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슬비가 내리길 (上)

 




가을은 하늘 길이 열린 듯 청명했다. 파랑이 터지며 폭죽처럼 노을이 세상을 집어삼킬 때조차 구름을 높이 높이 올려 보냈다. 헤라는 스토브에 올려놓았던 물 주전자로 식탁보를 다림질 하듯 눌렀다. 근심 걱정도 마름질이 된다는 듯이. 갈고 닦는 장인처럼. 헤라는 슬픔을 단련하는 슬픔장이였다. 감정을 두드리고 펴서 날카롭게 벼렸다. 한숨을 쉰 그녀는 찬장에서 찻잎통을 꺼내왔다. 잡히는 대로 찻잎을 주전자에 욱여넣은 차는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엔 덜 씁쓸하고 덜 썼다.

 

그야 벌써 이틀 째 였으니까.

정확히 하자면 42시간 23분 17초.

 

강박적으로 올라가는 타이머의 숫자들을 노려보던 헤라는 창틀 앞을 계속 서성거렸다. 아, 가을은 왜 이리도 바람이 부는지. 제가 찾는 것이 아닌 바람만 자꾸 창을 두드렸다. 라디오에선 여전히 지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이제는 그 소리조차 이명 같았다.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헤라는 라디오를 끌어안고 쇼파에 털썩 기대 앉았다.

 

kk뉴스 1채널에서는 히어로의 실시간 현장 인터뷰가 송출되고 있었다. 선한 인상, 노을을 닮은 붉은 끼 도는 금색 머리카락. 누군가 히어로의 관념을 현실에 구현해낸 것 같은 남자. 스무살이 국가 최고훈장을 수여받은, 아무튼 대단하신 모두의 영웅.

 

⁃ 모두 구해드리지 못 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영웅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사과에 인터뷰어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대폭발이었어요, 히어로. 현장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구해낸 것만으로도 기적인 걸요.

 

그의 녹색 눈이 흔들렸다. 인터뷰어가 뭐라 지껄이든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 히어로, 당신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시민들도 당신 덕에 ...

 

창틀이 인터뷰어의 말을 자르고 크게 덜컹였다. 낡은 철제 경첩이 삐걱삐걱 비명을 질러댔다. 눈물 자국 가득한 창문에 검은 인영이 아른거렸다.

 

그가 돌아왔다.

 

헤라는 숨을 들이키며 놀란 심장을 부여잡고 창가로 다가갔다. 흰 손이 창틀을 잡고 위로 올렸다. 드르륵,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소음을 내며 회칠이 벗겨진 낡은 창에 부딪혔다. 창문이 밀려 올라가는 그 짧은 순간이 억만년은 되는 것 같았다. 긴다리가 먼저 방안에 들어서고, 그리운 얼굴이 마지막으로 드러났다. 고양이 같은 날랜 움직임으로 바닥에 착지한 그는 일어서서 헤라를 바라보았다. 숨이 멈추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만한 남자는 미소 지으며 헤라에게 두 팔을 벌렸다.

 

"한바람, 이 개자식!"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헤라는 달려가 그 품에 안겼다. 심장이 뛰었다. 달아오른 체온이 차갑게 식은 헤라의 몸을 데웠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며 헤라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을 계속했다. 속에서부터 미끄러져 나온 눈물이 바람의 옷자락을 적셨다. 사람좋게 허허실실 웃던 그는 고동색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이마에 입술을 찍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바람이 속삭였다.

 

"미안해, 많이 놀랐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헤라가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가슴팍에서 메아리치는 목소리에 바람은 폐부가 시린 걸 느꼈다. 헤라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그의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아아, 아파. 되도 않는 엄살을 부리며, 바람이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둘러 끌어당겼다.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꽉 껴안고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춰대며 그가 달래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나한테 변명할 기회는 줘야지, 응?"

 

헤라는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눈물이 맺혀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에도 화가 나 손등으로 눈가를 신경질적이게 문질러댔다. 올곧은 보라색 눈에 곤란한 빛이 어렸다. 화가 났다. 짜증이 나 참을 수가 없었다. 지가 뭘, 지가 뭘 잘했다고.

 

결국 헤라는 변명의 기회는 주지 않고 목을 끌어당겨 대뜸 키스했다. 놀란 듯 커지던 눈은 짧게 깜빡이더니 주저없이 헤라를 들쳐안고 쇼파로 걸어갔다. 한창 깊이 타액을 섞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텔레비전을 쳐다봤다. 히어로의 구출 영상 하이라이트가 재생되고 있었다. 폭발하는 건물을 뒤로하고 시민을 안고 나오는 모습.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검은 티셔츠의 등부분을 잡고 앞으로 쓱 벗어내면서 그가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저 자식 나오는 건 왜 보고 있었어?"

 

같이 상체를 일으킨 헤라는 탁자를 더듬어 리모컨을 잡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이 꺼지고 검은 화면에 바람이 비쳤다. 두 사람은 잠시 거울이 된 검은 화면의 서로를 바라보았다. 침묵을 깬 것은 헤라였다. 그의 가슴팍 흉터들을 손으로 훑으며 한숨처럼 그녀가 내뱉었다.

 

"혹시 네 얘기를 할까봐."

 

바람이 헤라와 이마를 맞대고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계속하라는 듯 종용하는 눈빛에 헤라는 결국 또 눈고리에 간신히 그친 눈물을 다시 매달았다.

 

"폭발이 너무 커서, 반정군도 몇몇 휘말린 걸로 보인다고. 제발 그랬기를 바란다고, 라디오, 신문, TV, 모든 곳, 사방에서!"

 

붉게 상기된 볼을 가로지르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모두가 네가 죽었길 바랐다고. 네 잘려나간 시체라도 한 조각 찾으려고 사람들이 혈안이 되어 수색대를 꾸리는데, 너는. 너는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애가. 한 시간, 두 시간, 이틀을 오지를 않고!"

 

바람이 헤라를 밀어눕혔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우는 헤라에게 바람은 계속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얼굴에서 손을 치우자 벌써 눈이 부어 우스운 꼴이 된 헤라가 노려보고 있었다. 혼자 얼마나 ... 바람은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내가 그래서 각오하라고 했잖아."

 

무심하게 뱉으며 그는 헤라의 입술을 깨물었다. 탄성처럼 벌어진 틈을 비집고 들어가며 바람은 물었다.

 

그래서 후회해?

 

헤라는 대답 대신 말없이 목을 끌어안았다. 이제 겨우 저녁 7시였다.

 

*

 

잠귀가 예민한 헤라를 배려해 바람은 최대한 부스럭거리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일어나다가 스텐드에 부딪혀 쿵 소리를 냈다. 속으로 아픔을 삼키며 무릎을 부여잡는 그를 헤라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쳐다봤다.

 

"뭐하니."

 

"깼어? 안깨울려고 했는데. 이틀 동안 제대로 못 잤을 거 아니야."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킨 헤라는 한숨과 함께 이불을 끌어안았다. 그리곤 몇 주만에 겨우 바람의 체향이 묻어나는 이불에 얼굴을 쳐박고는 웅얼거렸다.

 

"또 어디 가게."

 

그제야 바람은 자기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헤라의 곁으로 돌아와 앉은 그는 훌쩍이는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고 이불로부터 떼어내 눈을 맞췄다. 이렇게 울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새 그렁그렁해진 눈가에 입술을 꾹꾹 누르며 그가 말했다.

 

"너 눈 엄청 부었길래. 얼음이라도 가져다 주려고 했지. 안 가. 늦게 온 만큼 더 있을 거야."

 

바람이 눈꼬리를 늘어트리고 아양을 떨며 한참을 설득하고 나서야 헤라는 그가 침대맡을 떠나는 걸 허락했다.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있어. 그가 사라진 부엌 쪽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헤라는 끝내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꿈결에 맡아지는 바람의 피비린내 섞인 소독약 냄새가 겨우 화를 누그려트렸다.

 

잠투정 부리는 갓난애 떼어놓는 엄마 심정으로 부엌에 나온 바람은 바람 나름대로 심란했다. 식탁에 질서정연하게 놓인 것은 식기가 아니라 구급용품이었으니까. 혼자 많이 무서웠겠지. 심장 근처가 아려오는 것은 분명 제가 치러야 할 죗값이리라. 바람은 마른세수를 한번 하고 식탁을 점령한 약품과 거즈를 치웠다. 금속성의 핀셋이 플라스틱과 맞부딪히는 소리가 거슬렸다.

 

바보같은, 바보같은 여자야. 식탁 끄트머리에 겨우 매달린 물주전자를 다시 스토브 위에 올리며 그는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내가 진짜 죽어야 할 텐데, 그땐 대체 어쩌려고.

 

습관적으로 부엌부터 거실까지 어질러진 걸 치우다 보니 헤라를 놓고 나온 근본 원인을 까맣게 잊었던 바람은, 재빨리 얼음 주머니를 만들어 다시 침실문을 열었다. 헤라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깨워주길 원하겠지. 헤라는 ... 자신이 돌아오고 난 후면, 한시도 잠을 자지 않으려 들었다. 심정은 이해했으나, 바람은 헤라가 제 품에서 편히 풀어지는 걸 제일 즐겼다.

 

바람 그 스스로가 모든 것이 긴장된 상태에 있다보니, 헤라가 잠든 모습을 원하는 듯했다. 자기와 정반대의 사람에게 끌린다고 하지 않는가.

 

그거 들어오는 소리에 미간을 찡그린 헤라의 눈두덩이에 바람은 얼음을 올렸다. 갑작스런 찬 기운에 헤라는 움찔 떨다가 손을 뻗어 얼음 주머니를 낚아챘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일어난 헤라는 잠기운에 절어 날카로운 투로 물었다.

 

"시간 많이 끌었네. 그래서, 왜 늦었어?"

 

짐짓 세모눈을 뜨고 바람을 노려보는 듯했지만, 눈이 하도 퉁퉁 부어있어서 죄 허사였다. 은근히 귀엽다고 생각하며 바람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포근한 이불, 익숙한 체향, 낡은 집 특유의 나무 냄새, 따뜻한 나의 헤라 ... 지금은 얼음을 만져 차갑지만. 이불자락울 만지작거리며 바람은 말을 골랐다. 위태로운 행복상태를 조금 더 유지하고 싶었지만, 헤라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불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바람은 말을 골랐다. 어떻게 말해야 헤라가 덜 화내려나.

 

"바로 다음 임무 설명 듣고 가라고 하셨거든, 대부님이."

 

헤라가 얼음 주머니를 그에게 던졌다. 가볍게 받아든 그는 곤란한듯 웃었다. 헤라는 계속하라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고 그를 쳐다봤다. 차가운 얼음 탓에 비닐 소재의 주머니에 물방울이 맺혔다. 헤라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일어나 옷장 앞으로 다가갔다.

 

"한 달 짜리래. 다음 임무가."

 

비닐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자신의 말이 묻히길 바라며 바람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옷장에서 가운을 꺼내던 헤라가 멈칫하는 걸 보니 들린 모양이었지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애쓰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

 

"한 달 짜리라고. 나 이번에 가게 되는 임무가. 그래서 너랑 더 있고 싶으면 당장 듣고 가는 게 나을 거라고, 대부님이 ... 그러셔서."

 

헤라가 침착하게 가운에 팔을 꿰는 동안 바람은 이제 전부 물이 된 얼음 주머니를 협탁에 올려두고 스텐드의 밝기를 올렸다.

 

"그래서 늦었어."

 

그의 흉터 많은 등짝이 오늘따라 심하게 미워 보였다. 헤라는 목이 매었다. 끽해야 임무 중에 뭘 잘못해서 얼차려나 좀 받고 왔을 줄 알았는데. 헤라는 입술을 달싹이다 깨물었다. 이 불행에서 잠시라도 도피하려면 빨리 화제를 바꿔야 했다. 그녀는 괜히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배고파."

 

화제를 전환하자는 시그널을 그가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바람은 표정을 풀고 쿡쿡 웃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쓰다듬어 까치집을 만들곤 바람은 부엌에 나갔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너. 나는 이미 드셨잖습니까. 대충, 아무거나.

 

헤라는 식탁에 팔을 괴고 앉아 가만히 바람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등에 늘어난 흉터 갯수를 세고 있었다. 바람이 파프리카를 써는 것을 본 헤라는 부루퉁하게 선언했다.

 

"너 등에 늘어난 흉터 수 만큼 파프리카 편식할 거야."

 

그 말에 잠깐 식칼을 들고 고민하던 바람은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파프리카를 잘게 썰기 시작했다. 아악, 패배한 헤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게 행복하다고 느꼈다. 식탁에서 그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헤라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확인했다. 바람이 들어오느라 환히 열린 창으로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비가 올때면 더욱 삐걱이곤 하는 창틀의 기분 나쁜 쇳소리를 들으며 창문을 닫으며, 그녀는 상념에 잠겼다. 벌써 이 생활도 4년째였다. 들이친 비가 고인 웅덩이를 발가락으로 건드리며 헤라는 바람을 돌아봤다.

 

그러고 보면 바람은 바람이 아니라 비를 부르는 편이었다.

그와 처음 말을 섞어본 것도 부슬비가 내리던 날이었는데.

 

 *

 

부슬비라도 내리길.

 

그날, 바람은 빌었고, 왜인지 운이 좋아 그의 바람이 실현되는 중이었다. 덕분에 화약이 죄 젖어 육탄전이 이어졌다. 히어로가 던진 실험 병동 C-18의 콘크리트 외벽을 피하며 바람은 생각했다. 히어로는 좋겠다. 저거 다 왕정돈일 텐데, 참 생각 없이 부수어대는구나. 이래서 돈이 많아야…까지 중얼거렸을 때 히어로가 이번엔 실험 병동 C-17의 물탱크를 집어 올렸다. 오, 젠장.

 

굉음과 함께 탱크가 터지고 안 그래도 유사 폐허가 되었던 실험 부지는 일시적 홍수 상태에 빠졌다. 히어로의 현장인력 팀들도 휘말렸는지 전투는 일단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B-17의 팻말과 물탱크 잔해를 짚고 실험 병동 C-18의 유일하게 똑바로 서 있는 벽 위로 넘어가니, 웬 민간인이 쫄딱 젖은 생쥐 꼴로 멍 때리고 있었다. 바람은 한숨을 쉬었다. 여자는 자기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이렇게 테러의 한 가운데 패닉이 와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꼭 한둘은 있었다. 바람에겐 저 여자를 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빌런인데 왜 구조팀이 해야 할 일을 하느냐고, 꼴같잖은 짓 말라고들 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바람은 민간인 피해자가 생긴 날 대부님께 된통 깨졌던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하루 종일 세뇌될 때까지 귀에 못이 박히게 듣던 말.

 

우리는 빌런이 아니야.

 

정부청사에 폭탄을 집어던지고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는 걸 업으로 삼는 제가 그럼 빌런이 아니면 대체 뭡니까,라고 바람은 비웃듯 소리 지르고 싶었다. 대부님의 신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반 정부군이 대중의 이목을 받기 위해서는 폭력 행동이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다만…. 됐다 싶었다. 사람을 살리는 건 좋은 일이지.

 

잔해들 사이로 히어로 쪽 동태를 살피니 침수된 일반 병동 A-21의 사람들을 대피시키느라 정신이 없는 듯했다. 그럼 이 틈을 타서. 바람은 주위를 둘러보며 비거리를 짧게 계산한 후,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목을 가다듬은 후 그는 여자에게 말했다.

 

"저기요, 여기 계시면 휘말려요."

 

여자는 내내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바람을 보았다. 눈동자에는 안광이라고는 없었다. 색이 죽은 파랑이 그를 그저 반사했다. 바람은 바로 깨달았다. 이 여자, 수동적으로 자살하고 싶어 하는군. 바람은 일순 짜증이 일어나는 것을 참으며 화를 삭였다. 대부님의 민간인 대응 매뉴얼이 A부터 Z까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매뉴얼 1번. 베이직 앤 베스트. 언제건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할 것.

 

"자살을 하려거든 다른 데 가서 하세요."

 

상냥하고 친절하게 바람은 빈정거렸다. 여자의 눈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 올곧은 자살 의지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에휴. 어디다 데려다 놓아야 이 여자가 안 죽을까. 대피로를 다시 계산하던 그에게 여자가 물었다.

 

"왜 나를 구해요?"

 

대피로 오-k. 일반 병동 D-6이 망가지지 않은 채 자랑스럽게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바람은 히어로처럼 날지는 못했기에 밟고 갈 외벽 잔해들을 눈에 익혀 두어야 했다. 머릿속으로 루트를 한번 그려본 바람은 다시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심정도 이해는 간다만.

 

"당신은 빌런villan이잖아요."

 

"실례."

 

바람은 가볍게 무시하고 여자를 들쳐 안았다. 여자는 딱히 저항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특이하네.

 

"떨어트리진 않을 거지만, 그래도 어딜 좀 잡는 게 마음의 안정에 도움이 될 겁니다."

 

전에 이렇게 말했더니 내 머리채(가발이었지만)를 잡은 대머리가 한 명 있었지…. 잘 있으려나. 잡생각을 하며 바람은 여자가 어딘가를 잡을 시간을 딱히 주지 않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고공 시간이 길어질수록 여자가 떠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봐, 결국은 죽기 싫은 게지. 바람은 달리는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사람은 살릴 때가 죽일 때보다 유희에 가깝다.

 

일반 병동 D-6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단숨에 도착한 그는 떨고 있는 여자를 내려주고 장비에 묻은 먼지를 털며 다시 친절 모드를 장착했다.

 

"저희는 왕정과 싸우는 거지, 함께 나라에서 살아갈 시민들과 싸우는 게 아니랍니다. 그리고 저희는 반反정부군이지 빌런이 아니에요. 시민 여러분께 해를 입힐 생각은 없습니다."

 

바람은 숨도 쉬지 않고 매뉴얼을 읊었다. 비가 와서 마스크의 접착면이 간지러웠다. 철제 장갑의 손등 부분으로 뒷머리를 툭 툭 치며 그는 말을 이었다.

 

"저쪽으로 가시면 시 외곽에 닿을 거예요. 여기에 있지 말고 이동하세요. 거기에 가면 도와줄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바람은 미련 없이 돌아 서서 병동 건물을 짚고 가볍게 뛰어넘었다. 히어로 쪽을 보니 구조작업이 얼추 끝난 듯했다. 이런 건 타이밍이 잘 맞아서 좋다니까. 어찌 보면 우리는 최고의 파트너일지도…. 바람은 귀 안쪽의 교신기를 눌러 동료와 연결했다. 이명 같은 연결음이 이어지다 끊기길 반복했다. 이윽고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변조된 음성이 들려왔다.

 

-상황 보고. 실험 병동 C-18 잔해에 민간인 둘, 우리 쪽 둘. 넷 모두 경상 추정, 잔해 사이 틈에서 생존한 듯함. 잔해가 대피 경로를 막아서 갇힘. 히어로 측에선 구조 의사 없음.

 

바람은 이를 사리 물었다. 박살 난 콘크리트들 사이로 숨어들어가며 그는 후두부의 교신기를 눌러 대답했다.

 

-지원 가는 중. 정찰 병력 부탁한다.

 

 

도착한 곳에서는 히어로가 보란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그를 오른쪽으로 굴러 피하며 울분을 토했다. 뭔 놈의 히어로가 민간인을 미끼로 빌런을 잡냐고. 그거 내 역할 아니냐?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일반인들은 모를 테다. 저 히어로가 그런 놈인지. 히어로 옆에 펫처럼 둥둥 떠다니며 붙어있는 중계용 드론 카메라를 힐끗 본 그가 한숨을 쉬었다.

 

히어로가 내리꽂은 주먹에 바람이 서 있던 콘크리트가 금이 가며 부서졌다. 무너지는 발판을 세게 밟고 도약한 바람은 그대로 히어로의 멱살을 잡았다. 그가 자신을 원하는 곳에 떨어트릴 수 있도록 대롱대롱 매달려 방향을 조절하며 주먹을 피한 그는 가까스로 허리를 꺾어 몸을 날렸다. 일명 히어로-플라이트-서비스. 바람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기술명이다. 날 수 없는 그가 종종 택하는 이 방법은 별점 0점을 주고 싶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고객 응대 서비스를 자랑했다. 물론 바람은 무임승차 승객이지만. 어쨌든 거지 같고 위험하지만 장거리 이동을 위해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자기가 또 항공기로 이용당했다는 걸 깨닫고 분노했는지 히어로는 거칠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람은 근력도 상대적으로 약하고 날지도 못했다. 아시다시피 날아다니는 것은 선한 쪽의 특권이니까. 다만 그는 빨랐다. 히어로의 두 배 이상. 그래서 그는 현존 최강 인류라고 불리는 저 괴물과 여러 번 붙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히어로는 빌런인 그와 상성이 좋았다. 저 힘 세고 날아다니는 놈은 머리가 조금 부족한 듯했으니까. 바람은 누울 곳을 보고 자리를 뻗었다. 히어로가 한 방 한 방이 크리티컬 히트인 펀치를 그에게 찍어 올 때마다 슬쩍 슬쩍 비껴 나가도록 유도하며 사람이 갇혀 있는 콘크리트를 원하는 모양으로 쪼갰다. 가끔 히어로는 부러 빗겨 나가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오히려 고맙고. 바람은 시선을 힐긋 돌려 콘크리트의 부서진 모양새를 살폈다. 슬슬 나도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제야 바람은 놀리듯 구는 것을 그만두고 실험 병동 C-18의 한쪽 벽이었던 것을 들어 올려 히어로 쪽으로 던졌다.

 

첫 번째로 들어 올린 것에서 민간인 두 명이 구출되었다. 두 번, 세 번째에서야 동료 한 명이 절뚝이며 걸어 나갔다. 조각 케이크처럼 잘린 흰 부분을 집어 드는데 이명과 함께 교신기에 대부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안한데.

 

바람, 스나이퍼 부대가 투입되었다. 철수하도록.

 

그리고 따끔한 전기와 함께 후두부 쪽의 교신기가 터졌다. 대답은 듣지 않겠다는 무조건적 명령. 바람은 목 부분을 매만졌다. 저기 아직 한 명이 남아있는데…. 히어로 쪽에서 구해주겠지, 구해주고 사형 선고를 하겠지. 익숙한 레퍼토리에 힘이 빠졌다. 악문 입술 새로 피 맛이 났다. 그게 실책이었다. 그 순간 팅 하는 소리가 났다. 초인종이 울리듯이. 그는 상냥하게 저격당했다. 급하게 피했지만 결국 칼날이 바람의 어깻죽지를 크게 베고 지나갔다. 오른쪽 어깨에 출혈이 시작되며 힘이 빠졌다. 전장에서 쓸데없는 감상은 자신의 파멸을 초래한다. 몇 번이고 훈련받았음에도 오늘따라.

 

아, 오늘 진짜 일진 좆같네.

 

들고 있던 잔해가 미끄러져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위치가 노출된 바람에게 히어로의 지원병력이 유리 파편포를 쏘았다. 거의 다 스치는 정도에 머물렀지만, 몇몇 조각이 상처 부위에 박히는 걸 피할 수 없었다. 파편포의 장전시간이 긴 게 다행이었다. 공교롭게도 아까 구해준 여자를 데려다 놓은 곳으로 짜인 도주 루트를 밟게 되었다. 잔해가 많아 숨바꼭질이 가능했다. 혼선을 주고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답지 않게 숨을 몰아쉬며 흐릿한 시야를 바로 보려 눈을 비비는데, 아까 그 여자가 아직도 있었다.

 

“뭐야 당신, 아직도 안 가고 뭐….”

 

“그렇게 지혈하면 파편이 파고들어요!”

 

여자는 죽은 눈이었던 아까완 달리 좀 살아있는 목소리로 소리 지르며 그에게 다가왔다. 바람은 지혈하던 손을 들어 여자의 입을 막으며 속삭였다. 시야가 어지러웠다. 손에 엮인 것이 여자의 머리카락인지 자신의 빠져나가는 목숨인지 헷갈렸다. 헐떡거리는 숨이 섞였다.

 

“조용히 해, 들키면 이번엔 진짜 죽게 생겼으니까….”

 

여자는 막무가내였다. 출혈이 컸던 탓에 힘이 빠지는 바람의 손을 치우고 대뜸 그를 부축했다. 과출혈로 하얗게 질려가는 그를 여자는 어디서 난 힘인지 끌고 바로 앞의 낡은 건물로 들어갔다. A118이라고 적힌 문패를 읽다가 바람은 결국 정신을 잃었다.

 

 

 

 

 

 

 

공방주인.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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