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 받아둔 물들이 아까울 만도 한데.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윤기형이 내민 아이패드에는 영어로 된 글이 있었다. 미국도 엘레닌으로 인하여 계엄령 상태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고, 그것은 NASA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세계적으로 동일한 이상현상이 보고되고 있었고 곧 전세계 여론에서 '좀비사태'로 명명되고 있었다. 윤기형이 보여준 글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쳐 나온 NASA 직원이 쓴 글이었다. 과학 전문 기사들을 올리는 사이트였기 때문에 굳이 의심하지 않고 읽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그랬다.

혜성 엘레닌은 인간의 기술로 쉽게 발견할 수 없게 태양 방향에서 왔다. 태양빛 안에 숨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나가는 혜성과 다르게 엘레닌은 지구를 향해 특이한 비행곡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원래의 크기는 140km로 추정되는데 이 정도 크기의 혜성이라면 지구에 부딪혔을 경우 지구 전체가 초토화된다. 하지만 이 혜성은 대기권에 닿자마자 잘게 쪼개져 지구 전체에 흩뿌려졌다. NASA에서 핵폭탄을 이용하여 터트린 것이 절대 아니었다. 또 하나의 이상한 점은 이 조각들이 지표면에 닿을 때 속도를 줄였다는 점이다. 아무리 작은 조각이어도 지표면에 닿으면 엄청난 크기의 크레이터를 만들어내는데 엘레닌의 조각은 그렇지 않았다. 살포시 안착하듯 지구에 내려앉았다. 그 직원은 긴 글을 마무리하며 '창백한 푸른 점' 이라는 유명한 말을 인용했다. 보이저호가 아주 먼 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의 어느 순간 카메라를 돌려 지구를 찍었다. 한줄기 빛 위에 놓인 작은 점. 그 작은 점을 보고 유명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서술한 문장이었다. 그는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엘레닌은 그 창백한 푸른점에 호기심을 가진 지적생명체가 보낸 것이거나 또는 그 자체 일수도 있다고.


과학 다큐며 재난 다큐며 온갖 얕은 지식이 가득했던 내게 이 글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맞아. 내가 생각한게 맞잖아. 한강에 이질적으로 꽂혀있던 그 조각. 깊은 한강 물 밖으로도 튀어나올 정도로 거대한데도 물만 조금 일었을 뿐…. 크레이터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진짜 혜성이었다면 여의도 전체가 날아갔을테니까. 아니, 여의도 전체가 뭐야. 한반도가 날아갔을걸. 에이 설마 하며 넘겼던 생각이 진실이 되었다. 나는 온 몸이 떨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본가로 가야만 했다. 이 말도 안되는 일에 정보가 가장 빠른 것은 내 부모님일테니까. 윤기형은 드레스룸으로 가 별말 없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나도 함께 짐을 싸다가 문득 윤재가 생각났다.


"아, 윤재… 깨우랬지? 지금 깨울까?"

"아냐. 좀비들 피하려면 밤에 나가야지. 지금은 자게 놔두자."

"알겠어. 옷은 얼마나 챙겨야하지?"

"……. 그러게."


처음 겪는 일인걸. 전쟁이 시작된 것처럼 우리는 뭘 해야할 지 알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 똑똑한 우리들의 머리가 멈춰버린 것 같았다. 윤기형 옆에서 가방에 한가득 짐을 싸던 손을 멈추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일까 우리. 정말 전세계가 망하기 직전인거라면 우리가 이렇게 살려고 아둥바둥 거리는게 소용 있는걸까. 불안함에 입술을 물었고, 내 작은 변화를 알아챈 윤기형이 손을 꽉 잡았다. 자기도 무서워서 덜덜 떨리는 주제에 강하고 포근하게 감싸와서 괜히 가슴 부근이 찡했다.


"형."

"응."

"우리 살 수 있겠지."

"살아야지. 그러려고 장모님댁으로 가는거니까."

"대체… 가면 뭐가 달라지는걸까."

"그러게. 뭐든 정보를 가지고 계시니까 굳이 이 집을 놔두고 오라고 하시는게 아닐까. 너무 걱정말자 지민아. 끈질기게 살아남을거니까."

"…응. 맞아. 아, 형."

"응?"

"왜 그 브랜드 옷만 챙겨…?"


윤기형이 걸렸냐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괜히 나까지 웃음이 날 것 같았다. 혹여나 침실에서 자고 있는 윤재가 깰까 조용히 키득거렸다. 둘 다 옷 욕심이 많아서 드레스룸이 가득한 상태였는데 그 중에서도 꼭 입어야되는 옷만 골라야 한다니…. 형과 나는 룰을 정했다. 최악의 사태에서 물이 부족해지면 세탁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튼튼하고 더러워져도 상관없는 소재의 옷이 필요했다. 티셔츠 여러벌, 튼튼한 바지, 속옷을 있는데로 쑤셔넣었다. 어떤 계절을 견뎌야할지 모르니까 긴팔, 반팔을 모두 챙겼다. 얇은 가디건도 여러개였다. 캐리어에 담을까 하다가 소리에 예민한 그것들을 자극할까 백팩 위주로 담았다. 빈 공간이 생기면 양말도 꾸겨넣었다. 그렇게 짐을 싸다보니 신발은 어쩌나 생각이 들었다. 

와, 우리 전쟁나면 그냥 집에서 바로 죽을걸? 짐싸다가. 허탈한 웃음이 또 터져나왔다. 오히려 너무 말도 안되는 상황이고 현실 직시가 안되어서 그런지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옷을 다 챙기고나서 신발은 최대한 편한 운동화들로 몇개 챙겨두었다. 그리고는 거실 장식장에 고이 모셔둔 재난가방과 식수, 비상식량을 챙겼다. 짐이 한가득이었다. 형은 이미 챙겨둔 짐을 들고 1층으로 향했다. 차고에 간 형이 한참이나 올라오지 않았다. 


"형?"

"어. 지민아."

"뭐해?"

"…지민아. 네 차를 쓰는게 낫겠지?"

"엉?"

"전기차니까. 조용하잖아 그치?"

"아…! 맞네. 응. 내 차에 싣자."


형이 트렁크를 조심스레 열었다. 회사 출근용으로 들고다니는 자잘한 짐들을 모조리 빼고 거기에 재난가방과 옷가방, 식수, 비상식량을 모조리 채웠다. 이러다 차 안나가는거 아니냐? 윤기형이 말했다. 내 차한테 무슨 망언이야! 흥.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트렁크에 자리가 부족해 신발이나 자잘한 짐가방은 뒷좌석에 두었다. 딱 윤재가 앉을 자리만 빼고. 오케이. 준비 완료. 조금 후련해진 마음으로 다시 2층으로 향했다. 차고 안에 마련된 전기충전소의 작동유무도 파악했다. 풀충전 중이다. 우리가 올라가니 3층에서 윤재가 긴장한 모습으로 내려왔다.


"윤재 깼어?"

"…네."

"윤재야. 저기 앉아볼까?"




엘레닌(C/202n X1)

MELA 




윤재는 슬쩍 눈치를 보더니 거실 소파에 먼저 앉았다. 그리고 나와 윤기형이 윤재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윤재는 뭔가 불안한 생각이라도 하는지 작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윤기형과 눈을 마주쳤다. 윤기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심호흡을 한 뒤 윤재를 향해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내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부터였다.


"윤재야. 사실 우리 아버지가 음… 조금 정보에 빠른 사람이시거든? 그래서 우리 셋이 다같이 우리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가려고 해. 아직 해가 지진 않아서 지금은 아니고. 어두워지면 갈거야."

"…밖…에요...?"

"응."

"그치마안…."

"응. 알아. 윤재 네가 무서운 건 아주아주 잘 알고 있어. 그렇지만 정보를 알아야 우리가 안전할 수 있어. 그러니까 형아들 따라서 잘 갈 수 있지?"

"……."


쿠구구웅-


윤재가 고민하는 사이 무서운 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살짝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다. 몇몇 채널들이 여전히 위험을 감수하고 방송 중이어서 켜둔 TV가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모두가 놀란 상태였다. 불안해하는 윤재의 손을 내가 꽉 잡았다. 윤기형은 침을 꿀꺽 소리가 들리게 삼키더니 거실의 통창으로 향했다. 무겁게 쳐져있는 암막커튼을 살짝 걷어본 그는 다시 커튼을 닫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일이야? 지진이야?"

"……. 아니. 어…. 그 우리동네 초입에 있는… 주유소가 폭발한 것 같아."

"뭐?"

"기름 전쟁도 시작되겠네. 밖이 난장판이야."

"……."


이번엔 가만히 뒤집어둔 휴대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다시 와이파이나 데이터가 잡히는 것 같았다. 나는 계속 밀려드는 카톡을 보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나서 트위터 어플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속도는 느렸지만 설치는 되고 있었다. 설치가 완료되자마자 재빨리 회원가입을 했다. 운이 좋았다. 트위터를 만든 나는 아직 사용법을 모르지만 일단 무조건 검색하기 시작했다.

'좀비' 

키워드는 좀비였다. 트위터가 가장 소식이 빠르다고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요즘은 트위터에 뜨는 소식을 가지고도 기자들이 기사를 쓴다고도 들었다. 검색해보니 많은 정보들이 있었다. 현대 시대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휴대폰을 떼놓고는 못산다. 뭐든 인터넷에 올린다. 뭐든 휴대폰으로 검색을 한다. 인터넷이 될 때 가장 빨리 소식을 확인해야 했다. 트위터에는 온갖 목격담이나 사진이 올라와있었다. 

총에 맞은 듯한 좀비 사진이라던가, 좀비를 피해 도망치는 영상 등 자극적인 것이 가득했다. 밖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검색창에 우리 동네를 검색했고, 내 본가인 한남동도 검색해보았다. 한남동 본가의 이웃인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우리 아파트는 아직 안전하다는 글을 올린 것이 보였다. 그에 반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는 온갖 증거들이 난무했다. 밖엔 좀비가 가득하다. 금방 울려퍼진 소리의 정체도 알게 되었다. 정말 주유소가 터졌다. 뭐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차를 타고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이 찍은 영상이었다.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아마 주유소 바닥에 설치된 유류저장소에 불이 붙었으리라. 엄청난 폭발과 함께 차 안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빨리 밟아! 이런 고함을 치는 영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겁에 질린 질주는 금방 끝났다. 앞이 차로 꽉 막혀있었다. 그렇게 밖의 도로가 지금 정체되어 있고 위험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 지…민 형아."

"응? 헉. 내 이름 불러줬네. 왜 윤재야?"

"…밖에 나가면…… 죽어요."


어린이답지 않은 말이 입에서 터져나오자 나는 휴대폰을 급하게 내려놓고 윤재를 끌어안았다. 윤기형도 열심히 검색하던 것을 멈추고는 우리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는 조심성이 많은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온갖 대비를 다 하고 나갈거야. 그러니까 걱정마. 그리고 내 부모님을 만나면 알게 될거야. 왜 안전한지를. 이 집보다 더 안전한 곳이야 정말로. 형아 믿고 따라올거지? 응? 내 말에 윤재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스트레스 심한가봐 진짜 배고파. 암막커튼으로 모든 빛을 막아 지금 밖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집안 만큼은 평화 그 자체였다. 물도 가득하고 온갖 재난에 대비한 물품도 구비되어 있고, 누구 덕분에 요새처럼 안전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윤기형은 주방으로 가더니 가스가 들어오는지 확인했다. 아직까진 괜찮은가봐. 불이 당연하게도 켜졌다. 마지막 만찬을 즐겨야지. 평소엔 잘 먹지도 않는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윤재야. 윤기형아가 라면을 진짜 잘 끓여."

"…정말요?"


윤재도 어느정도 익숙해졌는지 마음을 여는 것 같았다. 대화를 하는데 점점 어려움이 없어지고 있었다. 윤기형은 맛있게 생긴 라면에 계란까지 넣었다. 그래. 어차피 다 버리고 가야하니까. 먹어 없애자. 셋은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며 라면을 즐겼다.



**



"아무도 없어?"

"…그냥 보기엔."


나와 윤기형 그리고 윤재는 차 안에 앉아 차고문을 언제 열어야할지 고민이었다. 차고 벽에 있는 버튼을 눌러야 오버헤드도어가 열리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차고문이 열리는 소리가 이 수상한 적막을 깰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운전대는 윤기형이 잡았다. 내가 가장 아끼는 차라 내가 운전하겠다며 버텼는데 윤기형이 표정을 싹 굳히는 바람에 양보했다. 먼저 전기차에 시동을 걸었다. 전기차는 시동거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다만 헤드라이트가 문제라서 그냥 꺼버렸다. 어차피 밖은 전기가 나가지만 않으면 다 보일테니까. 시동만 걸어두고 어제 태형이 나갔던 작은 문을 통해 밖을 살펴본 윤기형은 다짐이라도 한 듯 운전대를 꽉 잡았다. 


"지민아. 문 열어."

"…응."


나는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는 손을 쭉 뻗었다. 손 끝에 닿은 버튼을 꾸욱 누르자 덜컹 소리를 내며 차고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 몰라 창문을 다시 닫고 윤재에게 뒷좌석에 있는 담요를 덮으라고 했다. 만약을 위해서였다. 쿠궁하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도어가 전부 열렸다. 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였다. 가로등 불빛이 아직 환히 들어오고 있었다. 동네 초입에 있던 주유소에서는 계속해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재난이구나. 소방관들이 출동한 여유도 없는건가. 다행인지 집 앞엔 아무도 없었다. 윤기형이 엑셀을 밟기 시작했고 내 차는 조용히 미끄러졌다. 이러려고 산 차는 아니긴 하지만 도움이 되긴 하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윤재를 바라봤다. 윤재는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나는 윤재를 향해 웃어주었다. 윤재야. 조금만 참아. 무서우면 뒤집어쓰고 있어도 돼. 윤재는 내 말이 허락이라고 느껴졌던 것인지 담요를 뒤집어써버렸다. 라디오조차 틀지 않는 조용한 차내에는 전기로 돌아가는 엔진의 소리만 위이잉 하고 들려왔다.

동네 골목을 빠져나가자 이제야 우리가 외면하고자 했던 현실이 보였다. 길은 난장판이었다. 버려진 차와 움직이려는 차가 뒤엉켜있었다. 바닥이 젖어있는 부분도 많았다. 지금이 밝은 대낮이 아니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저게 전부 핏자국이라면 당장이라도 구토를 해버렸을테니까. 불이 난 곳은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어두운 하늘에 붉은 물감이라고 풀어놓은 듯 불길이 번져있었다. 차는 속도를 크게 높이지 않고 천천히 달렸다. 가끔씩 길가에 대놓고 서있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은채로 시속 5~60km정도를 달리고 있어서 그들이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분명 좀비였다. 영화에서 봤던 그런 외형이었다. 이상하게 모두가 바짝 마른 상태였다. 누군가는 팔꿈치 밑이 없는데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게 밍기적거리며 정처없이 떠돌고 있었다. 


곧 한남대교였다. 이 다리만 건너면 금방이다. 한남대교 남단 교차로가 코앞이었는데 앞에 무언가가 있엇다. 나와 윤기형은 잔뜩 긴장했다. 앞엔 바리케이드가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한남대교가 통제되고 있었다. 바리케이드 앞에 차를 멈췄지만 아무도 없었다. 지나가려면… 엄청 세게 밟아서 치고 가거나 직접 치우고 움직이거나였다. 나는 윤기형과 눈이 마주쳤다. 형은 아무말 없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윤재야. 뒤에서 가만히 있어. 형아들 잠깐 내릴건데…. 금방 다시 올거야."

"……네."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윤재에게 손을 뻗어 담요를 다시 덮어주었다. 혹시 몰라 시동은 끄지 않은채로 차 문을 열었다. 형과 내가 내려 바리케이드에 손을 댔고 힘을 주어 밀기 시작했다. 두개 정도 밀면 차가 지나갈 것 같았다. 아스팔트 위에 올려진 쇳덩이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놀란 우리가 멈췄고, 사방은 고요했다. 큰 소리에 좀비들이 몰려들까 긴장이 되기 시작했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형과 나는 힘을 주어 바이케이드를 살짝 들어서 옮기기 시작했다. 

철컥-


이상하게도 낯익은 소리였다. 형과 나는 눈을 마주친 채로 바리케이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양 손을 위로 올렸다. 송골하게 맺혀있던 땀이 턱선을 따라 흘렀다. 서로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형과 내 뒤에서 아직 멀쩡한 것 같은 군인이 각각 소총을 겨누고 있었다.


"…뭐하시는겁니까."

"……지나가려고 해요."


내 뒤에서 조용히 묻는 군인을 향해 답했다. 왜 지나가려고 하냐는 물음이 뒤이어 나왔다. 나는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가려한다고 대답했다. 내 뒤의 군인은 윤기형을 겨눈 군인을 바라보더니 수신호 또는 눈짓을 주고 받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뒤에 겨눠진 총구가 동시에 내려졌다. 휴. 숨을 뱉어냈다. 군인들은 대사관이 모여있는 한남동과 이태원을 지키기 위해 한남대교를 양방향으로 막았다고 했다. 그럼 우린 어디로 가야합니까. 윤기형의 물음에 군인은 조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왼쪽을 가리켰다. 동호대교는 아직 막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가시면 통과할 수 있을겁니다. 군인들은 예상 외로 친절하게 굴었다. 하긴, 좀비가 번지고 있는 세상에 살아남은 인간들끼리라도 협조하고 살아야지.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차로 향했다. 뒷통수에 총구가 겨눠지는 경험은 처음이라 식은땀이 멈추질 않았다.

전기차는 다시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심히 이 한남대교를 지치고 있는 군인들을 향해 윤기형이 수고하라고 한마디 하고는 속도를 높였다. 동호대교. 올림픽대교를 조금만 가면 바로 있는 다리였다. 거기에서 강북으로 넘어가면 성수동. 성수동에서 내 본가 아파트까지는 언덕만 조금 올라가면 금방이었다. 천천히 달리는 조용한 전기차 덕분에 밖의 소음이 잘 들렸다. 우리가 지나온 뒷쪽에서 갑자기 총성이 여러발 울렸다. 뒷자리의 담요가 들썩였다. 윤재가 놀란 것 같았다. 이미 군대를 다녀온 윤기형이나 나는 그래도 익숙한 소리였지만.


"……아까 그 군인들 괜찮을까?"

"…그러게."

"동호대교는 아직 안막혔네."

"정말이네. 아까 군인들…. 아직 어린 애들이었는데…. 잘 살아남겠지."

"응."


올림픽대로에서 바로 동호대교로 올라가는 진출로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압구정역쪽으로 향했다. 이런 저녁시간만 되면 꽉 막혀있던 도로가 한산했다. 윤기형은 원래라면 유턴이 불가능 한 곳에서 바로 유턴을 해버렸다. 그리고는 동호대교 남단에 도달했다. 겨우겨우 한강을 가로질러 올라가 강북에 도달했다. 그렇게 도착한 한남동의 어느 아파트단지. 경비가 삼엄하기로 유명한 이 곳엔 더욱 삭막한 느낌이 들었다. 헤드라이트도 끈 채 천천히 다가오는 차량을 완전 무장을 한 경비원이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경비원이 다가오자 나는 열린 운전석 창문을 향해 말했다.


"박지민이라고 합니다."

"아. 111동 맞으신가요? 이미 전달 받았습니다."

"맞아요."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경비원이 무전기로 호출하자 임의로 설치한 것 같은 강철문이 스르륵 열렸다. 윤기형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안으로 향했다. 익숙하게 공용 주차장에 차를 대고 111동을 향했다. 집 앞에 도착하자 바로 엄마가 튀어나왔다. 멀쩡하게 와서 다행이라며 나를 끌어안던 엄마는 뒤에 서있던 윤기형을 향해 어서오라며 반겼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민서방. 어……."


우리의 뒤에 서있는 작은 아이를 본 엄마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보였다. 나는 살풋 웃으며 막무가내로 들어갔다. 윤재의 손을 꽉 잡은 채였다.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이 집은 어찌나 안전한지 거실에 커튼을 치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이라도 있으신걸까 물이 받아져있거나 뭔가 준비되어있지도 않았다. 그에 반해 우리는 꽤나 너저분한 옷 상태에 짐이 한가득이었다. 괜히 머쓱해져서 거실 한구석에 짐을 내려놓았다. 그 짐을 슬쩍 본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 집에서 버티려고 하는거냐?"

"예?"

"……우리는 이 집도 버릴거다."

"네? 그럼 어디에서…."

"비행기. 준비되어있다. 그 애는 누구냐."

"…제가 구한 아이예요. 같이 가도 괜찮을까요? 이 아이 부모님이 군인이시래요."

"……. 혹을 데리고 왔구나."

"아버지!!"


의젓한 윤재가 아버지의 날선 말을 모두 이해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모두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엄마는 윤기형과 윤재를 소파에 먼저 앉히고는 나보고 도와달라고 했다. 내가 머리를 식힐 시간을 주는 것이었다. 엄마가 차를 준비했다. 넌 시원하게 마실거지? 엄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어릴때부터 아버지는 늘 엄격한 사람이었다. 내가 공부를 잘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못하면 호되게 혼나고 말았다. 엄마도 그런 아버지와 교육관은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늘 잘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둘 다 워낙 능력이 뛰어나신 분들이라 내가 자회사 부사장 자리에 들어가 있는 것 조차도 불만이었다. 

나와 윤기형이 굳이 버틸 수 있을 것 같던 우리들의 집을 버리고 본가에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내 부모님의 정보력 때문이었다. 통신망이 자꾸 끊기는 상황에서 빠른 정보를 얻으려면 직접 와야만 했다. 내 아버지는 어릴때부터 미국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고 석사과정을 하며 그 유명한 NASA에 입사했다. 거기서 연구원으로 지냈고 어느덧 은퇴할 나이가 되어 모국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NASA에서 일하며 엄마를 만났다고 했다. 엄마는 미국 정부 소속 직원이었다. 둘이 미국에서 결혼하여 나 역시도 미국에서 태어났다. 두분 다 은퇴를 하시고 아버지는 명예직으로 한국항공우주산업에 몸을 담고 있다. 그 말은 이런 문제에 대해 가장 정보가 빠르다는 것. 특히 혜성 엘레닌으로 인해 이 사태가 생겨났다는 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가장 많은 정보는 이 집에 모일 것이 분명했다. 나는 진정하고 쟁반에 담긴 찻잔을 날랐다. 모두의 앞에 한잔씩 내어주고 나는 얼음이 가득 담긴 녹차를 손에 들었다. 윤재에게는 오렌지주스를 따라주었다. 


아버지는 차를 호로록 드시면서 한참을 조용히 계시더니 드디어 우리를 향해 물었다.


"지민이 네가 아는 것은 어디까지냐."

"…… 혜성이 진짜 혜성이 아니라는 것 정도요."

"혜성조각들이 전세계에 떨어지면서…. 속도를 줄였지. 전세계의 과학자들이 아마 그저 운이 좋았다고 처음엔 생각했을텐데. 실체를 파보니 그렇지 않았어. 처음으로 외계 생명체와 조우했다. 과학자들이 채취한 작은 미생물들은 금방 지구환경에 적응하고 순식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연구하던 과학자들을 공격했다. 그 때 빨리…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데…."


윤기형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는 머리 속으로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우리가 예상한 것, 그리고 과학 기사 전문 사이트에 올라온 그 글과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그냥 좀비가 아니다. 외계의 습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어쩌다 이게 좀비 바이러스처럼 변형되어 퍼진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 왜 요새같은 이 집을 버리고 떠나겠다는거에요? 비행기라고 아까 말씀하셨죠?"

"…미국에서 모든 인력을 끌어모으고 있어. 어떻게든 이 사태를 해결하려 하는거겠지. 이미 은퇴한 우리에게까지 연락이 왔다. 가족까지 모두 보호해줄테니 빠른 시일내에 오라고."

"……그럼. 한국은요? 여긴 버려요? 아무리 미국 우방국이라고 해도… 당장 자기 나라가 급한 상황에 우릴 도와줄리도 없고…. 애초에 한국인인 엄마랑 아버지까지 데려갈 정도면 거기가 더 위험한 거 아니에요?"

"내 두번째 고향은 미국이나 다름없어. 더군다나 우리 가족을 보호 해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비행기는 내일 정오에 뜬다. 일단 쉬거라. 민서방도 쉬게."

"…예. 장인어른."


우리만 살면 된다는거야…? 우린 우연히 정보에 빠른 사람들이었을 뿐. 지금도 아직 이 사태가 왜 생겨났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그저 공포에 떨며 죽음을 기다린다. 그런데 나는…. 나는 가장 안전한 벙커라도 마련해 놨을 해외로 떠버린다고…? 윤재가 불안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윤재의 작은 손을 꼭힘주어 잡았다. 모든 얘기를 마쳤다는 듯이 소파에 기대 앉은 아버지를 향해 난 말했다.


"아버지. 전 안가겠습니다."



짐른은 리얼

MELA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