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 뭐시기라며?’

‘꼭 나온다곤 안 했어….’

‘그럼 저건 뭔데? 디오니소스야 뭐야?’

‘그리스는 남유럽이라 관련 없을 걸세.’

‘음유 시인 아닐까요?’

 

넷은 풀숲에 숨어 나름 소곤소곤 얘기했다. 하지만 넷의 목소리가 겹치니 웅성거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약 동상이 몬스터였다면 진작 풀숲에 다가오고 남았을 정도였다. 굳건하게 서 있는 동상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태서가 불쑥 풀숲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놀란 셋이 붙들 틈도 없이 순식간에 동상 앞에 도착한 이태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보자….”

 

동상은 꽤 정교했다. 심혈을 기울여 깎은 정도는 아니지만, 신경 썼다고 말하기 어색하지 않은 정도에 적당히 녹이 슬었다. 이태서는 한 발 떨어진 거리를 유지한 채 동상으로 다가갔다.

 

우우웅-

 

“응?”

 

그러자 기다렸단 듯 바지 왼쪽 주머니가 진동했다. 이태서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기 무섭게 하나로 합쳐진 파편이 요란스레 공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가만히 있었던 동상에서 쩌적 소리와 함께 얇은 금이 그어졌다. 위험을 감지한 이태서가 뒤를 돌려 할 때, 동상의 손이 움직여 딱딱한 하프 줄을 튕겼다. 돌보다 단단해 보이는 하프에서 나오는 소리라 믿기 어려운 청아한 소리가 넷의 귀를 자극했다.

 

「 아름다운 음률이 가라앉은 당신의 기억에 바람을 실어줍니다. 」

「 ! 주의 ! 주의 ! 주의 ! 」

「 정신 간섭에 주의하세요. 」

 

순간 당황했지만, 이태서는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 들었다.

 

‘정신 간섭쯤이야. 해볼 테면 해봐!’

 

「 능력치 : 체력 99.4%

                마나 98.75%

                공격력 599,583

                방어력 282,166

                힘 48,750

                민첩 32,500

                지능 1,500

                행운 1,000 」

「 참여자의 지능 수치가 낮아 방벽이 활성화되지 않습니다. 」

 

응?

 

「 정신 간섭 방어 실패 」

 

어벙벙하게 입을 벌린 이태서가 이렇다 할 대처를 할 틈도 없이 덮어뒀던 기억이 물밀듯 밀려왔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정서의 생일 축하합니다~!’

‘우리 딸, 초 다 녹겠다. 후 불어서 끄자.‘

 

단란한 세 가족이 거실에 모여 앉아 셋이 먹기엔 큰 케이크를 조각냈다. 그림으로 그린 듯, 자로 잰 듯 완벽한 이상적인 가족이었다. 누구도 이곳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겠지만, 이태서만은 지독한 위화감을 느꼈다. 식탁에는 의자 세 개가 있었고, 슬리퍼는 빈 곳을 나뒹굴지 않고 세 가족의 발에 붙어있었다. 방의 개수는 세 명이 살기에 적당했고, 집 이곳저곳에 놓인 사진에는 오로지 한 명만 담겨 있었다. 어디에도 위화감을 느낄 곳이 없었지만, 집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현관에서만 이태서가 느끼는 위화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각기 다른 크기의 신발 네 개, 그곳에서 유일하게 한 신발만 심히 닳아 있었다.

 

’…….‘

 

신발의 자취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면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선 학생의 뒷모습이 보였다. 안쪽을 밝히는 따스한 빛과 달리 이곳엔 침착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학생은 안쪽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한참을 듣고선 몸을 돌렸다. 학생이 집 밖으로 나오고서야 들어온 빛이 가슴팍에 박힌 플라스틱 명찰을 스쳐 지나갔다. ’이태서‘라는 세 글자의 이름을 밝히고서.

 

이태서는 지금과 달리 낯선 흑발을 하고선 악에 찬 듯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걸음에는 당연하단 듯 분노가 담겨 있어 누구도 이태서의 주변을 지나가려 하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탁 트인 길은 말 그대로 트인 길이다. 아무런 방해물이 없어 편히 지나갈 수 있는 길. 하지만 누구도 걸으려 하지 않는 길이라면 마냥 편한 길이라 할 수 있을까? 이태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일직선으로 놓인 텅 빈 길을 걸으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 애처로워 보이는 떨림은 이태서를 누그러트렸지만, 곧 쏟아진 비가 모든 걸 덮고 가렸다. 우산 하나 없이 홀로 거리를 배회하는 이태서의 주위엔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공기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고, 또 돌아 도달한 곳은 따뜻하나 그늘졌던 집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물이 뚝뚝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귀가를 읊조린 이태서의 앞에 새하얀 수건이 내밀어졌다.

 

’왔어? 밖에 비도 많이 오는데 우산……. ……일단 씻고 옷 갈아입자. 춥지? 밥은 먹었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만들어 볼게.‘

 

걱정스러운 말과 표정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진심을 앞에 두고도 이태서는 거대한 비참함에 휘말렸다.

 

’재밌어?‘

’…….‘

’우산 하나 없어서, 우산 하나 살 돈 없어서 비 처맞고 다니니까 우스워? 그렇게 불쌍하면 적선이라도 해주지?‘

’그런 게 아니야, 태서야. 난…네가 걱정됐어.‘

’아, 그래?‘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는 이태서에겐 단 한 점의 호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이태서의 앞에 선 이정서는 담담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이태서의 팔을 살며시 잡아 당겼다.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뭐든….‘

’됐다고!‘

 

살갗에 닿은 손이 혐오스럽다는 듯 쳐내어 나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고요했던 집을 밝히는 소리에 불 한 점이 피어올랐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별일 아니에요. 그냥 태서가 비를 맞아서 수건을 주던 참이었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태서한테 좋은 우산 하나….‘

’언니가 하는 말에 꼬박꼬박 대꾸하다 못해 때리기까지 한 걸 들었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정서야, 이런 건 감싸준다고 다 되는 게 아니란다. 방에 들어가라.‘

’정말 아무 일도 없었….‘

 

이정서의 말이 채 끝맺어지기 전에 두꺼운 손이 움직이는 게 빨랐다. 순식간에 고개가 돌아간 이태서는 화끈거리는 볼보다 머리를 휘감는 분노에 몸을 떨어야 했다.

 

“……하!”

 

굳이 회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헛웃음을 치면서도 재생되는 기억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이태서를 농락하듯 이어지는 기억은 뜬금없이 던전 안에서 시작됐다.

 

’아니! 무작정 뛰어나가면 안 된다니까? 어린애가 뭐 이렇게 출세에 욕심이 많아? S급이면 됐지.‘

’출세는 아니죠. 욕심이 많다고 해야죠‘

’그것도 문제 아니야?‘

 

왁자지껄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이태서가 삐딱하게 서선 팔짱을 꼈다.

 

’어쩌라고?‘

’말본새 봐라. 이게 어딜 봐서 중1이야?‘

’고1이에요. 고1. 좀 외웁시다.‘

’그게 중요한가? 내 코딱지만 한 게 앞뒤도 안 보고 설치는 게 문제지!‘

’설친다고 표현하기엔 S급이에요. 그리고 코딱……. 비위 상하니까 그런 단어 쓰지 마세요.‘

 

질색하는 사람과 열을 내는 사람이 공존했다. 그곳에서 붕 뜬 사람은 이태서와 이태서를 노려보고 있는 김하일이 다였다. 둘 사이를 요령 좋게 파고든 한 사람이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래요, 그래요. 다 알겠으니까 일단 여기서 나가서 씻고 밥이라도 먹으면서 얘기해요. 언제까지 애들을 이렇게 세워두려고요?‘

 

피에 푹 젖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얼굴엔 미소가 있었다. 주변에 널려 있는 사체들과 비릿한 피 냄새만 아니었다면 길거리에 흔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

 

이태서는 그 광경을 이전 기억보다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숨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하지만 기억은 지나간 시간의 일부다. 시간이 흐르듯 기억도 흐를 수밖에 없었다. 이태서가 시린 눈을 감았다 뜨니 이번엔 싸구려 물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한 카페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익숙한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차분한 중단발과 편한 옷차림. 백영하였다. 이때의 기억이 나올 줄 몰랐던 이태서가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지만, 과거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평화롭게 붓질을 하며 격렬한 파도를 그리는 이태서의 손길엔 즐거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과거를 회상하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태서가 흐르는 과거를 보는 동안, 김하일도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었다. 새빨간 피가 가득한 공간에서 유독 붉은 사람이 누워 있다. 피로 얼룩져 알아보기 힘들지만, 김하일만은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를 수 없었다. 입술 사이로 울컥 나오는 피는 이미 만들어진 웅덩이를 깊게 만들고, 필사적으로 마나를 쥐어짜는 김하일. 상황과 누워 있는 사람의 체형을 보면 저 사람이 이태서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 광경을 더 보지 못한 김하일이 고개를 돌리려 하자 누워있던 이태서가 멀쩡한 상태로 김하일의 목에 팔을 휘감고 있었다. 그러다 못해 껴안기까지 하니 김하일의 눈이 점차 커다래졌다. 잊기 힘든 기억이 생생하게 재생되니 김하일도 쉽게 눈을 떨어트리지 못했다.

 

김운철과 최하성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기억에 취한 듯 꼼짝하지 않고 있을 때, 이태서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여 짧은 검기를 만들었다. 검기를 쥔 손은 빠르진 않아도 정확하게 목표를 조준했다. 반대쪽 팔뚝을 말이다.

 

“아주 그냥 온탕 냉탕을 왔다 갔다. 서비스 좋네?”

 

깊게 파인 살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이태서는 활짝 웃었다.

 

E-mail : chajo3728@gmail.com Twitter @CyJ_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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