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Leave You Alone
Written by. Maria







일상이었다. 어제처럼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왁스로 정성스레 머리를 세우고, 교복 재킷을 걸치고. 스포츠 백을 메고 학교에 갔다. 훈련을 마치고 점심시간까지 수업. 물론, 제대로 듣지는 않았지만. 수업이 끝나고 나면 점심시간. 배구부 활동 시간을 제외하곤 밥 먹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오늘 메뉴는 버섯과 양파가 잔뜩 들어간 고기볶음. 도시락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면, 볕이 잘 드는 곳에 앉아 나른한 고양이처럼 햇볕을 쬐고 있는 그가 있다. 아카아시 케이지. 배구부 부주장. 2학년. 그리고, 자신의, 연인.
점심을 나눠 먹고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있자면 그는 살살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를 만지작거린다. 그의 손목에서 풍겨 나오는 가벼운 풀잎 냄새가 좋아 내내 손목을 쥐고 킁킁,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본다. 간지럽다며 하지 말라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쪽, 초콜릿 맛 입맞춤을 나눈다.

아카아시의 토스가 좋아. 아카아시가 올려주는 공이 좋아. 네가, 너무 좋아.

언제나 덤덤한 표정으로 제 앞에선 어른스러워 보이려는 이 후배는, 그리 말 할 때 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귀만 발갛게 달아오르곤 했다. 그 모습이 좋아서. 보고만 있어도 행복했다. 6시까지 하는 부활동에서 1시간 더 자율연습을 그와 단 둘이 하고, 체육 창고에서 입을 맞추고. 샤워를 한다. 부일지까지 다 쓰고 나면 8시 가까이 된다. 돌아가는 길에 저녁을 사먹는다. 라멘을 먹을 때도 있고, 덮밥을 먹을 때도 있다. 어쩐 때는 햄버거. 그와 먹는 건 뭐든 맛있다.
돌아가는 길에 손을 꼭 잡고 하교한다. 그를 지하철역에 데려다주고 나면 일과가 끝난다. 헤어지기 전엔 뽀뽀도 키스도 할 수 없어서 조금 아쉽다. 내일 또 보면 되지 않습니까. 그리 웃는 그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헤어진다.
집으로 돌아가 자기 전까지 라인 메시지를 나눈다. 숙제가 있거나 해야 할 공부가 있다고 말하면 미리 끝내기도 한다. 그날은 숙제가 있다며 미리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누었다. 보쿠토는 가슴에 휴대폰을 올려놓고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온몸에 충만히 차오르는 사랑 덕에 간식을 먹지 않아도 입속이 온통 달다.

빨리, 내일이 됐으면 좋겠다.

“코타로-!”
“응! 엄마 내려갈게!”

평소보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이미 가볍게 아침 조깅 후 샤워까지 마쳤다. 욕실 문을 열고 나가 팬티를 입고 수건을 목에 건 채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아카아시 아직 안 일어났나?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음? 보쿠토는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어제까지 메시지를 주고받았기 때문에 아카아시와 대화한 내용은 항상 가장 상단에 있다. 그런데 이게 뭐지. 대화상대 없음? 이런 적은 처음이다. 아카아시는 잠이 많아 실수로 대화방을 나간 적은 많이 있지만, 이런 알림창이 뜨진 않는다. 보쿠토는 고개를 갸웃하며 이미 외우고 있는 아카아시 케이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너 앱 삭제라도 했어? 꾹꾹, 번호를 입력한 다음 문자를 보냈다.

[사용자 없음. 문자 전송이 실패했습니다.]

…음?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전송 버튼을 눌렀다. 같은 메시지가 답장 대신 화면을 가득 채웠다. 전화를 걸려는 순간 아래층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코타로, 뭐하니 어서 아침 먹어! 학교에 가면 볼 수 있겠지. 한참 휴대폰을 바라보다 바지를 입었다. 묘한 위화감과 스멀스멀 타고 오르는 불안감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길 바라며.

“좋은 아침!”
“보쿠토 너는 아침부터 기운이 남아도는구나?”

히죽, 환하게 웃으며 코노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카트에 든 공을 통통, 가볍게 튕겼다. 멀리서 코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합! 보쿠토는 주변을 휘휘 돌아봤다. 몸을 풀며 다가오고 있는 사루쿠이에게 물었다. 부주장은? 그러자 그는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느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저기 있잖아?”
“…뭐?”

그는 코노하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 있잖아. 코노하가 부주장 된지가 언젠데 지금 누굴 찾는 거야? 보쿠토가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 다 같이 짰어? 나 이런 농담 싫어. 사람 하나 없는 거 만들지 말고. 어디 있어? 오늘 아프대? 안 나온 거야? 사루쿠이는 더더욱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보쿠토를 보았다. 그의 큰 손바닥이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거기 조용! 연습 시작한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왜 연습을 시작하지? 그 애가 없는데? 보쿠토가 잔뜩 당황해 코치에게 달려갔다. 사람 한 명이 덜 왔어요. 코치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보쿠토에게 손짓했다. 너 엉뚱한 건 알고 있는데 그런 장난 하면 못쓴다. 억울함까지 들었다. 어서 코트로 돌아가라는 코치의 말에 보쿠토는 입을 부루퉁, 내밀었다. 다들 이상하다. 전부 자기를 놀리는 거다. 오늘 그는 어디 아프거나 한 거겠지. 제 상태에 영향을 줄까 봐 이런 식으로 숨기는 게 틀림없다. 아침 연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보쿠토는 결국 코트에서 빠져 체력운동을 했다. 쉴 새 없이 코트를 돌며 숨을 헐떡였다.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

전화를 걸었다. 없는 번호라고 뜬다. 그럴 리가 없었다. 부원 모두에게 ‘아카아시 케이지’는 어디에 갔냐고 물었다. 모두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 없다고 했다. 보쿠토는 지갑을 열어 사진을 꺼냈다. 이것 봐. 이렇게 생겼잖아. 사진 속엔 밝게 웃는 자신과 옅게 미소 짓고 있는 ‘그’가 있었다. 코노하는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야? 하며 혀를 찼다.

“그게 누군데?”

보쿠토가 입을 떡 벌렸다. 장난, 장난치지 마. 아카아시를 모른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보쿠토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너무 힘이 들어갔는지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보쿠토의 손을 뿌리쳤다. 보쿠토, 너 오늘 이상하다? 자꾸 왜 모르는 사람 얘기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돌아봤다. 다들 이상하다는 듯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군수군. 목소리가 들린다. 아카아시 케이지? 그게 누구지? 누군데? 너 알아? 아니, 나는 몰라. 우리 학교 앤가? 3학년이야? 후배인가? 다들 정말 그를 모르는 것 같았다. 다 잊어버린 거다. 까맣게. 보쿠토를 제외하고. 아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아카아시 케이지가 사라졌다.

2학년 6반에도, 배구부에도, 학교에도. 그 어디에도 없다.

보쿠토는 포기할 수 없었다. 학교에 없다면, 집에는 그 아이가 있겠지. 분명, 그렇겠지. 들른 적 있는 곳이다.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들렀다. 모를 리가 없다. 보쿠토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지하철을 탔다. 아카아시네 집은 지하철을 타고 세 정거장을 지나 다시 버스를 15분 정도 타야 한다. 동네 외곽에 있는 일본식 집이다. 처음 갔을 때 했던 말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카아시네 집은, 향냄새가 나는 거 같아. 와, 사당도 있네. 불단을 모셔놨어. 신기하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게 그대로 있네. 그때 아카아시가 뭐라고 했더라. 오래전부터 모시던. 그런…. 그런 거라고 했었는데.
해가 뉘엿뉘엿 저문다. 멀리서 이름 모를 새가 울었다. '아카아시'라 명패가 적힌 집 앞에서 한참 서성이다 결국 결심한 듯 마른 침을 삼키며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아,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보쿠토가 다급히 초인종에 대고 말했다. 누구 찾으러 왔는데요. 초인종 너머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덤덤했다. 누구를 찾으십니까? 불안함을 감지한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댔다. 보쿠토는 후우, 낮게 심호흡을 했다. 아카아시, 케이지…라고 혹시 댁에 계시나요? 그러자 그녀는 잠시만 기다리라 말했다. 제발. 제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제 소원을 들어주길 바랐다. 잠시 뒤이어 대문이 열렸다. 보쿠토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아카아시 부인. 그의 어머니다. 보쿠토는 환한 얼굴로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갑작스레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케이지는…. 그러자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보쿠토 그룹 첫째 아들이 우리 집에는 어쩐 일이죠?"
"…네?"
"메구미 씨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제가 직접 나왔어요."

케이지라는 사람을 찾는다고 하는데…. 우리 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어요. 친척 중에서도 그렇고요. 보쿠토 군, 누구를 찾으시는 건가요? 눈앞이 까맣게 흐려졌다. 아득한 곳으로 곤두박질치는 감각에 삽시간에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보쿠토는 현기증을 느꼈다. 담벼락을 더듬으며 머리를 짚자 그녀가 걱정된다는 듯 괜찮냐며 제 안부를 물어보았다.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겨우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사라졌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보쿠토는 정처 없이 헤맸다. 어디로 걷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걸었다. 다리가 닿는 곳이면 아무 데나 걸었다. 지잉, 지잉 울리는 진동이 혹시나 그일까 황급히 화면을 보지만 액정에 표시된 이름은 어머니였다.
아카아시는 어디에 갔을까. 지금 어디에 있지. 아니, 처음부터 그 애가 존재하긴 했나. 한참을 걷다 그와 처음 키스를 나눴던 공원 앞에 섰다. 발이 저절로 이곳에 온 거였다. 보쿠토는 울음을 삼키며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꿈을 꾸나. 아직도 눈앞에 선한데. 그 미소가 이리도 선명한데 그는 없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마냥 아무도 그를 모른다. 세상 어디에도 그의 흔적이 없다.
한참 공원에 앉아있었다. 손톱 달이 배꼼 떠 있다. 보쿠토는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봤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웬일로 부모님 모두 계셨다. 항상 바쁘셨는데.

"코타로, 이제 오니?"
"…네."
"잠시, 여기 와서 앉아라."

방으로 올라가려 했지만, 난데없는 아버지의 부름에 보쿠토는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머니는 심각했고 아버지는 복잡해 보였다. 말을 꺼내려는 듯 말 듯, 입을 닫았다가 떼길 여러 번 반복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지. 한참 바라보고 있던 보쿠토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저 일어날래요. 그러자 보쿠토의 손을, 아버지가 다급히 잡았다.

"미안하다, 코타로. 네가 그렇게 될 동안 우린 아무것도 몰랐어."
"…무슨?"

네가 그런 환상에 사로잡힐 정도로 힘들었는데, 왜 말을 하지 않았니? 어머니는 거의 우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결국, 울음소리가 터졌다. 아버지는 두 손으로 보쿠토의 손을 꽉 붙잡았다.

"…."

조금 전에 아카아시 의원에게 연락이 왔었다고 한다. 오늘 보쿠토가 저의 집에 찾아와 '아카아시 케이지'라는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을 찾았다는 거다. 그뿐 아니라 감독에게도, 학교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고 한다. 보쿠토가 내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 헤맸다는 것이다. 보쿠토는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 속의 보쿠토가 진짜 자신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분명 그들의 이야기 속에 있는 건 보쿠토 코타로인데 자신이 아닌 듯했다. 괴리감이 짙어진다.
그들이 말하는 보쿠토는 내내 배구에 대한 슬럼프에 빠져 있었고,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스파이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온갖 신경질을 냈다고 했다. 부모님도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며 언제 사고를 칠지 몰라 학교에서도, 부에서도 신경쓰고 있었다고. 듣고 있자니 입술을 비집고 실소가 흘러나왔다. 내가 그랬다고? 자신은 어제까지 아카아시가…. 아카아시 케이지가 올려주는 토스를 시원한 스파이크로 연결하며 짜릿한 쾌감을 느꼈는데.

"우리가 양해를 구하고, 아직 방학이 시작하기 전이지만 너를 좀 쉬게 할 생각이란다."
"그래, 코타로. 그러는 게 좋겠어."

보쿠토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낯설었다. 그들이 말하는 보쿠토는 자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대체 뭐지. 이 기억은. 이 마음은. 이, 그리움은. 전부 무엇이란 말이지. 어머니는 보쿠토를 끌어안고 우셨다. 아버지는 다 제가 집안을 소홀히 해서 그렇다며 저를 원망하라고 했다. 혼란스러웠다. 보쿠토는 아무도 원망할 수도 없었다. 이 기억은 대체 무엇일까. 전부 생생한데.
어머니는 짐 싸는 걸 도와주겠다 하셨지만 보쿠토가 거절했다. 그들은 '요양'이라고 말했다. 시골에 계신 할머니 댁에 있다 보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져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원하는 만큼 있다가 와도 상관없다고 했다. 보쿠토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이 세상에 없다.

할머니 댁으로 가는 신칸센 안에서 보쿠토는 앨범을 뒤졌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하지만 어디에도 '아카아시 케이지'란 존재는 없었다. 믿음이 흔들리자 확신마저 희미해졌다. 정말 자신이, 그들이 말하는 대로. 세상이 속삭이는 대로. 많이 힘들고 지치고 몰려 존재하지도 않는 파트너를 만들어 도망친 건 아닌지. 이 사랑도, 마음도. 전부, 거짓이었던 건 아닌지.
입술에 닿았던 감촉도, 이름을 부르면 돌아보며 웃는 얼굴도, 손끝에 감기는 그의 서늘하고 미지근한 체온도. 밤이 끝나면 깨어나는 꿈이었던가. 그랬나. 그런, 거였을까.

신칸센을 타고 내려, 버스를 타고 또 한참 들어가야 했다. 보쿠토의 조모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걸 봤고, 아주 작고 섬세한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꾸는 꿈은 언제나 미래를 예언했으며 그녀는 종종 하늘의 말씀을 들었다. 미리 부모님께 연락을 받았던 듯, 마중 나온 조모가 보쿠토를 꽉, 아주 꽉 끌어안아 주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지?"

보쿠토는 그녀를 아주 어린 시절에 봤다. 그때가 5살이었으니 족히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모든 게 기억과 달랐지만, 조모를 둘러싼 시골 풍경은 기억과 똑같았다. 보쿠토는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아 코를 훌쩍이며 그녀의 마르고 작은 몸을 마주 껴안았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좋아. 괜찮아. 그녀는 그리 말했다. 조모의 쪼글쪼글한 손을 잡고 보쿠토는 동네 청과물 가게에서 수박을 한 통 샀다. 물 좋은 수박에 소금을 처먹으면 맛있다는 조모의 말에 웃음으로 답했다.
다다미와 마당의 단풍나무. 모든 게 기억과 같았다. 보쿠토는 눈물을 훔쳤다. 떠올릴 수 있는 기억 전부가 달라진 이 세상에서 이 하나만은 변하지 않았다. 감사하면서도 슬펐다. 편안한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5살로 돌아간 듯 다리를 흔들며 마루에 앉아있었다.

"수박 먹으렴, 코타로."
"네!"

히히, 웃으며 마당으로 수박씨를 뱉기도 하고, 수박을 먹고 늘어지게 눕기도 했다. 끄트머리에 달린 올빼미 모양 풍경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렇게 더운 여름인데 여기는 시원하다. 산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짙은 풀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보쿠토는 눈을 느리게 떴다 감았다. 조모는 어느덧 정리를 마쳤는지 보쿠토 근처에 앉아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할머니."
"왜 그러니?"

보쿠토의 금색 눈동자에, 푸른 하늘이 비췄다. 멀리 구름이 둥둥 떠 있다.

"기억이라는 게, 그렇게 금방 사라질 수 있는 걸까요?"
"응?"
"정말 제가 어디 아파서. 많이 힘들어서, 그래서 그랬을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좀 쉴게요. 보쿠토의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내내 기억하지 않으려 애썼다. 떠올리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모두가 원하는 대로 그가 없는 사람이라고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 여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선명해진다. 마치 저를 잊지 말라는 듯, 기억해 달라는 듯 웃는 얼굴이 선명해진다.
곱실곱실한 검은 머리카락. 갸름한 턱. 얇고 긴 손가락. 오뚝한 코. 새치름한 눈. 가느다란 입술. 다 기억하고 있는데. 이름을 부르는 낮고 보드라운 목소리도, 키스할 때면 언제나 감던 눈도.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도 모두 기억하는데 어떻게 이게 환상인지, 어떻게 이걸 꿈이라고 할 수 있는지. 보쿠토는 방 안에 들어가 가방을 뒤졌다. 지갑을 꺼내 사진을 빼냈다.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는데도 이 사진은 그대로 있다. 정말 자신이 미쳐서 그런 거라면 이 사진도 없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그는 여기에 있다.

"…아카아시…."

눈물이 절로 흘렀다. 나 혼자 다른 세상에 뚝 떨어진 걸까. 네가 없는 곳으로 나 혼자 온 걸까. 그렇다면 이제 돌아가고 싶다. 너 없이 너무 힘들어. 나 힘들어, 케이지. 툭, 툭.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돌아가고 싶다. 네가 없는 세상은 이제 됐다. 잘 웃지 않는 네가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 우리 같이 찍는 사진이야 그러니까 조금만 웃자 응? 내내 무덤덤,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녀석에게 애걸복걸 장난스럽게 말하자 종래엔 피식 웃어 주었던 그 사진. 너무 소중하고 아까워 인화까지 했던 사진.

“코타로.”
“…할머니.”

우리 손주가 뭐가 그리 슬퍼서 울꼬. 응? 할머니의 다정한 음성에 보쿠토는 시뻘게진 코를 문지르며 더욱 아이같이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메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호박색 눈동자가 온화했다. 보쿠토는 품에 꽉 끌어안고 있던 사진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할머니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미소 띤 얼굴로 제 손주를 바라보았다. 저, 그 남자애 많이 사랑했어요.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사진에 머물렀다.

“사진도 있는데.”

이 세상에 그 애가 없대요. 그렇게 웃고 있는데. 어디에도 그 애가 없대요.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대. 나만 알고 있어요. 아직도 눈을 뜨면 곁에 있는 거 같은데. 이름을 부르면 나를 바라봐 줄 것 같은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대요.

“제가, 정말로….”

미쳐서 그런 거예요?

조모가 사진을 돌려주었다. 사진 위로 멈추지 않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흐릿하게 사진이 번진다. 화들짝 놀라 눈물을 닦아냈다. 보쿠토가 손등으로 벅벅 얼굴을 닦았다. 그녀는 여전히 온화하고 따뜻한 미소를 짓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쓱했다. …커밍아웃 한 거나 다름없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견딜 수 없는 민망함이 치고 올라왔다. 세수라도 하러 갈까. 얼굴 엉망일 텐데. 보쿠토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그 아이….”
“…?”
“무언가의 점지를 받은 아이구나.”
“네…?”

보쿠토가 눈을 끔벅거렸다. 무언가의 점지를 받았다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지…? 그러다 이내 입을 꾹 닫고 그녀의 앞에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기억하고 있다. 자신의 친조모, 그러니까 보쿠토 스미레가 어떤 사람인지. 무얼 본 걸까. 아카아시에게서. 목이 말랐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었다. 할머니, 뭘 보셨어요? 이 사진에서? 그녀의 호박색 눈이 보쿠토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 누구도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아가.”

이 아이를 많이 사랑하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사랑해요.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따라오라는 듯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보쿠토는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을 손으로 훔치고 사진을 든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당을 지나 멀리 보이는 창고로 향했다. 창고는 오랫동안 여는 이가 없었는지 먼지투성이였다. 끼익. 낡은 나무문을 열자 퀴퀴한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노모는 허리를 숙여 바닥을 오랫동안 바라보더니 흙과 메마른 잡초로 뒤덮여 있던 땅바닥을 손으로 훔쳤다. 바닥에 작은 문이 있었다. 보쿠토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바라보자 그녀가 잠시 웃었다. 읏차. 칠십이 넘은 그녀의 힘으로도 문은 쉽게 열렸다.

“들어오렴.”
“네, 네….”

지면에서 지하로. 계단이 나 있다. 그녀는 어둡지도 않은지 그 아래를 손쉽게 걸어갔다. 보쿠토는 주변을 둘러보다 창고에 처박혀있던 랜턴 하나를 들고 조모의 뒤를 쫓았다. 둥그런 오렌지빛이 할머니의 작은 등을 비췄다. 얼마나 아래로 내려갔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이 좁은 길을 지나니 복도가 보였다. 퍼석퍼석한 흙바닥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복도를 따라 걷자 붉게 칠한 나무문이 나왔다. 굉장히 오래됐을 텐데 바로 어제 칠한 듯 문은 요요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커다란 손잡이엔 금실로 엮은 굵은 매듭이 묶여 있다. 그녀가 금실을 잡아당기자 스르륵, 너무도 쉽게 매듭이 풀렸다. 끼익, 나무문이 열렸다.

“…세상에.”

저 작은 문 아래의 지하에, 이렇게 넓은 사당이 있었다니…. 보쿠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온통 적색과 금색으로 치장된 사당 안은 누군가 수시로 관리를 했는지 새것으로 보이는 양초가 환하게 타고 있다. 붉은 휘장이 쳐진 안쪽으로 조모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손전등이 필요 없을 정도로 밝았다. 그녀는 금 조각이 화려하게 붙은 작은 상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코타로.”

보쿠토는 대답 대신 그녀의 옆에 바짝 다가섰다. 그녀가 상자를 열었다. 붉은 비단이 겹겹이 깔린 상자 위에 굵고 커다란 호박 보석으로 장식된 검은색 단검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 이건….”

그녀가 검집을 열자 푸르스름한 칼날이 드러났다. 어찌나 날카로운지 공기도 벨 수 있을 듯했다. 칼날은 짧았지만, 끝부분이 위로 휘어져 부드러운 곡선을 이뤘다. 단검의 손잡이 끝부분엔 입구에 엮여 있던 굵은 매듭과 비슷한 모양의 금실 장식이 있었다. 그녀가 다시 검집에 검을 다시 꽂았다. 상자를 닫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받거라.”

묻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궁금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모는 검을 쥔 보쿠토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상자가 있던 단상 옆 붉은 방석에 보쿠토를 데리고 와 앉혔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 주어야 할까. 고민이 서려 있는 얼굴이었다. 손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검이, 살아있는 것 같다.

“먼 옛날, 보쿠토라는 성씨를 가진 자가 사냥꾼의 덫에 다친 토끼를 도와준 적 있단다.”

그 토끼는 먼 산의 신이었고, 도와준 대가로 이 검을 주었다. 모든 액운을 막고 불행을 이겨내며 부조리함을 바로 잡는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 신의 검. 이것을 받은 자가 우리 가문의 시조다. 덕분에 보쿠토가는 불행에서 언제나 비껴갈 수 있었고, 대대로 신기가 가장 뛰어난 자들이 단검을 지키고 신에게 제를 올리며 정성을 다했다. 그 덕이었는지 아닌지 인간의 눈으론 판단할 수 없지만, 단검의 힘은 점점 강해졌다고 한다.

“이 검에 어느 정도의 힘이 깃들었는지, 할미는 잘 모른단다.”
“….”
“하지만….”

이 할미는 알 수 있어. 코타로. 너는 신이 특별히 아끼는 아이란다. 네가 태어난 날 검이 흐느껴 울고 산에 있던 토끼들이 마을까지 내려와 네가 태어나는 걸 지켜보았다. 그런 너라면. 무언가의 점지를 받은 그 아이도 다시 데려올 수 있을지도 몰라. 보쿠토는 조모를 빤히 바라보았다. 쉬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보쿠토가 처한 상황 역시도 그렇지 않은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존재하던 사람이 증발했다. 제 기억만 남기고. 정말, 자신이 신의 사랑을 받아서 이 빌어먹을 비틀림에서 벗어난 거라면. 그렇다면. 보쿠토는 검을 바라봤다. 믿을 수밖에 없다.

“코타로.”
“네, 할머니.”
“꼭, 데려올 수 있을게다.”

그 아이를 다시 만난다면, 그땐 꼭 할미에게도 소개해 주렴.

그녀가 사당에서 나갔다. 쿵, 문이 닫혔다. 보쿠토 혼자 남겨졌다. 그러나 무섭지 않았다. 놀랍도록 평온했다. 보쿠토는 품 안에 검을 꽉 끌어안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카아시를 떠올렸다. 네가 없는 세상엔 빛이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색을 잃고 빛이 꺼진 세계에서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시간마저 멎어버린 듯, 사당 안은 모든 게 정체되어 있었다. 보쿠토의 눈에 천천히 눈물이 고였다. 네가 왜 사라졌을까. 마치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 왜 너만 사라져버린 걸까. 그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게 싫었어? 그럴 거면 나도 바꿔버리지. 보쿠토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카아시.”

네가 없는 나는 의미가 없어.

“케이지….”

내 옆에 네가 없다면.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 속을 잃어버린 껍데기가 어떻게 혼자 설 수 있겠어. 그 순간이었다. 사당 내부가 기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물이 차오르는 듯 방석을 깔고 앉아있는 땅 아래가 흐물흐물 진흙처럼 변한다. 보쿠토가 눈을 번쩍 떴다. 벌써 두 발이 땅 아래로 반쯤 사라졌다. 말이 나오질 않는다. 다리 아래에 감각이 없다. 온통 한기가 느껴졌다.

“으악!”

시야가 새까맣게 변한다. 아무것도 잡히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다. 물속을 허우적거리는 느낌? 아니다, 이건 허공에 둥둥 떴을 때와 비슷했다. 양팔, 양다리 제대로 붙어 있는 거 맞아? 보쿠토가 열심히 팔다리를 휘적휘적 움직였다.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야…. 앓는 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문질렀다. 다행히도 사지가 멀쩡했다. 보쿠토는 손에 쥐고 있던 단검도 그대로다. 도대체 여긴 어디지…?
온통 컴컴한 곳을 몇 발자국 더 걸어가자 발밑에 자박자박 모래 밟히는 소리가 들린다. 짙은 안개가 껴 있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부옇고 푸르스름한 색은 새벽녘 하늘을 닮았다.

“…바다?”

검고 검은 바다가 조용히 일렁인다. 수평선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보쿠토는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딜 봐도 모래사장과 바다뿐 사람은커녕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낮은 파도가 친다. 임의로 소리를 배제한 마냥 주변은 기이한 고요로 가득 차 있다. 축축한 안개가 발밑을 휘감는다. 수평선 너머로 거대한 뱀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희무끄레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보쿠토는 조용히 검을 고쳐 쥐었다. 키이이, 단검이 귀곡성을 뱉는다.
적막이 흐르던 공간에 갑자기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들린다. 보쿠토가 귀를 막았다. 현기증이 났다. 물결이 흔들린다. 파도가 친다. 물거품에 뒤섞여 또 다른 무언가가 들렸다. 누군가가 이름을 부른다. 보쿠토가 귀를 기울였다. 사람의 목소리였다.

보쿠토 씨.

고개를 퍼뜩 들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알고 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카아시!”

파도가 높게 일렁였다. 소리가 거칠다. 뱀을 닮은 그림자가 물결에 비친다.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물 위로 언뜻 사람의 형상이 비쳤다. 보쿠토가 그림자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가까워지질 않는다. 점점 더 멀어질 뿐이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환상인가? 아니면 헛것을 보는 건가. 짙은 안개에 가리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림자마저 자취를 감추었다. 단검이 또다시 서글피 흐느꼈다.

보쿠토 씨.

저 안개 너머에 아카아시가 있다. 확실했다. 보쿠토가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두려울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와 함께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이형의 존재도 겁나지 않았다. 비늘에 뒤덮인 뱀 그림자가 안개 주변을 맴돌았다. 아카아시가 저기 있는데.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지 않았다. 에라이, 이판사판이다. 보쿠토가 검집에서 검을 빼냈다. 빛이라곤 조금도 없는 희뿌연 공간에 단검의 금빛 보석만 찬란히 빛났다. 해가 떠올라 안개가 사라지듯 검의 빛이 닿자 안개가 스르르 증발했다.

“아카아시, 거기 있지?!”
“오지 마세요! 보쿠토 씨!”

몸이 우뚝 멈춰섰다. 왜…? 왜, 어째서. 혼란스러운 보쿠토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단검이 귀곡성을 낸다. 안개가 비명을 지르고 물결이 노호성을 쳤다. 뱀 그림자가 짙어진다. 안개 사이로 언뜻, 기다란 뱀 허리가 보였다. 비늘이 번쩍인다. 보쿠토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찰박. 바다 위였다. 발아래로 물이 고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새카만 물이었다. 나는 항상 아카아시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들었지만, 이번엔 아냐. 아니야. 보쿠토의 다리가 점점 빨라진다. 바닷물이 튀었다. 안개 속으로 뛰어든다. 부옇고 차갑다. 얼굴에 닿는 안개는 축축하고 끈끈했다. 손으로 앞을 마구 헤치며 달렸다. 바닷물이 점점 깊어졌다. 종아리 근처까지 찰랑거렸다. 보쿠토 씨. 제발, 오지 마세요. 위험합니다. 아카아시는 애처로울 정도로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께 잠시 허락을 받았습니다.”
“….”
“어찌 된 일인지 보쿠토 씨가 저를 기억하고 있으니, 기억을 지우기 전 마지막으로 만나고 오라고요.”

잘 지내십니까? 보쿠토가 주먹을 꽉 쥐었다. 잘, 지내냐고…? 물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럴수록 안개로 감싼 그림자는 조금씩 멀어진다. 쥐고 있던 단검을 한번 휘둘렀다. 시공간이 갈라지듯 안개가 반으로 뚝, 잘렸다.

“내가 어떻게 지냈을 것 같아?”
“…보쿠토 씨.”
“나만 너를 기억해. 너랑 찍은 사진도 있어. 모든 사람이 나를 정신에 병이 있는 사람 취급해.”
“보쿠토 씨, 죄송합….”
“그래도 상관없어.”

너를 잊어버릴 바에야. 너와의 기억을 모두 잊고 살아가느니 차라리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게 나아. 멀어지던 그림자가 우뚝 멈춰섰다. 뱀 그림자가 옅어진다. 안개 너머의 그림자가 한숨을 쉬었다. 눈앞에 선명하게, 저를 보고 어쩔 수 없단 표정을 짓던 아카아시가 떠올랐다. 게다가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는지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단검을 준 이의 힘인가요? 아카아시가 묻는다. 보쿠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지구 끝이든 땅 밑이든 어디든. 아카아시가 있다면 찾아갈 수 있다. 어떤 고통이든 아픔이든 상관없다.

“돌아가자, 아카아시.”
“…갈 수 없습니다.”

이미 저는 반은 사람이 아닙니다. 돌아갈 수 없습니다. 보쿠토 씨 앞에 얼굴을 내놓을 수도 없어요. 그게, 그게 무슨 소리인데…? 보쿠토가 바닷물을 헤치고 앞으로 달렸다. 물이 허벅지까지 찬다. 걸음을 우뚝 멈췄다. 다리가 얼어붙어 떨어질 것 같이 차다. 물에 잠긴 다리 사이에 스산함이 느껴졌다. 보쿠토가 아래를 바라봤다. 뱀이다. 수면 아래 물뱀이 가득 엉겨 붙어 제 다리 사이를 스친다. 경고였다. 조금이라도 아카아시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면 가차 없이 다리를 물어뜯어 버릴 거라는.

“뱀의 신부가 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보쿠토가 달렸다. 안개를 헤치고 내달린다. 앞으로. 앞으로. 안개가 얼굴을 스친다. 뺨이 따갑다. 가느다랗게 벤 상처에서 피가 방울방울 흐른다. 상관없다. 상관없어. 아카아시. 아카아시. 그림자가 멀어지는 속도보다 보쿠토가 빠르다. 아카아시가 다급히 소리쳤다. 제발, 보쿠토 씨. 제발.

“저는…!!”

안개가 옅어진다. 윤곽이 점점 또렷해진다. 바닷물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몸이 무겁다. 다리 아래에 계속 뱀이 스친다. 보쿠토가 손을 뻗었다.

“저는 보쿠토 씨를 행복하게 해 드릴 겁니다!!!”
“바보야!!”

아카아시의 양팔을 붙잡았다. 축축하고 미끈미끈하다. 해초를 만지는 듯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네가 없다는 그 하나만으로 이렇게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데.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데. 그런데. 그게, 가능할 거로 생각하는 건가? 보쿠토 씨, 제발 놔 주세요.
보쿠토는 자신의 힘이 얼마나 센지 잘 알았다. 그래서 함부로 힘줘 누군가 잡지 않는다. 손아귀 힘 때문에 멍이 들거나 다치기 때문이다. 특히 아카아시에겐 더 조심했다. 한번 세게 손목을 잡았다가 손 닿는 부분 그대로 멍이 든 걸 보고 기함을 한 적 있었던 탓이다. 검고 푸른 바다색에 새까만 비늘 무늬가 언뜻언뜻 비치는 기모노. 뱀신의 옷이었다.

“네가 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내가 어떻게 혼자 행복해질 수 있어.

아카아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은 파랗고, 얼굴엔 군데군데 비늘이 돋아났다. 검은 비늘이다. 흰자가 보이지 않는 파란 눈에서 주룩, 검은 눈물이 떨어졌다.

“혼자선, 안 돼. 아카아시.”

그를 꽉 껴안았다. 알잖아. 나 혼자, 스파이크도 못 치고. 밥도 급하게 먹어서 배탈도 나고. 아침에 같이 등교할 사람도 없고. 힘들 때 달래 줄 사람도 없고. 아카아시 생각하느라 매일 울고. 아카아시만 떠올리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는데. 나보고 혼자서 행복해지라니. 그것만큼 불가능한 이야기가 어디 있어. 나는 못 해. 혼자서 절대 못 해. 안 돼. 안 된다고, 아카아시.
보쿠토가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끈적한 진액이 묻어났다. 돌아가자. 아침에 일어나 서로 메시지 주고받고. 아침 훈련받는 거야. 점심엔 뭘 먹을까 고민도 하자. 매점에 가도 좋고 도시락을 먹어도 좋아. 오후 수업은 졸리니까 서로 응원도 살짝 나누자. 헤어지기 전에 늘 입을 맞추던 계단 위에서 뽀뽀하면 기분이 훨씬 더 좋아지잖아. 만약 이동 수업이 있다면 서로의 교실에 얼굴을 한번 비추는 것도 좋겠지. 정규 수업이 끝나고 나면 드디어 기다리던 부활동 시간. 네가 올려주는 토스는 언제나 최고야. 집에 가기 전, 1시간만 더 자율연습을 하자. 하지만 늘 1시간은 2시간이 되고, 2시간은 3시간이 되지. 7시가 다 되어서 부일지를 쓰고 집에 가자. 부일지는 늘 네가 쓰니까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저녁을 먹고 가자고 할 거야. 헤어지기 전에는 키스를 나누고, 또 내일 만나자고 인사를 해.

“나 혼자서 행복해질 수도 없지만.”
“….”
“아카아시랑 같이 행복해지는 게 좋아.”

비늘로 뒤덮인 뺨에 입을 맞췄다. 후둑, 비늘이 떨어졌다. 아카아시가 놀란 눈으로 제 뺨을 붙잡았다. 저 멀리 안개 뒤에서 커다란 뱀 머리가 언뜻 비친다. 그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보쿠토 씨, 저는 두고 가세요. 그분이 화가 나면 보쿠토 씨를…! 저를 밀어내려는 손길을 깍지 껴 잡으며, 보쿠토가 단검을 꺼냈다.

“야!”

쉬익. 뱀이 혓바닥을 내민다. 보쿠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넌 뭐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뭐로 아카아시를 꼬셨는지 모르겠지만, 난 얠 데리고 가야겠어. 신이면 신답게 굴라고. 너 같은 건 신도 아냐! 격노한 뱀이 긴 혓바닥을 내밀며 몸을 검붉게 부풀린다. 아가리를 쩍 벌린 뱀이 보쿠토의 머리를 삼키기 위해 날아온다.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한쪽 팔로 꽉 껴안았다. 아카아시가 발버둥 쳤다. 뱀의 농간일까? 또다시 소리가 사라진다. 제 사랑이 지금 무어라고 외치고 있는데 어떤 것도 들리지 않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뛴다. 공포? 두려움? 아니. 아니다. 그런 종류가 아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다시 아카아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는 무서움에 비하면. 저 뱀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

뱀의 아가리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검은 피가 솟구쳤다. 뱀이 물 아래로 쓰러지며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발아래가 사라진다. 밑도 끝도 없는 바다 저 바닥으로 처박힌다.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껴안고 눈을 감았다. 아카아시 역시 놓지 않겠다는 듯 보쿠토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물속인데 신기하게 숨이 쉬어진다. 수면 위에 희미하게 빛이 번졌다. 이대로 못 돌아가면 어떡하지? 시야가 가물가물 흐려진다. 보쿠토가 천천히 아카아시의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뭐, 상관없나.
우리 둘인걸.




* * *





자명종 소리가 들렸다. 보쿠토가 손을 뻗었다. 부스스 뻗친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기지개를 크게 켰다. 커튼 사이로 눈 부신 빛이 쏟아진다. 활짝 열고 창문을 열었다, 왠지 기분 좋은 하루가 될 듯하다. 조깅을 마치고 아침을 하고, 도시락을 든다. 휴대폰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달력도 보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오늘이 며칠이냐 묻지 않았다. 그저….

“…후우.”

대문 앞에서 심호흡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눈을 질끈 감는다. 온갖 감정이 몰려들었다.

“보쿠토 씨.”

빛이 쏟아진다. 아카아시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긴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응! 좋은 아침, 아카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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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마음과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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