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서기 전, 괜히 현관 앞에서 멈칫했다.

몸을 돌려서 천천히 돌아본 방은 지난 12년 동안 달라진 부분이 거의 없었다. 몇 년 전 중고로 바꾼 냉장고의 시원찮은 소음만 들어찬 공허한 공간에는 이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거의 지워진 참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묵직한 가방 안에는 이곳에서 지내온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제 이 장소에 대한 미련은 없다.

분명히 미련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걸음을 떼지 못하는 건, 미약한 집착 때문이 아닐까.

이달재는 잠시 고민하다가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밀어젖히자, 젖은 공기가 들숨을 타고 몸속에 흘러들었다. 축축하고 서늘한 감각. 어쩌면 지금 이 한 발짝은 죽음으로 향하는 어리석은 고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달재는 오늘 이 작고 정든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송태섭이 임무 도중 실종된 지 벌써 24일이 지났다.

임무 도중 실종된 사도(使徒)가 30일 안에 복귀하지 못할 경우, 국가 재액(災厄) 관리청은 해당 사도를 사망 처리하여 국가유공자로 대우한다.

공식적인 송태섭의 사망 선고까지 이제 꼬박 엿새가 남은 셈이었다.

건물을 나서자 달궈진 아스팔트 도로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늘진 현관을 넘어서 계단에 내려서자마자 어딘가에서 불어든 메마른 바람이 호흡을 틀어막았다. 억지로 심호흡하듯 가슴을 크게 부풀려 숨을 들이쉰 뒤에야 이달재는 걸음을 옮겼다. 군데군데 바닥을 차지한 그늘에 들어설 때만 겨우 숨통이 트였다. 머릿속에서부터 흘러내린 땀방울이 머리카락 끝에 맺히는 시간 동안, 이달재는 쉬지 않고 걸었다.

보호구역과 위험지역 사이에 위치한 이곳은 불과 이틀 전에도 재액의 습격이 있었다.

도로에 널브러진 부서진 자동차와 이리저리 쓰러진 채 말라버린 가로수가 길을 가로막을 때면, 이달재는 군말 없이 걸음을 돌렸다.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를 피해서 길을 찾아 나서는 동안 몇 번이나 고개를 들어서 방향을 가늠했다. 저 멀리 높게 솟은 철탑이 바로 표지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달재가 향하는 곳은 철탑 너머의 위험지역이었다. 24시간 사도의 비호 아래에서 안전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보호구역과 달리, 위험지역에는 그 어떤 사도도 상주하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이곳에 떨어진 재액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제멋대로 주변을 헤집어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

그러나 이달재는 그저 흘러내리려는 가방끈을 고쳐 쥔 채로 철근이 튀어나온 콘크리트 덩어리를 타고 올라, 걸음을 옮겼다. 철탑까지 가는 길은 조금 번거롭기는 했지만, 그리 고되지 않았다. 애초에 보호구역 바깥에서 살아온 세월이 이미 반평생에 가까웠으니, 그리 유난스럽게 투덜거릴 필요가 없는 탓이다. 그래, 이달재의 삶은 언제나 이렇게 반쯤 부서진 채로 영위되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보루에 다다랐다.

이달재는 앞으로 엿새 안에 송태섭을 찾지 못한다면 죽을 생각이었다.

 

*

 

정확한 시기를 명확하게 알 수 없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하늘에 호수가 생겨났다.

아주 조그맣게 시작된 하늘 위의 물웅덩이는 점점 몸집을 불리더니, 곧 거대한 거울처럼 지구의 땅과 바다를 비추었다. 마치 하늘 속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듯한 착각. 하늘에 호수가 생겨나기 시작한 이후로 많은 과학자와 기상학자들이 이 기묘한 현상의 원인을 찾아내고자 했지만, 아무것도 밝혀낼 수 없었다.

결코 땅으로 쏟아지지 않는 하늘 위의 호수. 어떻게 성층권 위에 물이 고이게 되었고, 어째서 하늘 속의 호수는 지구의 대류현상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인지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한 채로 3년가량 흘렀을 무렵에 상황이 급변했다.

잔물결 하나 없이 거울처럼 고요하던 하늘 속의 호수가 어느 날 크게 일렁거리더니 이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기묘한 것을 쏟아냈다. 커다란 눈알과 거대한 날개로만 이루어진 그것은 마치 중세 유럽 시기에 그려진 천사의 형상을 닮아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신의 사자라고 불렀고 도 다른 누군가는 악마의 권속이라고 칭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하늘 위의 호수에서 쏟아져 나온 그 기묘한 생명체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헤엄치는 것처럼 커다란 날개를 퍼덕거리며 내려와서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공격했다. 커다란 눈알을 열어 톱니 같은 이빨을 드러낸 채 길가의 짐승을 물어뜯는 일은 예사였고, 거대한 날개와 덩치로 건물을 부수거나 가로수와 전봇대를 후려쳐 뽑아버리기도 여러 번이었다.

이렇게 공격적인 미확인 생물체가 등장하는 지역에는 대중이 없었다. 이미 하늘에 존재하는 호수가 지구를 온전히 감쌀 만큼 커다랗게 퍼져버린 탓에 괴물이 닿지 않는 곳

그것은 마치 하늘을 헤엄치는 것처럼 여유롭게 땅으로 내려와서 사람들을 공격했다. 그것이 오직 인간만 공격하는 것은 아니었다. 커다란 눈알을 열어 톱니 같은 이빨을 드러낸 채 길가의 짐승들을 물어뜯기도 했고, 거대한 날개로 건물을 부수거나 가로수와 전봇대를 후려쳐 뽑아버리기도 여러 번이었다. 이렇게 공격적인 그것이 출몰하는 지역은 대중이 없어서, 전 세계의 모든 군대는 자국민을 지켜내기 위해 갖은 무기로 중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총과 수류탄, 미사일을 맞으면 그것은 상처를 입고 주춤거리면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 호수 속에 숨어버렸고, 약간의 회복기를 보낸 이후에는 다시 땅으로 내려와서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을 공격했다.

그리고 이 끊이지 않는 공방 속에서 서서히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이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본디 인간이 지닌 적 없었던 힘으로 발현된 이능력(異能力)은 그 종류가 무척이나 다양했다. 원소를 조작해 수분을 얼리는 빙결부터 매개체를 이용한 발화와 공기의 흐름을 이용한 기체(氣體) 조작 능력, 신체 강화 또는 변형 능력, 정신 감응 등의 여러 가지 능력을 지닌 이능력자(異能力者)들은 자연스럽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기괴한 괴물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서구권에서는 이들을 자연스럽게 히어로로 칭송하며 떠받들었지만, 동아시아권에서는 이들을 자연스럽게 국가 기관으로 빨아들였다. 재액 관리 기관인 재액 관리청에 속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날개 달린 눈알들을 전담하게 된 이들은 통칭, 사도(使徒)라고 불렸다.

 



사랑의 이름으로

 



먼지로 뒤덮인 거리를 지나며 이달재는 잠시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무시한 채 그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본래대로였다면 이달재는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끔 수도관이 말썽을 부리지만, 그럭저럭 아늑한 자신의 작은 집에서 말끔하게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에 반쯤 말라버린 식빵과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신 뒤에 보호구역에 있는 직장으로 출발하기에 알맞은 이 시간, 이달재는 지금 보호구역과 정반대 쪽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본래 이달재가 다니던 직장은 바로 재액 관리청의 지원관리실이었다.

지원관리실에서 담당하는 업무는 다양했다. 기본적으로 사도 선별을 위한 시험 일정을 조율하는 일이나 선별된 사도의 능력을 검증할 적절한 시험관 주선, 사도 자격증 발급을 위한 행정 업무. 혹은 재액으로 인한 공공물의 붕괴, 분실을 해결하기 위한 피해 통제. 사도의 활동을 보좌하기 위한 갖은 잡무 처리 등. 사실상 재액 관리청 내의 잡무 담당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송태섭은 언제나 지원관리실이 가장 좋은 직장이라고 말했다.

‘안전하니까.’

재액 관리청 지원관리실에 소속된다면 당연히 국가 기관에 속한 공무원으로 채용되는 데다가 재액 관리청이 보호구역 내에 존재하고 있었으니, 지금 같은 시기에 이보다 더 안전한 직장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때문에 지원관리실의 정원은 항상 만원이었으며, 특별히 재액과 관련한 기타 사고가 아니라면 제 발로 나서서 퇴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꿈의 직장으로 분류되는 이곳을, 이틀 전 이달재는 스스로 박차고 나왔다.

송태섭의 실종 소식을 전해 듣고 꼬박 일주일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달재는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반쯤 바스러진 건물의 그림자를 따라 걸으며 이마를 훔쳤다.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걸음을 재촉하는 동안, 이달재는 자신의 퇴사 소식에 게거품을 물고 소리칠 송태섭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아마, 엄청나게 실망하겠지.

이달재는 쓴웃음을 지었다. 눈썹을 삐딱하게 만들고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을 잔뜩 풍길 송태섭을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내온 세월이 벌써 16년을 훌쩍 넘어선 탓이었다. 근래에는 송태섭이 지난한 짝사랑을 청산하고 연애를 시작해서 그다지 자주 연락하고 지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머릿속에서 그려낸 송태섭은 마지 어제저녁에도 만났던 것처럼 생생하기만 했다.

부서진 건물 잔해를 피해서 망가진 자동차의 보닛을 밟고 넘어가던 이달재는 순간 크게 휘청거렸다. 먼지가 쌓인 보닛이 제법 미끄러웠다. 밑창이 두툼하고 단단한 신발을 신었다고 너무 안심하고 있었던 건지, 갑작스러운 사고에 이달재의 심장이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거세게 펄떡거렸다. 아직 위험지역에 다다르지도 못했는데, 벌써 이렇게 나약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달재는 입술을 꾹 깨물고서 얼른 보닛을 타고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바닥에 휘어져 나온 철근이나 부서진 유리 조각을 피해 걸으면서 이달재는 연약한 심장을 다스렸다.

재액을 직접 마주한 것은 무려 16년 전이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움츠러들면, 이달재는 송태섭을 떠올렸다.

재액이 두렵다거나,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것은 송태섭도 마찬가지였다. 16년 전 사도와 구조대상자로서 처음 만나던 날, 송태섭은 양친의 죽음 앞에 석상처럼 굳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이달재를 사각지대로 이끌어서 차분한 목소리로 달래주었다.

“네가 나쁜 게 아니야. 저 괴물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은 없어. 사도인 나도 매번 무섭거든.”

부모님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내내 굳어 있던 얼굴이 그제야 일그러지며 눈물을 쏟아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송태섭의 말은 다정했고, 부드러웠으며, 또 따뜻했다. 응급처치와 구조대상자 보호를 위해 전담 이송 팀이 오기 전까지 짧은 시간 동안 송태섭은 이달재에게 내내 다정했다.

이달재는 눈앞의 사도가 자신과 동갑이었으며, 그 역시 몇 년 전 사도로 활동했던 아버지와 형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송태섭 또한 이달재의 생일을 기념해서 외식하러 가던 도중에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과 전부터 사도를 동경하여 이능력자로 발현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송 팀이 직접 사체를 수습하는 동안 잠시 떨어져 있었던 송태섭은 자신의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이달재의 손에 넘겨준 송태섭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능력을 발현하는 건……. 생각보다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닐 거야.”

당시에는 몰랐다, 이능력을 발현하기 위한 주요한 동기는 바로 발현자 본인의 강력한 감정이라는 걸. 이달재가 차후에 겨우 해외의 사례나 논문을 찾아보고 나서야 알게 된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탓인지. 머리 하나는 차이가 날 정도로 키가 큰 어른들 사이에서 16살의 송태섭은 유독 앳된 얼굴을 하고서도, 더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이달재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송태섭의 말에 수긍했다. 그러자, 송태섭은 나중에 꼭 연락하기로 약속까지 받고 나서야 다른 사도의 곁으로 돌아갔다. 점점 멀어지는 등은 분명히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작았을 테지만, 이미 그때부터 이달재는 송태섭이 자신보다 훨씬 크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형제 없이 외동으로 자라난 이달재에게 있어서 또래를 향한 동경은 몹시도 생소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달재는 미련을 놓지 못했다.

송태섭과의 만남이 잦아질수록, 서로를 향한 거리감이 줄어들수록, 이달재는 언젠가 자신도 이능력을 발현하게 되지 않을까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재액이 날뛰는 위험한 현장으로 날아가는 송태섭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어떻게든 곁에서 돕고 싶다는 마음가짐으로 재액 관리청 지원관리실에 입사했지만, 역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만 다시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어째서 이능력을 발현하지 못했을까.

이미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능력을 발현한 시점이다. 이능력 발현에 필요한 강력한 감정이라는 것 역시 항상 커다란 위기 앞에서 끌어올릴 필요는 없다는 것 역시 밝혀진 시점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 이능력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만 발현되는 기적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행복감으로, 누군가는 안도감으로, 다른 누군가는 사랑으로 기적을 빚어서 이능력자로 발현한다.

그래서 지금 이달재는 여전히 의아했다.

지난 16년의 세월 동안 닥쳐온 그 어떤 감정으로도 이능력을 깨우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 눈앞에 닥친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건가?

이달재는 위험지역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커다란 재액 앞에서 마치 16년 전의 그날처럼 굳어 있었다.

건물 사이의 틈으로 드러난 새파랗게 빛나는 동공에 이달재의 굳은 얼굴이 비쳐 보였다. 하늘의 호수에서 내려오는 재액에는 필히 날개가 달려있을 테지만, 그 크기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인지 정작 날개가 어디쯤 붙어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하늘을 짊어지는 형벌을 받았다는 신화 속 아틀라스의 눈동자를 마주한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이달재는 본능적인 거부감과 두려움에 잠시 호흡을 잊고 있었으나, 곧 재액의 눈동자가 옆으로 크게 벌어지더니 그 안에 상어처럼 여러 겹으로 자리 잡은 치열에 뾰족하게 돋아난 이빨을 내보였다. 쩍 걸라진 눈동자 속의 이빨 밑에서부터 뻗어 나온 촉수가 몸에 닿기 직전에, 갑작스러운 힘이 이달재를 뒤로 잡아당겼다.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챈 것처럼 속절없이 끌려가던 이달재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가 휑하니 비어 있는 등 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도인가? 그렇다면 재액에서 벗어났다고 멋대로 안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위험지역에 일반인이 드나드는 것은 거의 불법이나 다름없었다.

말로는 위험지역에 일반인의 출입을 삼가기를 권고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위험지역에 재액 발생 비율이 높은 만큼 이곳은 사도의 활동 범위에 속하게 되므로, 여차하면 작전 구역 안에서 발견된 일반인에게 공무집행 방해죄를 물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아가던 속도가 줄어들자, 이달재는 주변에 있을 사도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발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갑자기 왼쪽 팔을 낚아챈 누군가의 힘으로 인해 이달재는 거의 건물 외벽에 처박히듯 밀쳐졌다. 가방부터 벽에 닿아 큰 충격은 면했지만,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의 충격은 남았기에 자연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던 이달재는 곧 바닥에 처박히듯 날아든 촉수를 보고 경악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재액의 촉수 역시 만만찮았던 모양이었다.

“움직여.”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옆에는 키가 큰 남자가 재액 관리청의 문장이 새겨진 검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다. 이틀 전만 해도 이쪽 지역에 따로 사도가 파견될 예정은 없었을 테지만, 방금 마주한 재액의 출현 때문에 긴급하게 파견된 대상자가 아닐까 싶었다. 이달재는 우선 틈을 봐서 도망칠 생각으로 사도의 말을 따라 재빨리 걸음을 옮겼지만, 재액이 훨씬 재빨랐다. 어느새 건물을 거의 으스러트리면서 골목을 빠져나온 재액이 거대한 날개를 휘두르며 허공으로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하얀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거리에는 희뿌연 먼지가 일어났다. 곧이어 길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야가 가려지자, 사도는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곧바로 왼팔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더니, 귓가에 장착된 통신기로 무전을 시도했다. 구역 번호와 현재 상황 따위를 설명하던 그의 시선이 힐끗 이달재에게 닿았다.

“그리고 일반인을 보호하는 중.”

무전 너머에서 위험지역에 일반인이 왜 있냐는 식의 내용이 들려왔다. 당황한 상대가 꽤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이달재는 짐짓 못 들은 척하면서 눈앞에서 다가오는 재액에 집중했다.

앞으로 재액과의 거리가 채 500m가 되지 않는 상황.

앞에 있는 사도의 능력으로 이곳까지 옮겨져 왔던 걸 감안해서 그의 능력을 단순한 염동력으로 추정한다면 지금 그다지 여유로울 수 없었다. 재액을 염동력으로 해치운 사례가 극히 드문 탓이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서 염동력을 다루는 이능력자의 능력이 부족한 탓인지, 재액을 염동력으로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어쩌면 위험지역을 계속 돌아다니면서 도망치는 게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을 무렵, 앞에 있던 사도가 나지막하게 말을 걸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말고, 등 뒤에 붙어.”

옆쪽의 좁은 골목길로 살짝 몸을 틀었을 뿐이었는데, 이미 다 알아차린 것처럼 말을 거는 행동에 놀라 쳐다보니, 그는 이달재와 잠시 눈을 맞췄다. 그늘진 새카만 눈동자는 지독히 무심해 보였다.

이어서 “잠깐이면 되니까.”라는 말을 끝으로 사도의 왼팔이 하얗게 타오르듯 빛이 나더니, 이내 그 빛이 여러 갈래의 줄기가 되어 재액을 향해 쏘아졌다. 마치 거대한 빛의 화살처럼 앞으로 날아간 그 힘은 곧 주변을 몇 바퀴 돌았다가 재액을 완전히 옭아맸다.

거대한 날개와 벌어진 눈동자가 빛에 감싸여 속박되자, 재액은 기묘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하지만 재액의 움직임을 봉쇄했다고 해서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달재가 슬쩍 눈치를 보듯 사도를 올려다보자, 그가 경고했다.

“더 가까이 붙어. 휘말리고 싶지 않으면.”

거의 달라붙을 정도로 사도의 등에 매달렸을 때, 갑자기 일순 주변이 새카맣게 변하나 싶었더니, 어딘가에서 들이닥쳤는지 모를 굉음과 함께 빛줄기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가히 천벌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벼락을 맞은 재액이 한층 더 기묘한 비명을 질러댔지만, 번개를 한 번으로 멎지 않고, 여러 번 하늘에서 떨어졌다.

16년 전에는 이런 광경까지 눈앞에서 지켜본 적은 없었다. 그때 송태섭이 구출에 성공한 구조대상자는 이달재뿐이었고, 송태섭은 이달재를 품에 안고 곧바로 하늘을 날아올라서 재액의 시야에서 벗어났으니, 남은 일은 오롯이 어른들의 몫이었다. 그래서 이달재는 눈앞의 거대한 재액이 단순히 몇 번의 벼락으로도 처치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사실과 달랐다.

재액은 벼락을 맞을 때마다 거세게 요동쳤고, 그때마다 재액을 속박한 사도 역시 떨리는 왼쪽 팔을 오른쪽 팔로 받쳐 들고서 이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곧 재액이 번개로 인한 상처를 스스로 수복하기 시작하자, 이달재의 앞을 지키고 있던 사도가 작은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냈다.

깜짝 놀란 이달재가 그의 앞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사도는 내내 무심하던 표정을 살짝 일그러트리고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도는 일반인을 앞세우지 않는 법이었다. 이것은 이미 법으로 정해진 사도의 의무였고, 그런 사도를 가로막지 않는 것 또한 일반인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이었다. 이달재는 문득, 작전 중 실종된 송태섭을 떠올렸다. 혹시 너도 이런 상황을 맞았던 걸까. 이달재는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고개를 숙인 채, 앞에 있던 사도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몸을 짓누르자, 화가 났다.

머리가 뻥 터져버릴 정도의 자괴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식되었으나, 이달재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눈물 따위가 아니라 다른 것이 필요했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능력. 어떻게든 이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능력.

이달재는 빈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그저 치미는 충동에 이끌려서 검지를 들었다. 손끝을 들어서 눈앞을 단단히 막아주는 사도의 등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이달재. 손끝으로 적은 이름에 소망을 담자, 믿을 수 없게도 그 글자가 샛노란 빛을 내더니 사도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능력? 드디어 이능력이 발현된 건가?

라는 생각으로 문장을 머릿속으로 채 완성하기도 전에, 앞에 있던 사도는 갑자기 살짝 움츠렸던 몸을 바로 세우더니 훨씬 강한 힘으로 재액을 옭아매었다. 훨씬 강해진 빛과 힘에 저항하듯 요동치던 재액의 몸짓이 잦아들자, 이번에는 하늘에서 번개와 불, 불줄기가 쏟아졌고, 곧 재액의 눈동자가 짙은 잿빛으로 물들자, 속박하던 힘이 끊어졌고, 재액은 두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재액은 죽지 않는다. 상처를 입으면 회복을 위해 하늘의 호수로 되돌아갈 뿐.

이달재는 그 광경을 눈을 확인한 뒤에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방금, 이 손으로 분명히 무언가를 전했다. 그리고 그게 분명히 저 사도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자신이 방금 무엇을 해냈는지 채 알아내기도 전에 이달재의 눈앞이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곧 의식을 잃으며 옆으로 쓰러지려는 이달재는 받아낸 사도는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로 통신기에 손을 댄 채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지금 당장 이쪽으로 와.”

통신기 건너편에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사도, 이명헌은 어느새 표정을 평소대로 되돌린 채 말했다.

“발현자를 찾았어.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10월 대운동회에서 판매 예정인 명헌달재 소설 입니다! :D

이능력AU물입니다. ;)

표지는 차후에 수정될 수 있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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