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량은 난감했다. 전날 인간의 수명 이야기가 충격이었는지 이번에는 들어오자마자 자라고, 자신이 침상 머리맡에서 지키며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하는 박무현 때문이었다.


베개 머리맡 이야기를 들을 나이는 진작 지났다. 게다가 이 청룡이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인지는 몰라도 잠이 오기는 커녕 머리가 아파서 오던 잠도 달아날 거 같았다. 게다가 신해량은 누가 볼 때 잠들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신해량은 양팔로 자신의 등을 밀어 전각 안으로 들여보내려는 박무현을 말렸다. 청룡이라더니 겉보기와 다르게 힘이 제법 세서 온 몸에 힘을 주어야 겨우 버틸 수 있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안 됩니다. 오늘도 잊지 않고 약속을 지켜주신 건 감사하지만, 쉬어야 탈이 안 나죠!”

“며칠 안 자는 정도로 큰일나지 않습니다.”

“그런 큰일날 소리를! 잠을 자지 않는 만큼 수명이 줄어드는 거라고요.”




인간에 대해 영 모르는 거 같더니 이런 건 또 어떻게 아는 거지. 혹시 청룡도 그런가. 신해량은 박무현의 고집을 꺾기 힘들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설득을 포기하고 협상을 시도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다른 걸 먼저 하다가 적절한 시간을 알려주시면 그때는 자겠습니다.”

“하지만…그러면 너무 조금 잘 텐데요.”




등을 미는 힘이 약해졌다. 신해량은 잽싸게 덧붙였다.




“눕자마자 여기 온 거니 바로 잠들지도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활동을 해야 잠들 수 있습니다.”




박무현이 망설였다.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신해량은 몸을 돌려 박무현의 손에서 벗어나 그를 마주봤다. 




“뭐라도 할 게 없습니까? 앉아서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요.”




차를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하는 건 지난 이틀로 충분했다. 박무현은 순수하고,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가 얼마나 다른 세상에 속한 존재인가 싶어 때때로 아득해지곤 했다. 게다가 이틀이나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그는 박무현이 혹시라도 오해를 하기 전에 덧붙였다.




“산책이라던가요. 몸을 움직이는 일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빨리 잠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으음….”




박무현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침상에 들게 하려는 계획을 드디어 포기한 거 같아 신해량은 살짝 안도했다.




“그렇게 말해도….”




난감한 표정으로 박무현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보시다시피 여기가 딱히 할 일이 많은 곳은 아닌 지라…”




확실히 그랬다. 남의 집에 와서 청소 같은 걸 한다해도 받아들일 지 의문이기도 했다. 신해량은 박무현과 같이 그들이 할 수 있을 법한 일이 뭐가 있나 둘러보며 고민했다. 방 안을 둘러보다 탁자가 시야에 걸렸다. 문득 이틀간 대접받은 음식과 차가 떠올랐다.




“어제 차려주신 음식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박무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요리는…따지자면 인간이 도술? 이라 하던가요? 그런 거라 신해량씨에게 가르쳐 드릴 수 있을 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재료는 농사지어 얻은 거니까요. 그거는 같이 해볼 수 있겠네요.”

“농사를 직접 지으신 겁니까?”

“그럼요.”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박무현이 가슴을 폈다. 여기에는 솔직히 신해량도 놀랐다. 청룡이 직접 농사를 지은 재료로 대접한 음식이라니. …어제 한 감사 인사정도로 충분한 걸까? 더 황송해하는 반응을 보이는 게 예의에 맞았던 게 아닐까? 박무현이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같이 가보시겠습니까?”












박무현은 자신이 농사짓는 곳이 마치 뒤뜰인 것처럼 말했지만, 협곡에서 전각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바위 언덕을 몇 번 넘어 풍경이 전혀 다른 곳에 도달한 걸 보면 그런 거리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거라면 혼자 다니는 건 엄두도 못 내겠군.




“대나무 길만 지나면 됩니다.”




늘씬하게 자란 굵은 대나무 사이의 길로 안내하며 박무현이 말했다.




“직접 농사를 지으셔야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어제 너무 많이 먹은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예? 어제 너무 적게 드시는가 아닌가 해서 걱정했는데요.”




물돼지라 5인분은 먹어야 하나보다고 놀려대는 부하들이 들으면 뒤로 자빠질 소리를 태연하게 한 박무현이 말했다.




“사실 전 안 먹어도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저를 채워주니까요.”

“?”




신해량은 의아해졌다. 즉 식재료를 키울 필요도 요리를 할 필요도 없다는 뜻인데.




“그러면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취미로 하던 거였는데 그래서 다행이었지요. 덕분에 신해량씨에게 대접할 수 있었으니까요.”




…역시 대단히 황송하게 여겨야 하는 게 맞았던 거 같은데. 신해량은 이제라도 감사 표현을 더 해야하는가 고민하면서 박무현의 눈치를 살폈지만, 박무현은 대수롭잖게 여기는 것 같았다.


대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초록색의 서늘한 빛이 점점 밝고 따뜻해지더니 탁 트인 공터가 나타났다. 박무현의 말대로면 여기가 바로 농사를 짓는 곳이었다.




“…….”




이게…농사짓는 거라고? 신해량은 목적지에 아직 도착을 안 한 건가 싶어 박무현을 돌아봤다. 박무현은 언제 갈아입은 건지, 아니면 이것도 박무현의 능력 중 하나인 건지 이제껏 입고 있던 치렁치렁한 남색의 비단 옷이 아닌, 활동하기 편하도록 소매와 밑단을 짧게 줄인 흰색 상의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딜 봐도 일을 할 채비가 된 차림이었지만 혹시 싶어 그는 한 번 더 물어 확인했다.




“도착한 겁니까?”

“예.”




박무현이 팔을 걷으면서 맑게 웃었다. 하지만 신해량은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눈 앞에 나타난 우거진 수풀을 봤다. 


이 비슷한 곳을 본 적 있는데. 신해량은 심각하게 생각했다. 사람이 떠난지 몇년 된 폐가의 마당이 딱 이꼴이었다. 작물이라고 주장하는 온갖 식물들이 제 멋대로 자라도록 방치한 아수라장에 다름없었다. 이게 농사라고 한다면 농부들이 죄다 거품을 물고 뛰어올게 분명했다.


박무현이 자기보다 더 크게 자란 식물들 사이로 걸어들어가면서 손짓을 했다.




“저기 안쪽에 어제 심은 게 자라고 있을 거에요.”




새로 작물을 심을 때는 다른 작물들 사이에 심지 않는다. 그러면 먼저 자란 잘물의 뿌리에 치이고 먼저 자란 식물들에 가려서 빛도 받지 못한다. …그렇지만 여기는 청룡이 사는…세계니까. 신해량은 애써 그렇게 새기며 납득하려 애썼다.




“…뭘 심으셨습니까?”

“초록색의 열매였어요. 아삭아삭 소리가 나고 물도 많고…”




오이인가? 그렇지만 모를 일이다. 전혀 다른 식물일 수도 있다. 신해량은 판단을 최대한 미루면서 박무현의 뒤를 쫓았다. 


박무현의 말대로 작물들 사이에 새 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노란색의 별을 닮은 꽃과 꽃이 진 자리에 삐쭉하니 자라기 시작한 열매를 보니 신해량이 짐작한 대로 오이가 맞았다. 그렇지만 이쯤되면 식물 학대 아닐까. 다른 식물들 틈 사이에 껴서 한뼘 남짓한 빛을 받으며 넝쿨을 뻗고 있는 오이를 보고 있자니 심란했다. 하지만 여기는 청룡이 사는 세계니까…. 




“어제 심었는데 벌써 이만큼 자란 겁니까?”

“? 예. 당연하지 않나요?”

“…….”




인간세계에선 당연하지…않다. 하지만 신해량은 다시 한 번 새겼다. 여기는 청룡이 사는 세계다.




“열매가 맺힌 거 보니 물을 좀 더 줘야할 거 같네요.”




박무현이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서 물방울 같은게 퐁글 솟아올랐다. 이내 물줄기가 되어 땅을 촉촉하게 적시기 시작했다. 


설마 싶어 신해량은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박무현이 뿌리는 물에서 바닷물 특유의 비린내가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아니겠지? 


신해량은 손을 뻗어 물줄기에 손을 댔다. 혀끝에 대어보자 소금기가 느껴졌다. 바닷물이…맞았다.


작물에 바닷물을 준다고…? 신해량은 되새기려고 했다. 여기는 인간 세계가 아니라…청룡이 사는…




“…….”




실패했다. 신해량은 이마를 짚었다. 여기는 정말 그의 상식과 너무나도 다른 세계였다. 신해량은 농사를 지은 적이 없지만, 식물을 키울때 바닷물을 주면 안 된다는 건 알았다. 이렇게 식물에게 하면 안 될 짓만 하는데…안 죽고 자란다고? 키우는 게 청룡이니까 식물이 알아서 자라는 건가? 물을 다 준 박무현이 신해량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는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신해량씨? 괜찮으세요? 혹시 아픈가요?”

“아뇨, 아닙니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고개를 갸웃하며 박무현이 물었다. 문제…있다. 신해량이 이해할 수 없다는 문제가. 그러나 양 세계의 질서가 너무나도 다른 걸 청룡에게 말해 뭘 어쩌겠는가. 신해량은 고개를 저었다.




“인간은 이렇게 농사를 안 짓나요?”

“…….”




이건 농사가 아닙니다-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말하면 이해는 할까? …아닐 게 뻔했다. 그럼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는가? …박무현이 설명할 때와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신해량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빨리는 안 자라지만, 비슷합니다.”












그 이후로 몇 군데의 작물을 키우고, 박무현이 구별 못해 그냥 두었던 잡초를 뽑아 옮겨심기-그냥 버리려고 하자 박무현이 펄쩍 놀라 뛰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를 해주고 났을 뿐인데 박무현은 시간이 많이 지났다며 귀가를 재촉했다.


갈 때는 언덕을 넘지 않았다. 같은 대나무 숲길을 걸어 나오자마자 전각으로 통하는 문이 나타났다. 신해량은 등을 돌렸다. 길은 사라지고 무성한 대나무숲만 남았다. 


신해량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공간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 어딜 가든 지리적인 정보를 뇌에 새겨넣는 그에게 알기 어려운 세계는 신비라기 보다는 스트레스 대상이었다. 조금 더 신뢰가 쌓이면 이거에 대해 이야기 해봐야겠군.


먼지가 묻은 얼굴과 손을 맑은 물로 가볍게 씻고 나자 박무현이 잠깐이라도 눈붙이라며 침상이 있는 전각으로 안내했다. 아까 박무현이 그를 밀어넣으려고 했던 방 한쪽에는 섬세하게 나무로 조각된 덮개가 있는 침상이 있었다. 양쪽으로는 얇은 천이 베일처럼 드리워져있고 바다의 풍경이 투각으로 묘사된 나무벽이 침상의 머리맡과 발치에 있었다. 


이미 말한 게 있어 신해량은 저항않고 순순히 침상에 누웠다. 바로 잠이 오지는 않아 눈을 깜박이며 덮개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나무로 만들어진 덮개에는 하늘을 나는 용과 기암괴석의 산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아름다운 구름과 그 사이를 뛰노는 온갖 동식물의 풍경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기척에 곁을 돌아보자 박무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이 상태로는 못잘 거 같은데. 그는 박무현을 마주봤다. 박무현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잠이 안 오나요?”

“누가 곁에 있으면 경계하느라 쉽게 잠들지 않습니다.”

“아….”




그렇죠. 무인이라고 했었죠. 박무현이 중얼거렸다. 망설이다가 박무현이 물었다.




“제가 자리를 비키면 주무실 수 있겠습니까?”

“노력해보겠습니다.”




박무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침상 옆의 동그란 탁자에 향로를 올려놨다. 불을 일으켜 향을 피운 박무현이 말했다.




“숙면을 돕는 향이니 도움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주무세요.”

“네.”

“눈 감으시고요.”




신해량은 피식 웃고 눈을 감았다. 기분을 나른하게 만드는 청량한 향이 서서히 실내에 퍼졌다. 정말로 잘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 이대로 잠들면 깰때는 선내의 침대에서 깨는 건가? 


문득 제대로 인사를 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눈을 다시 떴다. 박무현이 눈 감으랬죠, 라고 혼낼 거 같은 표정을 지었다. 박무현이 입을 벌리기 전에 신해량이 먼저 말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입을 벌린 박무현이 멈칫 굳었다. 치켜뜨려던 눈이 순식간에 동그랗게 떠졌다. 눈을 깜박거리는 사이 박무현의 표정이 묘하게 무너지다가 옅은 미소로 갈무리지어졌다.




“…내일 만나요, 신해량씨.”




박무현의 모습이 흐르는 것처럼 실내에서 빠져나갔다. 신해량은 남색의 옷자락이 남긴 잔상을 더듬다 눈을 감았다. 코 끝에 부드럽게 감기는 향에 이끌려 서서히 잠으로 떨어지는 동안, 순간적으로 스쳐간 표정이 내내 그의 머릿속을 감돌았다.













신해량은 눈을 떴다. 두터운 암막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빛과 선내 특유의 냄새가 익숙한 공간에 돌아왔음을 실감하게 했다. 


좀 전까지는 부드러운 향에 취해 잠들어 있었는데. 꼭 백일몽이라도 꾸는 거 같군. 신해량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 안에서 하늘색의 돌이 굴러다녔다. 신해량은 체온에 데워진 여의주를 말없이 내려봤다. 연한 하늘빛이 박무현이 있는 세계의 하늘과 공기색을 떠올리게 했다. 한참 내려보며 있었던 일을 가만히 복기하던 그는 자각도 못한 미소를 지은 채 돌을 꼭 손에 쥐었다. 


…어디서 끈이라도 구해와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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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발로 짓는 청룡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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