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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예언이 떨어져 내렸다. 


영웅과 악한이 맞닿는 순간, 모든 진리가 온전히 제 형상을 드러내고 모든 것이 파훼되리라.


누가 그러한 예언을 내렸는지, 영웅이 누구고 악한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으나 그 예언만은 기이하게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누구도 모르는 숨겨진 영웅은 세상을 사랑했다. 그 영웅의 이름은 히나타 쇼요였다. 그것은 진정 사랑 말고 다르게 표현할 길이 없는 감정이었다. 히나타는 인류애가 많다 못해 차고 넘쳤다. 제게, 혹은 타인에게 저지르는 추악한 악행을 보고도 인간을 싫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는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때로는 상처 받으면서도 다가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이 서로를 다치게 하고 죽이고 강간했다는 이야기를 인터넷 기사로 자주 접했으나 그럼에도 그걸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건 가해자를 향한 이입이 아니라 작고 귀여운 동물들이 싸우며 다치는 모습을 볼 때와 같은 종류의 안타까움이었다. 위에서 아래를 굽어 살피는 듯한 시선이었다는 의미다. 그는 사람, 동물과 같은 모든 생명체는 물론이고 무생물과 풍경마저 사랑했다. 눈이 펑펑 내려서 차가 움직이지 않는 날씨나, 낡은 건물에서 떨어지는 석조 가루나, 미세먼지와 매연으로 가득 찬 탁한 공기마저도. 그 깊은 감정이 일의 시발점이었다. 히나타가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세계는 명백하게 멸망해 가고 있었다. 누구도 그 점을 부정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부지불식간에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염산을 맞은 것처럼 녹아내렸고, 어떤 이는 반짝이는 가루가 되어 공중으로 흩날렸고, 어떤 이는 불타올라 재가 되었다. 눈 앞에서 대화하고 있던 이가 갑자기 죽어버리는 일은 흔해졌으나 그렇다고 해서 쉬이 적응이 될 리는 만무했다. 그 공포를 오로지 영웅인 히나타만이 해결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해결이 아니라 시간을 멸망 전으로 돌릴 수 있었다. 대가는 간단했다. 단 한 명 분의 죽음. 그 한 명 분은 당연히 히나타 쇼요의 것이었다. 어쩌면 죽음을 주고 멸망 전의 세계를 얻을 수 있다면 싼 걸 수도 있어... 세계를 사랑한 영웅은 세계를 위해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히나타는 평범한 이였으므로 그러한 결심을 하기까지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고 싶지 않다는 자아와 그럼 세계가 죽어가는 걸 방관하고 싶냐는 자아가 싸웠다. 그러는 동안 멸망은 심화되어서 이유 없이 건물이 부서지기도 했고, 여름에 눈이 내리기도 했다. 어느 도시에서는 반팔을 입고 물놀이를 즐겼으나 어느 도시에서는 찬바람이 쌩쌩 불며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히나타가 사는 곳은 후자였고, 변화는 느리게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더워 죽겠다며 땀을 흘리는 와중 어디에선가 알 수 없는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고 겨울의 냄새가 났다. 땀이 식으니 추위가 더 잘 느껴져 히나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름 모를 건물 안으로 대피했다.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하늘에서 하얀 것들이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혹한의 여름, 7월에 내리는 폭설, 말이 안 되는 수식어가 있는 그대로 나타났다. 한여름에 내리는 함박눈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나 그 뜻만은 명백하여 히나타의 얼굴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방법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들킨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넌 쓰레기라고 비난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나날이 늘어났다. 히나타는 결국 죄책감과 세계를 향한 사랑을 빌미로 죽기로 했다. 아픈 것은 싫었기에 첫 번째 죽음은 수면제 한 통을 비우고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강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수면제를 비우는 손이 달달 떨려서 바닥에 흘린 알약들마저 다 주워먹고 난간 위에 앉았다. 그믐달이 뜬 날 밤 히나타는 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강에 풍덩 빠졌다. 불행히도 물에 빠진 충격이 컸던 탓인지, 약을 더 먹어야 했던 건지 히나타는 약간 몽롱한 정신으로 차가운 물 속에서 숨을 못 쉰 채 고통스레 발버둥쳤다. 시간은 새벽 4시였고, 그는 수영하는 법을 몰랐기에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라앉기만 했다. 정말 살고 싶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는 게 없어 무력감이 찾아왔다. 히나타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뽀글거리는 숨 방울 뿐이었다. 영웅의 초라한 희생이었다. 

한 사람의 비정상적인 선택 하나로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히나타는 여전히 폐에 물이 들어차는 감각을 생생히 기억했으나, 아무도 이유 없이 사라지지 않는 세계를 보며 홀로 만족하려 했다. 제 죽음이 쓸데없었다고 여기는 것보단 쓸모있었다고 여기는 게 나았으니까. 누군가 이 모든 일을 보았다면 숭고한 사랑이라 칭송했을 테지만 그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지 비난받을까 봐 무서웠고, 내가 사랑하는 곳이 사라져가는 것이 죽는 것보다 조금 더 두렵고 끔찍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세계는 다시 멸망하기 시작했고, 히나타는 다시 죽었다. 멸망하고, 죽고, 시간을 돌리고, 멸망하고, 죽고, 시간을 돌리고. 그 횟수가 자그마치, 240번이었다. 한 사람의 정신이 마모되고 바스라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히나타만이 자신이 망가져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회귀자는 하나 뿐이었으므로 아무도 그걸 지적해 주지 못했다. 영웅은 죽음에 익숙해져 갔으나 단 한 번도 죽음을 기꺼이 여기지는 못했다. 그는 지쳐 갔지만 그럼에도 관성적으로 같은 선택을 했다. 히나타에게 점점 다양한 것들이 사라져 갔다. 배구를 향한 맹목적인 열정, 따스한 날씨에 산책하며 느끼는 평화로움, 친구들과 수다 떨며 얻는 즐거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모습같은 것들이. 반짝임이 사라져 버린 별, 다 타고 뼈대만 남은 건물, 영혼 없는 인간. 그를 수식하기에 거리낌 없는 문장이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부서지는 세계를 응시하며 오늘도 죽어야지, 마치 밥을 먹어야 한다는 듯 여상하게 말하는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았다. 나는 지금도 이 세계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답은 그렇다였다. 다만 사랑과 정확히 반대되는 감정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생겨난 채였는데, 히나타는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240번째로 죽은 회차에, 변화가 일어났다. 히나타는 그 변화의 조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노려보았다. 상대방도 무언가를 느낀 듯 멀리서 탐색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종횡무진 움직이는 지하철 역에서 둘만이 아무 움직임 없이 있었다. 상대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창백한 피부, 날카롭게 잘 빠진 인상의 남자였다. 후드티와 바지, 코트뿐만 아니라 구두마저 새까맸다. 연보라색 져지와 청바지, 주황색 눈과 머리를 가진 히나타에게 색을 다 빼앗긴 자 같았다. 히나타는 저 사람의 정체를 알았다. 어떻게 알았냐 하면 설명할 수 없었으나 보자마자 알았다. 내 앞에, 예언 속 악한이 있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나의 잃어버린 반쪽을 이제야 만난 것 같은, 그립고도 슬픈 기분이었다. 영혼이 사라졌던 인간에게 영혼이 돌아오니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너무 익숙한 감정이 느껴져서 오히려 생경했다. 영웅이 세계를 보며 느끼는 그 감정, 사랑이었다. 온 몸에 전율이 흘렀고 동태 같던 눈이 반짝였다. 저 사람과 함께해야 해. 동시에 닿으면 파멸하게 될 거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닿지 않아도 좋아. 곁에 있기만 하면 돼. 그래서 그는 발을 내디뎠다.

그 시각, 카게야마 토비오도 같은 직감을 느꼈다. 내 앞에, 예언 속 영웅이 있다. 그는 히나타와 반대로 세상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인류애 따위는 말살된 지 오래였다. 부정적인 쪽으로는 상상력이 한도 끝도 없이 뻗어나가는 인간을 보고 있자면 역시 다 죽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만 없으면 환경도 이렇게 파괴되지 않았을 테고, 고작 아이큐 좀 높다는 이유로 동물들을 학대하거나 멋대로 시혜를 베풀지도 않았을 터다. 그는 인간과 함께 있을 때 어떠한 심적 여유도 느끼지 못했다. 무생물이나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햇볕이 내리쬐는 선선한 바람 부는 날에 나가든, 하늘에 닿고 싶은 듯 높게 지은 유명한 빌딩을 보든, 깎아지른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수 같은 절경을 보든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런 카게야마의 심장이 인간 하나로 인해 고장난 듯 뛰었다. 왜 이렇게 심장이 미친듯이 뛰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긴장해서?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차오르는 또 다른 감정은 뭐란 말인가. 긴장 뒤에서 희열이 함께 피어올랐다. 그제야 둔한 카게야마가 눈치챘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전형적인 증상이 아니던가. 평생 인간을 사랑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해서, 눈치챈 후에도 혼란은 가시지 않았다. 지금, 화려한 색채의 영웅이 제게 걸어오고 있다. 닿으면 안 돼. 닿으면 안 돼! 머릿속에서 본능이 경고등을 울렸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될 것 같아 제 손등을 등으로 보내고 꽈악 맞잡았다. 상대는 적정거리를 유지하는 곳에서 발을 멈췄다. 가까이 보고 있노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에게 후광이 나는 것 같다면, 좆같던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면,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이 대체 어디 있겠는가. 더는 아무 상관이 없어졌고, 카게야마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제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과 당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같습니까...?"

"... 그 감정을 사랑이라 정의내린다면, 맞는 것 같아요."

히나타의 동그란 눈에 칠흑같은 흑발 흑안의 남자가 담겨 있었다. 카게야마의 눈에도 오렌지색 남자가 담겨 있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이었다. 양쪽 다, 말이다.

"내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곤 추호도 상상해본 적 없는데..."

"하하, 저도 제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는..."

카게야마는 자조했고 히나타도 따라 웃었다. 이렇게 둘은 반쪽짜리 연인이 되었다. 서로를 안아줄 수도, 손깍지를 낄 수도, 키스할 수도 없지만 사랑만은 진짜인. 처음 만난 날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특이하게 걸고 넘어지지 않는 특이한 연인이.


몇 달 간의 시간이 흐르고 세계에 다시 멸망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무렵, 히나타에게는 취미 아닌 취미가 생겼다.

"카게야마. 나 사랑해?"

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면 카게야마는 늘 똑같이 답했다.

"당연한 거 묻지 마."

히나타는 투박한 날 것의 감정이 좋아 샐샐 웃었다. 둘은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거리에서 적정 거리를 둔 채 서로를 잃지 않기 위해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가을이라 쌀쌀했으나 아직은 그리 춥지 않은 날씨였다.

"얼마나?"

"음... 그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말하려던 중, 인파가 소란스러워졌다. 연예인이라는 단어가 들린 걸 보아하니 누가 나타난 모양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인파에 휩쓸려 히나타와 카게야마가 찢어졌다는 것이다. 어느새 히나타는 전혀 모르는 곳에 와 있었다. 핸드폰으로 연락하려 하다가, 고장나서 수리를 맡겼다는 사실을 상기해 냈다. 문득 그는 둘의 사이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한쪽이 독극물도 아닌데, 서로를 조금도 만질 수 없는 연인이라니. 게다가 세계가 더 부서지면 나는 자살해야 하는데, 걔에게 그런 아픔을 안겨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카게야마가 힘들어할 거라는 핑계를 대며 내 사심을 채워도 되는 걸까? 히나타는 우울한 낯으로 고개를 젓고 뒤를 돌았다. 머리카락에 붙은 껌처럼 더 엉겨붙어서 떼어내지 못하게 되기 전에 가야 했다. 뒤를 돌아서 한 걸음을 옮겼다가 주춤했다. 저 앞에 어두운 색채의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과 보랏빛 입술로 숨을 거칠게 쉬며 히나타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히나타."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자세히 보니 팔다리도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갈 생각이야...?"

히나타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럴 거라고 대답하는 순간 카게야마의 옅은 숨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질 것 같아서였다.

"히나타 쇼요, 네 연인이 묻잖아. 날 버리고 가버릴 거냐고... 물었어."

카게야마의 갈무리되지 못한 감정이 생생히 느껴졌다. 히나타는 울컥하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 버리지 마. 나 버리지 말라고. 제발, 부탁이니까..."

비 맞은 강아지도 이렇게 처량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 표정과 그런 목소리와 그런 떨림은 너무하잖아... 히나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안 버릴게. 안 갈게..."

오로지 나밖에 없는 너를 떠날 수 없음을. 옳고 그른 것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가자. 우리 같이 가자."

그러자 거짓말같이 카게야마의 눈에 부정적인 감정이 자취를 감췄다. 그 극적인 변화를 눈에 담은 히나타는 카게야마가 제 옆에 오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걸었다. 여전히 피부가 창백한 게 만져보지 않아도 손이 차가울 것 같았다. 히나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가게에 멈춰섰다. 장갑을 찾았으나 원하는 종류의 것이 없어서 목도리를 골라 샀다.

"카게야마, 잡아 봐."

"뭐 하려고."

"일단 끝 부분을 손에 한 바퀴 둘러서 잡아."

카게야마는 시키는 대로 했고, 히나타는 반대쪽 끝 부분을 제 손에 감았다.

"이러고 걷자."

카게야마는 그제야 목도리의 의미를 알았다. 둘을 연결시켜주는 목도리를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대다가 꽉 부여잡고 입을 열었다.

"어디 가고 싶냐?"

"밥 먹어야 할 거 같은데, 너 배고프지?"

"응, 엄청."

"그래 보이더라. 헉헉대는 모습 보면 많이 뛰었을 텐데..."

그렇게 연인은 갈색 목도리 양 끝을 잡고 사람 하나 들어갈 공간을 사이에 남긴 채 붉은 낙엽이 지는 거리를 걸었다. 일반적인 커플의 모습은 아니었기에 몇몇 사람들이 시선을 주었으나 그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따듯하다, 진짜..."

얼굴에 점차 생기가 돌기 시작한 카게야마가 편안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히나타도 그 말이 단순히 손이 따듯하다는 의미가 아니란 걸 이해했다. 둘은 밥을 먹고 길을 걷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히나타의 자취방은 어느새 그들이 사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씻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간 히나타는 유리로 된 작은 샤워 부스를 보고 무언가를 떠올렸다.

"카게야마! 이리 와 볼래?"

"왜, 수건 없어?"

"그런 거 아니니까 일단 와 봐."

히나타는 샤워 부스 안에서 카게야마를 맞이했다. 유리에 오른손을 대고 있자 카게야마가 영문 모를 눈으로 거기 손을 올렸다.

"우린 직접 못 만지잖아. 이렇게라도 닿아 보고 싶어서."

그 말을 듣자 울컥한 카게야마의 눈에 약간의 물기가 차올랐다.

"그런 눈 할 필요 없어. 우리는 지금 연인들이 하는 다정한 행위 중 하나를 하는 거라구? 분명 즐거울 거야."

"... 그래."

카게야마는 왼손도 유리에 댔고 히나타도 거기 화답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따듯함이 전해졌다. 느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들은 이게 서로의 온기라 생각하기로 했다. 히나타는 이마를 샤워 부스에 댔고 카게야마도 그렇게 하며 씨익 웃었다.

"네 말이 맞다."

"기분 좋지?"

"응, 정말로."

네 행동 하나하나에 나는 일희일비해. 아까 나락으로 떨어졌던 기분이 지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아. 너도 그럴까? 카게야마는 궁금했다.


카게야마는 그 날 밤 꿈을 꿨다. 히나타가 죽는 꿈이었는데, 자살하는 횟수가 한 두번이 아니었고 몇 십번도 아니었다. 어림잡아 이백여 번 이상이었다. 어떤 회차는 칼, 어떤 회차는 밧줄, 어떤 회차는 낙하, 어떤 회차는 독약, 어떤 회차는 총, 방법도 퍽 다양했다. 그것을 막고 싶었으나 그는 히나타가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히나타의 이름을 불러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몸이 꽁꽁 묶인 듯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리 울어도 눈물 한 방울조차 흐르지 않았다. 꿈 속에선 이게 꿈이라는 것조차 몰랐으니 지옥 같은 시간이었음은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난 그는 침대 옆 바닥에서 일어났고 바로 침대 위 제 연인의 안위를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히나타가 없었고,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방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오니 제 연인은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지만 온전히 안심하기는 일렀다. 확인할 게 있었다.

"히나타."

"엇, 무슨 일이야?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하잖아...?"

"자는 동안 네가 세계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봤어... 셀 수 없는 수많은 죽음들을."

히나타의 손에 들려 있던 칼이 카앙 소리를 내며 도마 위로 떨어졌다. 

"그게... 정말 꿈이야?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고...?"

카게야마가 불안과 두려움으로 충혈된 눈을 번뜩였고, 그 촉은 짐승 같은 구석이 있었다. 딱 들어맞았다는 이야기다. 히나타는 감정을 갈무리하며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돌렸다.

"아냐, 카게야마. 그건 그저 꿈이야."

"너, 이 세계를 누구보다 더 사랑하잖아. 죽어가는 세계를 위해 대신 죽어줄 수 있을 만큼은."

어떻게 그토록 확신할 수 있지...? 히나타의 눈은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다.

"모를 것 같았어? 네가 나를 보는 눈과 세계를 보는 눈이 비슷한데 어떻게 눈치채지 못하겠어... 너라면, 허억, 정말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카게야마의 호흡이 조금씩 빨라졌다. 히나타는 발개진 눈가 위 충혈된 검은 눈망울에 물이 차오르는 광경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히나타, 헉, 대답해. 죽음으로 세계를 구할 수 있다면... 흐윽, 그렇게 할 거야? "

카게야마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는 히나타의 중심을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영웅은 그 찰나에 깊이 갈등했다. 모든 것을 털어놓을까? 날 이해해줄 수 있을까? 내가 또다시 같은 선택을 하면, 카게야마가 날 막지 않을까? 이제 지쳤는데 그냥 다 그만두면 안 되나? 나도 사실 죽고 싶지 않아... 오만가지 생각이 맴돌았으나 히나타는 결국 현상 유지를 택했다.

"...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있어. 근데, 실제로 해본 적 없어."

작정하니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카게야마, 그건 진짜 꿈일 뿐이야. 난 죽지 않았어."

"진짜야? 네가 사랑하는 세계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

"맹세할게."

세계를 구하기 위한 거짓말이니 이 정도는 세계도 용서해 줄 것이다. 그렇게 말해도 카게야마가 안심하지 못하는 걸 인식한 히나타는 방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

"이불은 왜..."

"거기 앉아 봐."

카게야마는 고분고분 말을 따랐고 히나타는 그 위에 두꺼운 이불을 덮어서 감쌌다. 그리고 이불로 감싸인 제 연인을 꽉 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괜찮지 않은 사람에게 하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반복해서 말해주자 불규칙적인 카게야마의 호흡이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왔다. 

"괜찮을 거야..."

너는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시간을 되돌리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죄책감이 히나타를 휩쓸었지만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깨문 입술에서 씁쓸한 쇠 맛이 났다.


세상은 소멸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갔다. 어느 봄날, 싸우다 몸에 칼이 찔린 채로도 말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생겨났다. 좀비다 뭐다 이야기가 많았으나 그들은 딱히 누군가를 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칼에 찔린 상태 그대로 고통만을 느꼈고, 그런 이들이 늘어감에 따라 점차 생과 사의 경계가 흐려진 거라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와 오래도록 함께 있기 위해 미루고 미뤄 왔던 걸 실현해야 함을 직감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덧없이 스러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법이지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러 오세요.)









그는 카게야마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핸드폰을 버려둔 채 차를 3시간 운전해서 한 시골의 폐가 안으로 들어갔다. 50회차인가 60회차인가에 죽었던 장소였는데, 그곳과 어울리지 않는 소음기 달린 권총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카게야마와 만나기 전 미리 구비해둔 것이었다. 히나타는 자살 도구로서 총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총은 잘만 쓰면 아픔 없이 바로 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죽을 때 가끔은 고통을 원하기도 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동안 제가 진정 살아있는 건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던 것이 그 까닭이었다. 죽고 싶지 않았으나 때로는 죽음이 주는 고통이 그를 '살아있다' 고 느끼게 했다. 하지만 이번 삶에선 카게야마가 제게 영혼을 불어넣어줬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총구를 들고 관자놀이에 갖다대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깊게 내뱉었다. 만약 내가 죽고 나서 시간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카게야마는 뒤늦게 내 시체를 발견하겠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히나타는 두려움보다는 지치고 건조한 낯을 했다.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영원히 자고 싶어... 하지만 난 죽어도 영원히 잠들지 못하겠지... 그 순간 밖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천천히 열렸다.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인물이 있었기에, 히나타는 혼비백산했다.

"카, 카게야마, 여길 대체 어떻게... 핸드폰도 두고 왔는데?"

카게야마는 관자놀이에 닿아 있는 총구를 고요히 노려보았다. 차에는 그가 심어 놓은 위치추적기가 있었다. 히나타는 몰랐겠지만 카게야마는 그 뒤로도 제 연인의 꿈을 꾸었고, 그 내용은 날이 갈수록 구체적이 되어 갔다. 이제 그는 안다.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자 과거임을. 

"히나타, 제발 내려 놔."

"그건 안 돼..."

"너 그렇게 못된 사람 아니잖아. 아무리 그래도 연인에게 머리가 날아가는 걸 보여줄 만큼 잔인하진 않잖아..."

가냘픈 애원이었다. 히나타의 동공이 풍랑을 맞은 배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난 이 세계를 지독히도 사랑해. 그래서 어쩔 수 없어..."

"난 이 세계 따위보다 네가 훨씬 더 소중해. 모두 죽어도 너만 살아 있으면 돼."

카게야마는 세계를 멸망시켜서 히나타를 살릴 수만 있다면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둘은 그만큼 달랐고, 그래서 N극과 S극처럼 끌렸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내가 안 하면 모든 이들이 죽는데 어떻게 안 할 수 있겠어..."

"그럼 너는. 그러면 너는! 네가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죽는 건 괜찮아?!"

카게야마가 주먹을 꽉 쥐고 참았던 분노를 왈칵 터트렸다. 그 말이 히나타의 입을 다물게 했다. 괜찮지 않았다. 항상 괜찮은 적 없었다.

"세상에 희생하고자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는데! 너 죽었다 살아나기를 원하는 게 아니잖아. 희생을 원하는 게 아니잖아!"

카게야마의 눈이 슬픔인지 분노인지 알 길 없는 감정으로 새까맣게 불타올랐다. 어느새 총을 쥔 히나타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상태였고, 심장은 두방망이질치다 못해 머리까지 울렸다.

"히나타, 하나 분명히 하자."

뭘 분명히 하자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왠지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말하지 마... 히나타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겨우 한 사람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세계 따위는, 존재 가치가 없어."

그 말이 히나타를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게 했다. 고개가 숙여졌고, 손에서 총이 힘없이 떨어져 내려 바닥에 닿았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 그러면 내가 해온 일들이 다,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잖아..."

히나타는 황망한 얼굴과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부 원망스러웠다. 저런 말을 하는 연인도, 자신도, 부서져 가는 세계도. 그러나 카게야마는 부정했다.

"... 히나타, 그거 무용지물 아니야. 네 선택으로 많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살 수 있었으니, 잘못한 게 아니라고. 넌 그저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을 뿐이고 사랑은 잘못도, 문제도 아니잖아. 우리가 해왔던 게 잘못이나 문제가 아니듯이. 나는 그저 묻고 싶은 거야."

묻고 싶다고? 히나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을 하고 싶어?"

히나타는 그 말에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아주, 아주 오래간만에 들어 보는 질문이었다. 볼에 무언가 흘러내려 이게 뭔가 하고 만져 보았더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 왜, 왜 이러지..."

딱히 슬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자꾸 났다. 아무리 닦아도 계속 흘렀고, 댐에 둑이 터진 듯 멈출 줄을 몰랐다. 고장나버린 인간은 감정의 연유도 잘 자각할 줄 모르는 법이었다. 그제야 눈치챘다. 나는 슬픈 게 아니라 기쁜 거야. 내가 평생 동안 기다려 왔던 말을 들어서. 

"카게야마. 나... 나... 하고 싶은 게 있었어."

"응... 우리 그걸 하러 가자."

"다시는, 두 번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아. 영원히 쉬고 싶어. 근데 어떻게 해야 가능한지를 모르겠어..."

"난 알 것 같아. 나가자."

혼란스러운 낯의 히나타와 달리 카게야마는 평화로웠다. 그는 여유로이 미소 지으며 히나타에게 손짓했다.

"어디로?"

"우리의 무덤이 될 만한 곳으로.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니잖아. 태어날 자리는 우리가 고르지 못했으니 죽을 자리는 우리가 골라야지."

히나타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차에 탄 카게야마가 운전대를 잡았고 히나타가 자연스레 조수석에 앉았다. 몇 시간을 달리는 동안 히나타는 잠들었고, 도착하고 난 뒤 잠에서 깼다. 눈을 뜨니 카게야마가 숨을 죽이고 자신을 다정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깨우지 그랬어."

"마지막인데 급할 거 있냐. 죽기 전에 네 얼굴을 뇌리에 새겨놓고 싶기도 했고."

둘은 차에서 내렸고, 히나타는 강가에 줄지어 늘어진 벚꽃 나무들을 보았다. 청명하게 맑은 푸른 하늘,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 바람에 맞추어 산들산들 춤추는 벚꽃잎이 잔디뿐만 아니라 물 위에도 떠다녔고, 웃고 떠드는 연인들과 친구들과 가족들이 그곳에서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명화에 나올 법한 풍경이었다. 

"어때, 맘에 들어?"

별다른 의문 없이 카게야마를 따라가던 히나타에게 질문이 들어왔다.

"응, 맘에 들어. 무덤이 되기엔 지나치게 예쁜 것 같기도 하지만."

"무덤이니 더 예뻐야지. 죽을 자리가 사나워서야 쓰나."

카게야마가 걸음을 멈췄다. 벚꽃 나무 아래에서, 제 연인이 히나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본능이 위험 신호를 보냈으나, 그도 이 방법밖에 없다는 걸 눈치챘기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주잡았다. 

"아..."

그러자 둘에게 섬광같은 깨달음이 쏘아져 들어왔다.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비명으로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천천히 부서지던 세계가 급속도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녹아내렸고, 가루가 되어 날아갔고, 불탔다. 바닥은 쩌적쩌적 갈라져 땅에 발을 디딘 존재를 집어삼켰다. 먼 바다에서는 바다가 얼어붙어 배를 부서뜨리거나 같이 얼렸다. 

"네가 그래서 이 세계를 그토록 사랑했구나."

"너는 그래서 이 세계를 그토록 싫어했고."

여기까지 오고 나서야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무엇인지 확실히 정의내릴 수 있었고, 히나타도 카게야마가 무엇인지 확실히 정의내릴 수 있었다.

"히나타 네가 이 세계의 창조자니까."

"카게야마 네가 이 세계의 파괴자니까."

창조자와 파괴자가 마주잡은 손은 느리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영웅과 악한이 맞닿는 순간, 모든 진리가 온전히 제 형상을 드러내고 모든 것이 파훼되리라.


예언이 이루어졌다. 둘은 손을 잡은 채 가까이 다가가서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혀를 섞었다.

"우리는 끌릴 수밖에 없는 존재였네."

"그런 게 바로 운명인 거지."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고, 밤이 있으면 낮이 있는 것처럼 창조가 있으면 파괴도 있는 법이었다. 본디 하나여야 할 존재가 둘로 갈라졌으니 둘은 서로가 없으면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둘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어떡하지... 나 지금 너무 행복해서 기분이 이상해."

"나도 그래. 꼭 행복해서 죽어버릴 것만 같아."

히나타와 카게야마는 황홀함에 젖은 채 떨었다. 녹아내리는 와중 할 만한 말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진심이었다. 살면서 이토록 행복한 적이 없었다.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으나 히나타는 참았다. 울면 카게야마의 얼굴이 흐려지는데, 마지막까지 또렷한 시야로 보고 싶었다.

"카게야마, 날 사랑해?"

"... 이 세계를 다 합친 것보다 널 사랑해."

카게야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 주었다.

"다음 생에서도 날 사랑할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너는 어떤데."

"나도야. 그치만 다음 생엔 우리... 멸망 따위 없는 세계에서 평범한 사랑을 하자. 영웅, 악한, 죽음, 멸망, 희생, 예언, 창조자, 파괴자, 이런 거 신경쓰지 말고 여느 연인처럼 싸우기도 하고 서로 마음껏 만져도 되는 그런 평범한 사랑을 해내자. 거창한 건 필요 없이, 쉽고 가볍게."

말할수록 그 모습이 이미지처럼 생생하게 구축되어 히나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싸우는 이유도 배구나 질투심이나 말투가 맘에 안 든다는 류의 사소한 거면 좋겠어."

"... 상상만 해도 너무 좋다."

"우린 할 수 있을 거야. 어쩐지 그런 확신이 들어."

"그럼... 다음 생에도 보자. 히나타."

"그때도 잘 부탁해. 카게야마."

그리고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에게 키스했다. 손이 녹아서 더 이상 깍지를 끼지 못하자 히나타는 팔을 카게야마의 목에 둘렀다.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주변은 완전한 아비규환이었지만 그들만이 평온했다. 마치 태풍의 눈처럼. 날카로운 비명이 난무했으나 그들은 고즈넉하니 조용했고, 무언가 타는 매캐한 냄새가 났으나 그들의 코에는 들어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절망했으나 그들은 행복했고, 모두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그들만이 유일하게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 두 연인은 볕 좋은 날 강가의 벚꽃나무 아래에서 흩날리는 벚꽃을 맞으며 서서히 형체를 잃어 갔다. 녹아내린 그들이 맞닿은 자리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다. 마치 달 표면의 크레이터처럼, 세계의 상흔처럼.










*










먼 훗날, 또다른 세계의 히나타는 울면서 잠에서 깼다. 무슨 꿈인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괴상하게도 감정만큼은 다 느껴졌다. 슬픔, 기쁨, 괴로움, 죄책감, 사랑, 증오와 같은 온갖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뭘 해도 눈물이 멎지 않아서 계속 울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왜 자꾸 눈물이 나오지... 이러고 있으면 카게야마가 어제 싸운 걸로 속상해서 우는 거냐고 물어볼 텐데. 나중에 백퍼 놀림받을 테니 그런 오해는 사기 싫단 말이야. 그런데 옆에서 자고 있던 카게야마의 눈에서도 투명한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히나타는 놀라서 제 연인을 흔들어 깨웠다.

"카게야마. 카게야마!"

"어, 어?"

카게야마는 비몽사몽 일어났고 히나타의 얼굴을 보고 잠이 확 달아났다.

"너 왜 울어...?"

"그러는 너는? 무슨 꿈을 꿨길래..."

"뭐야, 왜, 눈물이..."

히나타가 카게야마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려놓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더욱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서러워져서 이를 악문 카게야마는 같은 표정을 한 제 연인을 강하게 끌어안아야 할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둘은 서로를 숨 막히도록 껴안고 안심한 상태로 한껏 눈물을 뽑아냈다. 내용이 기억나지 않으니 그저 많이 슬픈 꿈을 꿨나 보다, 생각할 따름이었다. 이 세계의 둘은, 아무리 맞닿아도 녹아내리지 않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해피엔딩 아닌가요? 헤헤 제 기준에선 그렇습니다. 독자님들이 어떻게 보실지는 모르겠지만요.

읽어 주시고 구매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독자님들 덕분에 창작하고 있어요. 

불같은 글을 쓰기도 하고 꽃같은 글을 쓰기도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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