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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윤은 정현과 대화가 끝나자 마자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은지서!”


이제 익숙해진 6층에 올라서자 지서가 나와 있었다. 그래, 너도 끝장을 볼 때가 됐다고 생각한 거지. 지서가 정적인 표정으로 시윤을 올려다봤다.


“…옥상으로 갈까?”

“좋아.”


봄이 오고 있다지만 날씨는 아직 싸늘했다. 시윤은 당연하게 지서를 끌어안았다. 지서는 그를 밀어내거나 피하진 않았지만, 부러 기대지도 않았다. 


시윤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입을 열었다. 


“은지서. 내가 그때 무슨 실수 했냐?”


자신이 발정기를 지날 때를 묻는 것이었다. 지서는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아니. 넌 잘못한 거 없었어.”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듯 작았다. 시윤은 지서를 더 꽉 안았다. 흰 목덜미에 얼굴을 묻자 한 번도 역한 적 없었던 체향이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좋았어. 


“사랑하는 사람을 역겹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고.”

“….”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너 한 명 뿐이겠지. 난 여전히 우리가 딱 맞는 조각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은지서.”


우리 각인하자.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은 할 수 없었다. 이곳은 하프시티니까. 하지만 가능한 남은 시간을 전부 주겠다는 말은 할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으므로.


그 말이 나오고서야 지서가 시윤을 잡았다. 겨우 소매 끝이 미약하게 당겨졌다. 


“안 돼.”

“…싫어도 아니고 안 돼?”

“어. 나는 안 돼. 네 평생은 안 돼. 너한테 나는……”


딱 맞는 조각이 아니야. 그냥 차악이지.


“페로몬을 아예 흡수하지 못하면 영구적으로 장애가 남는대.”


나도 그동안 아예 흡수 못한 건 아니었어. 평균치에 한참 모자랐을 뿐이지. 그것도 네 덕에 훨씬 나아졌어. 그런데.


“그런데 그렇게 너한테 도움을 받으면서, 널 끌어내릴 순 없어.”


목소리는 있는 대로 떨고 있으면서 어조는 평소처럼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시윤은 한숨을 뱉지도 눈을 감지도 않았다. 그저 역시나 할 뿐이었다.


“그것까지 확신했냐. 이미.”


누가 그랬더라? 죄책감이 섞인 마음은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고. 시윤은 그 말에 코웃음 쳤었다. 이 모자란 도시에 일그러진 사랑이 얼마나 많은데 뭐 얼마나 고결한 사랑을 하려고 고작 죄책감에 뒷걸음치느냐고. 


그런데 지서는 그런 사람이었다. 정직하고 직선적이고 어이없게도 고결했다. 


보라. 시윤이 그보다 하루정도 더 앓은 것 가지고는 죄책감에 짓눌리면서, 시윤의 보금자리가 이 요람이 될 것은 확신하는 모습을. 소맷자락을 다 구겨지게 잡으면서도 그 이상은 잡지 못하는 이 모습을.


“…왜.”


지서가 막힌 목소리를 뱉었다.


“왜 각인하자고 했어. 그냥 넘어가지. 그럼 당분간은….”

“이 상태로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누구 하나가 발정기 오면 존나게 싸우고 헤어졌겠지.”

“….”


부정이 아닌 침묵에 시윤은 순간 열이 뻗쳤다. 


“썅. 차악이면 안 되냐? 최악보단 낫잖아. 대체 누가 이 도시에서 최선을 찾는다고.”


그러면서 시윤이 아주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자, 지서는 그나마 잡고 있던 소매까지도 놔 버렸다.


“…차악은 되어줄 수 있어. 하지만 각인은 안 돼….”


그래.


그렇구나.


기어코 물기가 어리는 목소리에 시윤은 팔을 풀었다. 놓아버렸다. 반은 오기였고 반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 속에 이해나 수긍은 하나도 없었으므로 나중에 가면 분명히 후회할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중 같은 걸 생각할 여건이 못 됐다.


시윤은 한걸음 물러서서 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돌아섰다. 옥상을 다 내려갈 때까지 지서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실내로 들어오자 참고 있는지도 몰랐던 숨이 터져 나왔다. 시윤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다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온몸이 떨렸다. 


난 너 때문에 떠도는 삶에 질려버렸는데. 니가 나보고 못 박히지 말라고 하면. 


대체 나보고 뭘 어떡하라고….


그리고 그 해 늦여름, 은하가 요람 아파트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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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는 아침 햇살이 눈부셔 잠에서 깼다. 최근 며칠 동안 눈보라가 심했기 때문에 모처럼 보는 햇빛이었다. 


손을 들어 햇살을 가리려고 하자 둔한 통증이 손목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 은하는 천천히 지금 자신이 베고 있는 팔이 누구 팔인지, 자신의 허리를 감싼 손이 누구 손인지를 떠올렸다.


오. 어. 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꿈이 아니었구나, 였다. 방에는 여전히 시윤의 페로몬 향이 떠다니고 있었다. 자신의 향을 다 뒤덮어 버릴 정도로 짙은 향이었다. 숨 쉬는 게 기꺼웠다. 


너무 기꺼워서 현실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은하는 격렬한 밤 이후에 으레 찾아오는 탈력감과 함께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그냥… 호의였겠지?’


아닐 리가 없었다. 친구끼리 이런 식으로 도와주는 일은 정말 흔했고, 겨우 한 번 정도로는 파트너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파트너란 말도 연인이란 울림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운 것이었다. 은하는 이곳저곳으로 일을 다닐 때 일주일에 한 번씩 파트너를 갈아치우는 사람도 본 적 있었다. 


그러니까 둘의 마음은 자신의 것보다는 한참 가벼웠으리라. 그 사실이 퍽 서글펐지만, 적어도 두 사람이 동시에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쪽팔리는 김칫국보다는 나았다. 심지어 둘은 서로를 좋아한다고….


은하는 겨우 수런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


깜짝이야! 진한 호박색 눈동자가 비명을 삼키는 은하를 보며 짓궂게 휘어졌다. 언제부터 깨 있었던 건지. 시윤은 은하가 베고 누운 팔의 손을 움직이더니 은하의 볼을 콕 찔렀다.


“괜찮냐?”


또 괜찮냐고 물어보네. 처음부터 내내 그러더니. 포식종한테는 내가 두부로 보이나. 

뭐, 그럴 만 했으므로 은하는 선선히 답했다. 실제로 몸 상태가 완전히 괜찮은 건 아니었다.


“나는… 근육통만 빼면.”

“아하.”


하루라. 이게 정상적인 경우구만. 시윤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알아듣지 못한 은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뭐라 묻기도 전에 시윤이 눈을 덮었다. 정확히는 이마에 손을 올렸는데 손이 커서 눈까지 가려진 것이었다.


“엉, 열도 다 내렸네.”


일련의 행동들을 보며 은하는 땅땅 못을 박았다. 얘네는 그냥 날 치료한 거야. 가슴 아래에서 뭔가 흘러내리듯이 사라져 아팠지만 은하는 무시했다.


그리고 괜찮냐고 물어야 할 부분은 자신에게도 있었다. 은하는 시윤이 손을 치우자마자 입을 뗐다.


“넌 괜찮아? 냄새가 역했을 텐데….”


멈칫. 시윤의 손이 눈에 띄게 굳었다. 은하는 급격히 색이 빠진 시윤의 얼굴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 진짜 별로였나 봐. 


그때 불쑥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뭐가 역해?”


또 누가 있겠냐마는, 지서였다. 기척 좀 내면서 일어나 이 포식종들아! 은하는 흠칫 어깨를 떨며 고개를 돌렸다. 


“그… 내 페로몬 향…….”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하자 지서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게 왜?”


정말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지서가 묘하게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쯤부터 은하는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일어난 시윤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단 걸 잘 안 먹긴 하지만, 핫초코 냄새를 역하게 느낄 정도로 싫어하진 않는데.”


?


뭐?


핫초코?


“핫…초코? 라니?”

“? 그야 네 페로몬 향….”


?


?


3명이나 올라와서 잔뜩 비좁아진 침대 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갈고리를 달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길 한참. 은하는 둘을 번갈아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내… 페로몬 향은… 시체냄새인데……?”


그리하여 밝혀진 진실은 은하를 패닉시키기에 충분했다. 


핫초코 냄새라니. 시윤과 지서가 거짓말을 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은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어코 페로몬을 꺼내보기까지 했다. 


손목에서부터 지독히도 익숙한 향이 퍼졌다. 은하 자신의 코엔 여전히 썩은 핏덩이, 오래된 시체의 냄새였다. 그러나 시윤과 지서는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핫초코잖아.”

“핫초코 냄새야, 은하야.”


아. 세상에.


주륵, 별안간 눈물이 흘러내렸다. 은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시윤과 지서가 당황하며 횡설수설했다. 야, 진짜야. 은하야, 우리 진짜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아니 진짜 핫초코 냄새라니까. 왜 울어, 응? 야, 울지 마! 또 열 오른다고 니! 김시윤! 우는 애한테 소리 지르지 마! 은하야, 나 좀 봐봐.


“진정하고… 괜찮아?”


지서가 조심스럽게 두 뺨을 감싸 올렸다. 청록색 눈동자가 솜처럼 부드러운 걱정을 담고 일렁였다. 뒤에선 시윤의 투박한 손이 연신 등을 쓸어내리고 있었고. 은하는 목이 메었다. 


다정. 치사량의 다정이었다. 은하는 어린 애처럼 도리질치며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손이 사방에서 은하를 끌어안았다. 늪처럼, 혹은 달콤하고 따뜻한 핫초코처럼… 은하는 한 없이 흔들리고 서러워진다. 이젠 숫제 원망까지 들었다. 


왜. 왜 자꾸 이래.


나는 최선을 다해 기대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왜 나한테 놓지 못할 것들만 쥐어주느냔 말이야…….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제 기말 시즌이라... 아무래도 이번에는 길게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ㅠㅠ 한 한달 정도...

대충 정리 되고 연말의 어지러운 일정과 새해의 까다로운 것들도 끝나면, 한 1월 중반 정도 될 것 같네요.

게다가 좀 심란한 소식도 전해드리자면, 설정과 플롯을 좀 고쳐야 할 부분이 보이기도 해서... 웬만하면 1부까지는 완결 내고 하고 싶지만, 음. 제가 또 상당한 변덕 하는지라. 미리 죄송합니다. 갑자기 리메이크 해 버릴 수도 있어요... 

참 인생이 쉽지 않네요. 체력과 이 빌어먹을 완벽주의자 기질... 많이 저울질 해보고 결론 나면 돌아오겠습니다. 죄송해요.

그래도 연중은... 말없이 삭제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니까...! 기다려주시면 정말정말정말 감사하겠습니다ㅠㅜ 

오늘도 봐주셔서 감사하구요! 최대한 빨리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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