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The fantasia of another dimen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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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야, 수야. 빨리 성득이 좀 혼내주렴. 자기 건 죄다 먹어 치우고 또 내 고구마까지 훔쳐 먹었다!!”

“아니다, 수야. 거짓말이다! 새빨간 거짓말이야!”

“거짓말은 무슨!! 네 놈 손과 입에 묻은 검댕과 고구마 껍질은 그럼 무어야?”

“옷에서도 군고구마 냄새가 풀풀 나는데, 아니라고 쌍심지 켜는 니 놈, 양심은 대체 어따 팔아 먹었니?!”

“에잇, 그래. 사람 먹을 것도 모자라는데 니들이 자꾸 짐승한테 주려길래 내가 먹었다!! 그래서 어쩔 거냐?”

“몽이가 아파서 잘 못 먹길래 고구마라도 구워 주려 했는데. 그걸 훔쳐 먹었어……”

“네 놈이 사람이냐? 네 놈 등에 전생에 못 먹어 죽은 아귀라도 붙었든?”

“수야, 수야. 이러다 몽이 죽으면 어떡해. 어떡하면 좋으냐. 응?”



얼핏 들고양이처럼 보이는 작고 어린 짐승 한 마리가 아진의 품에 안겨 있었다. 

며칠 전 아이들이 마을 외곽에서 뛰어놀다 머루 달래 덤불 속에서 발견했는데, 처음엔 워낙 기척이 미미하여 꼼짝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윤기를 잃은 채 엉망으로 엉키고 뭉친 흰 털, 오랫동안 굶었는지 뼈대가 드러날 만큼 앙상하게 마른 몸.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어린 것이 혼자 무리에서 뛰어나와 이탈했을 리는 없고, 전란 속에서 어미를 잃기라도 한 것일까. 

천지간에 의지할 데 하나 없는 그 몰골이 가엾고 애처로와 경수와 아이들이 며칠간 물과 먹을 것을 갖다주며 살뜰히 살피었으나, 어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경수가 맡아 기르며 몽이란 이름까지 붙여 주었는데, 타고난 맥이 약하고 회복 속도가 더뎌 하루하루가 난항이었다. 

본디 산에서 난 것이 사람의 손길을 경계하지 않고, 내뱉는 숨은 새벽녘 안개보다 흐리니. 어쩌면 녀석은 어미가 죽은 게 아니라 어미에게 버림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ㅡ 경수는 생각했다.



“어디 보자. 몽이가 언제부터 아팠어?”



아진에게서 몽이를 받아 안으며 경수가 물었다. 아직 뼈가 물러 보드라운 귀 뒤쪽을 쓰다듬으며 빠르게 녀석의 안위를 살핀다. 

다소 미열이 있긴 하나 내쉬는 숨이 고르고 간간이 이어지던 경련도 잦아들었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여, 마음을 내려놓는다. 

조선에 있을 때 경서의 병구완을 했던 경험, 종종 약방 허드렛일을 하며 의원의 어깨 너머 주워들은 지식이 여기서는 꽤 쓸모가 있었다. 

가뜩이나 몇 안 되는 의원들은 나라가 전시에 들어서며 완전히 씨가 말랐고, 행여 천자의 자비가 있었다 한들 어차피 이 가난하고 궁벽한 산골짜기 마을엔 닿지 않았다.



“기운이 없어 그래. 몽이 아픈 건 아니니 걱정 안 해도 돼.”

“수야, 수야, 이 것도 봐주렴. 이 것도. 어제까진 잘 됐는데 오늘은 또 안 돌아간다.”

“아, 내가 먼저야. 줄 서라. 수야, 나 먼저. 나 먼저 봐줘.”

“이 녀석들아, 좀 귀찮게 하지 말고 내버려 두거라. 뭐 무슨 일만 생겼다 하면 이리로 오누.”



칭얼거리는 아이들에게 꼼짝없이 포위당한 경수가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평상에 앉아 짚을 꼬던 애꾸눈의 노인이 굳은살 배긴 손을 허공에 휘두르며 아이들을 나무랐다. 

군데군데 대강 기운 누더기 솜옷과 길짐승 터럭 마냥 빗질도 않고 마구잡이로 풀어 헤쳐진 하얀 머리카락, 안대로 가려지지 않은 오른쪽 눈에서 언뜻 비치는 비범한 이채. 

오랜 세월 그늘 아래 방치된 칼집 속 칼날처럼 보이는 노인의 이름은 휘. 

집도 절도 없이 바람 따라 떠도는 인생,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떠도는 이들의 관습 대로 대충 휘, 휘 노인, 혹은 휘 할배라고 불렸다.


백발이 성성한 일흔의 노인이었으나, 설원에 홀로 자라난 대나무처럼 강건한 기세로 이 곳 청성마을의 암묵적인 우두머리로 여겨지는 자. 

구름을 신고 바람을 벗 삼아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 우연히 숭산에 발을 들였고, 황제군에게 양친을 잃고 빈사가 된 아진을 발견해 거뒀다고 했다. 

나이를 거스르는 뛰어난 무공, 외양에서 풍겨 나오는 묘한 분위기 덕에 한 때 대륙에서 이름을 날리던 무사였다는 소문도 있고, 장강삼협에 몸을 담았다는 얘기도 있으나 어느 것 하나 진실로 밝혀진 건 없었다. 휘 노인 또한 자신의 출신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으니, 모든 게 불가사의한 인물이었다. 그저 굳게 내리 감긴 두 눈에서 그의 지난 날이 순탄치 않았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을 뿐.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아 덥수룩하게 구불친 턱수염과 푹 패인 볼 언저리를 따라 그가 삼켜온 고통의 문장들이 짙게 주름져 있었다.




북서전쟁이 발발하고 연왕군과 황제군의 대치가 격화되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정현이 이끄는 황제군은 연왕군과 달리 투항하는 자들에게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아 원성이 자자했다. 

가는 곳마다 착취와 수탈을 일삼았으며, 심기를 거스르는 지역, 즉 제 성에 찰 만큼 접대하지 않는 지역은 더없이 혹독하게 다스렸다. 연왕군에게 협력할 여지가 보인다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한 데 모아 죽이거나, 마을에 불을 질러 전소시키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위국 곳곳에 집과 땅, 전 재산을 잃은 이들, 자식을 잃거나 부모를 잃은 이들이 즐비했다. 작은 읍성 하나가 지도에서 사라지는 경우도 태반이었다.





바야흐로 야만의 시대였다. 

이무기의 포효를 따라 폐허는 끝도 없이 번식했다. 대륙 곳곳에 뿌려진 절망의 씨는 상실을 포궁 삼고 눈물을 양수 삼아 착실히 자라났다. 갈수록 버거워지는 감정의 더미를 지고 사람들은 하루하루 위태로이 비척거렸다. 

자연스럽게 말을 잊었고, 잠을 잊었으며, 아이들은 더 이상 꿈꾸지 않았다. 숨 쉴 때마다 몸 안 어딘가에서 메마른 울음이 바스락거렸다.


난세에서 힘은 곧 권능이었고, 정복과 살육은 위태로운 시대를 관통하는 교리였다. 지위는 전복되고, 경계는 흐려졌다. 

인간이 금수가 되고, 금수가 인간이 되는 세상이었다. 짐승 같은 자들은 짐승보다 못한 짓을 했고, 짐승 아닌 자들은 짐승처럼 죽어 나갔다. 

길고 긴 겨울, 분간 없는 혼란 속에서 삶은 나날이 가혹해져만 갔다. 양인이란 양인은 모두 황제의 군대에 차출됐고, 음인이란 음인은 모두 황제의 유희에 동원됐다. 궁에서는 매일같이 호화로운 연회가 벌어지고, 황제와 귀족들은 산해진미와 금준미주를 넘치도록 즐겼지만, 정작 백성들은 당장 오늘 먹을 쌀이 없어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근근이 연명했다. 

그것도 모자라 황제와 그의 군사들은 군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혹리酷吏를 부리고, 내년 봄에 뿌려야 할 씨앗까지 강탈해갔다.


자고로 신하의 도리는 보필지신輔弼之臣.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 임금을 존귀하게 하고, 때로는 임금이 듣기 싫어하더라도 직간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평안케 하고 공적을 이루는 것이라 했거늘. 입 발린 아첨으로 현혹하고 무도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간신들만 득세해 조정을 전횡했다. 

태자일 시절부터 곁에서 보필했던 장일무가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의 관을 받아 실질적 재상 자리에 오르고, 그에게 보인 충성과 재물의 양에 따라 나라의 요직이 정해지니, 황제의 폭정에 제동을 걸 이가 아무도 없었다. 

공자와 맹자가 우려한 대로 조정에 가득 찬 향원響原들은 틈만 나면 덕을 도둑질하고 어지럽히니, 대의는 바로 서지 못하고, 신의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



살아남은 백성들은 전란과 학정을 피해 정든 고향을 버리고 하나둘 산속으로 숨어 들었다. 숭산 연천봉 근처에 위치한 이 곳, 청성마을도 그중 하나였다. 

경수가 청성에 발을 디딘 지도 벌써 이 년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연왕의 군세 확장을 우려한 황제의 지시로 북평으로 올라 가는 길목이 모조리 막혔고, 설상가상으로 황제가 보낸 친위대들의 추격도 극심해지면서 도저히 여정을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할배. 수야는 모르는 게 없는 걸?”

“맞아. 수야는 못하는 게 없어. 글도 잘 읽고, 아는 것두 많구.”

“할배 기억 안 나? 수야가 죽을 뻔한 나도 구해줬잖어!!”



경수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아진이 아기 오리마냥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 모습에 휘 노인이 못 마땅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청성마을 아이들 중에서도 유독 아진은 경수를 의지하고 따랐다. 마치 한 배에서 나온 친 오빠나 다름 없을 만큼.

아진의 이 유별난 친애는 경수의 풍모가 사시사철 눈이 녹지 않는 천봉과 바람조차 새어나가지 않는 만학에서 쉽게 보기 힘든 것이어서도 있지만, 호북성 저자에서부터 맺은 남다른 인연 때문이었다.





[아기씨. 북평으로 가는 길이 죄다 막혔습니다. 황제군이 산 너머에서 사람들을 학살하고 시체로 둑을 쌓아 물길까지 끊어버린 탓에 당분간 꼼짝도 못할 것 같고……]

[……]

[저들은 나날이 포위망을 좁혀오는데, 정말 어찌하면 좋습니까. 소인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앞날이 깜깜합니다.]



단풍 머금은 서색이 가죽신 뒤축을 적시던 어느 가을날 아침이었던가. 호북에 도착한 경수와 설은 말을 보일 의원을 찾아 지친 걸음으로 저자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장안을 떠난 뒤, 부러 인가가 적은 좁고 험한 길을 택해 돌며 북평으로 향하였는데, 날이 갈수록 맹렬해지는 친위대들의 추격에 쫓겨 밤낮없이 달리다 보니 피로가 배로 누적되었다. 

타고 온 말까지 시름시름 앓으며 맥을 못 추기 시작하니, 위험을 알면서도 저자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또다른 수가 생기겠지. 빛 하나 없는 뱀굴 같은 장안에서도 빠져나왔는데, 뭔들 못하겠느냐.]

[아니, 그러니까요. 그렇게 기를 쓰고 도망쳐나왔는데, 이러다가 다시 붙잡혀 끌려가면 어떡합니까?] 

[……]

[그러게 제가 나는 아무것도 못 보았느니, 아무것도 못 들었느니, 눈과 귀를 막고 곧장 북평으로 가는 일에만 집중하셔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눈을 감으면 다친 이를 보지 못하고, 귀를 막으면 우는 이를 듣지 못한다.]

[아, 진짜, 아기씨……]

[자고로 충담사가 경덕왕에게 지어 올린 안민가安民歌에 따르면 임금은 아비이고, 신하는 사랑하는 어미이며, 백성은 어린 아이와 같다했다. 내 한 몸 바쁘고 고단하다 하여 다친 아이와 우는 아이를 버리고 가는 매정한 부모가 되어서야, 내 어찌 그 분의 얼굴을 떳떳하게 다시 뵐 수 있겠느냐.]

[하지만 마땅히 그 건 관리들이 해야할 일이온데 귀한 아기씨가 직접 나서시면……]

[나는 연왕의 유일한 정비이며, 평생을 약조한 정인이다. 그 분을 은애함에 있어 한 몸이고, 그 분을 따름에 있어 벗이자 동기이며, 그 분을 섬김에 있어 신하이자 백성이지.]

[……] 

[그의 나라가 곧 나의 나라이고, 그의 백성이 곧 나의 백성이며, 그의 대의가 곧 나의 대의다.]

[……] 

[역사를 바로잡아 이들을 구하는 것이 그 분의 의지라면, 지키고 돌보는 것은 나의 몫이고 사명이야.]



예로부터 향은 살갗에 새겨진 천성과도 같아 아무리 묻고 감추려 해도 가려지지 않는다 하였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정과 자애 또한 심장에 새겨진 천성과도 같아 향기처럼 번져나가니, 쉬이 감춰질 리 있겠는가. 

경수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좀처럼 외면하지 못했고 발길이 닿고 손길이 닿는 곳마다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도왔다. 

떠도는 자에게는 머물 곳을 찾아주었고, 넘어진 자에게는 일어설 힘을 주었다. 부족한 이를 채우고, 괴로운 이를 구했으며, 서글픈 이를 위로하니 자연스레 가는 곳마다 찬탄이 끊이지 않았다. 

은혜를 입고 생을 부지한 이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그의 지혜와 은덕을 칭송하므로, 입과 입을 타고 “정체 모를 불명의 미인이 나타나 황폐해진 산천을 돌보고 백성들의 상처와 고통을 굽어살피니, 이는 곧 하늘이 위국을 버리지 않았다는 계시”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오래 전 무 황제에게 내렸던 대무녀의 예언은 운명의 별을 따라 돌며 차근차근 실현되고 있었다.





북쪽에서 치솟은 불꽃이 온 사방을 덮을 것입니다. 두 개의 칼이 부딪고, 하나가 완전히 부러지기 전까지 비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며, 위의 땅은 지나간 전국 시절보다 훨씬 더 황폐하고 참혹해질 것입니다. 

하늘에서 용과 이무기가 맞붙어 엉킬 때에, 땅에서는 범 한 마리가 포효하며 백성들을 지킬 터인데. 

그 것은 본디 범이자 꽃이고, 꽃이자 범이며……





설의 걱정도 나름 뿌리가 있었다. 말에는 발이 없기에 쉽게 날아 올라 성벽을 넘었고, 금수고 사람이고 가리지 않고 입과 귀만 보이면 둥지를 트니, 경수를 쫓고 있는 정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번의 눈길 만으로도 평생 잊히지 않을 만큼 청연하고 기려한 인상의 사내가, 가는 데마다 백성들의 존경과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며, 몸종 하나와 함께 북쪽으로 멀고 험한 여정을 하고 있다는 소문. 

좀처럼 위국 태생으로는 보이지 않는 수국 향의 음인 사내. 말투에서 은근하게 묻어나는 멀고 먼 동녘 나라의 억양. 무던하고 소탈한 성정을 가져 먹는 것과 자는 곳을 가리지 않고, 타인을 구하고 베푸는 일에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저를 향한 찬사와 명성을 되려 거리끼는 자. 

베일 밖으로 드러낸 곳은 그저 눈과 이마와 머리카락 뿐이나, 간단한 대화나 작은 몸짓에서도 군자의 기품과 위엄이 흘러넘치니, 

ㅡ 분명 이 혹독한 난세에 불가피한 사정으로 신분을 숨긴 인물 임이 틀림없다고.



대강의 인상착의와 몇 개의 행적만 되짚어도 경수임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으나, 누구도 그 의문의 사내와 금명궁 아기 마마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유추해내지 못했다. 

세상천지 어딜 가도 연왕의 비가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는 괴담이 파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현이라면, ㅡ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결한 것은 연왕의 비가 아니라 그와 같은 향을 지닌 선 양제라는 걸, 진짜 연왕의 비는 조선에서 데려온 몸종과 함께 한밤중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ㅡ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친위대들의 추격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이었다. 연왕군이 무서운 기세로 남하하고 있다지만, 경수가 부러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한 탓에 꿈에 그리던 재회는 여전히 멀기만 했다. 

정현의 마수는 벌써 코 앞이었다.



[여로가 녹록지 않았나 보구먼. 맥이 약하긴 한데 워낙 기질부터 강성한 준마인지라……좀만 쉬면 괜찮을 거요. 너무 걱정마시게.]

[고맙네, 의원 영감.]

[그나저나, 탐라마는 위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말이 아닌데. 애초에 저 바다 건너 탐라에서만 서식하는 종이라 조선 사신들이 선물로 가져온다는, 장안의 황궁에서나 볼 수 있는 말……그 유명한 조선 태조의 여덟 마리 명마 중에서도 위화도 회군할 때 탔다던 응상백(濟州馬)이 바로 이 탐라마 아니오? 어찌 자네들이 이 탐라마를 갖고 있는 것이오?]

[………어쩌다보니 귀한 연이 닿아 잠시 빌려 타게 되었소.]

[……혹시 자네들, 황궁 사람들이오?……]



말을 치료하던 의원이 경수와 설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차, 때 마침 바깥에서 큰 소란이 일어 기류를 바꾸었다. 

변방이긴 하지만 호북성은 근처에서 꽤 규모 있는 읍성이었고, 다양한 이들이 전국 각지에서 흘러 들어오는 저자다 보니 매일 크고 작은 소란이 일상이라 지만은, 이번엔 좀 달랐다. 

갈수록 험악해지는 사내의 고성과 귀를 난자하는 아이의 울음, 그리고 비명. 영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의원도 당황했는지 다급히 일어나 창을 가린 구슬 주렴을 걷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 속엔 길가에 핀 꽃도 절로 고개 숙일 만큼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값비싼 호박과 마노, 비취의 장식과 나비가 세공된 은비녀로 곱게 틀어 올린 머리. 이국의 비단으로 지어진 자홍빛 무령에는 전설 속 도화원의 꽃들이 색색의 실로 수놓아져 있었고, 가냘픈 어깨에는 일곱 겹의 피백이 둘러져 있었다. 

태자의 총애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의 선 양제 정도가 아니고서야 황궁의 비빈들도 저리 화려하게 차려입지는 못하거늘. 눈을 사로잡는 휘황찬란한 매무새에 내심 어마어마한 세도가의 여인이겠거니, 싶었다. 

무엇이 그리 불쾌한지 잔뜩 찡그린 얼굴.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추하게 생긴 벌레, 혹은 더럽고 역한 무언가를 떨어내듯 연신 바삐 부채질 하는 손. 

시선을 슬쩍 곁으로 옮기니 여인의 호위 무사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와 겁에 질려 울먹거리는 어린 여자아이도 보였다.



[네 이년, 지금 이 분이 누군지 아느냐? 홍 대부의 외동아들이 금이야 옥이야 매일밤 끼고 애지중지하시는 기녀 건소시다, 건소!!!!!!!!!]

[잘못, 잘못했습니다……]

[근본도 없는, 마소*보다 천한 것이 감히 하늘처럼 귀한 분의 치마를 더럽히다니!!!!]

*마소 : 말과 소


성난 고함을 내지르며 사내가 뺨을 내려치자, 아이가 볼품없이 나동그라졌다. 

비가 그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닥은 온통 진창이었는데, 반동을 견디지 못한 아이의 몸이 휙, 하고 자빠지며 흙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구정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공중에 흩뿌려진 오물을 피하려 여인은 한껏 몸을 사렸고, 동시에 그녀의 고운 눈매도 한층 더 사납게 가늘어졌다. 여인의 심기가 좋지 않음을 눈치챈 사내가 아까보다 더 험악한 손길로 아이의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손 아귀에 힘을 줄 때마다 두터운 사내의 팔뚝 위로 검푸른 힘줄이 한껏 도드라졌고, 아이는 두피가 당기는 소름 끼치는 고통에 입을 뻐끔거리며 사정없이 휘둘렸다.


전란을 겪는 땅에 버려진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아이는 왜소했고, 옷차림도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몇 살인지 쉬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얇은 뼈대에 거죽만 간신히 걸친 듯한 몰골. 흙탕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나이를 알 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눈은 표정을 알 수 없었다. 

길고 혹독한 북풍에 한 톨의 생기마저 죄다 빼앗겨버린, 겨울 나뭇가지 같은 아이. 울음을 울어 신의 구원을 빌 기력도, 비명을 질러 사람의 도움을 청할 의지도 없어 보였다. 

작은 어깨를 간간이 흔드는 연약한 떨림. 어떤 소리도 빚어내지 못하고 울대 아래 침잠하는 절규. 



왕이 되어서는 안될 자가 왕이 된 나라에서,

아이들은 이토록 비참해진다. 


왕이 되어서는 안될 자가 왕이 된 나라의 내일이 참담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건소라 하였는가?]



사내의 서슬이 워낙 등등해 아무도 말릴 생각을 못하고 있던 차, 갑자기 등장한 낯선 이의 목소리에 여인과 사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천지 간에 무서운 것 없이 날뛰던 사내가 경수를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아이의 머리채를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얼굴의 반을 검은 베일로 가려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눈앞의 이방인은 분명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총기로 정가하게 빛나는 눈, 함부로 사리지 않는 배포와 은은하게 묻어 나는 기품까지. 변방의 저자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귀인 임이 틀림없었다. 

당황하기는 여인도 마찬 가지였다. 부채를 흔들던 여인의 손이 현저히 느려졌다. 여인이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경수가 조용히 말을 이었고, 나지막이 울리는 음성에는 그들을 향한 경멸과 혐오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아무래도 세상 사람들이 그대의 이름을 영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소.]

[당신은 누구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하늘이 이름을 불러 세울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기에 건소(乾召)라 불린다던데.]

[……]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는 그저 비정하고, 냉혹하고, 온기 하나 없이 비쩍 말라 빠진 대추나무 한 그루 같아서.]



여인의 이름은 하늘 건, 부를 소를 써서 건소乾召. 

허나 하늘 건 乾이라는 글자는 ‘마르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고, 부를 소 召라는 글자 또한 ‘부르다’라는 뜻 외에 ‘대추나무’라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 동음이의를 이용해 아이를 학대하는 여인의 잔학한 성정을 비꼰 것이었다. 

경수의 의도를 알아챈 이들에게서 웃음이 터지기 시작하자, 여인의 어여쁜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붉으락푸르락 분노와 모멸감이 색을 바꿔가며 고상하게 가꿔온 여인의 자존심을 할퀴었다. 엉망이 된 틈으로 얼비치는 해묵은 열등감. 

그간 번드르르한 낯과 탐스런 몸뚱이 하나 믿고 하늘 높은 줄 모른 채 콧대를 높이던 여인이었다. 홍씨 가문의 위세를 업고 기고만장하던 여인에게 경수의 한 마디는 다시 없을 망신이고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으랴.


비록 홍 대부가 중앙에서 좌천돼 이 곳에 낙향했다 하나, 홍씨 가문은 본디 호북 일대에서 유서 깊은 선비 가문이었고, 드넓은 평야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유지였다. 

그렇다 보니 호북 사람들의 신임과 공경이 자연스레 홍 대부와 그 집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흐름이 오랫동안 고착되어 오늘날 홍씨 가문의 세력이 군수와 다름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황성이었다면 다른 가문의 견제나 관의 간섭이라도 있었겠으나, 호북 자체가 장안과 동떨어진 시골 읍성이다 보니 딱히 막을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홍 대부의 금지옥엽 홍진석이 하필 또 망나니 중의 망나니였다. 

홍진석은 아비와 달리 제 가문의 지위와 권세를 함부로 남용했는데, 슬하에 자식이 홍진석 하나 뿐인 홍 대부는 이를 알면서도 쉬쉬하며 엄히 훈육하지 않았다. 

눈먼 애정 아래 방목된 홍진석의 기행은 나날이 삐뚤어져 갔다. 홍진석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이후 여인 또한 언제 그랬냐는 듯 기박했던 기녀 팔자는 잊고, 온갖 부패와 악행을 일삼았다. 마치 호북성이 제 발밑의 왕국이고, 제 손안의 칠교판인 것처럼.

사리 분별 못하는 어린 도련님 하나 품에 끼니 가지지 못할 것이 없었고, 할 수 없는 것이 없었다. 성에 안 차면 가차 없이 버렸고, 맘에 안 들면 죽을 때까지 매를 쳤다. 

행실이 사특하고 광포하매 호북에 적을 둔 자라면 여인의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 걸음을 삼갔고, 할 수 있는 한 여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런 내게 감히, 

이를 악문 여인이 목청을 높였다.



[……뭐라? 지금 뭐라고 했소??]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경수는 서둘러 쓰러진 아이의 맥을 짚었다. 손 끝에 닿은 아이는 심지 다한 촛불 마냥 미약하기 그지없었지만 다행히도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경수가 아이를 안아 설의 품에 넘겨주었다. 여인은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부채를 집어 던지며 삿대질을 했다. 위악을 과장하고자 필사적으로 날을 세운 독설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대체 당신이 뭐길래, 감히 내게 이리 함부로 말한단 말이오?]



경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빛이 가라앉아 한층 검게 보이는 두 눈동자가 여인을 향했다. 처음처럼 고요한 표정이었다.



[그러는 그대는 대체 뭐길래 감히 천자의 백성을 이리 함부로 대한단 말인가?]

[……]

[황제가 아끼고 돌보시는 백성의 목숨보다 한낱 기녀의 치마가 더 귀하다는 말은 내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사위를 가른 그 목소리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정도의 언어가 가질 수 있는 당위. 그 당연하고 고결한 아름다움을 넘어선 기묘한 아우라, 부정할 수 없는 어떤 무게가 그 안에 서려 있었다. 



그저 한 철 스쳐 가는 바람이 아니구나.

…………

……

저 이, 

보통의 나그네가 아니구나.


단 한 줄의 문장에 완전히 정곡을 찔린 여인의 얼굴에서 차츰 핏기가 가셨다. 주변에 들끓던 크고 작은 소음들도 일순간 사그라들었다. 저자의 모든 눈과 입이 경수와 여인에게 향해 있었다. 

경수가 가벼운 턱짓으로 여인의 치마를 가리켰다.



[아까 듣자 하니, 이 치마가 천자의 백성보다 더 귀한 치마라던데.]

[……]

[그럼 그 치마를 입고 있는 그대는 필시 위국의 천자이거나, 천자보다 더 높은 자로군. 아니 그런가?]

[……]

[내가 아는 한 위국의 천자, 존재하는 유일한 용은 하늘 아래 오직 단 한 분 뿐인데.]

[……]

[그렇다면 내 앞의 그대는 대체 무엇인가?]



[……다, 당신……]



분기탱천한 여인은 부들부들 떨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맵시 있게 뻗은 입술 끝이 무참히 일그러졌고, 잘 다듬어진 이마 어귀로 차마 누르지 못한 신경줄이 퍼렇게 튀었다. 

그때, 군중 속 누군가가 경수의 물음에 대신 화답하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뭐긴 뭐겠어, 역적이지!!!]



걸걸한 외침을 필두로, 관전하던 이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한마디씩 덧붙였다.



[옳소!!! 옳소!!!!]

[역적이로구먼!!!!]

[그렇지!!! 역적이지!! 어서 관에 고발하게!!]

[홍 대부의 권세가 제 아무리 대단하다한들 고작 호북 지방의 선비 하나가 천자보다 더할 리가 있는가. 군수께 당장 고하게!!!!]

[시절이 하수상하니 저런 것들마저 황제의 권위를 넘보는군. 따끔하게 혼쭐을 내줘야 하네!!!!!]

[천하에 몹쓸 것!!!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어린 아이한테 저리 모진 짓을!!!!]



그때였다. 

여인이 욕설을 내지르며 사내의 허리춤에 매인 칼을 빼 들었고, 경수를 향해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홍진석의 첩이 된 이후로 처음 겪는 종류의 모욕이었으니, 뵈는 게 없었다. 죽여버릴 테다. 죽여버리고야 말 테다. 여인의 두 눈에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눈앞의 이방인이 제 아무리 황성의 높은 자라 한들 ㅡ 이 외롭고 궁벽한 시골 읍성에 있는 걸 보면 난세에 줄을 잘못 서 낙향하게 된 사대부 중 하나이겠거니, 싶었다. 

끈 떨어진 두레박 따위가, 주인에게 버려져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고물, 다시는 귀히 쓰이지도 못할 시대의 폐기물이, 감히, 나를. 감히, 내게. 이 곳은 나의 영역이고, 나의 왕국이다. 너 따위가 감히, 감히. 

평정을 잃은 칼날이 시야를 도륙하며 매서운 서슬을 흩뿌렸다. 잔뜩 벼려진 검 끝이 경수를 할퀴려는 순간, 모두가 숨을 멈췄다. 

쌔액 - 어디선가 출처 모를 화살 하나가 바람의 지느러미를 찢으며 날아왔고, 여인의 치마 끝단을 그대로 관통했다. 

놀란 여인이 검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화살촉에 묻은 불씨가 치마에 옮겨붙었고,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불길은 비명보다 빨랐다. 공포에 질린 여인이 몸을 들썩일 때마다 사람 목숨보다 귀하다던 자홍색 비단 치마가 꽃잎처럼 나풀거렸고, 화마는 낙화의 자취를 따라 점점 더 악랄한 춤을 췄다.



[물을 가져와라!!!! 당장!!!!!!]

[아악!!!! 그 더러운 물을 어디다 뿌리려고 하느냐!!! 그 물이 한방울이라도 내게 닿는다면 당장 네 목을 치겠다!!!!!]

[아니, 지금 깨끗한 물 더러운 물 따지게 생겼소??]

[불이 비단옷을 타고 계속 번지는데, 이러다 정말 타 죽겠소, 당장 치마를 벗으시게!!!]

[감히, 이 분이 누군지 알고 치마를 벗으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쯔쯧……이 와중에도 거들먹거리기는!!!! 타 죽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려나??]



여인은 악을 쓰며 길길이 날뛰고, 사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 맸다. 모여든 사람들까지 함께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설이 길모퉁이로 경수를 잡아 끌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정현의 친위대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니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빠져나와 겨우 숨을 돌렸을 때, 이름 모를 노인 하나가 나타나 설과 경수의 앞을 가로 막았다.



[전란으로 양친을 잃고 떠도는 아이를 내가 거둬 키우고 있소. 내 오늘 중한 볼일이 있어 잠시 근처 가게에 맡겼는데, 아이가 저자 구경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

[운이 나빠 저 간악한 건소 무리에게 붙들려 큰 고초를 겪을 뻔 했는데 덕분에 살았어.]

[……]

[……아이를 구해주어 고맙네.]



설이 안고 있던 아이를 건네받은 노인이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가죽 천으로 한쪽 눈을 동여맨 노인의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걸치고 있는 두루마기도 온통 낡고 해져 남루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였다. 

얼핏 성 밖에 흔히 보이는 떠돌이 거지 중 하나처럼 보였으나, 그의 손에는 여인의 치마를 불사른 화살과 꼭 같은 화살이 들려있었다. 

한적한 지방에 묻혀 사는 무명의 촌로*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출중한 활 실력. 안대로 가려지지 않은 눈 또한 마치 전장을 종횡하는 대 호걸처럼 형형했기에, 경수는 본능적으로 눈앞의 노인이 예사 인물이 아님을 직감했다. 

*촌로 村老 : 시골 노인

그 것이 바로 경수와 설, 아진, 그리고 휘 노인의 첫 만남이었다. 이 연이 계기가 되어 경수와 설은 북평으로 가는 길목이 트일 때까지 청성에 잠시 몸을 숨기게 됐다.





“수야는 위나라에서 제일 똑똑해!!!”

“매일매일 글도 가르쳐주고, 숫자 세는 법도 알려줬어!!”

“수야 때문에 멍청이 덕호도 이제 백까지 셀 수 있다!!”

“돈 헤아리는 법도!!”

“이제 눈 뜨고 돈 뺏기는 일 없어졌지!!”



그간 경수와 설이 마을에 머무르면서 아주 많은 일들을 했지만, 그 중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은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내는 데 벅차 글자는 커녕, 간단한 수 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애써 키운 곡식과 과일을 내다 팔 때도 제값을 받지 못했고, 품삯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얼토당토않은 내용으로 휘갈긴 문서 한 장에 속아 어렵게 모은 재산을 죄다 날리기도 했다. 

문맹文盲. 글자를 모르는 이는 마치 앞 못 보는 맹인과도 같아 눈 뜨고도 빼앗기고 귀 열고도 놓치는 것이 일상이었으니. 경수는 이들에게 글자와 수를 알려줌으로써 뼛속 깊이 스며 든 무지와 몽매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수야는 고개 너머 물도 끌어오자고 해서 우리 먹을 것도 만들어 줬다구!!

“이제는 풀뿌리 캐 먹으며 배곯을 필요도 없어졌는 걸!!!”



경수를 둘러싼 아이들이 연신 재잘거렸다. 

숭산에는 전란을 피해 도망 온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는데, 전세가 격화되면서 점점 그 수가 많아져 청성마을 포함 열다섯 개의 마을이 대규모 군락을 이루게 됐다. 먹어야 할 입은 늘어나는데, 먹을 것은 점차 줄어드니 보릿고개를 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해 여름은 전례없이 가혹했다. 볼품없이 갈라진 땅은 맥없이 제 마른 속을 내보였고, 하늘마저 저주받았는지 초열지옥처럼 타올랐다. 가뜩이나 척박하기 그지없는 산골에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으니, 사람들의 걱정은 끝 간 데 없이 깊어졌다. 

이대로는 다 죽겠다. 전쟁에 휩쓸려 죽든, 황제에게 핍박받아 죽든, 여기서 굶어 죽든, 이대로는 다 죽겠다. 모두가 절망을 곱씹던 무렵. 청성마을에서 머물던 이방인, 경수가 며칠간 숭산을 타고 도는 물길을 꼼꼼하게 살펴본 후 그 중 한 줄기를 마을 일대로 끌어오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냈다.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고적하던 산골 마을엔 한동안 큰 파문이 일었다.



지형을 파악하고 저수와 관개의 원리를 이해하는 자가 마을에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진작에 해결됐을 문제지만, 산에 숨어 사는 이들의 대다수가 일자무식 가난한 무지렁이들이었다. 

일평생 저항하는 법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 관리와 귀족과 부자들이 다짜고짜 때리면 맞고, 달라면 주고, 이유 없이 뺏기며 살아온 사람들. 싸리문 앞에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뉘어놓고도 무기력하게 엎드려 묵묵부답인 하늘에 치성을 드리는 일이 전부인 사람들. 

오랜 세월 동안 순응이 습관이 된 사람들은 재해란 '막을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견뎌야 하는 운명'처럼 여겼고, 그런 이들에게 경수의 제안은 최초의 혁신이나 다름없었다.



[이래도 저래도 죽을 팔자. 어차피 죽을 거면, 뭐라도 해보고 죽는 게 낫지 않겠나?]



변화 앞에 선 인간의 본성이 그렇듯 모두가 머뭇거리던 차, 청성마을의 거두 격이었던 휘 노인이 경수의 말에 선뜻 동의하고 나섰다. 

휘 노인 덕에 반신반의하며 주저하던 이들도 마지못해 힘을 보탰고, 숭산에는 전례 없던 공사가 시작됐다. 각 마을마다 몇 안 되는 장정들이 모두 차출돼 열흘간 매달려 둑을 만들었다. 

수로가 트이자 곳곳에 푸른 기적이 움텄다. 얼마 되지 않아 거짓말처럼 시름시름 죽어가던 농작물들이 생기를 되찾았다. 가지마다 생기가 다시 차올랐고, 자라지 못하던 과실들은 나날이 살을 찌우며 풍성해졌다. 

숭산에 자리한 모든 마을들이 더 이상 굶주림으로 고통받지 않게 됐다.



“맞아!! 그리고 수야는 활도 잘 쏘지!!”

“맞아, 맞아. 숭산에서 할배 다음으로 잘 쏘지!!”



마을이 바뀐 만큼 경수에게도 큰 변화가 생겼다. 휘 노인과 연을 맺게 되면서 활을 다룰 수 있게 됐다는 것. 

처음 청성에 발을 들이던 시점, 약 열흘 정도 예상했던 체류는 교전이 심화 되면서 기약 없이 늘어졌다. 결국 오도 가도 못한 채 청성에 숨어 꼬박 두 해를 보내게 됐다. 

묶여버린 걸음과 달리 임계를 지난 그리움은 한도 끝도 없이 넘쳐흘렀다. 잠 못 이루는 밤, 베갯머리에 물안개 핀 새벽들이 이어졌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 그 얼마나 답답하고 어지럽겠는가. 

목숨보다 간절한 이름만 수천번 되새기며 속울음만 삼키던 어느 날. 경수는 휘 노인에게 활을 가르쳐 달라 청했다. 

뭐라도 매달릴 것이 필요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뭐라도 해야 지금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너지는 내일이 오늘을 덮쳐 영영 이 자리에 멈추지 않도록, 텅 빈 오늘을 가득 채울 힘, 내일을 온전히 내일로 미뤄 둘 의지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전하지 못한 고백과 닿지 못한 기도들에 눌려 질식할 것만 같았다.



괴팍한 성질로 유명한 휘 노인은 처음 경수의 청을 듣자 마자 단칼에 거절했지만, 무슨 변덕이 불었는지 갑자기 마음을 바꿔 경수에게 활을 가르쳐 주었다. 

청성에 머무르는 내내 경수는 휘 노인의 특훈을 받으며 활을 잡았다. 열 손가락이 죄다 부르트고, 피가 나고, 굳은 살이 내려앉고, 그 살이 다시 부르트고, 피가 나고. 시위를 당기는 감각이 굳은 살처럼 쌓이고, 인이 박이는 과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훈련에 매진했다. 


그에게 가기 위해 잡은 무기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와 함께하는 날, 

그를 지키기 위함이 됐다.


그 타고난 끈기와 체력은 차치하고서라도 나름 활에 재능이 있었는지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이제는 근방에서 휘 노인을 제외하고 경수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칭얼거리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각자의 당위를 달고 점점 더 몸집을 키운다. 주변을 두드리는 소란에 잠이 깼는지, 경수의 품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몽이도 부드러운 양 귀를 몽긋거린다.



“수야가 어디 안 가고 오래오래 여기 살았으면 좋겠어어~~”

“나두우~~~~!!”

“수야, 수야, 우리랑 같이 오래오래 살 거지? 아무 데도 안 갈 거지?”

“수야가 뭐야. 형이라고 불러라. 요 놈들, 요 놈들 이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

“수야가 수야라고 해도 된댔다, 뭐!!! 할배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이들의 성화에 휘 노인이 못 이기겠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신난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휘 노인. 경수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작은 짐승 한 마리. 

참으로 한가로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길고 긴 꿈 중 가장 고요한 시절 한 폭을 잘라 걸어 둔 듯한 정취. 바위산은 여전히 말없이 웅크려 침묵하고, 계곡물은 그리운 기억처럼 어디론가 쉴 새 없이 흘러간다. 

오늘의 모든 것이 어제와 같다. 어제와 같은 채도의 햇살이 뺨에 번지고, 어제와 같은 온도의 바람이 귓불에 고인다. 평화롭고, 안락하다. 두 개의 태양이 부딪고 하늘이 요동치는 세상의 궤도에서 벗어나, 이생의 허물을 벗은 채 자유로이 유랑하는 것처럼. 당신 없이 손에 쥔 삶은, 이토록 낯설고 이질적이다. 

오래 머무를 수 없음을, 경수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다른 겹의 현실이 빠르게 날개치는 소리가 들린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눈물 대신 떨구는 한숨.



어느덧 능선에 넘어진 석양의 여운이 휘 노인의 은백색 머리카락을 적시고, 가닥가닥 번져든 빛방울들이 안대로 가려지지 않은 눈에 흘러든다. 

알 수 없는 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 알 수 없는 의미를 담은 그 시선이 경수의 손에 끼워져 있는 은 가락지에 잠시 내려앉았다가, 이내 멀어진다.








春來萬里客 봄에 와 있는 만 리 밖의 나그네는
亂定幾年歸 난이 그치거든 어느 해에 돌아가련가.
腸斷江城雁 강성의 기러기
高高正北飛 똑바로 높이 북쪽으로 날아가니 애가 끓는구나.

두보,  歸雁 中






[처음 그대를 보자마자 알았지. 쫒기고 있는 사람이구나 싶더라고. 대체 무슨 죄를 지어 누구에게 쫒기고 있는 겐가. 황제인가? 아니면 연왕인가? 둘 다 아니라면 개인적인 원한인가?]

[……]

[말하기 곤란하다면 말하지 않아도 되네. 나라에 큰 전란이 일어 발길 닿는 곳마다 지옥인데,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자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게지?]

[……예.]

[……그게 무엇인가?]

[……]

[……곤란하면 답하지 않아도 되네.]

[……저는……]

[……]

[……저는 저를 지켜야 합니다.]

[……]

[제게는 남은 생과 그 다음 영원까지 함께하자 맹세한 정인이 있습니다. 무사히 또 온전히, 저는 그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

[반드시 그를 만나야 합니다.]









만약 제가 그러지 못한다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

……


그 이는 이제 다시는 누군가를 믿지 못할 것입니다.











+
참고 및 인용
두보, 귀안

길고 긴 전쟁인지라, 2년을 뛰어 넘었습니다.
남겨주시는 하트와 댓글 소중하게 보고 읽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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