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까지."

"넵."

"지금까지 손든 것들이 축구 나갈 놈들. 이제 농구할 새끼들 부른다. 일단 농구부 둘하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농구부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학생주임이 출석부를 뒤적거렸다.



"나가고 싶은 사람 손들어."



점심시간 마다 농구를 하러 가는 두 어명이 손을 들었다. 그래도 한 명이 모자라는데. 학생주임의 눈에 체육대회 따위는 저랑은 상관없다는 듯이 턱을 괴고 창밖을 보고 있는 찬열이 눈에 들어왔다. 키도 크고 덩치도 빠지지 않아서 꽤 도움이 될 거 같았다. 운동신경도 나쁜 편이 아니고.



"마지막으로 박찬열."

"예?"

"너까지 농구."

"아, 저 농구 못하는데요."

"그럼 응원으로 갈래?"



몸집이 조금 작다는 이유로 반강제로 응원으로 들어간 종대와 요섭이 눈을 반짝거렸다. 찬열이 들어오면 제가 빠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사실 말이 응원단이었지, 남학교인지라 응원팀보다는 개그팀에 가까웠다. 특히 여장이나 분장을 하는, 많이 망가진 팀이 점수를 받았으므로 흑역사제조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요.“



귀찮은 게 낫지 응원팀으로는 가지 않을 찬열이다. 찬열이 고개를 젓자 학생 주임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한 번에 한다고 하면 얼마냐 이쁘냐.



"그럼 다 정해진 거지? 일등하면 피자 쏜다, 새끼들아. 열심히 해라. 반장, 인사."

"차렷, 경례."

"감사합니다.“

“아이씨...”












찬열이 짜증을 내거나, 말거나 체육대회는 다가왔다. 승부욕 강한 남학생들에 피자까지 걸려있어 죽기 살기로 열심히 했지만 찬열은 대충 뛰는 척만 할 뿐이었다. 팀에 피해를 끼치진 않았지만, 더 잘할 수 있는데 안하고 있는 게 눈에 딱 보였다. 하지만 아무도 찬열에게 투덜거리지 못했다. 귀찮다는 티 팍팍내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데 누가 찬열에게 불만을 토로할 수 있을까. 요즘 아무리 자기들끼리 뒤에서 백현맘이라 낄낄댄다 하더라도 찬열은 '그' 박찬열이었으니까. 찬열을 제외한 넷이 고생한 덕에 1차전으로 4반을 이기고 와서 쉬는 틈에 반장이 쭈뼛쭈뼛 찬열에게 다가왔다. 반장이 총대매고 찬열에게 한마디 하라고 등 떠밀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곧 결승인데, 찬열의 도움없이는 절대 우승을 거머쥘 수 없었다. 나는 왜 하필 반장인 것인가. 그리고 우리 반엔 왜 박찬열이 있는 것인가. 게다가 왜 나는 쫄보인 것인가. 하지만, 피자가... 피자가 걸렸어.



"그, 차, 찬열아."

"?"



반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찬열을 부른다. 더위에 지쳐 미지근한 포카리 스웨트를 들이키던 찬열이 인상을 찌푸리며 반장을 돌아봤다. 찐득거리는 땀과 햇빛 때문에 짜증나서 지은 표정이었지만, 반장을 쫄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반장이 얼어있자 찬열이 낮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물었다.



"뭔데."



누가 박찬열 요즘 부드러워졌다고 했어? 찬열의 다정함은 백현 한정이다. 침을 꿀꺽 삼킨 반장이 입을 열었다.



"...아, 아니야. 아무것도"



싱거운 새끼를 봤나. 찬열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1반을 열심히 응원하고 있는 백현이 있었다. 백현을 바라보는 찬열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진다. 아직도 잔뜩 쫄은 반장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종대가 반장에게 다가와서 뭔가를 속닥거리며 반장의 손에 쇼핑백을 쥐어주었다. 옷가지가 하나 들어있다.



“이, 이게 먹힐까?”

“백퍼센트 먹혀.”



고개를 끄덕인 반장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반장이 향한 곳은 1반이었다. 정확히는 백현의 앞.



"저, 저기 백현아."

"우웅?"

"안녕, 나 찬열이 반 반장인데 나 알지."

"응! 나 아라! 동후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백현을 보니 절로 아빠미소가 지어진다. 박찬열 마음 이해하겠어, 귀엽긴 졸라 귀엽다. 얘만 보면 그냥 얼굴이 풀어지네. 백현을 보며 헤벌쭉 웃다가 정신을 차린 반장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백현아, 찬열이 지금 기분 안 좋아서 그런데..."

"차녀리 기부니가 안 조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다. 씨발 존귀. 심장아.



"응 그래서 말야, 백현이가 도와 줄 수 있어?"

"웅! 배켜니 다 하께!"



반장이 제 빨리 비장한 얼굴로 대답하는 백현의 체형을 살폈다. 그렇게까지 비장하진 않아도 돼, 백현아. 음, 이 정도면 종대랑 체격도 비슷하네. 잘 들어가겠다. 반장이 백현에게 쇼핑백을 건넸다.



"이거 입고 나와서, 찬열이 농구하는 거 멋있다고 하면 찬열이 기분 좋아질 거야!"

"우웅.. 이거?"

"응"



반장이 침을 꼴깍 삼켰다. 백현아 부탁해, 우리 반 피자의 여신(?)이 되어줘! 피자의 힘인지 나름 (종대와 요섭의 희생이 있었지만) 순조롭게 이겨온 덕분에 1,2위를 다투고 있는 상황이라, 이제 농구 결승만 이기면 피자를 먹을 수 있었다. 배고픈 남고생에겐 1등의 명예보단 한 판의 피자가 더 중요한 법이다.



"히잉..."



반장이 준 옷을 화장실에서 갈아 고 나온 백현이 옷을 끌어내렸다. 이거 쫌 불펴내...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찬열을 떠올리며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반장이 시킨 대로 서툴지만 한 쪽 머리까지 묶었다. 이거 배켜니 쫌 귀여우네? 옷이 불편한 것도 잊고 백현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사과 같아진 백현의 머리가 폴짝폴짝 뛰는 백현을 따라 통통 튀었다.



"반으로 안 꺼지냐?"

"힝, 지호 심심한 거얼?"

"아 애교 진짜... 이거 죽일까"



찬열에게 매달려 애교를 부려대던 지호를 발길질로 겨우 떨쳐내고 돌아서는데, 오매불망 찾던 눈앞에 백현이 서있었다.



"차녀라!"

"배, 배, 배..."

"나 배켜니!"



말문이 막힌 찬열이 제 이름을 까먹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친절히 제 이름을 일러준다. 아니, 아는데 말문이 막혀서 그런 건데. 너 지금 차림이?



"으, 응. 백현아."



말이 잘 나오질 않아 겨우 백현의 이름을 부른 찬열이 바보처럼 멍하니 서서 눈만 꿈뻑거렸다. 눈앞의 백현은 어디서 났는지 빨간색의 치어리더 복을 입고 있었다. 익숙한 차림인데... 생각해보니 아까 종대와 요섭이 입고 있던 그 치어리더복이다. 팔랑거리는 손바닥만한 치마 때문에 백현의 다리가 훤하게 드러나 있었다. 아, 씨발. 이게 지금...? 신을 믿지 않는 찬열이었지만 신이시어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떻게 한 건지 여자아이돌들이 자주하는 사과머리를 한 백현이 솜사탕 같이 생긴 폼폼까지 들고 있었다. 씨발, 딱 죽을 거 같다. 너무 귀엽잖아. 찬열은 혹시 코피가 터졌을까봐 제 코아래를 만져본다. 다행스럽게도 코피는 나오지 않았다.



“새끼들아, 눈 안 돌려?”

"으음..."



눈앞의 찬열이 다른 애들에게 으르렁거리던말던 백현은 아까 반장이 하라고 했던 말을 생각 중이었다. 어, 뭐여떠라...?



"아, 마따.“

"......"

"농구하는 거 멋이써!"



백현이 농구하는 아이들을 가리키며 해맑게 웃었다. 중요단어 두 개 중에 하나를 빼먹으니 전혀 다른 얘기가 되버렸지만 백현은 알지 못했다. 저기 농구하는 애들이 멋있다고? 저딴 새끼들이? 저딴 것들이 뭐가 멋있다고. 찬열의 질투심이 화르르 불태워졌다. 다 죽었어, 씨발. 반장이 의도했던 것과 좀 다른 이유였지만 찬열의 투지를 불태우는 것은 성공한 모양이다.



"찬열아, 이제 우리 차례래!"



때마침 차례가 돌아왔다.



"백현아, 잠깐만 여기서 내 옷 덮고 앉아있어."



제가 있던 자리에 백현을 앉힌 차녀리 제 교복을 백현에게 덮어주고는 농구 코트로 뛰어갔다. 다 뒤졌어. 질투심에 불타 농구코트 위로 올라선 찬열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타고난 피지컬도 피지컬이지만,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아 보이는 ‘그’ 찬열에게 태클을 걸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농구부 애들이 당황할 정도로 혼자서 경기를 독식하더니 엄청난 점수차로 경기를 이기더니 결국 우승까지 해버렸다. 사스가 백현맘. 파워 오브 백현. 종대와 반장은 자기들의 계획대로된 것을 보며 검은 미소를 지었다.



"......"

"......"



엄지 척. 미션 썩세스.



"하아, 하아..."



찬열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숨도 돌리지 않고 백현에게 걸어왔다. 방방 뛰며 반겨줘야 할 백현이 너무 조용하다. 잘 봤냐고 물어보려는데 백현의 얼굴이 잔뜩 빨개져 있었다. 뭐야, 아픈가?



"왜 그래 백현아?"

"차녀라..."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서있던 백현이 찬열의 귓가에 속닥속닥 말을 했다.



"차녀라..."

"응."

"우리이..."

"응, 얘기해."

"어른 뽀뽀하러 가까...?"



백현은 찬열에게 지금 두 번 반했다. 찬열은 다시 반한 게 백현식 표현으로, 한 백번째 쯤 되는 거 같다. 찬열이 백현이 손목을 붙잡고 성큼성큼 비어있는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우승 소식에 기분 좋아진 학생 주임이 바로 피자를 시켰다. 한참이나 사라져 있다가 모여서 피자를 먹고 있는 중간에야 나타난 찬열과 백현이었다. 백현은 어느새 제 교복으로 다시 갈아입은 상태였다. 귀여웠는데. 반장과 종대가 괜히 아쉬워하며 백현에게 제 몫의 피자를 건넸다.



"어... 배켜니꺼야?"



같은 반이 아니라 자기가 먹을 것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피자를 받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백현이다. 그걸보고 종대와 반장은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사실 백현이가 한판 다 먹어도 돼. 이 피자는 백현이 때문에 받은 거거든. 종대가 차마 말은 못하고 싱긋 웃었다. 피자를 받아든 백현이 찬열 옆에 찰싹 달라붙어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저는 먹지도 않고 백현이 피자를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찬열이 백현을 준다며 음료수를 뽑으러 일어섰다.



"잠깐 여기 있어, 알겠지?"

"으응."



피자를 먹고 있는데, 누군가가 백현에게 말을 걸었다.



"백현아."

"웅?"

"선생님이 너 찾으셔!!"



차녀리가 여기 있으랬는데... 떨어지기는 싫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부르신다니까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금방 가따 와야지. 백현과 남학생이 사라진 것을 힐끗 보고 다시 피자 먹는 것에 집중하던 종대가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야, 민석아."

"응?"

"아까 남자애 다른 학교 교복 입고 있지 않았냐?"

"응원단 하느라 입었나 보지."

"...그런가?"



왠지 찝찝하긴 했지만 종대가 다시 피자로 시선을 돌렸다. 피자, 존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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