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실존인물,사건과는 관련이 없는 작가의 허구(fiction)입니다.※




실수라니까 (상)




[ BGM 재생 ]


----------------------------------------------------------------------------


 



"야, 김여주! 저기 봐. 저 사람이야"

"누군데?"

".....이번에 새로온 부장님. 몰라?"

"민부장님은 어디가고?"

"기획팀으로 가시잖아!"

"진짜?"

"넌, 니 상사가 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면 어떡해..!?"

"내 일 하기도 바쁜데 뭐, 컨펌만 제때 제때 해주면 만사 오케이지"




수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여주를 흘겨보곤 남자를 쳐다봤다. 여주는 어깰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은듯 수정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단정하게 올린 흑발, 거기에 자로 잰 듯 딱딱 맞춰진 슈트, 굵직한 몸 선. 여주는 남자의 실루엣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훑었다. 


딱 봐도, 한 성깔 하게 생겼네. 웬만하면 안 부딪히는 게 좋겠어. 여주는 눈썹을 꿈틀이며 입을 비죽 였다. 남자의 목에 걸린 사원증에 적힌 '전정국' 이란 이름마저 각져보였다. 그때 수정이 역시 소문이 맞았다며 여주를 향해 말했다.




"무슨 소문?"

"전 회장님 손자라는 소문"

"손자?"

"꽤 유명해~ 솔직히 저 나이에 부장자리 꿰차기도 힘들잖아."

"민부장님도 젊은데 뭘. 능력만 좋으면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야, 저 분은 젊은 게 아니라 어리시단다"

"몇 살인데?"

"우리보다 한.. 두 살 정도 어릴 걸?"

"그래?"



여주는 다시 시선을 옮겨 정국을 바라봤다. 두 살정도 어리다니, 피부가 탱글탱글하게 보이긴 하네. 여주의 시선이 정국의 짙은 눈썹과 곧은 콧대 각진 턱선을 훑는다. 왜 어디선가 본 것같지? 절대 만났을리 없는 사람인데. 여주는 미간을 구기며 기억을 뒤집었다. 낯선이에게서 풍기는 기시감. 게다가 기분나쁜 기시감. 수정 또한 여주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중얼거리듯 목소리를 툭 내뱉었다.



"근데, 누구랑 좀 .. 많이 닮은 것 같다?"

"너도?"

"어디서 봤는데.., 누구더라, 김여주 전전전남친!"

"이 미친....!"

"닮지 않았냐? 완전 쌍둥이야!"

"무슨...! 그리고 니 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야, 한동안 니가 그새끼 때문에 온갖 주둥이는 다 싫다고 지랄-"

"닥쳐."

"아, 아님 말고~"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는 여주에 수정을 멋쩍을 미소를 지어보이며 뒷머릴 긁적였다. 이내 입술을 콰득 씹은 여주가 그대로 뒤돌아 사무실로 돌아간다. 씨발, 어디서 봤다 했더니 구남친이랑 똑닮았네. 도플갱어급이야. 분위기는 다르지만 이목구비의 생김새에서 풍겨나오는 느낌이 여주의 구남친과 매우 흡사했다. 여주는 다시 생각나버린 더러운 기억에 머리통을 꾹꾹 눌렀다. 때는 바야흐로 약 8년 전. 풋풋한 대학시절의 여주가 처음으로 사귀었던 남자. 거기까진 핑크빛이 솔솔 흐르고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 연인이라 함은 응당 자연스러운 스킨십과 이어지지 않는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두달 만에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췄던 달콤한 키스는 그 새끼의 비아냥으로 끝나버렸다.




"여주야."

"으..응?"

"너 키스 진짜 못하는구나?"

".......아?"

"양치는 한거지?"




씨발, 그거 니 인중냄새라고 말해주기도 전에 뒤돌아서버린 그새끼. 시발 다시생각하니 열받네. 그 뒤로 여주는 한동안 키스 트라우마가 생겨 세상의 온갖 주둥이를 저주했으며 이후로 사귄 남자친구들과 다른건 다 물고빨아도 키스만큼은 하지않았다. 지워버리고 싶어 봉인해두었던 기억이 솔솔 떠올라 여주를 짜증으로 이끌었다. 에라이 썅. 하필이면 왜 그 새끼를 비슷하게 생겨선, 여주는 고갤 털며 더러운 기분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때 정국이 여주의 앞으로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허릴 숙인다.



"안녕하세요. 전정국 부장입-"

"미친! 깜짝아..!"

".....네?"

"...아, 아, 아닙니다. 죄송해요.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내밀었던 정국의 손바닥을 냅다 쳐내며 욕을 내뱉는 여주에 정국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이 여자? 낙하산이라고 벌써부터 무시하나. 정국은 여주를 작게 흘기며 내려보았다. 그러자 여주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정국의 손을 다시 붙잡으며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허릴 숙였다. 정국은 그런 여주에게 목소리를 묵직하게 낮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생각을 하셨는진 모르겠지만, 가급적 사내에서 거친언행은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넵."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 김여주 대리"




서늘하게 등을 돌리고 사무실을 나서는 정국에 여주는 입술을 씹으며 미간을 구겼다. 제길, 찍힌거 아니겠지? 그러니까 왜 갑자기 툭 튀어나오고 지랄이야.. 가까이서 보니까 더 닮았네. 여주는 찌릿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털썩 앉았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눈에 안 띄는 게 상책이다. 아무리 다 른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놈과 생김새가 닮아 좋은 얼굴은 못하겠으니 말이다. 여주는 긴 숨을 내쉬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




"전정국 부장, 요새 낯빛이 좋지 않은데 무슨 일 있습니까?"

"아, 별 거 아닙니다"

"...뭔데 그래, 말해봐"

"별거 아니라니까"

"우리 애들이 힘들게 하냐? 다 괜찮은 애들인데"

"업무적으론 손색 없지"

"사적으론 손색 있다는 말처럼 들리네"




고요함이 흘러다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정국이 긴 숨을 내쉬었다. 윤기가 이끌던 팀을 이어받은지 약 한달정도. 과연 윤기가 끌어갔던 팀이라 그런지 업무에 있어선 흠집하나 없이 깔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국이 이렇게 거슬리는 이유는. 바로 김여주라는 그 여자. 왜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듯한 눈빛을 쏘아대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엔 그저 기분탓이라 생각했지만 날이갈수록 기분탓이 아니었다.

가늘게 길어진 눈꼬리와, 차가운 분노가 서려있는 눈빛.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는걸 보면 그렇지 않던데- 왜 나한테만 그러냐고. 그 어디에서도 차가운 눈빛을 받아본 적이 없는 정국은 당혹스러웠다. 입술을 비죽이며 미간을 구기는 정국에게 윤기가 되묻는다.



"왜, 뭔데 그래"

"김여주 대리 말야."

"여주? 여주가 왜"

"원래 그렇게.. 싸가지가 없어?"

"....응?"

"아니 나만 보면 으르렁 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여주가? 그럴 애가 아닌데."

"하도 째려봐서 뒷통수가 뚫리겠다니까?"

"설마. 니가 뭐 잘못한 거 있는거 아냐?"

"있겠어?"

"하긴."




윤기의 답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자 한 손에 커피를 든 여주가 서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윤기와 정국의 시선이 여주에게 몰린다. 여주는 윤기를 향해 해맑게 웃어 보이며 고갤 숙였고, 그 옆에 있는 정국을 힐긋 보며 얼굴을 굳혔다. 낯빛이 순식간에 변하는 여주에 윤기는 살짝 놀란 얼굴로 정국을 바라보았다. 정국은 그런 윤기를 향해 '이것 봐' 라며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윤기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여주를 향해 말했다.




"김대리, 오늘 전체회식 참여하나?"

"빼고 싶어도 어쩔 수 없죠, 민부장님까지 오시는데"

"다행이네. 오랜만에 김대리랑 놀고 싶었는데"

"그러게~ 있을 때 많이 놀아주셨어야지. 기획팀은 어때요?"

"나쁘지 않아."

"다행이네요. 그럼 이따 회식 때 뵙겠습니다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여주는 또각거리며 사라졌다. 정국은 눈썹을 꿈틀이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뭐냐고 대체. 날 대할때랑 완전 딴판이잖아. 정국은 짜증이났다. 내 얼굴만 보면 얼굴을 굳히지않나, 아님 인상을 쓰지않나, 회의할 땐 완전 딱딱하게 말하더니. 방금 그 유순한 목소리는 뭐냐고. 윤기는 고갤 갸우뚱 거리며 정국을 향해 입을 열었다.





"뭔가 너한테만 벽을 치는 것 같긴하지만, 크게 못느끼겠는데?"

"나 지금까지 회의말고는 김대리랑 3마디 이상 못 나눠봤어"

"........뭐?"

"그리고 꽤 발랄한 김대리 목소리는 또 처음들어보네."

"김대리 우리팀에서 꽤 발랄한 캐릭턴데?"

"웃기시네. 발랄은 무슨, 다 발라먹을 기세면 모를까"

"허, 회식 때 한번 잘 얘기해봐. 상사면 불만 접수도 해야지"

"어련하시겠어."

"이따보자. 먼저간다"





윤기가 엘리베이터를 나서자마자 정국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신경쓰여. 짜증스럽게말이다. 무슨 말만 걸으려 하면 딴청을 피우며 도망가질않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째려보질 않나, 뭐하는 여자냐고진짜. 정국은 지끈거리는 뒷목을 젖히며 꾹꾹 눌렀다. 상사는 난데 왜 눈치가 보이는지 알 수 없을 노릇이다. 이 눈치싸움을 슬슬 끝낼 때가왔다. 정국은 시선을 내려 시계를 쳐다봤다. 회식까지 남은시간은 4시간 남짓이었다.




******




정국은 작정한 듯 여주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양 손엔 맥주병과 소주병을 들고서 여주와 잔을 부딪히고 시덥지 않은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여주는 그런 정국이 불편하다 못해 부담스러웠지만 차마 대놓고 거절할 재간은 없었다. 아무렴 회사사람들이 다 있는데서 상사한테 그럴 순 없으니까. 여주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술이나 들이켰다. 


윤기는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며 남몰래 키득거렸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려하고, 필사적으로 따라붙으려 하는 모습이 흡사 술래잡기 같기도 하고. 그런데 김대리 이미 치사량 넘어간 것 같은데? 윤기는 두 뺨이 붉게 달아오른 여주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 윤기의 추측은 정확했다. 여주와 정국이 비운 소주병과 맥주병은 이미 궤짝의 한 줄이 넘어갔다. 취기가 올라 벌개진 얼굴을 한 건 여주뿐 아니라 정국도 마찬가지이기도 했다. 자꾸 따라붙는 정국에 여주는 불편함을 숨기기 위해서 술을 훅훅 들이켰다. 그로 인해 벌써 혀가 꼬이고 말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정국의 얼굴이 자꾸 구남친의 얼굴과 겹쳐보여 욕지꺼리가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제길, 왜 하필 그 새끼랑 닮으셔서. 


여주는 점점 뜨거워지는 머리통에 테이블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눈이 풀리고 다리가 휘청거리는 걸 보니 얼큰하게 취해버린게 분명했다. 이렇게 있다간, 구남친으로 착각해 정국의 아구창을 휘갈길수도 있다. 여주는 비틀거리며 주점을 나섰다. 그러자 정국이 코트를 집어 들고 여주의 뒤를 졸졸 따른다. 매서운 칼바람에 여주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여주는 벽을 짚으며 미끌거리는 빙판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눈 앞이 어질거렸다. 술이 깨기는커녕 뒷통수를 후려치는 느낌. 그때, 여주의 발목이 삐긋한다. 정국은 재빠르게 손을 뻗어 여주의 등을 받쳤다.



"괜찮습니까?"

"..에이씨..뭐야?"

"많이 취하셨네요."

"예예~ 누구덕분에."

"...전부터 궁금했는데, 저한테 뭐 불만있습니까"

"전~혀요. 부장님한텐 없죠."

"나한텐 없다구요? 그럼 뭐야.."

"알 필요 없어요. 그냥 내가 개인적으로 짜증나는거니까"

"네..? 대체 그게 무슨말입니까?"

"진짜.. 드럽게 닮았네."




여주의 말에 정국은 미간을 좁히며 고갤 갸웃거렸다. 드럽게 닮았다고? 무슨소리야 이건. 정국은 여주를 부축하며 생각했다. 여주는 취기가 훅 올랐다. 정국의 시선에 그 새끼가 떠올랐다. 귓가에서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너 키스 진짜 못하는구나?', '양치는 한 거지?' 씨발. 그거 니 인중 냄새라니까. 여주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정국의 얼굴을 붙잡았다. 갑작스런 여주의 행동에 정국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느슨하게 풀린 여주의 눈동자가 잔뜩 화 나있었다. 뭐야, 뭔데. 정국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를 뱉었다.




"뭐, 뭐하는겁니까?"

"씨발....."

"...예?"

"너도 키스 드럽게 못해. 알아?"

"뭐...라구요? 김대리, 정신차려요"

"니 인중냄새를 왜 나한테 떠넘겨? 싸가지없는 새끼"

"김, 김대리?"




여주는 정국의 뺨을 죽 늘이며 말했다. 이것이 취기인지, 분노인지, 황당인진 모르겠지만 더운 열이 올라왔다. 코끝이 스칠 거리에서 한바탕 욕지거리를 내뱉던 여주의 입술이 냅다 정국의 입술을 꾹 누른다. 순간 정국의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머릿속이 멍해지는 듯 했다. 뭐야, 지금.. 이게-

이내 알콜향을 품은 여주의 혀가 정국의 입안을 헤집었다. 입천장을 간지럽히고, 어쩔줄 몰라하는 정국의 혀를 빨아 당겼다. 다소 거친 키스가 질척하게 이어졌다. 매섭게 부는 바람 사이로 두 혀가 엉켜 끈적였다. 정국은 비틀거리는 여주의 몸을 잡고 밀어냈지만, 뒷목이 붙잡혀 역부족이었다. 여주는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정국의 입술을 씹어 먹었다. 미간을 한껏 구긴 정국이 낮은 신음을 흘린다. 격정적인 키스가 한참 이어져 가다 숨이 모자란 정국이 다리를 휘청이며 먼저 입술을 뗐다.




"김대리! 지, 지금 뭐하는 겁니까!"

"하아..., 하.. 나 키스 잘해. 이제 알겠어?"

"뭐요?!"

"짜증나는 새끼. 내 눈앞에 또 보이기만 해봐. 그땐 좆 대가리를 걷어 차버릴...테니..까아..."

"김대리!"



여주는 두 눈을 스르륵 감으며 주저앉았다. 정국은 그런 여주의 허리춤에 팔을 단단히 감고서 일으켰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진짜, 이 여자는 뭘까. 죽일 듯이 쏘아 보질 않나 득달같이 입을 맞춰 오질 않나. 정국은 짙은 숨을 삼키며 여주를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덕계춘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