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 재생"으로 배경음악과 함께 읽어주세요. 

무관복 차림에 귀면을 쓰고 황궁에 도착한 윤기는 황제의 집무실인 태화전으로 향했다.

어릴 적 살았던 황궁은 모친과의 짧은 추억을 제외하곤 악몽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황명으로 방문할 때마다 늘 마음이 무겁고 거부감이 들었다. 볼모처럼 냉궁에 잡혀있는 어린 아우만 아니었어도, 시선조차 두지 않을 곳이었다.

“폐하, 칠 왕야께서 알현을 요청하시옵니다.”

“들라.”

안에서 들리는 묵직한 목소리에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윤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펴곤 당당하게 안으로 들었다.

황금으로 꾸며진 실내의 높은 단상엔 그렇게나 피하고 싶었던 황제가 거만한 모습으로 용상에 앉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보다 열 살 위의, 얼굴엔 심술과 표독함이 가득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윤기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래. 이리 또 얼굴을 보니 참으로 좋구나.”

새빨간 거짓말. 고개 숙인 윤기는 황제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직도 살아있느냐는 속마음이 여실히 느껴지는 어투였다. 저를 노려보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음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선황의 뜻을 받들어 천하 통일을 이루고자 귀왕을 보낸 것이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어. 아니 그런가?”

“예, 폐하의 혜안에 감복하였습니다. 폐하의 대업을 위하여 싸울 수 있음에 각골난망옵니다.”

황제는 상백안으로 꿇어앉은 윤기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일어나라는 말도, 고개를 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허락받지 못한 윤기는 그 자세 그대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로 말해야 했다.

“이제 하나만 부수면 이룰 수 있겠구나. 천하통일을.”

“반드시 방탄국을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

황제는 윤기의 대답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그는 선황과 달리 천하통일에 하등의 관심도 없었다.

어릴 적부터 황태자인 저보다 돋보이는 거로 모자라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백금족의 튀기를 죽이기엔 전쟁이 딱 좋은 명분이었다. 그래서 선황의 의지를 잇는다는 핑계를 대며 부러 전쟁터로 보냈다.

한 번이라도 패배한다면 그 죄를 물어 처형할 수 있었건만, 출정하는 족족 살아 돌아와 승전을 알리니 부아가 치밀 지경이었다. 암살자를 보내 은밀하게 죽일까 싶었지만, 방심하는 일이 없었기에 그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한 해, 두 해, 세 해…… 정복하는 국가가 늘어갈수록 윤기는 더욱 강해졌고, 십 년이란 세월 동안 무패의 전설로 화양국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젠 하나만 남았다. 화양국과 비등할 정도의 군사력을 지닌 동방의 방탄국. 정말로 천하통일이 제 손아귀에 떨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황제는 더욱 속이 끓어올랐다.

어떻게 해야 저놈을 내 눈앞에서 치워버릴까.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지금이야 제 아우 때문에 얌전히 목줄을 차고 시키는 대로 따르고 있지만, 사실 구 왕야는 태생이 병약한 탓에 약관도 채 넘기지 못할 운명이었다.

물론 이 사실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기에 황제와 태의(太醫)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태의를 시켜 그의 목숨을 잘 간수하고 있었지만, 병약한 구 왕야가 언제 덜컥 죽을지 알 수 없었다. 며칠 전엔 각혈까지 했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더욱 그랬다.

구 왕야가 죽는다면 윤기는 단번에 목줄을 끊고 제게 달려들어 송곳니를 박아넣으리라. 그렇게 확신한 황제는 불안하고 초조했다.

어렸을 적부터 지겹도록 느꼈던 윤기를 향한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은 성년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고의 자리인 황좌에 올랐음에도 윤기를 경계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정작 윤기는 황좌엔 아무 욕심도 없는데 말이다.

“……요즘 귀왕부에 재미있는 소문이 들리더구나.”

그러던 찰나에 귀왕부에 심어둔 간자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연화국에서 연동을 하나 데려왔다지?”

“!”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귀왕부로 사람을 데려온 것은.

“……부관이 마음에 들어 하여 허락하였습니다.”

“그래? 귀왕부 가령의 연동이라…… 퍽 너그럽고 자애로운 처사로구나.”

“…….”

“가령의 연동을 위하여 호화로운 정원을 만들고, 망해버린 연화국의 음식도 만들고, 그곳에서만 피던 꽃을 심고, 장인을 불러 특별히 물건을 제작하고…….”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하나하나 조목조목 말하는 목소리에 윤기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그 느릿느릿한 저음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밤에는…… 밀회를 나누니 말이다. 그야말로 월하정인(月下情人)이 아니더냐.”

“!”

하마터면 고개를 들뻔했다.

“천하는 짐의 것이니라. 짐의 귀와 눈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단다. 그것이 황궁과 멀리 떨어진 귀왕부라 할지라도.”

“…….”

윤기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었고, 황제는 그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간자로부터 보고받았을 때는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이 들어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지금 당장 밥버러지에 불과한 구 왕야를 죽여도 여전히 목줄을 채울 수 있으니 말이다.

“어릴 적부터 모두가 이리 말했지. ‘칠 황자야말로 황태자의 재목’이라고. 내 그 말이 어찌나 귀에 거슬리던지.”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폐하.”

“귀왕아, 너는 모를 것이다. 그 말을 처음 들은 이후로 짐은 끝나지 않는 악몽을 꾸고 있음을. 네가 짐의 목을 치고 용상에 앉는 끔찍하고 역겨운 꿈이지. 깨어나면 그리도 불쾌할 수가 없어. 차마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아갈 수가 없겠더구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응?”

“……폐하의 신하된 자로서…… 오직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명하소서.”

“아둔하구나. 짐의 신하된 자로 주군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더냐?”

“…….”

그럴 리가. 윤기는 악몽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단번에 황제의 말뜻을 이해했다.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듯이, 황제의 엽견인 자신은 정복 전쟁이 끝나면 승패와 관계 없이 죽을 운명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황제가 그것을 원했기에, 그의 뜻대로 죽어야 했다.

“출정은 언제로 잡았느냐?”

“정비를 위해 석 달 후 출정 예정입니다.”

“앞당길수록 좋겠구나.”

윤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입을 열었다.

“…… 폐하, 아둔한 자의 한 가지 청이 있나이다.”

“고하라.”

“구 왕야와 귀왕부의 식솔에게만큼은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윤기는 윤허 받지 않았음에도 무례하게 자세를 바꾸었다. 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쿵 박으며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가 되었다.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면 이 한 몸.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꺼이 승리의 제물로 바치겠나이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제 목숨은 그리 귀하지도 중하지도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기에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었다.

윤기의 간청에 매우 흡족하다는 듯이 황제의 양쪽 입매가 찢어질 듯이 올라가며 악인과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비비(悱悱) 終

말을 하려고 하면서 아직 못함

Written by 휴위







 

점심 식사 후 맑은 날씨를 만끽하며 정자에서 지민과 꽃차를 마시던 호석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원담으로 향했다.

“호비 님? 무얼 그리 보세요?”

지민의 재잘거리는 목소리조차 듣지 못한 채.

“호비 님?”

“으음?”

살짝 당황한 듯한 호석의 반응에 지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딜 보시는 거예요?”

호석의 시선이 머무르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원담이었다. 원담을 통과해 대나무와 아까시나무꽃 산책길을 지나면 윤기의 처소가 나옴을 알고 있던 지민은 고개를 돌려 못 본 척하며 꽃차를 호로록 마셨다.

“혹시 원담 너머에 계신 분이 누군지 아니?”

“그분은 ㄱ…….”

“?”

“그,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저 같은 아랫것들은 가령님이 지정해준 장소만 오갈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제 숙소와 호비 님의 처소만 갈 수 있지요. 그 외에는 알 수가 없답니다.”

지민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애써 감추고자 고개를 숙이고 꽃차를 마시는 데 집중했다.

“역시 너도 모르는구나. 일산도, 연화국 음식도, 꽃차 도구도…… 모두 그분이 주셨다는데 누구실까.”

호석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예? 그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혹시, 만나보신 건가요?”

“아…… 응…….”

호석은 눈을 내리깔며 꽃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지민의 두 눈에 비친 호석의 두 뺨이 복숭앗빛처럼 살짝 발그레해져 있었다.

“신선처럼 빛나는 분이셨어. 달빛을 타고 속세에 내려오신 분인 줄 알았지 뭐야.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과 달처럼 빛나는 금안이라니.”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워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계속 바라보고 싶었다.

그 순간, 얼어붙었던 차가운 연화국에서 자신을 범한 백발 귀신이 잠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호석은 황급히 고개를 붕붕 저으며 머릿속을 환기했다. 그런 짐승과 비교할 바가 아닌데 말이다.

지민은 ‘역시 그렇지요? 우리 귀왕 전하께서 제일 멋지시지요? 옥면공자라 칭송받을 정도로 미남이시랍니다!’라고 덩달아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으나 애써 어금니를 꽉 깨물고 참아야 했다. 호비에게 귀왕의 존재를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석진과 윤기가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참 이상하다. 호비 님도 전하를 흠모하시는 거 같은데 왜 말하지 말라는 걸까?’

이유를 알 수가 없었지만, 지민은 그저 귀왕부의 충실한 하인답게 윗전의 명령을 따를 뿐이었다. 










밤이 깊도록 호석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도 먼저 정원의 정자로 와 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기 님…….’

그날, 그와 처음 만난 이후로 약속이나 한 듯이 종종 밤마다 윤기를 만나 소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 좋았다.

따스한 밤바람을 맞으며 정자에서 제가 내려주는 꽃차를 마시며 향과 맛이 좋다며 은근하게 미소 짓는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악기도 능숙하셨지…….’

윤기는 악기를 많이 다룰 줄 알았다. 호석이 한 번도 악기를 다뤄본 적이 없다고 하자 그는 직접 거문고를 가르쳐주겠다며 가져왔다. 하얀 손이 거문고 현을 뜯는 모습조차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연주해보겠느냐는 말에 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로.

손을 뻗으며 한 말에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윤기는 호석의 손을 잡고 거문고 앞으로 데려와 양손을 현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작은 손에 자신의 큰 손을 덮었다.

등에 닿는 따스한 체온과 손등에 느껴지는 온기에 호석은 또 심장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가 열심히 가르쳐주었음에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곤란했다.

또 다른 날에는 침소까지 데려다주고는 피리를 불어주었다. 마치 다정한 자장가 같아서 쉽게 잠이 들었다.

그렇게 윤기와 정원에서 밀회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오늘은 또 어떤 악기를 연주해줄까 싶어 기대되었다.

정성들여 꽃차를 준비하던 호석은 갑자기 몸에 열이 나는 듯한 감각에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었다.

‘뜨거워…….’

저녁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아픈 곳이 없는데 지금 왜 열이 나는 걸까. 

‘바람을 쐬면 나을까?’

호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자를 내려와 원담으로 향했다. 지금쯤 윤기도 제게로 오고 있지 아닐까, 이 길을 가다 보면 윤기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에 온통 윤기 생각뿐이었다. 지아비를 마중 나가는 듯해서 더욱 두근거리고 설렜다.

‘어서 만나고 싶어.’

그를 만날 생각으로 가득 찼기 때문일까? 불 켜진 연꽃 석등을 따라 대나무 산책길을 사부작사부작 걸어도 여전히 얼굴에 오른 따끈한 열은 내려가지 않았고, 갈수록 점점 몸이 뜨거워지며 호흡이 가빠졌다. 

‘설마…….’

그제야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눈동자가 커졌다.

핑―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자, 아까시나무 꽃잎이 호석의 몸 위로 내려와 덮었다. 

“아으…….”

바닥을 짚은 양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단전에서부터 시작된 뜨거운 열기가 삽시간에 전신으로 퍼지는 감각에 숨쉬기가 힘들어져 헐떡였다. 자극을 받은 것처럼 하반신이 빠르게 젖기 시작하는, 이 감각은 틀림없는 희락기였다.

‘아, 안돼…… 윤기 님이 오실 텐, 데…….’

호석은 벌벌 떠는 가는 양손으로 간신히 입을 틀어막고 신음을 막으려 했다. 그러다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안 돼? 왜?

그 순간 맞은편에서 윤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호석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를 발견하니 기뻐하기라도 하듯이 음탕한 몸뚱이가 환희를 느끼며 젖어 들었다.

“윤기, 니임…….”

호석은 달뜬 목소리로, 물기 젖은 목소리로 윤기를 불렀다. 어서 윤기가 제게 오기를, 저를 품에 안기를, 제가 입은 옷을 벗기기를, 그리고 열기 가득한 체온으로 안아주기를, 그에게 안기는 제 모습을 상상하고 말았다. 그것은 온전한 자신의 의지였다.











―형님, 저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형님이 더 걱정입니다. 제가 미욱하여 형님을 도와드릴 수 없으니 말입니다.

어미를 닮아 무척이나 여린 아이였다. 약하게 태어나 또래보다 발육이 느렸고, 체력도 좋지 않아 호신술조차 배울 수 없었다. 침소에만 갇혀 사는 작은 새 같은 모습이 더욱 안쓰러워 마음이 쓰였다.

다정한 성정의 아우는 침소에 형을 위한 자그마한 제단을 만들어 신에게 무사 안위를 빌었다. 그 덕분일까? 늘 사선을 넘나들며 싸워도 크게 다칠지언정 끝끝내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황제는 마지막 전쟁터에서 죽으라고 하였다.

―형님? 오늘따라 표정이 아니 좋으세요. 편찮으신 건가요? 아니면 근심거리가 있으신가요?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안심시켰다. 제가 이제 없더라도 이 아이만큼은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제가 죽는다면 더는 황궁에 갇혀 지낼 필요가 없었다. 그리도 원하던 바깥 구경도 마음껏 할 수 있을 터.

―한 달 뒤에 떠나신다고요? 그런…… 이번에도, 승전보와 함께…… 반드시 무사 귀환하셔야 해요. 성심을 다해 기도하겠습니다.

애써 글썽이는 눈물을 삼키던 여린 아우를 다독이고 돌아오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마중하던 모습에, 떼어지지 않은 걸음을 겨우 재촉하여 귀왕부로 돌아왔다.

황제는 제 간청을 들어주겠노라고 약조하였다. 제가 전사한다면 귀왕부를 폐쇄하지 않고 구 왕야에게 주겠노라고. 다행이었다. 황제의 칼날은 오직 저만을 향했으니 말이다.

그래, 그러니 이제 저만 마지막 전쟁에서 죽으면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거문고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요. 윤기 님은 못 다루는 악기가 없으시네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꽃보다 더 달콤한 그의 체향과 깃털처럼 가벼운 여린 몸과 사랑스러운 온기를 지닌 운명의 반려가.

―윤기 님…….

제 아이를 배었을지도 모를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만일 그 배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제가 아닌 그를 닮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을지라도 짧은 시간이나마 운명의 반려를 만나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회임 여부를 영영 알 수 없으리라.

‘아, 어느새 시간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서재에서 병법서를 읽으며 마지막 전쟁을 위한 전략을 짜며 고심하다가 어느새 해가 졌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호석이 기다리다 처소로 돌아가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 서둘러 밖으로 달려 나왔다.

봄바람에 실려 온 아까시나무의 꽃향기에 기분이 울렁거렸다. 코끝을 통해 들어온 꽃향기에는 호석의 향도 섞여 있었다. 평소보다 배나 진한 향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윤기의 걸음이 빨라지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

산책길에 한가운데에 주저앉은 호석을 발견하고 달려가려던 윤기가 걸음을 멈췄다. 희락기를 맞은 호석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심장을 옥죄는 듯한 다디단 진한 향에 갈증이 올라와 침을 꿀꺽 삼켰다. 

호석의 달짝지근한 향이 윤기를 진심으로 유혹했고, 윤기는 숨을 멈추고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렸다. 잠깐 맡았을 뿐인데도 다시 그때처럼 이성이 마비되고 짐승으로 변모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뒷걸음질 치려 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다가가 손을 뻗어 안고 양껏 입 맞추고 싶었다. 사타구니로 피가 쏠려 열이 오르는 듯한 음탕한 감각에 손이 떨렸다. 이대로 그의 곁으로 다가가면 틀림없이 실수할 게 자명했다. 사람을 불러 그를 처소로 돌려고 약을 먹여야 했다.

하지만 윤기의 발소리를 들은 호석이 고개를 들었고,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달뜬 얼굴이 달빛을 받아 유독 색스럽게 보였다. 호석은 윤기를 보자 한계가 풀린 듯이 자신의 향을 더욱 진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남동풍의 바람은 곧장 호석의 향을 가득 실어 윤기에게 날아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윤기, 니임…….”

달뜬 목소리로, 물기 젖은 목소리로, 애타는 연심을 가득 담아 윤기를 불렀다. 윤기를 향해 손을 뻗으며 기다시피 하며 천천히 나아갔다. 저를 찾는 이 어여쁜 모습을 어찌 감히 외면할 수 있을까. 윤기는 다시 호흡하며 홀린 듯이 빠르게 달려가 호석이 뻗은 손을 잡고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화악―

호석을 안은 순간, 호석의 떨리는 두 팔이 윤기의 목을 감은 순간, 그의 향이 온몸에 배며 영혼에 새겨지는 듯한 뜨거운 감각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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