 치우고 와. 집에 가자."

리르먼은 짧게 말하고 대련을 한 기사들에게 수고했다 치하 후 돌려 보낸 뒤에 개중에 계급이 높은 자와 훈련 상태 따위의 대화를 나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평소에도 종종 이런 식으로 들러서 확인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필리엔이 형이 시킨 대로 제가 늘어놓은 무기들을 치우러 가기 위해 몸을 휙 돌리는 바람에 쪼르르 다가오던 릴리와 거의 부딪힐 뻔했다. 엉겁결에 휘청이며 물러나려던 릴리를 필리엔이 붙잡았다. 릴리는 팔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깜짝 놀랐다. 방금 들은 이야기에 심경이 복잡한 건 복잡한 거고 놀란 건 놀란 거다.

"우와, 엄청 뜨거워졌네요."

"그러게요. 아, 땀을 흘려서 냄새가 날 텐데."

필리엔이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낭패란 표정이었지만 릴리는 필리엔의 말을 듣고는 오히려 바짝 다가가 킁킁거렸다. 필리엔의 등이 검을 휘두를 때보다 더 강하게 긴장했다. 릴리가 반쯤 필리엔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괜찮은데요?"

필리엔이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확인하듯 물었다.

"냄새 안 나요?"

"땀 냄새요? 나죠. 그런데 필리엔의 체취랑 섞이니까 저한텐 아주 좋은 냄새로 느껴지는 걸요."

릴리가 고개를 숙이며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고개를 들고 필리엔을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멈춰있는 필리엔의 목과 귀가 점점 벌겋게 변했다. 그게 완전히 붉게 물들었을 때 필리엔은 갑자기 바닥에 늘어놓았던 무기들을 치우는 게 무척 급하고 바쁜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거의 달려가는 필리엔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릴리에게 리르먼이 천천히 다가가서 같은 곳을 보았다. 기사와는 간단하게 대화를 끝낸 후였다.

"방금은 좀 심하셨습니다."

"별로 심하진 않았는데요."

"제 동생 순진한 거 아시잖아요. 적당히 해두세요."

반은 농담이지만, 나머지 반은 진담인 것 같았다. 릴리가 리르먼을 흘겼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필리엔은 성인이거든요? 무슨 열살짜리처럼 싸고도는 건 아무리 리르먼 씨라도 좀 아닌 것 같다는 말씀 드릴게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차라리 열 살 짜리면 좋겠군요."

리르먼은 한숨처럼 내뱉은 뒤에 면도해서 매끈한 턱을 쓸었다. 그 말은 어느 정도는 진심인 것 같았다. 필리엔이 열 살이면 이카트의 이름이니 검술이니 하는 게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적어도 전쟁터에 끌려갈 일은 없긴 했겠다. 그랬다면 전쟁에서 공을 세우지도 않았을 거고 영구적인 상해를 입은 리르먼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는 의혹 한 점 살 일도 없었겠지. 무슨 소린지는 알겠지만 릴리는 불퉁하게 반발했다.

"전 10년이나 못 기다려요."

"아, 그런 문제가 있군요. 그레이스 씨를 위해서 그냥 지금 나이로 둬야겠습니다."

리르먼은 그 전부가 농담이었던 것처럼 웃었다. 얼핏 웃음 뒤에 아무런 무게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실로 그렇지는 않겠지. 하지만 릴리도 그에 관해선 더 말하지 않았다. 필리엔이 돌아온 때문이다. 릴리는 들고 있던 새하얀 한 송이 꽃을 가슴 앞까지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순풍의 축복이라는 건 역시 축일이랑 관련된 말이죠? 좀 전에 얘기하던 사람도 리르먼 씨 가슴에 꽂은 꽃을 보고 그렇게 얘기 하던데요."

리르먼은 간단히 대답했다.

"이안드는 축복받은 도시니까요."

이안드는 바다를 면하고 있고 중서부는 대현자의 땅이니 바람의 축복을 이야기하는 게 잘 어울리기는 했다. 바다와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계절마다 오가며 회칠한 벽 사이를 노닐고 바람의 마법사가 다스리는 거대 도시의 축제에서 흰 것을 걸친 사람들이 서로에게 배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주길 기원했다. 

당연하게도 축제의 인사말 또한 이 지역에서 전해지는 관습일 것이다. 사람들의 노력으로 오래도록 지켜온 양식은 지금도 기억되며 전해지고 있었다. 소중하게 아껴온 것들……. 릴리는 제 손에 들린 흰 꽃을 보았다.

"필리엔에게도 순풍의 축복이 있기를."

필리엔은 고맙다며 웃었고 릴리는 돌아온 필리엔의 귓가에 다시 꽃을 꽂아주었다. 금장식을 받은 아이가 고심해서 고른 그대로 망가지지 않은 채였다. 무결한 하얀 꽃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살짝 고개를 숙인 필리엔의 녹색 눈에는 기쁨이 어렸다. 릴리의 손끝이 필리엔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필리엔은 아무 것도 모를 것이다. 릴리는 필리엔이 모르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해 떨어지기 전에 가요."

릴리도 미소 지었다. 사람의 무구와 연병장과 무뚝뚝한 표정의 건물과 미소 짓는 사람들을 오후의 햇살이 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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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는 필리엔을 홀랑 데려가려는 자신의 계획을 완수할 수 있을까요? 두구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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