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에게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여 상대편도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일.

이성에게 사랑을 구함. 

거리끼거나 얽매임.

구애의 모든 사전적 정의다. 하지만 이깟 거창한 사전 정의 필요 없이 쉽게 정의내릴 수 있었다.

구질구질한 애정.

세상에서 가장 볼품 없는 애정이었다.



Fucking Heroine



나재민은 우지현과 헤어진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김여주에게 일말의 미련도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보내준 날, 우지현을 잃었으니까. 김여주와의 마지막은 아름다웠을지 몰라도 우지현과의 마지막은 최악이었다.

오해야.

대충 지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아직도 김여주를 못 잊은 줄 알겠지. 오해였다. 그런 거 아니다. 잘 말하면 들어 줄 거다.

정말 오해야.

싫어졌다고, 내가 싫어졌다고 말해도 진심 아닌 거 안다. 이제 진짜 서로 좋아하는 사이야. 알려 주면 돼. 나도 좋아한다고 말하면 지현이도 기뻐할 거야. 같은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면 돼.

뚝. 물어뜯고 있던 손톱이 뚝 소리를 내며 부러지더니 피가 났다. 나재민은 그제야 멍한 눈을 바로 떴다. 읽지 않는 메시지 창만 들락날락거렸다. 어떤 연락도 닿지 않는다. 전화는 이미 차단한 지 오래인 듯했고, 어떤 텍스트도 읽지 않았다.

찾아갈까.

이 생각과 동시에 떠오른 게 있다. 나재민은 우지현 집에 단 한 번도 용건 없이 방문한 적 없었다. 우지현 집에 들어간 게 손에 꼽는단 이야기다. 그 몇 년을 함께하면서 단지 보고 싶어서, 만나고 싶어서, 같이 자고 싶어서 찾아간 적이 없었다고. 나재민이 핸드폰을 껐다. 그래, 곧 연락 볼 거야. 그때 오해 풀면 돼. 지현이가 시간 갖고 싶은 만큼 가지면 그때 다 하면 돼.


[야, 재민아. 너 지현이랑 뭔 일 있었냐?]

“…왜요?”

[지현이가 이럴 애가 아닌데 갑자기 문자 하나만 띡 보냈어. 스터디 못 한다고.]


뒷내용은 흐릿하다. 먹먹하게 들렸다. 아니야, 진짜 아니야. 지현이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몇 년을 만났는데. 절대 이렇게 쉽게 끊어질 인연이 아닌데.

몇 개월 동안 제정신 아닌 상태로 살았다. 방에 처박혀 뭣도 못 했다. 취준이고 스터디고 뭐고 더 못나고 비참한 사랑을 한 건 분명 우지현이었는데 죽을 것처럼 구는 건 나재민이었다. 찾아가는 건 오바라고, 스토킹과 다를 바 없다고 꾹꾹 참다가 결국 육 개월 만에 찾아간 날엔 그 전보다 더 최악의 엔딩을 맞았다.

우지현이 저를 보고 최악이랬다.

나재민이 어떤 변명을 해도 듣질 않고, 궁금해 하지 않고, 대화하고 싶지 않아 하고, 혼자 판단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여기저기 비수를 꽂아대는 문장에 나재민은 드디어 깨달았다.

내 말에 전혀 신뢰가 없는 거야. 정확히는 그 몇 년의 시간 동안 나재민은 우지현에게 관계의 안정감, 신뢰, 그리고 사랑을 주지 못했다는 거다. 그때 인정했다. 이 관계의 엔딩 장면은 이 순간인 것을. 지현이가 저를 보고 경멸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공간에서 같이 숨쉬는 것도 짜증 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보기 힘들어 나왔다. 집 가는 길에 육 개월 치 눈물을 다 쏟아냈다.

우리 진짜 끝인가 봐.


/


뭐, 평생 식음전폐하다 죽으란 법 없으니 나재민도 그 이후론 제법 사람처럼 살았다. 3D 제작 쪽으론 나름 유명한 회사에 취업도 했다. 출근 전 아침마다 가볍게 조깅을 하고 균형 잡힌 식단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회사 일 층에 있는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사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 후엔 가끔 친구도 만나고 취미 생활도 하고 봉사도 다니고 또, 또…

‘재민아 우리 커피 좀 줄여 보는 거 어때. 너무 걱정돼. 아니면 샷 좀 연하게 내려 보자.’

또.

‘어… 내가 만들었어. 맛없으면 뱉어. 너 또 밥 안 먹고 대충 아무거나 먹을까 봐 해 봤는데, 나 요리엔 영 재능 없나 봐. …그래도 한 입은 먹어 줘.’

또.

‘오늘 너무 춥게 입었다고? …너 때문이야, 바보야.’

또.

‘생일 축하해! 열두 시 전에 도착해서 다행이다. 정말정말 축하해, 재민아. 앞으로 네 생일 계속 축하해 주고 싶어.’

끝도 없는 다정함이 들이닥쳤다. 진짜 딱 죽고 싶었다. 카페에서 커피 주문할 때마다 걔 생각하면서 여러 번 추가하던 샷을 점점 줄이고, 걔가 남기고 간 반찬 통 보면 울고 싶어지고, 걔한테 덮어 줬던 담요에 코 박아도 남은 향기가 없고, 생일에 걔가 없는데. 말할 때마다 부끄러워하고 볼 붉히면서 애정을 보여 주던 걔가 없는데. 나 진짜 과분한 사랑을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을 만나도 같은 상황에서 항상 나를 먼저 생각해 줬던 지현이 생각이 든다.

정말 보고 싶은 날엔 너무 찾아가고 싶어서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라도 하는 사람처럼 단장을 하다가, 지현이와의 마지막을 상기하고 손을 툭 떨궜다. 이미 최악이라고 했다. 모든 최악을 모아둔 것처럼 행동한다고 했다. 여기서 더 최악이면 안 됐다. 열심히 꾸민 게 무용지물이 되게 침대에 처박혀 잤다. 허튼 생각 못 하게.

이 모든 게 우지현 없는 나재민의 일상이었다. 우지현이 몇 년을 쏟아부은 애정이 쑥 빠지니 메꿀 재간이 없었다. 옅은 물에서 어떻게든 숨 쉬어 보겠다고 뻐금대는 아가미가 안쓰러웠다. 지현이가 준 애정이 몇 년이지. 그만큼 허우적대면 좀 나아질라나.

그날도 그냥 비슷한 생각하면서, 또 아침에 갔던 카페에서 샷 빼고, 밥 잘 챙겨먹으면서 곳곳에 지현이를 얻은 날이었다.


“안녕하세요, 보호자님.”


그냥 정말 그런 날이었다. 특별한 징조도 언질도 없는 평범한 날. 지현이 생각하면서 그렇게 꾸며댔는데, 결국 아무 단장도 하지 못한 채로 맞이했다.


“오늘 원장님 대신 상담 맡게 된 우지현입니다.”


나재민은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아는 체하고 싶다. 좋아 죽겠다. 보고 싶었다. 닿고 싶다. 그간의 시간들이 궁금하다. 어떤 이유로 스타일을 바꿨는지, 뭐 하고 지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생각은 이거였다.

놓치고 싶지 않다. 누구 하나 찾아오질 않으면 만나지 못 한다는 말을 완벽히 부정할 기회였다. 나재민은 정말 우지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나재민이 우지현을 좋아한다. 문장이 어딘가 어색하지 않은가. 주어와 목적어가 바뀐 듯했다. 우지현이 나재민을 좋아해야 되는 게 맞는 건데. 원래 이 둘의 관계는 그게 맞는 건데. 이상하게도 갑의 구애가 시작됐다. 을에게 목줄을 쥐여 주고 주어 자리를 꿰차란다. 갑이든 주어든 관계의 우위이든 다 쥐여 주겠단다.

그토록 바라던 로미오를 해 주겠단다. 우지현은 이미 줄리엣이길 포기했는데.


“이제 그만해.”


우지현이 백미러를 힐끗 쳐다봤다. 뒷좌석에서 자고 있는 나재민의 조카를 확인한 후 다시 입을 뗐다.


“너도 내 얼굴 보는 거 불편하잖아.”

“안 불편해. 좋아해.”

“난 네 얼굴 보는 거 불편해, 재민아.”


요 근래 우지현은 나재민의 차를 타고 퇴근길에 올랐다. 데이트 이후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제게 아는 체 안 할 줄 알았는데, 나재민의 지독한 구애가 시작됐거든. 집까지 바래다 주겠다는 걸 거절했더니, 나재민의 조카가 학원 바닥에 대 자로 뻗어 소리쳤다. 나, 선생님이랑 같이 가고 싶어! 우지현은 땀 뻘뻘 흘리며 거기 지지라고 일어나라고 나재민 조카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결국 같이 퇴근길에 오른 지 일주일째. 우지현은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이제 너 안 좋아해. 불편해.”

“미안해.”

“미안할 거 없어. 과거 일은 그냥 묻어두고 선생님과 아이 보호자 관계로,”

“너랑 사귄 거 묻어둘 생각 없어서 미안하다고 한 거야.”

“여전히 이기적이네.”

“응.”


나 어떻게 해서든 너 잡아야 하거든, 지현아. 뒷말이 음절 하나하나 귀에 때려박혔다. 친구일 때도, 허울만 연인인 사이일 때도 느꼈지만 나재민은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친구인 시절에 사귀어서라도 날 끈질기게 제 옆에 붙잡아 두고 싶어 했으니. 우지현은 더 할 말이 없어 그냥 차에서 내렸다. 잘 가라는 인사도, 손짓도 없이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뒤에서 들리는 잘 가라는 다정한 음성에 뒤 한 번 돌지 않았다.

갑이 되는 거 원하지 않는다. 주어가 되고 싶지도 않고, 관계의 우위를 점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그만의 줄리엣이 되길 포기한 지 오래였다. 목줄 쥘 힘도 없는데 자꾸 손에 쥐여 주는 나재민이 지긋지긋했다.


하루는 나재민의 조카가 아예 오지 못 한 날이었다. 학교 현장 체험 학습이 끝나자마자 부모님의 차를 타고 바로 집으로 갔다고 했다.


“오늘 데리러 올 사람 없는 걸로 아는데요.”

“지현 선생님 보고 싶어서 왔어요.”


방실방실 잘 웃는다. 내가 지 웃는 얼굴에 약했던 걸 알고 이러는 거다. 예뻐해 달라고 아양 떠는 거다. 학원 애들이 다 빠지고 우지현 자리 스탠드만 켜둔 상태였다. 나재민이 우지현에게 가까워질 때마다 점점 선명해졌다. 마침내 나재민이 이르렀을 때, 딸칵 소리와 함께 스탠드 조명이 꺼졌다. 우지현이 당황하자 나재민이 말했다.


“그 표정 너무 무서워.”

“…뭔,”

“나한테 정말 질린 표정이야, 지현아.”


모르겠다. 나재민이 말하는 저의 질린 표정이 뭔지. 예전엔 나재민 앞에서 지어보일 표정을 고민하느라 거울 앞에서 웃는 연습을 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무슨 표정을 짓는지 저조차 모르겠다. 신경을 안 쓰니까. 우지현은 한숨을 푹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너무 피곤해. 너무 답답해. 너무 미련해. 숨이 턱턱 막혀. 너무 피로해서 단어 하나하나를 씹어 뱉었다.


“아, 너 진짜 좀.”

“…….”

“구질구질해.”


얼굴이 안 보이니 더 모지게 말할 수 있었다. 우지현은 숨소리만 들리는 이 정적에 온갖 말을 다 쏟아냈다.


“이제 넌 그냥 나한테 꼴도 보기 싫은 옛 연인에 지나지 않아, 재민아.”

“…….”

“내가 미안해. 대학생 때 내가 얼마나 질렸을까.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자존심 다 버린 것처럼 굴어서 얼마나 질렸을까. 미안했어.”

“…….”

“…근데 그래도 넌 내가 네 첫사랑 닮아서 옆에 둘 가치라도 있었잖아. 지금 넌 나한테 아무것도,”


툭. 책상 위에 올려둔 손등 위로 물이 떨어졌다. 우지현은 그제야 입을 멈추고 정신을 차렸다. 방금 말 너무… 심했던 것 같아. 억겁 같은 정적을 지나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스탠드를 켰다.


“…….”

“…방금 내가 말이 심했다. 미안해.”


나재민이 울고 있었다. 소리도 못 내고, 흐느끼지도 않고, 입도 벌리지 못 한 채 그냥 아랫입술 꾹 깨물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우지현은 눈물을 닦아 주려 절로 손을 뻗었다가 우뚝 멈췄다. 닦아 줄 사이 아니니까. 손의 방향을 바꿔 티슈를 뽑아 건넸다. 나재민은 그게 더 서러워 눈물이 났다. 어떤 상황에도 눈물 보인 적 없던 애가 그랬다. 그렇게 굴었다. 수백 편의 영화를 같이 봤을 때 무섭든 슬프든 감동적이든 눈물 없던 애가 그랬다. 우지현은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숨이 턱 막혔다. 답답해. 너무 깝깝하고 막힌 느낌이다.


“일단 가. 나중에 연락할게.”


순순히 물러나는 나재민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우지현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재민이랑은 항상 왜 이럴까. 왜 정상적인 관계의 범주 안에 들 수 없는 걸까.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재민이를 좋아하면 안 됐던 거다. 재민이를 붙잡고 싶어서 사귀자고 하면 안 됐던 거다. 애정 없는 연애라도 너만 있으면 된다고 하면 안 됐던 거다. 아니, 애초에 그때 앞자리에 앉지 말았어야 했고, 봉사에서 만났으면 안 됐던 거고, 또.

내가 걔 첫사랑을 닮으면 안 됐던 거다.

손등에 떨어진 나재민의 눈물을 바라봤다. 나재민은 미련하다. 지 첫사랑 닮았다고 나를 붙잡아 두려는 것부터 알긴 했지만, 그때는 나도 같이 미련했으니 뭐가 됐든 좋다고 생각했다. 다 괜찮다고. 내가 나재민을 좋아하니까 오히려 김여주를 닮은 게 잘 된 일이라고. 서로 붙잡을 명분이 있으니 다행이라고. 하지만 명분이 사라진 나는 재민이가 안쓰러웠다. 그 시절 나를 보듯이 동정했다. 연민했다. 그리고 이젠 얼굴도 흐릿한 걔를 원망했다. 빌어먹을 김여주. 걔가 무슨 삶을 살았는지, 어떤 앤지, 얼마나 사랑에 빠질 만한 요소를 많이 가진 사람인지 모른다. 아는 건 하나뿐이다. 나재민의 첫사랑이라는 것. 이 망한 사랑에 원망할 대상이 필요해서 아무 죄도 없는 그 사람을 욕하기로 했다. 그냥, 그냥.

사랑이 많은 나재민한테 지독하기만 하고 이루어지지 못 한 첫사랑으로 남은 게 원망스러웠다.


/


나 결혼해.

당황하는 일이 잘 없는 우지현이 헛기침을 했다. 내용은 알아들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뭐라고? 상대방은 친절히 다시 말해 준다. 나 이번 달 말에 결혼해. 발화자는 우지현의 고등학교 친구였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첫 짝꿍이었던 남자애랑 일 년 전까지만 해도 헤어지고 만나고 울고 불고를 반복한 장수 커플이었다. 일 년 전에 헤어졌다더니 다시 만났나. 우지현은 당연히 그 애랑 결혼하는 줄 알고 말했다. 헤어진 줄 알았는데, 어떻게 다시 잘 만났네.


“걔랑 결혼하는 거 아니야.”


우지현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상대방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도 걔랑 결혼할 줄 알았어.”

“지금 결혼한다는 사람은 누군데?”

“걔 잊겠다고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이야.”

“얼마나 만났는데?”

“구 개월 정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지현의 부모님은 만난 지 오 개월 만에 결혼했지만, 그래도 결혼할 사람을 판단하기에 구 개월이란 시간은 짧지 않을까. 우지현이 착잡한 표정을 하자 상대방은 호탕하게 웃었다. 너 얼굴에 다 티 나는 거 진짜 여전하다.


“왜, 너도 그런 친구 있지 않냐. 그 친구 너무 좋고 몇 년을 봤는데 가까워지는 건 죽도록 안 되는 애 있고, 만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천 년의 우정처럼 친해지는 애들.”

“그래도 이건 결혼인데.”

“천 년의 인연이랑 섹스만 했다 뿐이지 별로 다를 거 없어.”


지금 얘랑 결혼하고 싶어. 얘랑 평생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아. 이 선택을 후회하더라도 일단 지금은 그렇네. 그러더니 청첩장을 건네며 장난스레 말한다. 참고로 사고 친 거 아니다. 


“그냥 한순간인 것 같아. 걔가 좋아지는 것도 싫어지는 것도.”

“너 걔 진짜 좋아했잖아.”

“맞아, 걔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지.”

“근데,”

“말했잖아. 근데 다 한순간이라고. 걔가 무슨 바람을 피웠다거나 날 때렸다거나 한 것도 아닌데 그냥 지금 이렇게 됐어.”


그냥 이렇게 됐다고 말은 했지만 그냥이 아닐 것이다. 모든 일에는 동기가 있는 법이니까. 친구도 우지현도 알고 있다. 만나는 동안 쌓아왔던 수많은 서사들 중 하나가 또는 다수가 이런 결과를 낳았겠지. 그게 사소한 것이든 용서받지 못 할 짓이든. 지금 결혼한다는 그 사람이 구 개월 동안 주었던 확신을 걔는 몇 년 동안 그 수많은 서사로도 못 주었던 걸 수도 있겠지. 아니면 상황이 그런 걸 수도 있고. 걔랑 나랑은 둘 다 미숙할 때 만났으니까. 지금의 내가 완전하진 않아도 지금이라면 걔한테 이렇게 안 했을 것 같다는 순간이 많아. 걔도 그럴 거고. 그게 그냥 지금 이 상황이 된 거야. 친구와 대화를 마친 우지현은 청첩장을 받아들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결혼 축하해.


친구와의 대화를 며칠이나 곱씹었다. 전부 다 이해되지만 이해 안 되는 것들 투성이였다.

보통 스물 후반에서 서른 중반까지. 대부분 스물 초반보다 어느 정도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상태로 미래에 대한 방향성을 갖고, 성숙하면서 적당히 젊은 그 나이에 몇 년을 만난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니까. 그래, 이게 보통 어린 애들이 생각하는 결혼의 정석적이고 일반적인 루트였다.

다른 이야기지만, 어떤 투표에는 모순과 역설이 존재한다. 다수결은, 그러니까 보통이란 건 항상 일반적이고 대부분이지 않다는 것이다. A가 40%, B가 35%, C가 25%를 득표한 투표가 있다면, 이 셋 중 다수는 누가 봐도 A이다. 많은 A들이 위와 같은 결혼 루트를 밟겠지. 스물 후반에서 서른 중반에 적당히 돈 모아서 신혼 집을 갖게 되고 애를 가질까 고민하거나 영유아 정도의 아이를 이미 키우고 있는 가정들. 그럼 B와 C는 다수이지 않은 결혼이었다. 만날 사람 다 만나고 감정에 무뎌진 상태로 마흔 넘어 결혼한 신혼도 있을 것이고, 비혼주의자이다가 몇 개월 전 만난 사람과 느닷없이 결혼을 택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 신혼도 있는 거다. 그런 B와 C들을 모아 보면 A보다 크다.

A를 택하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는 뜻이다. 다수이지만 다수이지 않은 것.

우지현의 친구는 B일 수도 C일 수도 아니면 X일 수도 있는 거겠지. 얼마 만나지도 않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택한 A에 어긋난 사람. A에 익숙한 사람들은 의심할 것이다. 애가 생긴 건 아닌지, 외로워서 아무나 붙잡고 결혼하는 건 아닌지, 오래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과 결혼하다니 곧 이혼하고 후회할 것이라고 예상한다거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리고 아닐 수도 있을 거다. 우지현은 그냥 지금 한결 편해 보이는 친구를 보며 생각한다.

부럽다.

친구가 한결 편해 보여서 그런 걸 수도, 가족이 되고 싶을 만큼 믿는 사람을 만난 게 부러운 걸 수도, 아니면 오래도록 만나왔던 걔와의 서사와 추억에 얽매이지 않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그런 걸 수도. 이유는 다양했다. 지금 사랑이 질려 죽겠는 우지현은 혼자 사는 쪽으로 생각을 고정시키고 있지만 결혼이란 데에 환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 환상의 대상이 대부분 재민이었기에 지금 죽도록 질리는 것뿐이지.

선볼까.

그냥 새 사람을 만나야 할 시기인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며 여전히 저를 집까지 바래다 주는 재민을 떠올렸다. 그날 나재민을 보내고 감정 정리를 마친 다음 연락을 보냈을 때, 나재민은 미안하다고 답했다.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게 하겠다고.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겠다고. 그냥 답장하지 않았다. 대화가 끝났다. 사랑이 질리는 건지 우리가 질리는 건지 모르겠다. 같은 공간에서도 둘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우지현이 나재민과 눈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나 이번 주 주말에 선봐.”


핸들을 잡은 나재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기도 모르게 넋이 나가 멍청하게 입을 뻐끔 벌렸다.


“우리가 너무 우리한테 갇혀 있는 것 같아.”

“…….” 

“그래서 선자리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야.”


나재민을 만날 땐 나도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 만나보고 싶다고, 그게 나재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재민과의 이별에 허우적댈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죽도록 나 좀 사랑해 주는 사람 만나고 싶다고. 지금은 다르다. 그냥 좀 편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나 혼자 있을 때도, 둘이 있을 때도 편한 사람이면 좋겠다고. 혼자 살든 결혼을 하든 편하고 싶다고. 죽도록 하는 사랑은 정말 죽겠으니까 이제 그런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고. 나재민은 아니었다. 혼자 있을 땐 계속 생각나고, 둘이 있을 땐 같이 침몰하는 기분이었다.

우지현의 말에 나재민은 반응이 없었다. 딱히 반응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말을 이었다.


“우리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재민아.”


가슴 떨려서 눈 못 마주치던 소녀는 없었다. 올곧게 나재민을 쳐다보는 우지현의 눈동자가 결연했다.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기로 했는데, 미안해.”

“…….”

“나랑 한 번만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나 정말 잘할게. 나 누구보다 잘할게. 실망시키지 않을게. 나한테 다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나 안 좋아해도 되니까, 나 안 봐도 되니까, 나 안 사랑해도 되니까.

난 그냥 널 바라만 봐도 좋아.

꿈에서나 그리던 문장들이 드디어 나재민 입으로 나왔다. 꿈을 깨고 나왔다. 우지현은 현실인가 싶어서 숨을 들이켰다가 한숨으로 내뱉었다.


“그때 나를 보고도 그런 마음이 드니. 아니지, 그때 내가 그리워서 그런 마음이 드는 거구나.”

“…….”

“만나 봤자 너 내 눈치만 볼 거야. 내 비위 맞추려고 들 거고.”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그게 괜찮다고?”


왜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고 목울대가 울렁거리는지 모르겠다. 그때 안쓰러웠던 내가 지금 눈앞에 나재민과 겹쳐 보여서 그런 건지, 듣고 싶었던 말을 이제야 해 주는 나재민이 괘씸해서 그런 건지. 그냥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떻게든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 고개 빳빳이 들었는데, 이 말을 할 땐 푹 무너졌다.


“그게 어떻게 사랑이야.”

“…….”

“구질구질한 거지.”


처음부터 망한 사랑이었다. 같이 있는데 숨이 턱 막힌다. 숨통이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한쪽이 애정을 주기만 하지, 받는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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