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유정의 회상


NAR. 유정

이렇게 집에서 조차 편할 수 없는 나의 생활은 야밤의 수다한판으로 겨우 산소 호흡기를 대고 있다. 쓸쓸한 인생에는 연애만한 윤활유도 없다고 하는데, 그런 윤활유는 대학 때 이후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다.


대학생 유정. 아직은 화장이나 하이힐이 익숙하지 않은 신입생이다.

군복을 입은 남자친구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유정.

걸어가는 길마다 사람들이 둘을 보고 웃거나 손가락질 하며 수근거린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풀고 그 자리에 멈춰선 유정. 남자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안녕.

남자친구는 그런 유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 여자들에게 인사하며 앞으로 걸어간다.


NAR. 유정

신입생 때 복학생 선배와 CC 생활은 다른 사람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구설을 견디지 못하고 결별. 동아리에서 만난 오빠와의 만남은 내가 먼저 취업하면서 멀어진 둘 사이에 상큼이 신입생이 끼어들면서 결별. 두 번의 연애 모두 대학생 때 만나볼 수 있는 전형적인 스타일을 고스란히 답습한 교과서 같은 관계였다. 나름 설레고 풋풋했지만 그렇기에 불안정했던 사춘기 같던 연애들.


조금은 세련되진 유정. 소개팅을 하고 있다.

바뀌는 배경, 바뀌는 남자들. 활짝 웃고 있는 남자들과 어색한 미소의 유정.

마지막에 웃고 있던 남자가 쇼핑백을 건네고, 그것을 받아든 유정.

가벼운 발걸음으로 쇼핑몰을 나선다.


NAR. 유정

그동안 소개팅도 해보고 잠깐씩 데이트도 해봤지만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20%는 부족한 인연들이었다. 소개팅 나갈 때마다 면접에 떨어진 사람처럼 초라해지는 기분도 싫고, 남자를 사귀면서 눈치보고 맞춰가는 것도 버거웠다. 많지도 않은 월급 나눠서 데이트 비용으로 쓰느니 블라우스를 하나 더 사는 것이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 든 이후로는 소개팅도 잘 나가지 않게 되었다.


10. 일본식 카레가게/ 점심시간


열 평 남짓한 가게 앞에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이 50미터 가량 줄을 서 있다. 동료들과 둘, 셋씩 그룹을 이뤄 각자 떠들고 있는 사람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유정과 상지는 직원이 상지의 이름을 부르자 안으로 들어가 앉는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식사를 하면서 대화한다.


유정: 밥 한 번 먹기 힘들다.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맛집은 아닌데.

상지: 그래도 슈퍼에서 컵라면 먹는 거보다는 훨씬 맛있지 않겠니? 잘생긴 총각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디?

유정: 응, 갈 때마다 있던데?

상지: 그 구멍가게가 알바를 쓸 정도로 장사가 되긴 하나?

유정: 거기 담배 팔잖아. 그게 좀 쏠쏠하다던데. 어제는 그 남자, 답답한지 밖에 나와 앉아 있더라고. 그러더니 갑자기 말을 걸더라. (느끼한 남 자목소리를 흉내 내며) ‘라면 좋아하시나 봐요?’

상지: (인상을 찌푸리며) 그렇게 느끼하게 말했어?

유정: 암튼, 자기는 이 동네 이사 온 지 얼마 안됐다. 알바는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할아버지가 일하라고 해서 하게 됐다. 혼자 떠드는 데 그냥 옆 테이블에 앉아서 먼 산을 바라보고 얘기를 하니까 중간 에 끊기도 애매하고 어쩌다 보니 다 들어주게 됐다는 거지.

상지: (눈을 가늘게 뜨고 유정에게 몸을 기울이며) 걔가 사람 낚는 기술이 있네. 그렇게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애들이 무서운거야. 사기꾼 아니 야? 옥장판 사라고 안하디?

유정: (상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들어 보이며) 내가 뜯어먹을 돈이 있어 보 이냐?

상지: 돈 있는 사람만 사기당하냐? 없어도 빚지고 장기 팔아서 당하는 게 사기다 너.


INSERT. 상지의 집 거실.

어두운 거실. 소파위에 아빠다리를 하고 쿠션을 끌어안은 채 시사고발프로그램을 집중해서 보고 있는 상지.


NAR. 유정

고발프로 마니아인 상지는 길을 걸을 때도 부실공사 때문에 건물에서 뭐가 떨어질 수 있다며 간판 밑으로는 안지나 가고, 묻지마 살인이 벌어질까봐 버스 정류장에서도 사주 경계를 하는 걱정이 팔자인 유형의 인간이다. 지상파 방송만 있을 때는 그나마 정상적인 걱정을 했던 것 같은데, 갖가지 미친 일화가 나오는 채널들이 많이 생기고 나서는 군대 가 있는 남동생이 나중에 결혼해서 부모님을 버리고 재산을 빼돌릴지도 모른다는 괴상한 걱정을 시작한 친구가 걱정이 된다.


상지: (나름 진지한 표정) 너 혹시 혼자 산다고 얘기했어? 절대 하지 마. 집에 갈 때도 집 방향으로 바로 가지 말고.

유정: (황당한 표정으로) 길이 하나밖에 없는데? 집 코앞에 있는 슈퍼에서 어떻게 돌아 가냐. 이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고, 그냥 좀 신기했어. 자연스럽게 자기 얘기를 생판 남에게 할 수 있다는 게.

상지: 너희 집 아낙네도 그러지 않냐?

유정: 그 여자는 지 대화내용을 확성기로 푸는 거고.

상지: 요새도 시끄럽게 굴어? 니가 따끔하게 말을 해. 내가 가서 해 줘? (고개를 가로젓는 유정을 보고) 답답아. 그런 몰상식한 인간한테는 똑같이 대해줘야 한다니까.

유정: 똑같은 인간되고 싶지 않네요. 어차피 다음 달에 나간데. 이번엔 진 짜 인가봐. 집도 이미 구했다던데. 근데 돈이 어디서 나는지 몰라. 맨날 그렇게 밤에는 놀러 다니고 낮에 보면 자고 있고.

상지: 부모 등골이나 빼먹는 거겠지. 일도 안한다며.

유정: 몰라. 빨리 나갔으면 좋겠어. 이번에 들어오는 사람은 좀 평범한 사 람이었으면.


11. 동네 슈퍼/ 상지와의 점심식사 전 날, 해가 진 저녁


슈퍼는 유정의 빌라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골목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가로등 불빛과 슈퍼 불빛이 비추는 골목길은 꽤나 서정적인 밤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적당한 키에 마른 몸을 가진 호중은 아직도 학생 같은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자기 혼자 떠들고 자기 혼자 대답하고, 질문은 없어서 크게 거치적거리는 것은 아니지만 유정에게 조금은 당황스런 캐릭터의 등장이다.


호중: (조용히 유정의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며) 라면 좋아하시나 봐요? 혼자 먹으면 맛없지 않아요? 저는 먹으면 바로 찌는 체질이라 라면 은 엄두도 못내요. (살갑게 웃으며) 말라서 살찔 걱정이 없으신가 봐요. 좋겠다.

유정: (배를 옷으로 가리며) ‘뭐야, 여기서 마른 건 지 하나인데. 놀리는 거야?’


INSERT.

배가 볼똑 나온 유정.

받아든 건강검진서에 빨간 글씨로 내장비만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보인다.


기분이 조금 상한 유정은 몸을 호중의 반대편으로 살짝 돌려 앉았다.


호중: (시선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두며) 밤에 밖에 나와 있으면 여유롭 고 좋죠? 저도 밤 산책 좋아해요. 지금은 알바로 묶인 몸이지만. (슈퍼 안 카운터를 가리키더니) 처음 담배 사러 왔을 때 저기 카운 터에서 졸고 계신 거예요.


INSERT, 슈퍼 안

카운터에 앉아 안경을 쓰고 핸드폰을 손에 쥔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할아버지.


호중: 편의점도 아니고 동네 슈퍼에서 뭘 24시간이나 장사를 하시냐고 여 쭤보니까, 그냥 자는 둥 일하는 둥 하고 있데요. 그럴 거면 그냥 편 히 집에서 주무시지 왜 굳이 힘들게 계시냐고 하니까, 할머니가 한 푼이라도 더 벌어오라고 잔소리를 하신다나 봐요. 그 장면이 상상되 지 않아요? (천진하게 웃으며) 괜히 툴툴거리시는 게 전 귀엽더라고 요. 그래서 제가 할아버지한테 돈을 조금만 받을 테니 그냥 저를 쓰 고 들어가서 주무시라고 했어요.


호중은 유정의 눈치를 보는 듯 하더니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말을 붙였다.


호중: 왠지 이 가게 느낌이 좋아요. 따뜻한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서 라 면 드시는 거죠? 이 근처 사세요? 저도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얼마 안됐는데. 집을 못 구해서 지금은 고시원에 살고 있어요. 고시원도 왜 이렇게 비싸요? 고시원 살아보셨어요? 제 방은 창문도 없어요. 암튼 빨리 집다운 집을 찾아야 하는데... 혹시 추천해주실만한 집 없어요? (살짝 유정의 눈치를 보더니) 하긴 그런 건 복덕방에 물어 봐야겠죠?


유정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려한다.


호중: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 드셨어요? 제가 치울게요. 놔두고 가 세요.

유정: (손사래치며) 아니에요, 괜찮아요.

호중: 아닙니다. 제가 알바인데 이정도 서비스는 해야죠. (손은 테이블을 정리하지만 시선은 유정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또 오세요.

유정: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집으로 걸어가며) '왜 이렇게 오바야? 뭐 하 는 사람이야? 밤낮이 바뀌어 생활을 하면 낮에는 잔다는 건데 그 럼 알바만 한다는 건가? 뭐지? 나이도 어려 보이지는 않는데. 곱 상하게 생긴 게 제비인가? 아니지 제비는 밤에 열심히 아줌마들 꼬셔야지, 왜 동네 슈퍼 알바를 해? 그 할아버지도 사람 허술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네. 진짜 저 놈이 이상한 놈이면 어쩌려고 덜컥 가게를 맡기셨지? 하긴 어른들은 저런 싹싹 한 스타일을 좋아하니까. 그런가보지 뭐. 몰라.’


12. 동네 슈퍼/ 막 해가 진 저녁


호중은 가게 밖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별빛 하나 없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호중은 유정이 가게에 들어가서 라면을 들고 나올 때까지 유정을 눈치 채지 못했다. 유정이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야 발견하고는 인사를 건넸다.


호중: 또 오셨네요? 오늘은 날이 좀 덥네요. 여름이 시작됐는지. 저 어제 자는데 모기 엄청 물렸어요. 집에 모기 많지 않아요? 미리 모기매 트를 사놔야지 생각은 하는데, 맨날 까먹고 이모양이예요.

유정: (컵라면의 뚜껑에 손을 올려놓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예, 뭐.

호중: 호응이 미적지근한 것이 저랑은 달리 준비성이 철저한 타입인가 봐 요? 저는 좀 즉흥적인 편이거든요. 그래서 철저한 사람들이 부러워 요. 제가 성공하지 못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인가 싶기도 하고. (괜 히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싶은 호중은 괜히 한 번 웃어 보인다.)

유정: (이야기가 불편하다는 듯이 한 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갑자기 신세 한탄?’(호중의 미소에 대한 답으로 억지대답을 꺼낸다.) 저도 별로 안 철저해요.

호중: 그래도 즉흥적인 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어요. 그렇죠? 전 특히 즉흥 적으로 여행가는 걸 좋아해요. 준비 없이 무작정 떠나는 거요. 그렇 다고 노숙을 하는 건 아니고. 혼자 여행가보셨어요?

유정: (시선을 피하며) 아니요.

호중: 간단하게 무박이라도 혼자 다녀오는 것도 색다를 거예요. 뭐 저도 일이 있으니까 그렇게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요.

유정: (참견이 심한 호중의 입을 막으려 곤란할 것 같은 질문을 골라 던졌 다.) 무슨 일 하시는데요?

호중: 아, 저요? 저는 무용수예요.

유정: ‘갑자기?’

호중: (유정을 잠깐 살피더니) 백수인줄 아셨구나. 저는 현대무용해요. 요새 무용 단 사정이 안 좋아져서 잠시 공연을 못하고 있어요. 그 참에 잠깐 알바를 하고 있는 거죠. 무용공연 본 적 있어요?


생각을 들켜서 조금은 머쓱해진 유정은 시선을 애써 피하면서 조금은 호의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유정: 아니요.

호중: 언제 한 번 봐보세요. 의외로 재미있을 거예요. 몸으로 표현하는 건 말이 생기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언어잖아요. 그래서 그냥 느낄 수 있어요. 무용이나 내용을 몰라도 느낄 수 있죠. 느꼈다면 제대로 즐긴 거구요.

유정: 오히려 그런 ‘느낌’이라는 게 더 어렵지 않나요?

호중: 음... (잠깐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아이들은 신나면 뛰어다니잖아요. 그런데 어른들은 잘 뛰지 않죠. 어디에 늦었을 때 빼고는. 자기가 원해서 자기감정에 벅차서 뛰는 사람은 많이 없어요. 사회적인 체면 때문에 표현이 제한되는 거예요. 중력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춤과 달 리기는 같은 맥락이라고 봐요. 억눌린 표현이 일상이 되다보니 감정 을 끊임없이 표현하는 무용을 보면 당황스럽고 그래서 어렵다고 느 끼는 것 같아요. 낯선 것을 불편해 하는 거죠. 막상 접해보면 그렇 게 불편하지 않은데도.

유정: (어색하게 웃으며) 어렵네요.

호중: 그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보세요.


벌떡 일어난 호중은 긴 팔 다리를 휘적이며 알 수 없는 동작을 이어서 보여줬다. 유정이 보기에 그것은 마치 춤 같기도 하고 술주정 같기도 했다.


유정: (주변에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리며) ‘뭐야, 창피하게.’


사람이 다니지 않는 걸 확인한 유정은 호중이 민망하지 않게 억지로 호중을 바라봐 준다.


유정: ‘그러고 보니 키가 크구나. 무용을 해서 그런지 몸매도 좋고. 내 몸뚱이보고 욕한 거 아니야? 팔 다리가 길쭉길쭉 하니까 멋있네.'

호중: (하던 동작을 멈추고는) 저 좀 멋있죠?

유정: 네?

호중: 그나저나 라면 드시는데 제가 너무 폴짝거린 거 아닌가?

유정: (시선을 피하며) 아니요. 다 먹었어요.

호중: 언제 오는지 미리 알려주시면 제가 세팅해놓을게요.

유정: 괜찮아요. 그냥....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며)

호중: 놔두세요. 제가 치울게요.

유정: 그럼... (당황한 유정은 자리를 피하고자 하는 마음에 급히 돌아 나선다.)


골목을 돌아 호중의 시선에서 멀어지자 진정된 유정은 집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생각한다.


유정: '그냥 백수는 아니었네. 배고픈 예술가, 뭐 이런 건가? 이런 동네 슈퍼에서 알바 하니까 배고프지. 무용을 보러가는 사람이 있기는 하나? 그냥 자기들끼리 돌아가면서 보는 거 아냐? 춤 선생님 같은 거 하는 게 낫지 않나? 실력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닌가? 학생들 가르치면 인기는 있을 것 같은데. 쟤도 할아버지과로 매사가 흐리멍덩한 모양이구만. 저런 남자 만나면 피곤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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