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의 아홉수.

‘삼재와 겹치진 않았지만 올해는 특별히 조심하라’는 모친의 시시콜콜한 당부가 나도현은 언제나처럼 성가셨다. 그는 사주가 어떠니 팔자가 어떠니 하는 그녀의 허무맹랑한 믿음에 동조할 만큼 스스로가 얼빠진 놈은 아니라고 여겼다.

실제로 무더운 여름이 다 지나도록 무난한 일상이 그의 소신에 힘을 실었고, 그 부분에서 오히려 자부심과 비슷한 만족감까지 느꼈다. 평범하다는 것은 약간 지루하긴 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는 그런 평범한 날들이 좋았다.


그래서 늦장마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그 날도 그에겐 딱히 인상 깊은 날은 아니었다.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며 실망하는 후임 양진수 과장의 말에 호응해 주면서도 그는 별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종일 사무실에 앉아 키보드나 두드리는데 천장에 구멍이라도 뚫리지 않는 이상 무엇이 대수란 말인가. 빗길 퇴근에 차가 조금 밀리는 것만 빼면 주구장창 덥기만 했던 공기가 기분 좋게 서늘해지는 점이나 운전 중 규칙적으로 울리는 와이퍼의 기계 소리를 듣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그 이후에 나온 본론에서, 비가 오니 막걸리 한 잔 하자는 소리에는 진심으로 마음이 동했다. 양진수도 그도 술이라는 마성의 액체 앞에서는 짝짜꿍이 참 잘 맞았다. 그들 나이의 직장인들에게 ‘퇴근 후 한잔’이란 성실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일상의 특권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차장님. 들어보세요. 제가 진짜 요즘 눈치 보느라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없어요.”

“뭔데 그래.”

둘은 퇴근하기 무섭게 자주 찾는 단골 술집으로 향했다. 막걸리와 어묵 탕을 주문하니 서비스로 두툼한 파전이 먼저 나왔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을 한 입 맛 볼 새도 없이 양진수가 볼멘소리를 한다.

그가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하면 그 속내야 뻔했다.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아이가 둘, 집-회사가 일상인 유부남이 친한 상사와의 술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이 뭐가 있겠나. 어느 정도 짐작을 하며 갈색 플라스틱 잔을 막걸리로 채워주면 일단 한 잔을 쭉 들이켜는 틈이 생겼다. 나도현 역시 타이밍 맞게 상대가 채워놓은 잔을 단숨에 비웠다. 우유보다 약간 더 누런빛의 액체는 달고 시원했다.

“크흐.. 술이 다네요. 아니, 제가 며칠 전에 이제 우리 둘째도 어린이집 보낼 때가 됐다고 했었잖아요.”

“어, 기억난다. 딸내미?”

“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우리 막내요. 그래서 첫째 보냈던 곳으로 와이프가 신청을 했거든요. 근데 그게 신청하고 그 날 바로 첫 달 원비를 송금해야 한다는 거예요.”

“아, 그래?”

술을 따르던 양진수가 울상을 했다. 나도현은 잔이 채워지기 무섭게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솔로인 그는 지금의 화제에 대해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지만 후임의 하소연을 최대한 잘 들어주고 싶었다.

“네, 근데 하필 그 때 타이밍에 부장님이 저를 찾으신 거예요.”

“설마... 며칠 전에 미국법인 투자 건, 그거?”

“예에.”

아하. 마저 듣지 않아도 나도현은 그가 어쩌다 곤란해졌는지 알아버렸다. 이틀 전이었나, 팀장에게 불려간 양진수는 볶은 깨 껍질 털듯 훌훌 털렸다. 부장실을 나오는 그의 얼굴에는 말 그대로 그늘이 어둡게 내려앉았는데, 미국법인 실적이 저조한 탓에 만회할 자료를 영업회의 전날까지 만들라는 갑작스러운 지령이 떨어진 것이다. 분명 나도현이 늦은 퇴근을 할 때도 집에 갈 생각조차 못하던 양진수를 떠올리면 그 일 때문에 어린이집 원비를 송금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송금을 못했구나.”

“완전 잊어버렸지 뭐에요. 저녁 여덟시가 마감이었대요. 그 시간에 저는 한창 법인 자료 취합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어떻게 됐어?”

“예비 번호로 밀려났대요. 아니, 당일 송금이 말이에요? 조금 더 여유를 줄 수도 있잖아요. 물론 제가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리긴 거지만... 무슨 어린이집이 맛집도 아니고 대기까지 걸어서 보내야 하냐구요.”

그는 만회할 수 없는 실수에 무엇이든 탓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답답한 마음이 급하게 술을 찾으면 나도현은 얼른 잔을 맞춰주었다.

“제수씨는 뭐래?”

“노발대발했죠. 잊어버릴 게 따로 있지 딸 어린이집 등록을 홀라당 잊어버리냐고... 등록까지 다 해 줬는데 송금 하나를 똑바로 못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드냐, 너만 회사 일 하는 티를 내는 거냐, 그럴 거면 경제권을 왜 쥐고 있느냐, 그러고도 제대로 된 아빠가 맞느냐...”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듣는 아내의 잔소리는 선을 넘은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제 잘못을 알고 있는 그는 한마디 제대로 변명도 못하고 그 분풀이를 오롯이 받아내었다.

완전히 기가 죽은 양진수에 나도현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맞벌이 가정에서 아이를 맡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도 알고, 실수할 수밖에 없었던 양진수의 사정도 낱낱이 알아 성급하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 어려웠다.

“제수씨가 그렇게 화가 났으면 변명도 어려웠겠네.”

“그렇죠. 상사한테 깨진 게 뭐 대단한 이야기라고 그 앞에서 그 소릴 하겠어요. 차라리 실수한 걸로 자존심 상하는 게 낫지, 불난 데다 가스통 굴리는 거죠. 근데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뭐가 더 있어?”

“어제 아침에 전화가 왔는데, 첫째 등원 도우미 하던 분도 갑자기 그만둔다는 거예요. 개인적인 사정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데 애 맡기는 입장에서는 여기도 저기도 다 을이지 진짜, 하..”

제수씨도 그도 집과 회사의 거리가 꽤 되는 탓에 아이를 등원시키기가 쉽지 않았단다. 그래서 도우미를 쓰게 되었는데, 사람이 갑자기 그만두면서 새로 구하기까지 공백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나쁜 일은 항상 같이 오는 것 같다며 사족이 붙었다. 급하게 술을 찾는 그를 보며 나도현은 꼭 제 일인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해 줄 수 있는 것이 같이 마셔주는 일 뿐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하이고, 너희 주변에 도와줄 사람도 없잖아.”

“그렇죠. 본가도 처가도 다 지방이고.. 진짜 어제 저녁엔 눈앞이 깜깜하더라구요.”

“그래서, 대책은 세웠어?”

“오늘은 와이프가 조금 늦게 출근했고, 다음 주는 제가 맡아야 할 것 같아요. 이후에는 무조건 사람을 다시 구하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차장님..”

“그래, 내가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부장님께 잘 말씀드려 볼게.”

이번에도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나도현은 상대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의 듬직한 대답에 쭈그러들었던 양진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으아! 역시 차장님뿐이에요. 진짜 차장님 최고, 최고!”

“별 소릴, 아홉수는 나라는데 왜 너한테 자꾸 그런 일이 생기냐.”

“그러게 말이에요. 오히려 제 인생이 더 험난한 거 같은데요. 그런 거 다 믿을 게 못 된다니까요.”

“그래, 믿을게 못되지.”

그의 처지를 이해 못하는 것도, 그의 부탁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으니 나도현은 사소한 일에 고마워하는 양진수의 눈빛이 부담되었다.

선임 좋은 게 다 뭐야, 슬쩍 농담을 던지면 이번엔 양진수가 나도현의 말에 진심으로 동조해 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술을 주거니 받거니 반복하면 어느새 한 병이 금세 비어버렸다. 양진수가 손을 들어 막걸리를 추가로 주문했다.


술자리의 화제는 미신을 신봉하는 나도현의 모친 흉보기로 이어졌다가, 다시 양진수의 배우자에 대한 소소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서로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사이에 가타부타 할 부가적인 설명도 필요 없었으니 두 남자의 술자리는 적당히 흥겹고 즐거웠다. 그런 분위기의 끝을 알리는 것은 양진수의 핸드폰으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였다. 금방까지 성격이 급하니, 아주 직장상사가 따로 없다니, 제수씨 욕보이는데 열을 올리던 그가 나긋나긋하게 전화를 받으면 나도현은 육성으로 웃음이 터졌다.

“응, 여보. 나차장님이랑 한 잔 한다고 했잖아. 응, 아니 열시 전에는 들어가지 그럼. 아냐, 아냐. 많이 안 마셨어. 차장님 바꿔줘? 싫어? 응, 알았어요. 걱정 말고 먼저 자요. 그으럼 내가 내일은 애들 다 씻기고 재울게. 응, 오늘도 수고했어요. 응응, 깨우지 않게 조용히 들어갈게. 그래, 나도.”

나도현의 눈에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양진수가 우습기도 했지만, 한참 흉을 보던 당사자가 자신을 찾는 전화에 흐뭇해하는 것이 어쩐지 좋아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도 진짜 가족이 될 수 있구나 싶어 부럽기도 했다. 그에게는 귀가가 늦다고 걱정해 줄 사람이 없었다. 부러워졌다는 사실이 민망해져 괜히 꾸짖어 본다.

“나 바꿔준다는 소리를 뭐하러 해.”

“차장님이랑 있다는 티를 내야 잔소리를 덜하거든요. 저희 와이프가 차장님을 또 그렇게 좋아하잖아요. 열시까지 얼마나 남았죠?”

“됐어, 임마. 입 발린 소리 하고는, 취했냐? 이제 일어나자.”

“크,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차장님!”

눈치가 귀신이라고, 그렇게 욕을 하고서도 와이프 한 마디에 양진수의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것이 보이면 술자리를 더 끌어가기 어려웠다. 애를 둘이나 낳아놓고도 저렇게 좋을까. 그에게 있어 가정에 충실한 양진수의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한 일이다. 그가 제수씨에게 밉보이지 않는 법을 아는 것도 사실이니 입바른 소리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알싸한 술기운까지 더해 기분이 좋아진 나도현이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의 뒤를 따라 양진수가 빠트린 물건이 없는지 테이블 위를 마지막으로 체크했다.

 


그칠 것 같지 않던 비가 뚝 그쳤다.

대리기사가 올 때까지 기어코 기다렸다 가겠다는 놈을 나도현은 억지로 택시에 태웠다. ‘상사부심’을 부리고 싶었다면 애초 둘 사이에 단란한 술자리는 가능하지도 않았다. 유부남과 달리 집에 가 봐야 기다려 주는 사람도 없고, 제 몸 하나 씻고 자는 것 외에 할 일도 없으니 여유 있게 담배나 한 대 태우고 대리운전을 부를 생각이었다.

나도현은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일 때까지 잠깐 뜸을 들였다. 그러면서 금요일 밤 축축하게 젖은 유흥가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활기를 느껴보았다. 복장이 화려한 젊은 학생, 그와 같은 캐주얼한 차림의 직장인, 근처 식당의 종업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빠르게 그의 앞을 지나쳐 갔다. 그는 사람이 덜 지나는 곳으로 몸을 옮겨 마침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개비가 다 타들어가는 시간동안 그의 사색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조금 전에 있었던 술자리 대화를 곱씹어보았다. 가벼운 친목 도모가 목적인 만남에 되짚을 것이 뭐가 있겠냐마는, 꼭 이렇게 끝나고서 허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는 그 공허함을 그냥 넘기지 않고 차분히 들여다보았다.

같은 직장, 비슷한 연배임에도 양진수의 삶과 그의 것은 아주 달랐다. 한 사람은 ‘제 때’라고 불리는 시기에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고, 다른 사람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겠지. 양진수에게는 없으면 찾고, 필요로 하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셋이나 있었지만 그에게는 가끔 연락하는 모친이 전부였다. 투덜거리고 불평하면서도 결국엔 행복한 얼굴을 하게 만드는 것이 가족이라면... 한마디로 부러워서 허한 기분이 들었다는 거다.

그는 양진수보다 네 살이나 많았으니 한 가정을 이루기에 늦은 것은 확실했다. 그렇지만 포기했냐고 물으면 그런 건 아니고, 반대로 절실하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결혼할 사람은 다 정해져 있다는, 인연에 대한 보수적인 태도가 지금의 그를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연애는 어떨지 몰라도 결혼은 생활인데, 애인도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 상태로 미래를 계획하는 것은 그에게는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한편으로는 여태 혼자인 제가 나을지도 모른다는 변명도 해 본다. 나도현이 양진수의 입장이라 한들 더 잘해 낼 자신이 없기도 하고,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던 그는 늘 그의 평탄한 일상에 자부심을 느꼈으니 굳이 인력으로 되지 않는 일에 힘을 줄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유리문에 대고 스스로가 괜히 초라해보이진 않는지 체크해 보았다. 취기에 눈가가 불그스름하긴 했지만 셔츠와 양장바지 차림이 꽤나 멀끔했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와 잡티 없는 피부도 제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것 같아 위안이 되었다.

“그래, 이 정도면 나도 아직은 꽤 괜찮은 편이,”

“아, 좀 가라고!”

그의 혼잣말을 민망하게 만드는 시끄러운 고함소리였다. 소리는 그가 서 있던 바로 다음 골목 어귀에서 들렸다.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정도로 컸다.

“형, 아 형어엉. 잠깐만... 응?”

이어서 절박하게 매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화답하는 것은 땅 꺼질 듯 깊은 한숨소리였다. 단순한 다툼이구나. 쉽게 눈길을 주었던 사람들은 그보다 더 쉽게 관심을 거두었다. 나도현 역시 그럴 참이었다.

“가라고, 좀. 가라고.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들어?”

“잠깐만, 응? 잠깐만 이야기 좀 해.”

“뭔 얘길 더 해, 너하고 나 사이에.”

“형도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나 여기 자주 오는 거, 형두 알고 있잖아. 그래서 온 거잖아. 나 보러 왔잖아, 맞잖아!”

“아 뭔 억지야! 그건 너 때문이 아니라 오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하, 됐다. 아무튼 그런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알고 좀 떨어져. 나 지금 가야 한다니까? 너하고 더 할 말 없다고. 애가 왜 이렇게 찌질대.”

발길을 잡았던 것은 말소리 뒤에 이어진 둔탁한 마찰음이었다. 뭘 어쩌고 있는지 몰라도 제법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소리에 겹치는 작은 신음소리까지. 누가 들어도 물리적인 갈등을 짐작케 했다.

“형, 형 제발. 나 이렇게는 못 헤어져. 제발 형... 나한텐 형밖에 없단 말이야. 악!”

“제발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제발 좀 가라. 그냥 조용히 가라고. 내가 너 싫다잖아. 그럼 우린 이미 끝난 거야. 연호야, 한연호. 사귀다가 한 쪽이 틀어지면 그건 그냥 쫑 난거라고.”

“으.. 아파 형. 아파 아프다구.”

한연호. 어쩐지 귀에 익은 이름이었지만 단숨에 와 닿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도현이 그 당사자들을 직접 확인하게 된 이유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에 있었다. 울먹이는 소리에 끌려 시야를 막은 벽을 돌아서면 예상대로 커다란 남자가 작은 체구의 남자의 옷깃을 마구잡이로 끌며 제압했다. 구슬픈 애원에도 그는 상대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야야, 내가 너한테 그만큼 해 줬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

“바라는 게 윽, 아니라 나는 형 포기 못한단 말이야. 형 없이 못 산다구! 으윽.”

“못살긴 뭘 못 살아. 다 살 수 있어. 네가 아직 어리고 철이 없으니까 잘 모르는 거지.”

“형 진짜 왜 이래? 내가 요즘 바빠서 그래? 부를 때마다 못 가서? 그거 잘 안 해줘서? 형 취향에 못 맞춰서? 나 잘못한 거 다 알아. 형, 내가 잘할게. 진짜 더 잘할게. 부족한 거 다 고칠게. 그러니까 제발 헤어지잔 말 하지 마... 응?”

“어휴... 이게 진짜. 누굴 그거에 미친놈으로 생각 하냐?”

“아악!”

덩치 큰 남자가 흥분하면 기분 나쁜 페로몬이 물씬 풍겼다. 또 한 번 여린 몸이 벽으로 사정없이 내쳐졌다. 페로몬과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알파와 오메가의 치정이었다. 패대기쳐진 작은 남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 앳되고 무방비한 얼굴에 나도현은 미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하... 이거 진짜 답 없네. 야, 잘 들어. 나 다른 사람 생겼어. 결혼까지 생각할 만큼 진지한 사이야. 그래서 너하고는 안 된다고. 이것도 못 알아듣겠어?”

“뭐... 뭐?”

“왜. 이제는 셋이 하자는 소리도 하겠다? 씨* 이건 눈치도 없어. 그 동안 그렇게 티를 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 아님 모르는 척 하는 거냐?”

“누군데? 어떤 사람인데? 나보다 잘난 사람이야? 그래서 형이 나한테 이렇게, 악!”

“아 네가 그걸 알아서 뭐 할 건데. 너보다 잘나면 뭐 어쩔 거냐고. 제발 구질구질하게 가지 말자.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 좀 알아들으라고.”

그래, 제발 좀 알아들어라. 나도현은 이만하면 그가 포기하길 바랐다. 같은 알파의 입장에서 오메가가 일방적으로 제압당하는 것이 기껍지도 않을뿐더러 잠깐 보았을 뿐인데도 그 놈이 매달릴 만큼 가치가 없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대화로 그의 짐작은 사실이 되었다.

“으.. 흑. 왜 그래 진짜. 거짓말 하지 마. 형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형 나 좋다구 했잖아. 나만큼 잘 맞는 사람 없었다고 했잖아. 내 처음을 형한테 줘서 고맙다고 했잖아!”

“하? 이거 봐라. 이젠 질질 짜기까지 하네. 동정심 자극 뭐 그런 거면 소용없으니까 그만 해. 어린놈이 나이 많은 놈 만나줬다고 유세 부리는 거라면 그만 두라고.”

“그 말 아닌 거 알잖아! 형이 제일 잘 알잖아!”

악을 쓰기 시작한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의 눈물이 구정물이라도 되듯 덩치 큰 남자가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애달픈 얼굴을 동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골이 아프다는 듯 남자가 이마를 짚었다.

“야, 솔직히 이만큼 했으면 너도 손해 본 건 아니지. 물론 네가 어릴 때 우리가 만난 건 사실이지만 내가 수준도 안 맞는 거 엄청나게 잘 맞춰주지 않았냐? 학생으로는 꿈도 못 꿔 볼 레스토랑에, 호텔에, 내가 너한테 얼마를 썼는데. 그만하면 추억거리 삼을 것도 충분하잖아.”

한연호는 대답이 없었다. 서러움의 눈물이 재차 쏟아졌다.

“그니까 이제 좀 끝내자.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거? 그거 딱 하나있다. 그만 내 앞에서 사라져주는 거. 나도 내 수준에 맞는 사람 만나 미래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거 아니겠냐. 너도 이제 네 또래 만나서 정신 좀 차리고.”

쓰레기 새끼. 나도현은 소리 나지 않게 입 모양으로 욕을 했다. 눈치가 귀신인 그는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한연호의 얼굴을 보고 기시감을 느낀 이유도 알아버렸다. 생판 모르는 연인의 불화라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개자식.”

“뭐?”

“나쁜 새끼. 개새끼. 쓰레기 같은 놈.”

“야, 한연호!”

“너 지금 나 따먹고 버리겠다는 거냐? 어린 애 꼬셔내서 3년이나 뒹굴었음 양심이라도 있어야지. 형이 나한테 어떻게 그래!”

“아 나 참. 이게 진짜.”

끝임을 직감한 한연호가 반격하기 시작했다. 죽어라 좋아했던 상대가 이제는 죽어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아주 비참하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상대는 이미 냉정해졌으니 그 입에서 나온 비수는 다시 돌아와 본인의 마음에 꽂힐 게 뻔했다. 그럼에도 감정에 격해진 그는 독설을 그만두지 못했다.

“경험 없고 어릴 때는 예뻐 죽다가, 놀만큼 놀고 나니까 이제 와서 뭐 현실? 수준? 내가 너 그냥 결혼하게 둘 것 같아? 형이 어딜 가든 쫓아갈 거야. 나 다시 봐 줄때까지 따라다닐 거라고!”

“이게 진짜 돌아버렸나.”

“악!”

떡. 뼈와 뼈가 부딪히는 소리는 처음 그의 관심을 끌었던 고함소리만큼 요란했다. 축축한 눈을 마구잡이 부라리고 있던 한연호가 놈에게 얻어맞아 나가 떨어졌다. 손바닥도 아닌 주먹으로. 어지간히 아플 텐데, 몸보다는 마음이 더 아파 느끼지 못하는지 오메가가 겁도 없이 다시 대들었다.

“왜 때려! 왜 때리냐고!”

“진짜 본격적으로 맞고 싶냐? 말을 가려서, 뭐.. 뭐야?”

“그쯤하지. 사람 때리는 거 보면 그냥 못 지나가는 사람도 있는데.”

이미 한연호가 튕겨나간 순간부터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재차 멱살잡이를 하려던 남자를 나도현이 제지하면 격했던 분위기가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정의의 사도, 바른 사나이, 뭐 그런 역할을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한연호가 누군지 알아본 시점부터 모르는 척 하긴 글러먹었다.

“아저씨 뭐야?”

“아저씨, 얘 알아요? 알면 좀 데려가요.”

“뭐? 싫어! 나 이 아저씨 몰라. 아저씨 신경 끄고 그냥 가던 길 가요. 이 형 내 애인이에요. 우리 지금 이야기 중이라구요.”

“아이 씨, 진짜 미쳤나. 내가 왜 네 애인이야!”

기가 막혔던 것은 한연호의 반응이었다. 막 세게 얻어맞은 사람은 맞는지, 자존심도 없이 남자의 팔을 부여잡으면 남자는 기겁하며 그것을 뿌리쳤다. 그가 말했던 대로 구질구질, 미련을 놓지 못하는 모습에 나도현은 어째서인지 짜증이 치솟았다.

“나는 끝낼 생각 없으니까 아직 애인이지! 아, 엇. 뭐야. 뭐야! 이거 놔! 형, 형! 나 이거.. 윽.. 아파. 아저씨. 나 아직 할 말 있어. 놓으라구!”

“시끄러워. 조용히 따라와.”

말로 해선 답이 없었다. 그가 한연호의 목덜미를 강하게 끌어 잡고 골목 밖으로 끌어냈다. 막 얻어맞은 오메가를 그런 식으로 대하고 싶진 않았지만 상황을 모면할 지혜로운 방법이 나도현에게는 퍼뜩 떠오르지 않았다.

어리고 약한 오메가의 저항은 그에게도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남자는 그제야 한 숨을 돌리고는 구겨진 옷을 털며 반대쪽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에 한연호의 눈에 재차 눈물이 고이는 것을 나도현은 모르는 척 했다.

 


“아저씨 뭐야. 아저씨 나 알아요?”

눈알은 시뻘겋고 얻어맞은 볼따구니는 통통하니 부었다. 그 와중에도 경계의 눈빛은 팔팔하게 살아있어서 구해 놓고서도 나도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적당히 하고 집에 가라.”

“아, 아저씨 뭐냐고!”

“나 기억 안 나냐? 너 호철이 아들이잖아.”

한연호는 감정을 숨기는 방법을 아예 몰랐다. 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알려주면 처음 보여주는 얼빠진 표정은 충격, 후에 나타난 것은 좀 전보다 더한 경계였다. 나도현은 때를 놓치지 않고 참았던 잔소리를 했다.

“너 왜 그러고 사냐? 네 아빠도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아냐?”

“아저씨가 무슨 상관인데.”

“얻어맞고 있는 거 데리고 나왔더니 대답 한 번 기똥차네.”

나도현의 비꼼에 한연호가 입술을 삐죽였다. 도움 받았다는 것은 안다는 소리였다. 누가 도와 달랬나. 중얼거리는 것은 대꾸하기 귀찮아 무시해버렸다. 그는 혈기왕성한 젊은 놈들 그러듯 사소한 것으로 티격태격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마음으로 데리고 나왔으니 좋게 보내자. 어른 된 입장에서 꼭 그렇게 할 계획이었다.

“집에 들어가라.”

“싫어.”

“호철이한테 내가 직접 전화해?”

“나 그 사람이랑 안살아. 독립한지 좀 됐어.”

“그럼 네 집으로 가면 되겠네.”

“그것도 싫어.”

이건 대체 나이가 몇일까. 다섯 살짜리 떼쓰는 행동에 나도현은 하마터면 평정심을 잃을 뻔 했다. 게다가 제 아버지더러 ‘그 사람’이라니.

“그럼 뭐 어쩔 건데.”

불퉁하고 퉁퉁한 어린놈이 사정 있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눈치 빠른 나도현은 아주 짧은 사이에 그 사실을 짐작했다. 그러나 캐묻고 싶지 않았다. 그가 베풀 수 있는 친절의 한계는 이미 좀 전 그 골목에서 끝이 났다.

“어휴, 네 마음대로 해라.”

“나 왜 끌고 나왔어?”

“뭐?”

“왜 끌고 나왔냐구. 나 다시 갈 거야.”

“갈.. 어디를 간다는 말이야.”

으름장을 놓는 것치고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지레 불안해진 나도현은 그의 팔부터 덥석 잡아챘다. 그 행동에 놀란 듯 한연호가 작게 몸을 떨었다. 우습게도 그 반응에 나도현 본인도 놀라버렸다. 위험한 상대가 아님을 몸으로 알린 꼴이었다. 불만스러운 놈이 계속 고집을 부렸다. 

“나 아직 형이랑 이야기 안 끝났어.”

“그 쓰레기 같은 새끼랑? 지금 그 놈한테 다시 간다고? 기껏 데리고 나왔더니 또 그 꼴을 당하러 간다고? 너 미쳤냐?”

다그칠 생각은 없었지만 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폭언에 폭력까지 당했으면 다시 만나봐야 좋을 일 하나 없는 게 빤한데 그 정도로 좋은 건지, 아니면 뭣도 모르는 건지. 어린놈이 답답해서 그랬다.

“아저씨가 뭘 알아! 아저씨 나 알아요? 그 형 알아요?”

“지금 가면 좋은 꼴 더 못 본다는 건 알지. 얼굴은 불어 터진 붕어상을 해 가지고 돌아간다는 소리가 나와? 너 바보야?”

“으.. 이딴 건 금방 없어져! 몇 대 얻어맞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상윤형도 아직 나한테 감정이 남아 있으니까 손을 댄 것뿐이야. 나 별로 아프지도 않아.”

“그래서 기어코 더 맞으러 가시겠다? 쥐어터지고 깨져서 병원에 실려 가더라도 굳이 그 놈한테 가시겠다?”

그 폐기물의 이름이 상윤인지 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도현이 있는 힘껏 빈정거렸다. 대답을 망설이는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한연호가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대체 뭘까.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 갈 거야.”

“갈 데가 없어서 이러냐?”

핵심을 찌르면 찔린 반응을 보인다. 완강하던 눈빛이 갈 곳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도현은 손에 들어온 얇은 팔에 더 단단히 힘을 주었다.

“그럼 방 잡아줄 테니까 오늘은 거기서 자. 혼자서 차분히 생각을 해 보면 답이 나오겠지. 너 지금 이러는 거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그런 거야.”

“싫어.”

“싫...”

이것은 분명한 인내심 테스트였다. 어른답게 굴자던 결심이 불안한 소리를 내며 휘청거리는 것 같았다. 죽사발이 되던 밥사발이 되던 진짜 확 보내버릴까. 그런 고민마저 들었다.

“후, 그럼 뭐 어쩌라고 나더러. 어쩌자고.”

“...재워주던가.”

“뭐?”

“아저씨 집에서 재워주던가.”

“뭔 미친 소리야.”

한연호가 원하는 바는 파격적이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얘가 왜 이럴까. 내가 누군지는 알고 대뜸 내 집에 가겠다는 소리를 할까. 나도현의 격한 반응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똑바로 서서 눈을 마주치면 좀 전에 보이던 불안감은 어디로 갔는지 아주 매우 당당했다. 무언가 떠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싫으면 말아. 그게 아니면 난 다시 돌아갈 거야.”

나도현은 밀려오는 짜증을 걷어내고 제 앞에 선 어린 오메가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시험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진심으로 그 쓰레기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그는 그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이 어리고 철없는 놈에게 보여주고 싶어졌다.

“그래, 가라.”

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면 읽을 수 없는 기류가 면대면 사이로 흘렀다. 뒷걸음질을 하나, 둘. 정말로 잡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한연호가 가볍게 돌아섰다. 살짝 발을 끄는 것 같은 걸음소리가 자박자박 멀어졌다. 손찌검 당하고 폭언을 들어도 기필코 돌아가겠다는 뜻이었다.

“휴우, 씨*.”

들으라고 내뱉은 한숨과 욕설에 다행히 한연호가 움칠하고 멈춰 섰다. 그보다 긴 다리로 단숨에 따라잡은 나도현이 여린 목덜미를 강하게 끌어 잡았다. 좀 전에, 골목에서 그를 빼 내올 때와 같은 행위였다.

“그래, 가자. 가자고 우리 집에.”

“진짜?”

“대리 불러야 하니까 기다려.”

처음으로 보여주는 한연호의 기쁜 얼굴은 기묘했다. 완력으로 제압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험한 거 맞네, 건방진 애새끼. 나도현은 그를 한 대 쥐어박으려다 실랑이하는 사이 더 부풀어올라있는 작은 볼따구니를 보고 관두었다.

핸드폰 화면을 몇 번 터치하면 대리운전 어플리케이션이 밝게 빛났다. 출발지, 목적지, 금액을 입력하는 그에게 긴장 풀린 한연호가 그제야 조잘거려온다.

“아저씨, 진짜 우리 아빠 친구야?”

“그래.”

“누가 아빠 친구라고 같이 가자고하면 따라가지 말라던데. 나 유괴하는 거 아니지?”

“네가 유치원생이냐? 몸값 대 줄 사람은 있고?”

“치.”

시시한 농담을 죽어라 맞받아치면 콧방귀 소리가 돌아왔다. 한연호가 하릴없이 운동화발로 흙바닥을 긁었다. 콜을 부르던 기존 화면에서 금액을 오천 원 더 높이면 대리기사가 출발했다는 알림이 떴다. 손아귀에 힘을 줘 한연호를 이끌면 어린 오메가는 이끄는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순순히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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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 저녁에 오겠습니다.

본 작품은 유료화 계획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것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 미리미리 챙겨 보세용.ㅎㅎㅎ

오메가버스 임신수 아저씨공 정도로 소개할 수 있겠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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