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랑애묘기

35


W. 롤라






BGM: 랩소디 / 그 꽃 피우는 달맞이꽃처럼








    핸드랩을 감는 손이 조금은 어색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하는 격투 훈련이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대련 상대가 없어서 거의 혼자 검술이나 사격 연습을 했지만 오늘은 상대가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물론 내 개인 훈련이 아니라 공식 훈련이라 내 성에 찰 만큼은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격투를 할 생각에 신이 났다. 나는 같이 오게 된 특공대원들과 나란히 앉아 손에 붕대를 감다가, 그 중에서도 나랑 제일 친한 녀석이 말을 걸어 고개를 돌렸다.





    “너 박 소령님이랑 친하다며?”

    “나? 뭐, 그냥 몇 번 만났어.”

    “실제로도 무서우시냐?”

    “무서우시대?”

    “어. 완전 눈도 못 마주칠 정도라던데?”





    나는 정현군을 떠올렸다. 무섭다고? 전혀 아닌데. 나는 그의 무서운 모습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도 다 그의 좋은 성격 덕분이었다. 그는 나에게 부대원들에게 특수공작대의 훈련을 보여주고 싶어했고, 그 시범을 보여줄 사람으로 나를 골랐다. 나에게 있어선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시범을 보이는 것 자체도 큰 영광인데, 이렇게 되면 내가 왕실 직속 특수공작대의 대표격으로 온 셈이기 때문이었다. 특공대장님에게 먼저 말씀 드렸더니 이를 흔쾌히 허락하셨고, 그래서 나는 친한 대원들과 함께 이 부대까지 오게 되었다. 나는 손목에 감은 핸드랩을 좀 더 탄탄하게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무서운가?”

    “그렇대. 선임들도 함부로 못 대했다던데?”

    “그건 왕족이어서 그런 거 아니야?”

    “... 아, 그런가?”





    나는 피식 웃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다 감은 손에 주먹을 꽉 쥐고 녀석과 마주섰다. 우리는 각자 대련 상대를 정하고 가볍게 몸을 풀어주었다. 나는 검도를 주로 했고 이 녀석은 현역 권투 선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격투 훈련을 할 때면 좋은 상대가 되었다. 나는 빙글빙글 돌면서 공격할 타이밍을 보다가 확 달려들었다. 그런 나를 싹 피한 녀석이 바로 내 허리에 주먹을 내질렀고, 나는 그에 인상을 썼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대련을 하다가 잠깐 다시 마주앉아 쉬었다. 나는 녀석이 건넨 물을 받아들고 마셨다. 녀석 역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를 보았다.





    “나 여기 들어오기 전에 그 분 봤거든.”

    “어.”

    “그냥 슬쩍 보기만 했는데도 확실히 진짜 대장은 대장이긴 하더라. 포스가~ 와, 장난 아니여~”

    “안녕하십니까.”





    진짜 진심으로 나온 감탄에 피식 웃다가, 갑자기 들린 소리에 우리 모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단정한 군복을 입은 정현군이 서 있었다. 앉아 있던 내 동기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고, 우리는 동시에 경례로 인사를 했다. 





    “충성!”

    “충성.”





    그의 큰 손도 잠깐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는 특공대원 옷을 입고 있었고 그가 입은 옷은 군인 장교가 입는 옷이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군복 위로는 여러 휘장이 가득 달려 있었다. 우리 둘 다 베레모를 하고 있었지만 특공대와 일반 군대의 베레모는 조금 달랐다. 나는 베레모마저 깔끔하게 쓴 그를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마.”





    마마- 라는 소리에 내 옆에 있던 동기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군 내에서는 정현군을 마마라 부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게 버릇이어서 아무래도 이렇게 부르는 게 좀 더 편했다. 그 때까지도 딱딱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던 정현군은 마마- 라는 소리에 생긋 웃었다. 그리고 시범 훈련 준비를 모두 마친 나를 바라보았다.





    “오는 길은 어땠습니까?”

    “일찍 나와서 그렇게 막히진 않았습니다.”

    “동궁전에서 나온 겁니까?”    

    “예. 저하께서 안부 인사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냥 해보는 말이지요?”

    “예. 사실 그런 말씀 안 하셨는데 제가 예의상 하는 말입니다.”

    “그래요. 이림이 그럴 리가 없지.”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정현군과도 꽤 친해진 터였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우리 둘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특공대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정현군과도 인사를 시키고 오늘 해야 할 훈련의 내용을 들었다.


    오늘은 나를 포함한 특공대원들이 일일 교관이 되어 왕실 직속 특수 공작대의 일과 그에 따른 훈련을 진행하기로 했다. 얼마 전 소령으로 진급한 정현군이지만, 그 전까지 그가 중대장으로 있었던 중대가 바로 그 훈련 대상이었다. 우리는 열을 맞춰 정현군을 따라갔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정현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키도 크고 어깨도 딱 벌어져 있어서 그런지, 군복을 입으니 더더욱 위용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나는 왕자들 중에서도 가장 씩씩하고 듬직한 그를 보면서 조용히 웃었다. 그런 사람도 세자 저하와는 어렸을 적에 같이 흙놀이를 하며 놀던 사람이라는 게 신기해서였다. 


    그렇게 훈련장에 도착해 정현군이 우리를 직접 소개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임시 특공대장이 되었고, 나는 그걸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앞에 서게 돼서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 사실 이런 일은 여러 번 겪었었다. 나는 학창시절에도 거의 항상 반장을 맡거나 훈련대장을 하곤 했다. 내가 주도하지 않는 훈련은 거의 없었으며, 그래서 이렇게 예상치 못 하게 대장의 자리를 맡게 된 적이 많았다. 나는 반듯하게 서서 나를 소개하는 그를 힐끗 보고 앞에 곧게 섰다.





    “안녕하십니까. 왕실 직속 특수공작대 소속 오세훈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과 함께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일원으로서 뜻깊은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나는 가볍게 경례를 하고 다시 뒷짐을 졌다. 특공대인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중대는 어림잡아도 100명은 훨씬 넘어 보였다. 140명쯤 되려나? 나는 우리 앞으로 끝없이 서 있는 중대원들을 보면서 약간 긴장을 했다. 


    그래도 막상 훈련에 들어가니 했던 긴장이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일일 교관이 되어 일반 특수공작대와 왕실 직속 특수공작대의 차이, 하는 일 등을 설명했다. 나는 화면을 짚으며 차근차근 설명했다. 내가 누구 앞에서 뭘 이렇게 가르치는 건 조금 어색했으나, 그래도 내 전문적인 일을 설명하는 거라 괜찮았다. 슬쩍 보니 정현군은 흡족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조용히 웃고 다시 설명을 했다. 





    “일반적으로 특공대의 전반적인 업무는 모두 같습니다. 주로 위험 상황에서의 침투 임무를 맡으며, 여기에 폭발물 설치와 해체 작업도 메인으로 맡습니다. 보통 특공대 내에 폭발물처리반이 신설되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이를 주특기로 삼는 대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주된 임무는 첩보 활동입니다. 여기에서 일반 특공대와 왕실 특공대의 업무가 나뉘어집니다. 왕실 특공대의 첩보 활동은 오로지 왕실을 위해서만 이루어지며, 이는 일반 특공대와도 교류하지 않습니다. 예, 질문 받겠습니다.”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나는 포인터를 내리고 다시 똑바로 섰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깍듯하게 경례를 했다.





    “충성. 상병 이재환.”

    “충성.”

    “일반 특공대는 사병 출신 중에서 차출해서 뽑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왕실 특공대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왕실 특공대는 시험 전형이 아예 다르기 때문에 따로 응시를 해야 합니다. 관심 있습니까?”





    내 질문에 그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듯 했다. 나는 왠지 불과 일 년 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흐뭇하게 웃었다.





    “알다시피 왕실의 일원을 뽑는 시험은 매 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고가 뜨는 것을 매 달 확인해야 하며, 공고가 뜨지 않는다면 그 해는 새 인원을 뽑지 않습니다. 다만 그만큼 들어갈 수 있는 여러 루트가 있습니다. 저는 원래 왕실 근위 기사 시험에 응시를 했다가 특공대로 차출되어 간 케이스고, 이 대원은 국가정보원에서 현장직으로 근무하다 쉽게 말해 이직을 한 케이스입니다.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열심히 찾아만 본다면 될 수 있는 길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최대한 내가 아는만큼 설명해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꽤 좋은 답변이 된 것 같았다. 그 후로도 나는 질문을 몇 개 더 받았고, 열심히 내가 속한 특공대에 대해 설명을 했다. 설명이 다 끝난 후 이제 현장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정현군이 내 옆에 와서 섰다. 나는 훈련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중대원들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오 대원 아무래도 무대 체질인가 봅니다.”





    그의 말에 나는 괜히 쑥스러워졌다. 그래서 배시시 웃자 그 역시 웃었다. 나는 그와 함께 훈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훈련장에서는 기본적인 침투 임무에서 탑재해야 할 잠입과 격투 기술을 설명했다. 군대의 일반적인 훈련과는 아마 다를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다른 것이 바로 폭발물 설치 및 해체 작업이었다. 내가 입궁하자마자 터진 테러때문에 바로 투입되어야 했던 그 일이었다. 일반 군대에도 폭발물 처리반이 있긴 하지만 보다 전문적으로 이를 다루는 것은 본디 특공대의 일이었다. 나는 폭탄을 보다 효과적으로 설치하는 방법과 빠르게 이를 해체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두 가지 훈련을 마치고 나서는 점심시간이 되었다. 다른 특공대원들은 중대 사람들과 먹었지만 나는 정현군과 식사를 따로 하게 되었다. 정현군은 곧은 자세로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허겁지겁 달려와 깍듯하게 경례를 하고 앞에 마주앉았다. 식사를 하면서는 전혀 딱딱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그와 웃으면서 얘기도 하고 농담도 주고받았다. 물론 얘기는 주로 세자 저하에 대한 것이었다.





    “세자 저하가요? 일부러요?”

    “그렇다니까요. 숨바꼭질을 하는데 토끼로 변하는 바람에 결국 저녁 때까지 아무도 못 찾았습니다. 그 때 온 궁인들이 궁을 다 헤집고 다니느라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와, 저하가 일부러 그러실 줄은 몰랐는데.”

    “그 때 저희가 내기를 해서 그럴 겁니다. 진 사람이 민석 형님에게 뽀뽀를 하고 오기로 했거든요.”

    “예? 그럼 누가 졌습니까?”

    “시작하자마자 5분만에 잡힌 명산이 졌습니다.”





    나는 왠지 예상이 가는 그림에 피식 웃어버렸다. 연화군은 뽀뽀를 받고 어떤 표정이었을까. 어린 나이였지만 왠지 그 얼굴이 상상이 갔다. 정말 질색하는 표정이었겠지. 나는 정현군이 들려주는 어린 시절 얘기를 들으며 즐겁게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다시 오후 훈련에 들어갔다. 오후에 할 훈련은 첩보 훈련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공개할 수 없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선에서의 훈련을 하게 되었고, 나는 첩보 활동 시 꼭 알아 두어야 할 사항을 정리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각자 팀을 꾸려 미션을 주었다. 나는 오늘 하루 배운 것을 토대로 각 팀끼리 작전에 투입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런 내 옆에 선 정현군이 나를 힐끗 보았다.





    “오 대원.”

    “예, 마마.”

    “오늘 어땠습니까?”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생긋 웃었다.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병들을 보면서 다시 또 흐뭇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재밌었습니다.”

    “나중에 특공대장을 해도 정말 잘 할 것 같습니다.”

    “앗, 과, 과찬이십니다.”

    “아, 기사 시험을 본다지요?”





    그의 말에 뜨끔 놀랐다. 왜 다들 알고 있는 거지. 나는 이러다 또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지만 그는 나를 보며 그저 웃었다.





    “그나저나, 미국 여행 말입니다.”

    “예?”

    “왕위 계승권을 가진 자들은 한 곳에 오래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까?”

    “... 헐, 진짜요?”





    정말 몰랐다. 이것도 왕실 생활 수칙에 있다거나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없었다. 하지만 왠지 듣고 나니 익숙했다. 나는 기억을 더듬다가 이마를 짚었다. 병원에 있을 때 읽은 <왕실생활사>에 있는 내용이었다. 이래서 필독서였구만.





    “그, 그럼... 제가 기사 되도 같이 여행은 못 가시겠네요?”

    “가도 전체 다는 못 가겠지요.”

    “그럼 가는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뭐, 주상 전하께서 윤허만 하신다면 안 될 것도 없겠습니다만.”

    “앗, 진짜요? 제가 잘해보겠습니다!”

    “오 대원이?”





    주먹을 불끈 쥐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조용히 웃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는 그런 나를 힐끗 바라보다 다시 정면을 보았다.





    “여태 많이 들었겠지만... 오 대원.”

    “예, 마마.”

    “고맙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중대원들에게 가 있었고, 이따금 그들을 지휘하고 교육하는 특공대원을 바라보기도 했다. 





    “오 대원 덕에 참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 제가요?”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들이 변하지 않았습니까.”

    “...”

    “오 대원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있었을 것들이지요.”





    내 시선이 잠시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내 전투화와 그의 깔끔한 구두를 바라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고맙다는 말을 들은 건 나였지만, 왠지 내가 그에게, 그리고 또 그를 포함한 모든 왕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었다.


    다시 입궁을 한 건 저녁 즈음이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고된 훈련을 마치고 오니 온몸이 녹초였고, 나는 얼른 세자 저하 품에 안겨서 오늘 하루를 얘기하며 쉬고 싶었다. 오늘은 이랬고, 내일은 저럴 거라는 얘기를 재잘재잘 떠드는 건 내 하루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나는 설레는 발걸음으로 동궁전에 들어섰다. 그리고 정현군이 가서 먹으라고 준 케이크를 달랑달랑 흔들며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칫했다. 연못가 끄트머리에는 조용한 정자가 있었고, 나와 저하는 그 곳에 자주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 곳에 세 사람이 있었다. 내게 등을 보이고 선 이는 이제 머리카락만 보아도 알 것 같은 세자 저하였다. 그는 정자로 오르는 계단 아래에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서 있었다. 그리고 정자의 위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의 끝에는 주상 전하와 중전 마마가 계셨다. 깔끔한 제복을 입은 두 분은 곧은 자세로 앉아 저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케이크 박스를 꼬옥 쥐게 되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 대원.”





    그러다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시종 어르신이 계셨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를 물끄러미 보던 아저씨가 이내 고개를 저으셨다. 나는 다시 정자 쪽을 바라보았다. 저하는 여전히 공손한 자세로 서서 두 분을 올려다보고 계셨다. 


    나는 그 쪽으로 가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저하를 기다렸다. 내 뒤에는 시종 어르신이 계셨고, 우리는 저하가 우리에게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세 분이서 무슨 얘기를 나누는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주로 세자 저하가 말을 꺼냈고, 이따금 주상 전하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하지만 중전 마마는 그저 그런 저하를 내려다보기만 하셨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 아저씨.”

    “예.”

    “아저씨는... 저하를... 몇 살 때부터 보셨습니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르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잠시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세상에 나오신 날부터 모셨습니다.”

    “... 저하가...”

    “...”

    “많이 달라지신 건가요?”





    모두들 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세자 저하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이들은 모두 내게 고마워했고, 그 변화를 이끌어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게 혼란스러웠다. 그게 정말 긍정적인 변화인 걸까? 내가 오히려 그를 망친 것은 아닐까? 나는 여전히 주상 전하와 중전 마마께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저하를 바라보았다.





    “무척요.”

    “...”

    “그리고 저 역시 그에 기쁠 따름입니다.”





    나는 다시 아저씨를 보았다. 어르신은 그런 나를 보면서 인자하게 웃으셨다.





    “저하는 세상을 알아가고 계십니다.”

    “...”

    “그런 저하 곁에는 이제 오 대원이 꼭 있어야 할 겁니다.”

    “... 그게... 좋은 걸까요?”

    “불안합니까?”

    “... 조금요.”





    어르신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와 같은 시선으로 저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한동안 세자 저하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여태 같이 손 잡고 끌어드렸으니 이제 잘 걷길 기다리시면 됩니다.”

    “...”

    “충분히, 잘 해내실 겁니다.”





    나는 시종 어르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정자 쪽을 보았을 때, 멍해졌다. 저하는 더 이상 가만히 서 계시지 않았다. 그의 걸음이 정자로 향하는 계단을 한 칸씩 올랐고, 이내 중전 마마의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의 고개가 중전 마마의 무릎에 자리했다. 꼭 엄마 무릎을 베고 누운 작은 아이같았다. 멀리서 보아도 그의 표정이 평온함을 알 수 있었다. 나와 시종 어르신은 그런 그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주상 전하는 헛기침을 하시며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셨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당신의 무릎을 저하에게 내어주신 중전 마마가 계셨다. 그 분은 한참동안 저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천천히 손이 올라갔다. 고운 손이 저하의 머리에 닿았고, 그러자마자 저하가 입술을 꾹 깨물고 눈을 감았다. 차분하게 감은 얼굴은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미소가 선하게 자리해 있었다. 중전 마마는 저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셨다. 나는 그런 그의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다가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그런 내 손에 아저씨의 손길이 닿았다. 고개를 돌리자 어르신이 생긋 웃고 계셨다. 그는 내 손에서 케이크 박스를 가져갔다.





    “차 한 잔 하시지요.”





    나는 내게서 먼저 몸을 돌려 동궁전으로 들어가는 그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정자에는 여전히 주상 전하와 중전 마마, 그리고 세자 저하가 있었다. 하지만 붉은 노을을 등진 그들을 계속 보고 있자니 왠지 다른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그리고 아들. 조금은 늦었지만 그렇기에 적당하고, 또 조금은 멀었지만 그렇기에 더 애틋한 모습이었다. 나는 햇살의 온기를 가득담은 그들을 보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나 역시 어르신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저씨, 같이 가요!”

    “궁 내에서는 가급적 어르신이라 부르십시오, 오 대원.”

    “저희 둘밖에 없잖아요.”

    “궁에는 귀가 많습니다. 낮말은 새가 듣...”

    “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구요? 그럼 세훈이 말은 아저씨가 들어주세요.”

    “...”

    “방금 와, 진짜 피곤하다 이 표정 지으신 거죠?”

    “아닙니다.”

    “맞잖아요.”

    “아닙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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