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정확히는, 몸을 격하게 움직이는 행위를 싫어하는 편이었다. 어쩐지 꺼려진다는 게 맞았다. 평범한 어린아이답지 않다는 자각은 있었다. 만나왔던 모든 또래들은 그럴 기운이 어디서 솟아나는지, 언제나 흙밭을 세시간이고 네시간이고 뒤엎으며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뛰어놀곤 했으니까. 하지만 케이아에게 있어서 그런 식의 운동은, 결국 쓸데없는 피로감과 공백감만 늘리는 행위에 불과했기에, 꺼려지는 것도 당연하다고 반박하는 자신이 있었다. 부농가의 자식이 된 지금은 더 이상 배를 곯을 일이 없는데도 그런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밖에서도 뛰는 횟수가 손에 꼽는 마당에, 집에서는 내내 느리게 걸어다닐 뿐이고, 그마저도 하루 대부분의 시간은 서재에 앉아 책을 읽는 것으로 때우는 지경이다. 먹는 양이 이보다 많았다면 분명 운동 부족으로 살이 쪘을 것이다. 가족들은 근육은 고사하고 살이라도 붙으라며 애걸에 가까운 부탁을 하고 있었지만.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라는 것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체질이라던가, 성격이라던가, 과거라던가……. 

사람이든 환경이든. 친아버지가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둥, 잊으면 안 되니 똑바로 기억하라는 둥―이 뇌리에 어련히 깊게 박혀버렸구나 싶었다. 케이아는 주변의 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의 불안감을 유독 크게 느끼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독서였다. 어차피 어린아이가 할 일은 한정되어있고, 잡일을 도맡아서 할 처지도 아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낯선 말과 글을 가장 열심히 배운 것도 그 까닭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걸 가르쳐주는 집에 거둬지다니 참 다행인 일이었다. 기초적인 교육부터 차근차근 배웠던 것은 무척 큰 도움이 됐다.

그런 이유로, 평소에도 케이아는 서재에 콕 틀어박혀 있다. 할 일이 없을 때나 시간이 빌 때는―다시 말해, 대부분의 눈 떠있는 시간 동안은―복습을 핑계 삼아 독서에 몰두한다. 그때만큼은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지식과 상식을 배울 수 있어서 유익했고, 성실하고 근면하고 의젓한 아이를 연기할 수 있었으며, 한곳에만 머무르면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여지도 적어진다. 무엇보다, 남들의 시선을 자연스레 피할 수 있기에 심리적으로 굉장한 안정감을 받는다. 그건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굉장한 장점이었다. 

서재의 책장은 어린 케이아에겐 굉장히 크고 높기 때문에, 최근에는 하녀들이 케이아가 읽을 만한 책들을 미리 뽑아다가 책상 위에 올려놔주곤 했다. 필요 이상의 수고를 끼쳤다는 생각에 민폐스럽기도 했지만, 고작 책 좀 뽑아주는게 무슨 대수냐는 만류를 매번 들었기에 부담감은 상당히 가신 상태다. 하지만 오늘따라, 책상 위에 놓인 책들을 훑어보는 케이아의 눈은 하녀들의 수고가 무색하도록 냉담하고 지루한 채다. 서재에 들어온 지 몇 주 째다. 익숙하지 않은 필기체와 작문 양식에 곤욕을 치르긴 했지만, 한 번 버릇을 들이자 읽는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라진 것이다. 즉 케이아의 손에 닿는 이것, 이 책들은 대부분 그녀가 아는 내용들이다. 더 이상 흥미롭지 않은……. 그렇다고 더 어려운 것을 더 많이 읽고 싶다 말해야 한다 생각하니, 그것도 괜스레 튀는 행위일까봐 선뜻 부탁할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다.

처음 저택에 당도했을 적 케이아가 가장 먼저 호기심을 드러낸 것은 대개 역사서 분야였다. 그러나 파고들어가면 파고들어갈수록 자신이 신변을 의탁하게 된 라겐펜더 가문이 얼마나 학이 떼일 정도로 명가인지에 대해서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몬드의 역사에 대한 책을 읽을 때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라겐펜더의 이름이었다. 2600년 전 몬드 해방 전쟁 때부터 시작해서, 1500년 전 공성전 때, 1000년 전 노예 반란 때, 500년 전 대전쟁 때, 뭐가 됐든 굵직한 사건마다 그 이름이 언급된다. 그런 가문에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기가 죽는 것 같기도 하다. '난 그냥 마차에 주워지는 것만이 목표였는데…….' 귀족가의 명가가 갈 곳 없는 아이를 양자로 받아주는게 흔한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차라리 포도밭의 잡일을 도맡는 편이 훨씬 더 마음 편할 거야.'

창 밖을 내다보면 검술 수련을 받고 있는 다이루크가 있다. 이 가문의 정당한 후예인 다이루크는 같은 것을 익힐 때도 자신 같은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명문가의 자제에게 필요한 교양이라던가,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이라던가, 어떤 흠결도 없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라던가…….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우물쭈물, 누군가의 눈치를 보다 결국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마는 자신과는 달리.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왜 불안한가. 몸이 편하고 노곤노곤하게 풀어지는 것이 왜 공포스러운가……. 햇빛 아래에서 꿈벅꿈벅 잠이 들었다. 

이렇게 따뜻하고 평화로운 오후의 날씨 아래에서도 자신은 어쩐지 악몽을 꿀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예의 바르게 노크 두 번을 해도 서재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은 없었기에, 벌써 가버렸나? 하고 다이루크는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열었다. 하지만 하녀들이 '아가씨는 아직 서재에 계셔요'라고 말한 대로, 케이아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아까 창문에서 보였던 바로 그 위치의 소파에 얌전히 누워있었다. 

절로 숨을 죽이고, 발소리를 낮추고, 문을 최대한 살살 닫게 되었다. 방금 필요 없이 노크를 한 것, 문을 벌컥 연 것도 어쩐지 신경쓰이게 되었다. 유독 작은 케이아는 붉은 벨벳 소파의 커다란 팔걸이에 기댄 채 푹 잠들어있었다. 

다이루크는 몸을 웅크리고 케이아에게 다가가, 소파 바로 앞에 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그렇게 하면 커다란 소파에 앉은 케이아보다 조금 눈높이가 낮아져, 고개를 숙인 케이아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예쁘다.'


여전히 작은 키만큼이나 얼굴도 앳돼서, 커다란 눈까지 합치면 어딜 가나 굉장히 귀여운 얼굴이라는 평가 이상을 받지 못하는 케이아였지만, 이렇게 눈을 감고 있는 순간은 그런 인상이 상당히 가시는 것이다. 길고 빽빽한 속눈썹이 그대로 햇빛을 받아 볼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종종 같은 침대에서 자곤 했지만, 그거야 아플 때나 땡땡이 칠 때만 가끔 가능한 일이지, 이렇게 대놓고 낮잠을 자는 모습은 보기 힘든 기회니까. 

케이아가 이 집에 온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자신의 생일을 모른다는 케이아의 말을 들은 라겐펜더 저택은 은밀히, 케이아는 모르게, 그 날을 생일 대신으로 기념 삼아 성대한 파티를 열어줄 계획을 짜고 있는 도중이었다. 다이루크는 아무것도 모르고 제 뒤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케이아를 보며, 그녀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과 동시에 그녀가 기뻐 활짝 웃는 얼굴을 상상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두근해지고 했다.

그건 지금도 그랬다. 

바람에 파들거리는 긴 속눈썹, 잠결에 오물거리는 입술. 꿈이라도 꾸고 있는건지 손이 조금씩 꼬물꼬물 움찔거렸다. 느지막한 오후의 햇살 아래서, 느릿하게 가라앉는 황금빛 먼지 속에서, 자잘하게 반짝이는 케이아의 모습은 일견 낯설기까지 한 것이라, 이유를 알 수 없이 가슴이 뛰었고 눈가에는 뜨뜻하게 열이 몰렸다. 다이루크는 한참동안 홀린듯이 케이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따가웠던 탓인지, 케이아의 눈꺼풀이 움찔, 하다가 천천히 개안했다. 한쪽뿐인 눈알은 옅고 새녘빛을 띄고 있으며, 한 바퀴 둥글게 방황하다가 이내 눈 앞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다이루크에게 꽂혔다. 


"다이루크?"


살풋 부르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으응? 하고 당황해서 반문하자,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케이아는 키득거리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직 잠기운에 취한 모습이었다. 나른한 얼굴을 한 케이아가 손을 뻗어 다이루크의 곱슬곱슬한 옆머리를 잡고 만지작거렸다. 힘은 전혀 실려있지 않았다. 스치듯이 뺨에 닿는 손은 그동안 잘 관리한 티가 나도록 부드럽기만 했다. 


"예쁘다……."


그렇게 중얼거린 케이아의 눈이 다시 가물가물 감겼다. 천천히 느려지다가 점점 아래로 떨어지는 손을 다이루크는 무의식 중에 덥썩 붙잡았다. 케이아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다시 곤히 잠들어있었다. 방금 저지른 맹랑한 일에 대해선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잡고 있는 작은 손이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다이루크의 온 몸을 뜨거운 열기가 달구고 있었다. 

한참동안 그러고 있다가, 이대로 자다가 일어나면 케이아가 몸이 결릴 것이라는 생각에, 밖에서 하녀를 불러와 그녀를 침대로 옮겨주었다. 케이아는 푹 잠든 탓인지 침대에 뉘일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가, 저녁 시간때서야 잔뜩 부끄러운 얼굴로 일어나 때가 맞지 않는 인사를 해왔다. 왜 깨우지 않았냐는 밉지 않은 투정은 덤이었다. 그날 밤에는 서로 늦게까지 떠들다가 아델린에게 호통을 듣고 겨우 잠에 들었다. 








손이 닿지 않는다. 케이아는 한 발을 까치발까지 들고 쭈욱 팔을 뻗어봤지만 자신의 손가락은 아슬한 거리에서 책등만 건드리는 게 전부였다. 한숨을 내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페보니우스 기사단 건물 내부의 도서관은 시민들에게도 열려있었고 규모도 큰 편이라, 소장권수만 따져도 네자릿수는 되는 것이다. 천장까지 닿는 책장이 유독 커보인다. 역시 사다리를 가져와야 할까.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옮기는 데 드는 힘과 생길 소음이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한 번 더, 책장의 중간을 짚고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이거 찾아, 케이아?"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면, 단정한 기사단 정복을 목끝까지 차려입고 있는 붉은 머리의 소년 기사가 있었다. 난데없는 부피감과 압박감, 그리고 가까이 다가온 따끈한 온기에, 케이아가 기겁하며 책장 쪽으로 몸을 꾹 붙이자, 다이루크는 신경쓰지 않고 팔을 쭉 뻗어 케이아가 신나게 간지럽히고 있던 두꺼운 책을 뽑아들었다. 먼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케이아의 머리 위를 팔로 가려주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자신에겐 어중간하던 높이의 책장에 꽂혀있던 두꺼운 양장본 표지를 다이루크가 탁탁 털고 한 손으로 건넸다. 얼핏 제목을 보았는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잔소리가 날아들었다. 


"또 어려운 책만 찾아읽고. 머리 아프지 않아? 가끔은 좀 가볍고 재미있는 걸 찾아봐도 좋을텐데 말이야. 폰타인에서 새로 들여왔다는 소설이나. 이번에 바뀐 사서는 그런 걸 좋아한다는데, 한 번 물어보는 건 어때?"

"걱정할 필요는 없거든. 이런저런 거 충분히 다 읽고 있어……."

"마음 같아선 다 됐고, 밖에서 놀고 쉬게 하고 싶어."


방금까지만 해도 도서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기뻐했으나, 지금은 그 빠져나간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가족들은 별 세세한 걸 다 신경써서 탈이다. 케이아는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찾던 책을 조심히 받아들었다. 방금 그 '소설'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까? 키 크고 잘생긴 남자애가 받침대 같은 거 없이 찾던 책 찾아주는 거. 유치하지만 설레는 상황. 케이아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책을 얼굴 가까이에 대고 몸을 돌렸다. 고맙다는 인사는 빼놓지 않은 채였다.


"……나도 키 크고 싶어. 너만 크고 치사해."


무의식적인 중얼거림이었다. 응? 다이루크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케이아의 말을 잘 들으려는 듯 허리를 살짝 굽혀왔다. 케이아는, 말해놓고 나서야 살짝 아차 싶긴 했으나, 이제 와서 이 정도 투정으로 혼나지는 않을 것임을 알기에, 불퉁한 얼굴로 마저 다이루크에게 불만을 종알거렸다. 


"너만 또 자랐나봐. 이게 뭐야. 난 오늘 구두도 신고 왔는데……."

"어릴 때도 네가 나보다 키가 컸던 적은 없었잖아."

"그래서 문제지."


최근 들어 다이루크가 퍽 남성적인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한 것을 케이아는 알고 있었다. 그는 케이아에게 알려주지 않으려 했지만, 가끔 턱을 쓰다듬는 게, 클립스 아버지처럼 수염이 나려는 건가? 싶기도 했다. 물론 아무리 봐도 그는 나이보다 한참 어려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말이다. 이젠 다들 마주치면 성숙하다, 조숙하다 소리부터 먼저 해주는 케이아와 달리, 다이루크는 목 위로만 올려다보면 아직도 십대 초반으로 보일 만큼 얼굴이 둥글고 말끔해 내심 신경쓸 수준이었다. 

케이아가 까치발을 들고, 자신의 정수리에서부터 다이루크의 키까지 손을 움직여가며 키차이를 가늠했다. 그리고는 혼자서 울상을 짓는 것이다. 어쨌든 키로만 따지면 머리 한 통이 넘게 차이가 났고, 기사 훈련으로 단단하게 일궈진 다이루크의 몸에 비하면 자신은 도토리만한 꼬마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최근엔 잘 먹고 잘 걸어다녔는데.


"빨리 어른 되고 싶다."

"그때쯤이면 나도 더 커져있을텐데?"

"우이씨."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고 몸을 돌리는 케이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다이루크는, 결국 동생의 귀여움을 참지 못하고 기습적으로 동생을 와락 안아들었다. 우왓, 케이아가 놀라 바짝 굳었다. 꽉 안은 터라 떨어지지 않을 텐데도 두 팔로 책을 꼭 감싸안은 채였다. 미묘한 질투심이 돋는다―그게 재밌었다, 겨우 책인데. 


"난 케이아가 작아서 좋아. 품에 쏙 들어오잖아."

"뭐야 그게. 지금 나 작다고 놀려?"

"진짜야. 이대로 쭉 안 컸으면 좋겠는데."


케이아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바동거리며 반항했지만 다이루크의 악력을 이기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불퉁해져 아무 말도 안할 때쯤이 되어서야 아, 이건 진짜 삐졌구나, 싶어진 다이루크가 일부러 더 해사하게 웃으며 케이아를 놓아주었다. 이런 패턴에 워낙 많이 당한 케이아는 놀아달라는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거리는 다이루크를 쳐다도 보지않고 흥, 콧방귀를 뀐 채 도서관 한구석으로 총총걸음으로 도망쳤다. 제자리에 없는 사서를 대신해 대여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도서관을 나가는 케이아의 뒤를 다이루크는 놓칠새라 후딱 쫓아갔다. 

하기야 동생은 뭘 먹여도 여전히 조그마한 채였고, 자신보다 시선이 한 단계는 낮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계절이 바뀔 때마다 꼼짝없이 침대에 앓아눕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절대로 혼자 둘 수 없는 어린아이 같은 것이다. 일부러 앞서나가는 케이아의 뒤를 바짝 쫓아가며 다이루크는 케이아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했다. 


"서류 일은 어때?"

"할만해." 케이아는 익숙한 얘기가 나오자 조금 들뜬 기색으로, 자신은 자각하지 못한 듯 했지만, 재잘재잘 설명했다. "아직 간단한 것들밖에 안하지만. 옮겨쓰면서 배우는 것도 많고, 다들 친절하게 가르쳐주시고, 숫자들 계산하는 것도 재밌고, 이리저리 사람들도 만나고……"


사실 그 내용보단 조잘거리는 여동생의 목소리가 더 듣기 좋았던 것이기 때문에, 다이루크는 반쯤 흘려들으며 케이아의 말에 의미 없이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다이루크, 내 말 제대로 안 듣고 있지?' 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응, 이라고 대답해버릴 뻔했을 만큼. 

화제는 곧 다이루크의 일로 옮겨가, 그는 오늘도 성 순찰을 돌고 왔으며 그 과정에서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했다. 스네즈나야 접경지까지 갔다왔다고 말해줬을 땐 어찌나 흥미로워하던지 말하는 자신까지 들떴다. 물론 별 내용은 없었지만 근처의 눈밭이라던가, 몬드에선 보기 힘든 몬스터들에 대해서 설명해주면 케이아의 눈은 그만큼 더 반짝거리는 것이었다.  

내일은 주말이고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남은 얘기는 아버지가 있는 자리에서 같이 하자고 말하면, 케이아는 아쉬운 기색을 보이면서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다이루크에게 같은 얘기를 두 번이나 반복하게 하는 수고를 들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시간이 그리 늦은 것도 아니고, 오후 햇살이 느지막히 노을 지고 있는 시점이었으며, 와이너리에 말을 타고 도착할 때 쯤이면 으레 저녁 시간일테니 별로 오랜 기다림도 아니었다. 

그렇게 나란히, 알맹이라곤 전혀 없는 뜬구름 같은 평화로운 소리를 조약돌 늘어놓듯 이어나가다 보면, 다이루크는 문득 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서 잔잔하게 실감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몬드성을 나서기 직전에, 다이루크는 케이아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기념품 상점에 들려 리본을 하나 샀다. 아까부터 느슨하게 묶여있던 케이아의 머리가 신경쓰이던 참이기도 했고, 이젠 용돈이 아니라 봉급을 받기 시작한 다이루크는 케이아에게 이것저것 선물을 사주는 일이 금새 새로운 취미가 되어있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자주 그랬다. 선물을 꼭 특별한 날에만 받아야할 이유가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케이아의 길게 기른 머리를 자주 만지작거렸던 터라, 잠시동안 동생을 세워두고 순식간에 머리카락을 맵시 있게 땋아내려 리본으로 묶어주는건 일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끝난 새단장을 보며 케이아가 신기한듯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검정색 리본은 단순한 듯 했지만 자세히 비춰보면 섬세한 문양이 가득 짜여있어서, 다이루크의 안목에 감탄함과 동시에 순수히 예쁜 물건에 대한 호감이 가득 들어찼다. 제게 어울리는지, 가격이 얼마인지는 선물받은 입장으로서 사실 그렇게 첫번째로 신경쓸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고마워, 다이루크! 너무 마음에 들어."


언제 삐졌냐는 듯 케이아는 활짝 웃으면서, 밝은 목소리로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 선물이 나름의 뇌물인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조금은 과장된 태도로 밝은 목소리를 꾸며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사실은 정말로 기쁘기도 했다. 맨날 하고다닐게, 그렇게 말하면 다이루크의 얼굴은 노을의 못된 방해에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확연하고 환하게 이지러지는 것이었다.

케이아는 최근까지도 가끔씩 그 리본으로 머리를 묶었다. 다이루크가 아직도 그런 낡은 걸 쓰냐고 한마디 말을 얹기 전까진 그랬다. 






브키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